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협약 비준 함께
필수유지업무제도 전면 바꿔야
사용주의 이중잣대···핵심업무 아니라 외주화, 파업할 땐 필수유지업무
    2019년 06월 11일 10:3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철도, 항공, 병원, 발전, 가스 등에 적용되는 필수공익사업·필수유지업무 제도 관련 법과 시행령을 폐지 혹은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온다. 사용자 측이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박탈하고, 경영에 대한 노조의 견제기능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해당 제도를 악용해왔기 때문이다. 필수공익사업장이 ‘필수사익사업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공공운수노조, 여영국 정의당 의원 등은 1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ILO 협약 비준과 함께 필수유지업무제도를 전면 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회견에는 필수공익사업 적용대상인 병원, 항공, 발전 등의 민주노총 소속 노조도 참석해 ▲필수공익사업을 엄격한 의미의 필수서비스로 제한 ▲필수유지업무제도의 적용실태 보고 ▲긴급조정제도의 제한, 필수유지업무제도의 전면적인 개선 등 ILO 결사의자유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권고가 이뤄지지 않을 시 ILO에 추가제소를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사정이 모인 국제노동기구인 ILO는 직권중재 제도가 폐지된 후 2006년 도입된 한국의 필수공익사업 제도와 관련해 “최소 서비스는 공중 전체 또는 일부의 생명이나 정상적인 생활조건에 대한 위협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로만 엄격하게 한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한국은 이러한 권고를 벗어나 거의 대부분의 공공부문 사업장에 필수공익사업장 제도를 적용해 노조의 파업권을 무력화하고 있다. ILO는 이후 발표한 보고서 등에서도 한국이 필수공익사업의 범위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정하고 있다고 지적해왔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업무의 정지 또는 폐지가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경제를 현저히 저해하고 그 업무의 대체가 어려운 곳을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하고 있다. 철도, 전기, 가스, 병원, 은행, 통신, 항공 등이 그렇다. 또 노조법 시행령은 필수공익사업장 내에 결사특정 부서를 필수유지업무로 정해 파업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진=곽노충

필수공익사업장 제도로 인한
노조 파업권 박탈이 
사용자 견제 기능 상실로 이어져

필수공익사업은 정부가 비준하기로 한 결사의 자유 보장을 위한 ILO 핵심협약 정신에도 어긋난다. 공공부문의 파업권은 사실상 박탈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법률원 소속 권두섭 변호사는 “업무가 멈췄을 때 사용자들이 압력을 느껴서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업무들은 모두 시행령에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돼있다”며 “필수공익사업장에서 파업을 하면 평균 80%의 인력을 유지하면서 파업을 해야 하고, 사용자는 파업참여 규모 중 50%의 대체인력을 허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노동자가 100명인 필수공익사업장에서 파업을 하게 되면 대체인력까지 포함해 90명은 업무에 투입되고 단 10명만이 파업에 참여하게 된다.

철도와 항공은 필수공익사업으로 인해 파업권이 제한된 대표적인 사례다.

철도노조는 2016년 공공부문 총파업 당시 70여 일간 파업을 벌였으나 파업효과는 거의 없었다. 여객수송 조합원 60%가 필수유지업무제도로 파업에 참가하지 못했고, 파업인원의 100%에 가까운 대체인력이 투입됐기 때문이다. 당시 사용자 측인 철도공사는 파업기간 중 차량 100%를 운행하겠다며 무분별하게 대체인력을 투입해 안전 문제가 불거졌고, 노사갈등이 격화되면서 파업이 장기화되기도 했다. 필수공익사업 제도가 오히려 파업 장기화라는 노사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 셈이다.

항공운수사업은 2006년 필수유지업무사업으로 추가되면서 10년간 파업을 벌이지 못했다. 운항, 객실, 정비 등 항공운수사업의 거의 전 업무가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되고, 국제선 80%, 제주노선 70%, 국내선 50%의 운항률로 필수유지율이 결정되면서 사실상 파업효과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노조의 파업이 사라지자 항공사 재벌에 의한 경영 견제기능도 실종됐다. ‘땅콩회항 사건’은 노조의 견제기능이 사라진 사업장 내 노동자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이 밖에 조종사 대거 해외이탈, 안전예산 축소와 항공안전 후퇴 등 안전문제까지 초래하고 있다.

박창진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은 “필수공익사업장 제도는 공공을 위한다는 허울 좋은 표제 아래 가식과 왜곡으로 노동자들의 기본권과 인권을 탄압하는 아주 나쁜 법”이라며 “이 법은 공익과 국가를 위한 법이 아니라 일부 항공재벌을 위한, 그들의 보위를 위한 법”이라고 비판했다.

사용자의 이중 잣대…핵심업무 아니라 외주화, 파업할 땐 필수유지업무

태안화력발전에서 일하다 목숨을 잃은 하청노동자 고 김용균 씨가 했던 연료환경설비운전 업무도 필수유지업무였다. 그러나 발전사는 김 씨의 업무가 핵심업무 아니라며 외주화했다. 핵심업무가 아니라며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은 하지 않으면서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파업권을 행사할 때만큼은 ‘필수적인 업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필수공익사업 제도를 대하는 대부분 사용자들의 태도다.

박태환 발전산업노조 위원장은 “악법 중에 악법이라고 외쳤던 직권중재가 그리워지는 상황”이라며 “발전현장의 운전 파트에 대해선 100%가 필수유지업무라 파업을 할 수 없고, 보조업무를 하는 부서조차도 30~50% 필수유지업무라고 하지만 실제론 100%에 가깝게 파업권이 제약당하고 있다. 특히 필수유지업무이기 때문에 파업을 할 수 없다고 해놓고는 필수유지업무를 외주화하고 정규직화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아이러니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제도는 반드시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필수공익사업장인 병원도 마찬가지다. 의료연대본부 등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시설, 미화를 필수업무라고 하면 파업에 돌입하면 100% 대체인력을 투입하고 있다. 그러나 병원은 정규직화를 위한 노사 논의 과정에선 시설, 미화업무는 필수업무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병원 측은 하청 노동자 직접고용에 반대하는 이유로 파업인원 확대와 대체인력 투입율 저하 등을 꼽았다고 한다. 직접고용을 하게 되면 대체인력을 50%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하청노동자인 경우 무한정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정희 의료연대본부장은 “정규직화 요구하면 필수업무가 아니라고 부정하다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필수업무이기 때문에 필수인력을 남기라는 이율배반적 요구를 하고 있다”며 “특히 병원에서의 이 제도는 오히려 파업을 유도하고 장기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 본부장은 “병원은 노조가 생긴 이래로 전체 병원이 파업을 함께 한 적이 없다. 국내 수백 개의 병원이 존재하지만 단 몇 개의 병원만이 파업에 들어가는 현실을 감안할 때 병원에서의 이 제도는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여영국 정의당 의원 또한 “필수공익 사업장 제도는 필수적이지도, 공익적이지도 않다”며 “필수적인 업무라고 해놓고 사람은 비정규직으로 쓰는 상황은 이 제도가 가진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제적인 기준에 맞게 이 제도의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유하라
레디앙 취재기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