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소의 추억 (feat.비둘기와 강아지)
    [역사의 한 페이지] 역사적 의미로 등장하는 동물들
        2019년 06월 14일 1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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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한 페이지] 한 장 증명서 속의 1946년 그리고 오늘

    #장면1. 고려대생 5백여 명은 26일 오전 11시 20분 다시 동교(同校) 배구장에 모여 삼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성토대회에서 학생들은 “삼선개헌기도는 제2의 쿠데타”라고 주장, “조국이 다시 시행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비극을 초래치 않게 투쟁대열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어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보내는 메시지와 ‘삼선개헌반대 학생 처벌 철회’등 4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황소 파시즘’이라고 쓴 허수아비를 박수갈채 속에서 불태우는 화형식을 가졌다.

    – 동아일보, 1969.8.26일자

    #장면2. 경기도 광주에 있는 새마을 모범부락을 시찰할 때의 일이다. 그날이 마침 광주 장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광나루를 지날 무렵, 소장수들이 여러 마리의 소를 길 한복판에서 몰고 가는 것을 보았다. 대통령이 탄 차가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 길을 비켜섰는데, 그 중 한 마리가 막무가내로 길 한 가운데를 막아서고 비키지 않았다. 클랙션을 요란하게 울려도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를 몰고 가던 소장수도 당황하여 “이럇 이럇”을 외치며 고삐를 마구 잡아끌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박정희가 소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임마! 나를 몰라 봐? 내가 너희들 황소당의 총재야!”

    이 말에 당황했던 소장수나 차 안에서 바쁠 일정에 조바심을 내던 수행원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됐다.

    -송효빈, [가까이서 본 박정희 대통령](휘문출판사) 중에서

    [사진] 농업이 주산업이었던 한국인들에게 황소는 순하고 충직한 동물로 늘 주변을 지켜왔다. 그런데 이 황소가 가끔 역사의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하곤 했다.

    ‘황소 파시즘 화형식’과 ‘황소당 총재’?

    갑자기 황소 이야기가 나와서 의아할 것이다. [역사의 한 페이지] 연재를 시작한 지 1년이 되도록 한 번도 동물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글은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끔 ‘동물’들이 조연(助演)으로 등장해 인간사를 보다 풍부하게 해준다. 심지어는 동물로 인해 권력이 바뀌는 일도 가끔 있으니 이쯤 되면 조연이 아니라 때로는 주연이기도 한 것이다.

    동물로 인해 권력이 교체되는 일이 있었다고?

    이런 일은 한국사에서 크게 두 번 있었다. 이 일부터 다루고 황소 이야기로 넘어 가자.

    한번은 고려시대이다. 고려 후기 무신 집권기 이의민이 몰락하고 최충헌이 권력을 잡는 과정은 비둘기 한 마리를 둘러싼 갈등이 계기가 되었다. 이야기는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의 애완 비둘기를 빼앗는 데서 시작된다. 최충수는 무신 최충헌의 동생이었다. 이 비둘기 탈취에 격분한 최충헌·최충수 형제는 결국 미타산(彌陁山)의 별장에 있던 이의민 습격을 감행함으로써 권력을 차지하게 된다. 때는 1196년, 지금부터 823년 전의 일이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이의민 정권의 몰락과 최충헌 정권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또 한 번의 권력 교체는 최근의 일이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강아지 한 마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를 요약하면 대략 이러하다. 최순실은 딸 정유라의 강아지를 고영태에게 잠시 봐 달라고 맡겼는데, 고영태는 골프 약속이 갑자기 생기는 바람에 강아지를 혼자 두고 외출하게 된다. 잠시 후 빈 집에 오게 된 최순실은 강아지가 혼자 방치된 것을 보고 격분하게 되고, 이 일로 나중에 돌아온 고영태와 심하게 다투게 된다. 이 다툼으로 최순실과 고영태의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최순실로부터 “모욕적인 말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은” 고영태는 결국 대통령 옷을 제작·공급하는 최순실 의상실에 비밀 카메라를 설치해 대통령과 최순실의 특수한 관계를 보여주는 영상을 녹화한 후 이를 언론에 제보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등 언론의 탐문 취재가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JTBC 기자가 우연히 문제의 ‘최순실 태블릿PC’를 확보! 2016년 10월 24일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룸을 통해 이 태블릿 PC 내용이 최초로 폭로되면서 박근혜 정부 몰락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그 다음 일들은 독자들께서 잘 아실 것이니 생략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촉발된 사건이기 때문에, 촛불혁명이 진행될 당시 외신은 한국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Puppygate’로 불렀던 것이다. 당시 외신 기사의 제목도 이런 식이었다.

    “Key figure in South Korean Leader’s troubles: A puppy” (The New York Times)
    “The Korean scandal was made possible because of a puppy” (Reddit)
    “Park Geun-hye impeached: Did a puppy bring down South Korea’s president?”(BBC News)

    [사진] 2016년 당시 외신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Puppygate’로 표현하였다. 강아지 한 마리가 권력을 통째로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왼쪽은 [BBC News], 오른쪽은 [The New York Times] 보도 화면)

    물론 이렇게만 보면 역사라는 것이 지나치게 우연하고도 사소한 일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의민 부자의 탐학과 악행이라는 근본 배경이 있었고, 그 정권 붕괴의 단초를 제공한 것이 비둘기였을 뿐이다. 그러니 본질을 먼저 주목해야지 비둘기만 이야기하면 역사는 거대한 물줄기는 놓치고 에피소드만 취하게 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도 마찬가지! 본질을 빼버리고 강아지만 부각시키면, ‘강아지 한 마리가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나라를 구했다’가 되겠지만, 박근혜·최순실의 국정 농단이라는 본질이 따로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려의 비둘기’와 ‘대한민국의 강아지’가 공을 쏘아 올리긴 했지만, 그것들은 단순한 소품에 불과하다. 비둘기가 아니더라도, 강아지가 아니더라도 일이 일어나려면 다른 어떤 계기로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모든 우주 만물은 각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이다.

    화엄사상의 핵심이다.

    민주공화당 그리고 황소

    비록 비둘기와 강아지처럼 정권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것만큼이나 현대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동물이 있었으니 바로 박정희 시대의 황소이다. 그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고 설명할 수 없으므로 황소는 박정희 시대의 주요 조연이었다.

    먼저 필자가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는 사진부터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족히 50년은 지났을 것 같은 빛바랜 흑백사진 2장이다.

    [사진] 황소 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2장. 왼쪽은 1972년, 오른쪽은 1968년 촬영한 것이다. (박건호 소장)

    두 장 모두 같은 곳에서 찍은 것인데, 한 장은 1972년 2월 어느 건물 앞에 수십 명이 정연하게 줄 서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앞 줄의 양복을 입은 주요 인물들 말고는 대다수가 군복 비슷한 제복을 입고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그보다 4년 전인 1968년 7월 열 명의 인물이 자유로운 포즈로 찍은 사진이다. 여름이라 다들 반팔 옷을 입고 있다. 이 두 사진을 같은 곳에서 찍었다고 말한 이유는 사진의 배경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황소상(像) 때문이다.

    첫 번째 사진에는 인물들 뒤쪽 저 멀리 조그맣게 보여 눈 여겨 보지 않으면 놓칠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사진에는 아예 황소를 배경으로 크게 찍었다. 이 사진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정권의 집권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의 상징 동물이 황소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그런 맥락에서 추측컨대 황소상이 서 있는 저 건물은 아마 공화당과 관련된 건물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진들 뒤에는 모두 공화당 당원 연수를 수료하고 찍었다는 설명 문구가 적혀 있다.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이 황소상을 보면 자칫 황소상으로 유명한 미국 월 스트리트 증권거래소에 간 사람들이 미국 방문의 감격을 담아 찍은 기념사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실은 미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시 공화당의 당원 연수원은 서울 가락동에 있었다.

    이 사진들 말고도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박정희 시대 자료들에는 황소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1964년 12월 공화당 제2년차 전당대회 당시 배포된 기념메달도 그 중 하나다. 백동 재질로 만들어진 지름 4센티 크기의 이 메달에는 월계수 잎을 두른 테두리 선 안에 황소 한 마리가 가운데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 민주공화당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한 1967년 제6대 대선을 앞두고 지구당 대책위원회 위원에게 수여한 임명장 위쪽에도 황소 마크가 제일 위에 인쇄되어있고, 네 귀퉁이 가장자리에 ‘민주’, ‘자주’가 한 자씩 새겨져 있다. 박정희 시대는 그야말로 황소의 시대였다.

    [사진] 왼쪽은 황소를 중앙에 새긴 공화당 제2년차 전당대회 기념메달, 오른쪽은 황소 문양이 위에 뚜렷하게 표시된 공화당 6대 대선 지구당 대책위원회 위원 임명장이다. (박건호 소장)

    그런데 이런 종류의 황소 상징물 중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매우 특이한 것들도 있다. 작년 경매에 나온 물품 한 점은 이 공화당의 황소 숭배가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자료였다. 비록 그 크기와 부피 때문에 필자가 입찰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신선했다. 그 물품은 다름 아닌 ‘황소 전화기’였다.

    전화기는 전화기인데, 일반 전화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전화기의 왼쪽에는 수화기가 있고, 오른쪽에 큰 황소 한 마리가 불쑥 솟아있다. 청동으로 만든 이 황소의 왼쪽 배에는 숫자들이 하나씩 박혀있고, 소의 목에 연결된 노란색의 줄이 수화기로 연결되어있다. 목에는 전화선 말고도 방울이 달려 있다. 수화기 위쪽에는 메모지를 넣어둘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따로 두었고, 그 옆에는 펜 꽂이도 마련하였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전화기. 한국에서 수많은 전화기가 만들어졌겠지만, 형태의 특이함으로 보자면 이 전화기가 단연 최고일 것이다. 실용성과 상징성을 고루 갖출 수도 있었겠지만, 이 전화기는 상징성이 과도하게 표출되었다. 전화기에 황소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황소 조각상에 전화기를 붙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렇게 불편할 정도로 크게 황소를 부각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진] ‘황소’를 이용한 매우 특이한 형태의 전화기이다. 박정희 시대의 역사를 증언하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인터넷 사진)

    지금의 시각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각으로 들여다보자. 그러면 이렇게 기형적이고 비실용적인전화기가 만들어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1960∼70년대에는 전화기가 대중화되지 못했고, 매우 귀한 사치품이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아무나 가지지 못할 때, 그 물건은 희소하고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전화기가 부의 상징으로 통하던 시대였으니, 작게 만들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기술적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황소상을 전화기 위에 크게 올려놓아 집권 정치세력과의 연줄을 보여줄 수 있으니, 더더욱 권위적으로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게다가 부유층 혹은 권력층과 연결된 사람의 집이라면 이 전화기를 두고 사용하기에 공간이 그리 부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화기는 생필품이 아니라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장식품의 성격을 띠었으므로 되도록 크게! 되도록 권위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그렇게 자주 전화기를 사용하지도 않았을 테니 실용성은 양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용성보다 중요한 것은 부와 권위였다.

    이렇게 사진들이나 기념메달이나 임명장이나 전화기를 통해 공화당의 상징 동물로 황소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독자들께서는 이 글의 제일 앞에 소개한 장면1의 ‘황소 파시즘 화형식’과 장면2의 ‘황소당 총재’ 이야기의 맥락이 충분히 이해될 것이다.

    황소, 선거판에 뛰어들다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경우 각각 파란색과 붉은색의 상징 색을 사용하지 상징 동물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미국과 달리 한국의 정치 문화 자체가 동물을 정당의 상징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니 1960년대 공화당이 황소를 상징동물로 삼은 것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나름 신선한 시도였고, ‘이미지 메이킹 정치’의 출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먼저 공화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잠시 살펴보고, 황소가 선거판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었던 1967년 6대 대선으로 가보자.

    5.16 군사쿠데타 이후 2년 동안 군정을 했던 박정희는 결국 1962년 11월 민정 이양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결한 후, 12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했다. 79%의 찬성을 얻어 확정된 이 헌법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 개헌에 따라 제3대 대선이 1963년 10월 15일 실시되기로 정해졌다. 이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민정 참여를 발표하고, 8월 30일 열린 전역식에서 “이 나라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고 후배 군인들에게 당부하고 본격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된다.

    이 과정에서 창당된 것이 민주공화당이었다. 공화당은 1963년 2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의 주도로 창당되었다. 박정희 장군이 전역하기 6개월 전이었다. 공화당은 ‘5 ·16혁명이념의 계승’과 ‘민족적 민주주의 구현’, ‘반공안보’ 및 ‘경제개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자처하였다. 당의 상징 동물로는 우직하게 일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황소’로 정하였다.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기에도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인구의 다수가 농민인 시대에서 ‘농민의 아들’ 박정희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농촌 지역의 표를 확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황소는 논밭에서 일만 하다가 정치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황소가 정치판에 데뷔한 후 실시된 첫 대선인 1963년 5대 대선에서 공화당은 “새 일꾼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보자”는 현수막을 내걸고 선거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황소는 이 선거에서는 아직 쟁점화 되지는 못했다. 황소가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황소를 둘러싼 본격적인 여야 논쟁은 1967년 제6대 대선까지 기다려야 했다.

    1967년 대선에서 벌어진 ‘황소 논쟁’은 한국 현대 정치사 전체를 통 털어 매우 이례적인 논쟁이었다. 동물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일이 그리 흔했겠는가?

    당시 집권당이었던 공화당은 1967년 2월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재지명했다. 공화당은 지난 5대 대선에서처럼 황소 이미지를 선거에 재활용하였다. “틀림없다. 공화당! 황소 힘이 제일이다”를 중심으로 “박대통령 다시 뽑아 경제 건설 계속하자” “중단하면 후회하고 전진하면 자립한다”는 선거 구호를 내걸고 선거전에 돌입하였다. 유세장에는 “황소 힘이 제일 틀림없다. 공화당”이라는 선거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두른 황소가 등장하여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사진] 왼쪽은 제6대 대선 당시 공화당 박정희 후보의 선거 포스터, 오른쪽은 선거 운동에 동원된 황소로 “황소 힘이 제일, 틀림없다 공화당”이라는 글이 적힌 현수막을 두르고 있다.(인터넷 사진)

    한편 야당인 신민당은 윤보선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고 “지난 농사 망친 황소 올 봄에는 갈아 치자”,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갈아 치자”, “박정해서 못살겠다. 윤택하게 살길 찾자”는 구호를 내걸고 공화당에 맞섰다. 또 다른 야당인 민중당의 김준연 후보도 황소논쟁에 끼어 들었다. 그는 “파벌정치 몰아내고 병든 황소 갈아 치자!”라는 선거 구호를 내걸었다. 야당이 이렇게 황소를 비판하는 구호 대신 황소에 맞설만한 다른 동물을 상징으로 내세워 선거판에 데려오지 않은 것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그랬다면 이 선거는 훨씬 더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황소 힘이 제일이니 믿고 다시 맡겨 달라는 공화당과 지난 농사 망친 황소를 갈아 치우자는 신민당의 대립! 선거 결과는 5대 대선과는 달리 싱겁게 결판이 났다. 박정희 후보가 총 유효 투표의 51.44%에 해당하는 568만 6666표를 얻어 452만 6541표를 차지한 윤보선 후보를 116만여 표 차이로 나누고 제 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들은 아직 일하는 황소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소, 링 위에 올라 봉변을 당하다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말라는 뜻이다. 오이를 따거나 오얏을 따는 의심을 받기 쉬우므로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이를 줄여 ‘과리지혐(瓜李之嫌)’또는 ‘과리(瓜李)’라고 한다. 그럴 의도가 없이 우연히 한 행동이 때로는 의심을 사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황소논쟁으로 뜨거웠던 1967년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1965년에 ‘장영철 사건’이라는 ‘웃픈’ 사건이 있었다. 일명 ‘레슬링은 쇼’사건으로도 불린다. 1960년대 당시 프로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특히 ‘박치기 왕’ 김일과 ‘백 드롭의 명수’ 장영철이 인기가 많았다. 김일은 역도산의 제자로 해외파 영웅이었다면, 턱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장영철은 국내파 영웅이었다. 국민들은 이들 레슬링 스타에 열광하였다. 그러던 중 발생한 장영철 사건은 이런 레슬링 열기에 찬 물을 끼얹은 사건이었다.

    1965년 8월 1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는 프로레슬링 5개국 친선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날 한국의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 쿠마고로가 경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쿠마가 미리 약속된 플레이를 무시하고 단독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오쿠마에게 ‘보스턴 크랩(Boston Crab; 일명 새우꺾기)’에 걸린 장영철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자, 이를 지켜보던 그의 후배 10여명이 링에 난입하여 오쿠마의 머리를 맥주병과 의자 등으로 집단 폭행하게 된다. 한 순간 링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경찰 수사로까지 번졌고, 장영철은 경찰 조사 과정에서 “프로레슬링은 사전에 승패를 정하는 쇼”라고 진술했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 그렇게 열광했던 프로 레슬링이 사실은 미리 각본을 짜고 하는 쇼라는 사실에 국민들은 속았다는 실망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였다.

    한편 장영철 사건 당시 난장판이 된 링 위에서 장영철이 밑도 끝도 없이 “김일에게 도전하겠다”고 소리쳐 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런 일 때문인지 이 사건 이후 프로 레슬링계의 두 스타 장영철과 김일은 오랫동안 서로를 외면하게 된다. 장영철과 김일은 2006년 70대의 노쇠한 환자들로 만나 41년 만에 화해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둘은 나란히 사망하였다.

    어쨌든 프로 레슬링에 대한 싸늘해진 분위기 때문에 속앓이하던 프로 레슬링계는 이를 회복할 특별한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획한 것이 바로 천규덕의 ‘당수로 황소 죽이기’ 생방송이었다. 천규덕은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로 당시 장영철과 함께 한국 프로 레슬링계 국내파의 양대 산맥이었고 특히 당수가 주특기였다. 이미 당수로 소를 때려잡았다는 소문도 나 있던 터였다. 뒷날 천규덕의 증언이다.

    마장동 소 도축장에 가서 연습 삼아 한번 해봤어요.

    그랬더니 한 대에 소가 확 가더라고요. 거기 있던 사람들이 다 놀랐지. 연속해 5마리를 때려 잡았어요. ‘아, 이거 되겠다’ 싶어서 장충체육관 잡고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어요.

    -조선일보 2008년 9월 20일, 천규덕 인터뷰 내용 중

    1967년 예고된 이벤트 당일 장충체육관에서 링에 황소와 천규덕이 올랐고 국민들은 생방송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천규덕이 당수로 소의 머리를 내려쳤으나 소는 끄떡없었다. 한방에 보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천규덕은 이후 열댓 번 당수를 날린 후 소의 머리를 잡고 쓰러뜨림으로서 이벤트를 마무리 지었다. 혹자들은 이를 ‘천규덕 소 잡기 사건’이라고 불렀다. 광고한 것에 비해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실패한 이벤트였다. 그런데 이 사건의 뒷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

    다시 기억을 되살려보자. 1967년이 어떤 해였던가?

    당시는 어떤 당은 황소 힘이 제일이니 믿고 다시 맡겨달라고 호소하고 있었고, 또 어떤 당은 지난 농사 망친 황소를 갈아치우자고 주장하던 그런 대선 정국이 아니었던가. 이런 상황에서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황소를 때려잡겠다고 광고를 해댔으니, 이것은 용감함이었을까? 아니면 무모함이었을까? 모든 맥락을 빼버리고 이 이벤트를 본다면 참 재미나는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때가 때인지라 그것이 단순한 재밋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황소도 그냥 황소가 아니었다. 당시 황소는 공화당이었고, 박정희였다.

    [사진] 천규덕이 장충체육관에서 ‘당수로 황소 죽이기’ 이벤트를 하는 장면이다. 이것이 누군가에는 ‘최고 존엄’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인터넷 사진)

    유명 프로레슬러 천규덕이 집권 여당의 상징 동물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한방에 때려잡겠다고 했을 때, 대통령이나 집권당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과리지혐(瓜李之嫌)’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똑같은 행위라도 언제 어디서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맸을 뿐인데, 사람들은 오얏을 따는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천규덕은 중앙정보부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감찰부장은 이렇게 추궁한다.

    “천 선수, 왜 하필 소를 잡으려 해, 소가 뭔지 알아? 공화당 상징이 황소라는 거 몰랐어? 당신이 황소 때려잡으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않겠어?”

    이 말에 천규덕은 “정치고 뭐고 잘 모른다”고 우물거릴 수밖에…….

    그러자 감찰부장은 이런 제안을 한다.

    “이미 광고 다했는데 국민들에게 거짓말 할 수는 없고, 단번에 때려잡지 말고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어서 황소가 센 동물이라는 걸 보여 달라”

    천규덕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무슨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도 아닌데, 하필 1967년 ‘황소 논쟁’에 휘말린 것도 그렇고, 또 한방에 소를 잡아서 시청자들 앞에서 자신의 괴력을 과시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도 그렇고.

    다소 의아한 점이 하나 있다. 이벤트 마지막에 그가 소를 단순히 넘어뜨렸는지, 아니면 결국 죽였는지가 확실치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2009년 조선일보 인터뷰와 1년 뒤의 2010년 문화일보 인터뷰 내용이 다소 차이가 난다. 둘 다 천규덕 자신이 한 인터뷰인데도, 또 그렇게 시간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그는 링에 올랐던 황소의 최후에 대해서 다른 뉘앙스로 말을 한다. 어쨌든 그날 봉변을 당했던 황소에게 위로를!

    나야 단번에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 말 듣고 열 몇 대로 힘을 나눠 때리다가 막판에 가서 쓰러뜨린 거라. 시키는 대로 한 거지

    – 조선일보 인터뷰, 2009.9.20일자

    정보부에서 ‘천 선수, 공화당 상징이 황소인데 그걸 때려죽이겠다는 게야? 정부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며 중지하라고 하더군. 광고까지 나갔다고 사정했더니 ‘그러면 한두 방에 끝내지 말고 여러 번 때려 황소가 그렇게 세다는 것을 보여준 후 죽이라’고 하데. 결국 15번이나 쳐서 죽였어.

    – 문화일보 인터뷰, 2010. 9.10일자

    황소, 독재의 상징를 넘어 민주 투사로 진화하다

    1960∼70년대 황소는 박정희 정부의 상징 동물이었다. 황소처럼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박정권의 추진력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불통의 독재 권력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 황소가 박정희 독재 정권을 만들고 유지하는데 부역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황소 파시즘 화형식’은 이의 단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런 부역에 대한 속죄였을까?

    2016년 촛불혁명의 와중에 필자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하였다. 2016년 11월 26일 5차 촛불시위에 느닷없이 황소들이 등장했다. 당시는 ‘트랙터 상경단’(일명 ‘전봉준 상경단’)이 이슈가 되었던 때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2016년 11월 25일 오후 5시부터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릴 농민대회와 또 당시 열기를 더하고 있던 촛불시위에 동참하기 위해 트랙터 상경단을 구성해 전국 각지에서 출발해 서울로 모이는 장엄한 행진을 벌였다. 그들이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며 트랙터 등 농기구를 몰고 서울로 진입하고자 했을 때, 경찰은 교통 혼란을 이유로 이들의 서울 진입을 막았지만, 법원은 농민들의 서울 진입과 정부 청사 앞 상경시위를 허용했다. 어쨌든 트랙터 상경단이 합류한 이 날 시위에 황소 여러 마리가 등장해 시민들의 눈길을 끌었다. 농민들이 데리고 온 것으로 추측되지만, 모두 다 그러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전라도 광주에서 올라온 소에는 ‘박근혜 체포단’이라는 옷이 둘러져 있었고, 어떤 소에는 ‘박근혜 구속’이라는 옷이 입혀져 있었다. 또 어떤 소에는 ‘근혜씨 집에 가소’, ‘근혜씨 하야하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당시 시민들은 소들이 지나갈 때 “짐승들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는 셈”이라고 환호하고 박수쳤다.

    [사진] 2016년 11월 26일 5차 촛불시위에 몇 마리의 황소가 박근혜 퇴진을 주장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 왼쪽은 1967년 민주공화당 박정희 선거 운동에 동원된 황소 사진, 오른쪽은 2016년의 촛불시위에 동원된 황소 사진(연합뉴스)이다. 두 사진의 시차만큼이나 이 두 집회에서의 황소의 상징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50년 전 “황소 힘이 제일, 틀림없다 공화당”이 적힌 옷을 둘렀던 황소는 2016년 “박근혜 구속”이라는 옷을 두르고 서 있었다. 1967년 당시의 대통령은 50세의 박정희였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6년의 대통령은 그의 딸 박근혜였다. 1967년의 50세 아버지 나이를 훌쩍 뛰어 넘은 64세의 인기 없는 대통령이었다. 이날 황소를 끌고 온 이들도 50년 전의 황소 이야기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황소를 끌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더더욱 촛불시위 현장에 참가한 황소들 역시 자신들의 선배 황소들이 50년 전 아버지 대통령의 선거 운동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인간사(人間事)에 강제 소환되는 일에 무척 속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서인지 사진 속의 소들의 눈빛은 슬퍼 보인다.

    역사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다.

    때로는 동물 심지어 식물도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다는 것도 그렇고, 동일한 동물도 누가 그것을 이용하는가에 따라 독재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촛불 투사가 되기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이번 글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 1001마리를 끌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을 당시 소들은 ‘통일’을 상징하는 동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도 했으니 이 다기다양한 황소의 변화와 진화를 무슨 말로 설명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동물은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 존재로서의 동물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 속에 동물도 일정한 발언권이 있고, 그래서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찌 알겠는가?

    내 주변의 저 하찮아 보이는 동물 한 마리가 나중에 어떤 계기로 권력을 붕괴시킬지, 아니면 거대한 역사의 진보를 만들 계기를 만들지……..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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