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의 정치를 향해"
[모멘텀의 목소리] 조롱조의 댓글들
    2019년 06월 20일 04: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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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가 누적되어 자동 신고 처리 시스템에 의해 접근 제한 조치되었습니다. 접근 제한 게시판 : 전체”

지난 3월, 정의당 서울시립대 학생위원회는 “여성 노조위원장, 시의원되다”를 주제로 권수정 서울시의원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시립’대라는 특성상 시의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홍보문자를 돌려주는 등 상당한 협조를 해주었다.

맥이 풀리게도 진보정당 소속 시의원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은 학생들 사이에서 나왔다. 신고 누적으로 에브리타임*에 올린 권수정 서울시의원 강연회 홍보글은 삭제되고, 필자는 한 달간 게시판 접속 금지라는 중징계(?)를 당하게 되었다, 에브리타임은 자체적인 모니터링을 하지 않고, 게시판 이용자의 신고가 일정 이상 접수되면 자동적으로 게시글 삭제와 경고조치를 가하기 때문에, 시립대 학생들이 신고를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진보정치에 대한 청년학생사회의 이러한 냉대는 이미 활동가 청년학생에겐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그야말로 ‘격동의’ 학창시절을 보낸 교수님께는 자못 흥미롭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나보다. 경고누적으로 게시판 접속 금지를 당했다는 글을 SNS에 올린 지 며칠 뒤, 길에서 만난 교수님 한 분은 필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보았다. “요즘 학생들 분위기가 그래요”라고 말씀드리자 교수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일부 기성세대는 청년들이 ‘보수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의 극단적 연장선상에서, 모 국회의원은 20대 남성층의 지지가 여성에 비해 낮은 이유에 대해 “이 분들이 학교 교육을 받았을 때가 10년 전부터 집권세력들, 이명박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그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 … 지금 20대를 놓고 보면 그런 교육이 제대로 됐나하는 의문은 있다.”라며 망언에 가까운 발언을 하였다.

‘보수화’의 정의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쩌면 청년이 보수화되었다는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진보정치는 조롱받고, 인터넷엔 혐오발언이 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의 상황이 마냥 낙관적인 것도 아니다.

정의당을 비롯한 진보좌파진영은 박근헤를 심판한 촛불집회가 새 세상을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표현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집회의 주역이었던 청년들을 ‘촛불세대’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다소 삐딱하게 보자면 촛불집회는 ‘보수적’인 집회이기도 하였다. 촛불집회는 결코 체제를 바꾸려는 집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수의 시민들과 청년들은 그저 박근혜와 최순실에 의해 농단된 국정을 다시 ‘정상화’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같은 20대인 필자가 느끼는 청년은, 그 방향과 표출방식이 다를지언정 일정부분 ‘진보’적인 개혁 열망 또한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안티 페미’를 드높여 외치는 청년조차도 “여성이 차별받는 지점이 있다”는 것은 상당수가 동의하며, 불합리한 성역할을 타파하고 싶어한다. 또 민주노총을 적대시하고 ‘노동자’란 단어를 무슨 반체제적인 단어처럼 대하는 청년조차도 주휴수당이나 노동환경 개선과 같은 노동권 향상에는 관심이 많다.

이렇듯 내면에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열망이 잠재해있음에도 청년들이 진보정치를 멀리하게 된 것은 1차적으로 그들이 생존경쟁에 내몰려있기 때문이다. ‘취준(취업준비)’을 위해 1, 2번씩 졸업유예를 하는 게 일상이 된 상황 속에서, 청년은 취업과 생존 외에 다른 것을 상상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더 옭아매더라도 말이다.

사진 : 에브리타임 캡처. 인터넷 커뮤니티엔 혐오발언이 넘쳐나고 설득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는 진보정치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진보정치가 설득의 정치를 소홀히 하고 투쟁의 정치에 매진하였기 때문이다. 투쟁의 정치는 아군과 적군의 경계를 확실히 긋고, 정치적, 물리적 투쟁에 의해 반대 정치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투쟁은 효과적인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었고, 여권을 신장하였으며, 최근에도 노동개악 저지 투쟁을 통해 당장의 노동개악 입법을 막은 바 있다. 지금도 누군가는 우리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투쟁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경계를 한정짓는다.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과 그것을 확대재생산하는 지배계층은 당연히 우리의 경계 내에 둬서는 안 될 존재이지만, 투쟁의 에너지가 때때로 다른 민중을 향하거나 우리의 경계가 그들을 배제하고 한정지을 때, 필자는 문제의식을 느낀다. 진보정치가 흔히 듣는 ‘운동권’이란 말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진보정치가 아무리 성과를 내어도 청년 민중에게 그것은 운동권의 일, 다른 세계의 일로 여겨진다. 진보정치는 운동을 하되 운동권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 노회찬 의원 또한 진보정당의 지역위원회가 ‘마을회관’이 되기를 바라면서 진보정당이 운동권 정당으로 정체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필자가 생각하는 설득의 정치는 민중 다수를, 설령 당장 나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설득하여 민중 다수가 진심으로 진보정치의 지향에 동의하도록 하거나, 최소한 ‘일리는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설득의 정치는 지난한 과정이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접촉하고, 토론하고, 공부해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말도 열심히 들어야 한다. 수구세력의 되지 않는 억지논리도 성의 있게 반박해야 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 당장 억압받는 사람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될 역량을 허투루 쓴다는 비판에 직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설득에 기초하지 않은 정치는 위태롭다. 설득되지 않은 다수는 언제든 반동세력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수십 년간의 정치적 투쟁을 통해 상당부분 종식된 줄 알았던 미국의 인종주의는 트럼프 당선을 통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자신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느끼는’ 백인들의 반동인 것이다.

설득은 중앙의 논평 한두 마디로 가능하지 않다. 슬프게도 진보정당의 논평은 잘 기사화되지도 않는다. 또, 논쟁적인 사안을 덮어두거나 단순히 비본질적인 갈등으로 치부하고, 더 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싸우자는 식의 태도 또한 제대로 된 설득이 아닐뿐더러 효과적인 설득도 아니다. 설득은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납득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과 접촉하여 듣고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모멘텀의 이유가 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모멘텀은 기층 청년 조직과 운동의 활성화를 주요 목표로 출발하였다. 모멘텀을 갈등을 회피하고 그럴 듯한 말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학생 기층으로 파고들어가 그들을 치열하게 설득할 것이다.

사실 필자 스스로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며, 지금까지의 담론 또한 일반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졸문일망정 필자가 독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진심어린 설득의 힘이다.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시고 약 두 달 뒤, 필자는 시립대 정의당 모임을 만들려한다는 글을 에브리타임에 올렸다. 당연하게도(?) ‘노회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조롱조의 댓글이 달렸다. 보통은 무시하겠지만, 필자는 그 댓글에 ‘정의당은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하려던 노회찬의 정신을 이어가려한다’고 정중하게 답글을 달았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조롱이 담긴 글에 정중하게 답글을 달아줘서 자신이 부끄럽다는 말에 더해, 모집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까지 들었다. 그 캡처본이 사라져 무척 아쉽지만, 진심어린 설득의 힘을 깨달은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에브리타임 : 시간표 제공 서비스를 바탕으로 성장하여, 학생증 인증을 통해 각 학교 학생별 독립적인 커뮤니티를 제공해주는 어플리케이션

필자소개
정의당 서울시립대 학생위원장. 모멘텀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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