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간도 항일민족교육,
    그 중심에 용정 명동교회
    [그림 한국교회] 중국 용정 명동촌의 심장···한국기독교장로회의 뿌리
        2019년 06월 17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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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략) 별이 아스라히 멀 듯이, / 어머님, /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윤동주, “별을 헤는 밤”)

    윤동주 시인의 고향 만주 북간도를 떠올리면 제 고향인양 설레입니다. 또 김약연 목사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지난 5월 22일, ‘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 ‘조선족복지센터’와 연변대 교수들의 연구소가 공동주최한 ‘한중국제학술세미나’에 참가한 후, 용정 명동촌에서 두 분의 채취를 느끼며 명동교회의 고귀함을 확인하였습니다. 명동촌으로 가는 길에 김약연 선생의 배려로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다는 ‘선바위’가 조선인들의 기개를 보여주듯 우뚝 서 있었습니다. 중국 길림성이 이곳을 관광명소로 건설하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신학생들과 방문했던 2010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복원한 명동학교에 이런 소개문이 걸려 있습니다.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이름 지어진 명동촌은 룡정시구역 동남쪽 20여km 떨어진 지신진 륙도하량안에 자리잡고 있다. 1899년 2월,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김약연과 김하규, 종성 출신인 문치정과 남위언 등 25세대, 142명이 집단으로 이곳에 온 다음부터 이곳은 점차 새로운 삶의 터전, 민족교육의 요람, 반일애국활동의 활무대로 꾸려졌다. 김약연을 비롯한 민족지사들은 이곳을 제2고향으로 삼고 열심히 살았고 명동학교를 설립하여 문화과학지식과 재능을 지닌 반일투쟁인재들을 양성하기에 전념하였다. 1908년부터 1925년 명동중학교가 폐교되기까지 명동학교에서는 1,200여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 중에서 저명한 반일의사와 교육자, 수많은 반일무장투쟁투사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나타났다. 그 후 명동학교는 소학교만 두면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동쪽을 밝힌다.’는 말이 ‘조선’을 밝힌다는 뜻임을 언급하지 않았고 명동교회를 빼고 공산주의자들을 올렸지만, 중국 당국의 공식기록에서도 명동학교는 북간도의 중심이었습니다. 복원학교에서 걸어가니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신축한 윤동주 전람관, 그리고 1994년에 복원한 명동교회가 있었습니다. 학교가 먼저 설립되었지만 명동교회는 명동촌의 심장이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어린 시절 생가 옆 교회마당에서 놀며 예배드리고, 성경공부하며 가치관을 형성하였습니다. 명동교회 오른쪽의 낡은 비각에는 문화대혁명 때 파괴하여 땅에 묻은 것을 찾았다는 ‘김약연 목사 칭송기념비’가 훼손된 채로 서 있는데, 명동학교와 명동교회를 실제로 세운 분은 김약연 목사로서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릴 정도로 존경받았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의 부모인 문재린·김신묵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만녜의 꿈』(삼인, 2006)에 보면, 집단이주하여 북간도에 명동촌을 세운 4대 가문을 이끈 분들은 유학자요 교육자들이었는데, 생계를 위해 이주한 것이 아니라 옛 조상들의 땅을 되찾고, 넓은 땅에 이상촌을 건설하며, 추락하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인재를 교육하려는 뜻이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P. 33)

    1868년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약연 선생은 31세에 다른 가문들과 북간도 장재촌으로 이주하여 명동촌으로 개명하고 이곳에 ‘규암재’를 설립합니다. 1906년에 이상설 선생이 설립한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그 설립정신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배움터로서 1909년, 명동학교로 개칭합니다.

    항일독립운동가 양성의 요람이 된 명동학교는 약관 22세의 정재면 선생이 부임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상동교회의 청년학원에서 전덕기, 남궁억, 주시경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가 되어 이준, 이동녕 등과 교제했던 독실한 기독교인 정재면 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용정에서 활동하던 중 명동학교 교사로 초빙되었을 때 “학생들과 마을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실학파였던 명동촌 지도자들은 며칠간 회의를 거듭한 끝에 용단을 내렸고, 김약연 선생은 1909년 6월경에 명동교회를 세웠습니다. 1910년 이동휘 전도사가 사경회에서 여성교육을 중요성을 강조하자 명동여학교를 세웁니다. 정재면 선생에게서 민족구원의 기독교를 주목하고 희망을 찾은 김약연 선생을 통해, 명동촌은 교육과 기독교, 독립운동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김약연 선생이 1913년에 조직한 북간도 최초의 조선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는 항일민족운동의 구심체가 됩니다. 선생은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 교회들의 종소리를 신호로 3만 여명이 만세를 외쳤습니다. 주동자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일제 토벌대는 1920년 10월 명동학교를 불태우더니 1925년에 폐쇄하였습니다. 선생은 61세였던 1928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이듬해 북간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명동교회에 부임하였고, 계속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하다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산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42년 10월 24일, 74세로 존경스런 생애를 마감하였습니다.

    북간도 용정에 명동학교의 문익환/문동환 목사와 정대위 목사, 은진중학의 강원용 목사와 교사였던 김재준 목사가 있었으니, 여기가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근복

    류대영 교수(한동대)는 저서 『한국기독교의 역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에서 캐나다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장로교는 1921년 간도노회(1925년부터 동만노회)를 조직할 정도로 성장하여 6천 명 전후의 교세를 유지했다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 남감리교의 만주선교도 1922년에 북만주의 길림지방회와 동만주의 북간도지방회를 설립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고 분석했습니다. (P.192)

    1999년 6월, 저는 친구 목사들과 연변 도문에서 두만강 넘어 북한에 밀가루를 보내는 지원사업에 동참하였다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남한사람들에게 초청사기를 당하여 고통당하는 많은 조선족 가정을 목격하였습니다. 이에 친구들과 ‘한민족선교정책연구소’(현 <사>참된평화를만드는사람들)를 만들어 소장으로 일하며 조선족과 평화통일 등을 연구하여 여러 책을 발간하고, 장학금으로 조선족 가정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더구나 연구소의 자매기관인 ‘조선족복지센터’의 소장 임광빈 목사는 재외동포법에 의해 차별받던 조선족 동포들과 같이 90여일 간 농성하고 단체들과 연대한 끝에, 자유왕래가 가능한 법의 개정을 이끌어냈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조선족의 발전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했습니다. 조선인들은 만주에 벼농사를 보급하여 풍요롭게 땅을 일구었고 항일투쟁에 헌신하였기에 주인의식이 강하고, 중국이 자치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공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노귀남 박사의 발제에서 긴급한 과제를 공유하였습니다.

    “조선족 사회는 지난 15여년 사이에 중국 변화와 아울러 급격하게 변했다. 중국의 경제성장보다 더 빠르게 자본주의 문화에 편승한 바, 쉽게 한국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물질적 풍요에 가려진 가족 해체와 조선족 인구의 열세로 인해 새로운 위기에 놓여 있다. 이에 질적 삶과 문화적 가치에 대한 전환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다.”

    일정 중에 도문 수남촌의 마을숙소에서 잠을 잤는데 깨끗하고 친절하여 좋았습니다. 다음날 세미나 초두에 수남촌 리철룡 촌장이 문화사업을 통해 가난한 농촌을 ‘영혼이 살아있는 마을’로 변화시켰는지를 발표했습니다. 벼농사를 보급한 선조들의 창의적인 정신과 항일운동을 감당한 불굴의 의지를 이어받은 모습에서, 동포들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백두산에 눈이 많이 내려 천지에 오르지 못하여 참 아쉬웠지만, 우리 일행은 앞으로 북한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 가라는 뜻으로 여기고 마음을 달랬습니다.

    중국을 떠나기 전날, 우리는 연길시 류경호텔의 북한식당에서 20년간 파트너였던 조선족단체의 이사들과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서로 노고를 치하하였고, 4·15 태양절에 초청받아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김치, 평양냉면 등 북한음식을 맛있게 먹고, 봉사하는 북한여성들의 노래에 맞춰 같이 어설펐지만 춤까지 추며 조선족 동포들과 유쾌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6·15 남북 공동선언’ 19주년이 다가옵니다. 작년 4월 판문점 공동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평화통일의 물꼬를 텄지만, 올해 2월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의 실패로 전망이 어둡습니다. 이런 국면에서 중국 조선족 동포들은 남북통일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고, 통일 후 우리나라가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가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조선족들(현재 83만명)은 귀한 동반자이니 더 많은 관심과 지원방안을 세워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교착상태인 남북미 관계가 변화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평화통일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된다면, 중국 연변의 명동교회가 이 땅에서 부활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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