일본 선제공격론 해프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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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18일 06: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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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 이라크 전은 미국의 사상 첫 예방전쟁(preventive war)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 부시 행정부는 예방전쟁이 아니라, 선제공격이라고 표현한다. 선제공격은 이미 군사력을 동원하고 있는 국가를 상대로 할 경우에 쓰는 개념이고, 그 국가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위협을 강조한다.

하지만 대량살상무기(WMD)가 발견되지 않은 이라크의 경우에는 분명히 장기적으로 힘의 균형을 변화시킬 수 있기도 전에 상대국가를 공격하는 예방전쟁이었다. 이로써 미국은 ‘민주국가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규범 중 하나에 도전한 셈이다. 때문에 전쟁에 동반하는 수많은 잔혹함을 고려하지 않고 유엔 안보리를 아예 무시한 미국은 세계에 또 하나의 충격을 안겨줬다.

최근 북한 미사일 발사사건에 따른 일본 일부 정치가들의 ‘북 기지 선제공격론’이라는 수사로 바로 ‘큰형’ 미국을 흉내를 내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지역과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이유로 발사 10일만에 유엔 안보리의 결의안 1695호가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을 보면 일본은 ‘형님’보다 똑똑했다.

군사력 사용을 허용해주는 유엔헌장 7장이 원용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은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미사일 발사 당일부터 동네북을 치고, 며칠 뒤에 선제공격론을 편 일본의 수법은 재래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를 시작하는 장사치들의 상술과 유사하다.

평화헌법과 선제공격론의 모순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미사일 발사 당일에 유엔 안보리 회의를 요청하고, 앞장서서 유엔헌장 7장이 원용된 결의안을 통과시키려고 했다. 즉,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7장에 따라 군사적 제재도 고려할 수 있는 결의안을 의도한 것이다.

사실 일본의 발 빠른 움직임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미사일 발사에 대한 지역과 전 세계의 우려표명과 자제요구를 몽땅 다 무시하고 1998년과 같이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7개나 발사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40년대에 핵무기 폭격을 경험했던 일본이 평화헌법을 60여 년 동안 지켜왔던 사실을 고려했을 때는 일본으로서는 여간 걱정이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북한이 핵 폭탄을 미사일에 싣고 일본으로 발사하면, 일본은 평화헌법 때문에 수수방관하고 그냥 당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 때문에 일본은 오래 전부터 미사일방어체제(MD)를 추진하고 있지만, 헌법 상으로 미사일을 보유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 지금까지 개헌 외에 필요한 모든 개정을 해왔다고 한다. 이번 미사일발사는 일본 일부 정객들의 이러한 계획에 정당성을 실어줬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많은 일본 국민들이 동의할 가능성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지난 몇 년 동안 북한을 둘러싼 국제적 협상과정을 감안하면 북한도 나름의 전략이 있고, 또 일본의 움직임이 의심을 받을 만한 점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안보를 위한 법이라 해도 무조건 찬성할 수 없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처럼 일본의 표면적인 주장을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역사적인 그림자를 공유하는 독일의 자세와 비교하면 일본의 문제점들이 더욱 더 두드러진다.

역사가 말해주듯 미국 이전에 독일도 일본의 ‘형님 역할’을 한 적이 있다. 일본이 결국 가출해 새 집을 찾았지만 말이다.

독일과 일본의 ‘정사(情事)’

독일과 일본의 관계는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세기 중반쯤, 즉 일본의 에도(江戸) 시대부터 독일인 몇 명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종의 계몽운동을 추진했다. 일본을 개방한 메이지(明治) 시대에 두 나라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면서 일본은 독일에서 법률, 과학, 미술 등과 같은 분야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바로 프러시아 헌법을 모형으로 삼아 일본헌법을 만든 것이다. 일본 낭만파가 독일의 독특한 민족주의 개념을 ‘수입’한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19세기 말에 두 제국은 중국에 위치한 식민지에 대한 갈등이 발생했지만, 곧 사이가 좋아졌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각자 전쟁을 벌이면서 두 나라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결국 군사동맹까지 맺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은 ‘경제 기적’ 말고는 별다른 공통점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정리에 있어서는 오히려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뉘른베르그의 전범재판, 수용소 유태인 재판, 탈나치화, 교육에서의 철저한 사실공개와 반성자극, 주변국가들과의 공동교과서 운동 추진, 기타 화해기획과 노력 등에서 그랬다.

역사를 보는 데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은 낮과 밤처럼 서로 달랐다. 왜 그럴까?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본다.

독일과 일본은 동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두 나라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먼저 독일은 유럽에서 역사적으로 늘 후진국 대열에 있었다. 지금은 ‘독일산’이라는 표시가 높은 질을 보장하는 상표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질 낮음의 대명사였다.

정치적으로도 유럽에서 가장 늦게 국민국가가 된 나라가 바로 독일이었다. 후발국이었기에 격차를 해소하려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욕심과 공격성이 동반했던 것이었을지 모른다.

여하튼, 경제력과 강력한 민족국가를 꿈꾸는 독일이 당시 일본에게는 최고의 이상형이 된 셈이다. 일본은 마치 큰형과 같은 강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선군정치는 원래 일본 것

독일과 일본의 비슷한 점은 끝없이 나열할 수 있지만, 왜 2차 대전 이후부터 왜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예컨대, 위에서 언급한 ‘큰형론’을 받아들이면, 패망한 2차 대전 이후부터 한국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군사적 그리고 경제적 성장을 제외하고는 두 나라의 길은 갈라질 수 밖에 없었다.

   
▲ 미주리 함에서 일본의 공식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맥아더
 

이유는 독일과 달리 일본은 완전항복을 당함으로써 일본 판 ‘베르사유의 치욕’을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1차 대전을 패망해서 결국 베르사유에서 항복을 서명함으로써 독일이 가지게 된 부담은 물질적 배상을 넘어, 특히 나중에 나치들에 의해 온 민족의 곤욕으로 과장됐다.

이처럼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완전항복하고 ‘제왕’이 (간접적이지만) 공식적으로 사과했지만, 패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그랬는지는, 즉 일반 시민들은 몰라도 엘리트들의 머리 속을 들여다 봐서 확인할 수 없지만, 이후에 나타난 행태를 보면 다른 설명을 하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의 범죄성과 중대성이 전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반면에, 일본에서는 일본의 팽창주의 혹은 제국주의가 아직까지 비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독일에서 홀로코스트가 발생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이 대중선동죄 (Volksverhetzung; 독일형법 제130조)에 해당하는 불법행위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일반적인 관례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일본 정치가들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망언을 보면 태평양전쟁 때의 전범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다.

이런 면에서 일본의 제국테러에 대한 의식화의 수준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것이 한 마디로 압축해서 ‘아우슈비츠 거짓(Auschwitzlüge)’으로 표현된다.

일본에게는 ‘정신대 거짓’을 비롯해서 많은 범죄에 대해 아직도 진정한 반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일본은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문제, 야스쿠니 신사참배, 정신대 폄하발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오히려 계속 우경화되고 있다.

미사일 발사 직후 자위권으로서 적기지 공격론을 제기해서 대북 선제공격 논란을 일으킨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 며칠 뒤 ‘공격을 받았을 때’라고 해명해 뒤늦게 발을 빼느라고 바빴다.

하지만, 다른 정치인들의 끝임 없는 망언들과 곧 있을 자민당 총재선거를 감안할 때 이 발언이 단순 ‘결례’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 선군정치는 식민지 피해자인 북한뿐만 아니라 식민지 가해자인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채택된 정치라고 하겠다.

“시작을 주의하라!”

물론 독일에서도 반전평화를 원칙으로 한 녹색당과 사민당의 연립정부가 1999년에 코소보(유고슬라비아)에 이어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전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 역시도 비판을 받을 만하고 실제로 비판을 많이 받았다.

   
 ▲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어린이들
 

독일의 참전은 오랜 논쟁 끝에 결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진지하고 심도 있는 토의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는 있으면 안 되는 전쟁에 참전한 것이지만, 주변국가와 국민들과의 대화를 거쳐서 이뤄졌다.

필자는 참전결정은 결코 찬성할 수 없고 잘못된 것으로 보지만, 독일의 역사정리와 이와 관련된 전체적인 노력을 고려했을 때 최근에 일본에서 나오는 ‘선전포고’와는 차원이 매우 다르다고 본다.

책임이 있는 자세와 행동 때문에 주변국가들로부터 신뢰를 받은 독일은 잘못된 수단이지만 전쟁은 평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비교했을 때 일본의 행태는 사뭇 다르다. 일본은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평화헌법을 제외한 전쟁관련법을 모두 개정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 군대와 합동군사훈련을 하면서 기기운영 기술을 전수받기도 한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사건은 일본에게 때마침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 방어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빌미를 준 셈이다. 평화헌법을 개헌하고 군사대국화 해서 아시아에서 팽창하는 등 60여년 전 일단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깨진 꿈들을 다시 이루려는 본색이 거침없이 드러나고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의도를 떠나서 독일을 똑똑히 관찰하고 있는 주변국가들이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여기서는 일본의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성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뒤에 늘 미국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19세 중반에 미국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개방되었을 때처럼 압제자의 노릇을 잘 배우고, 고이즈미의 방미 때처럼 미 대통령 부시를 만나 알랑거리면서 고마워할 줄도 안다.

이번 대북 선제공격론은 하나의 해프닝처럼 제기되었다가 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2차 대전 패배 이후 지금까지 끊임 없이 나타나는 일본의 반성도, 책임도 없는 자세를 보여주는 징후인 만큼 적어도 북한의 치명적인 벼랑끝 전술처럼 조심스럽게 관찰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68운동에서 생긴 반나치 구호는 한국과 일본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시작을 주의하라!” (Wehret den Anfän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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