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들을 위한
매혹의 정치, 대안의 좌파 정치 필요
[보이스 오브 모멘텀]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나?
    2019년 06월 04일 10: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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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의 청년학생그룹, 의견그룹인 ‘모멘텀’의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칼럼이다. 청년문제와 사회문제, 노동문제, 페미니즘 등 사회의 다양한 이슈와 쟁점에 대해서 청년의 시각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접근하는 글들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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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20년은 무너질 것 같지 않던 2015년, 내 첫 대중집회는 세월호 1주기 추모집회였다. 변혁은 영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때 머릿속으로만 진보를 꿈꾸던 나로서는 거리에 나서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익사할 것 같았으니까.

그 이후로 집회를 참 많이 나갔다. 일곱 번의 민중총궐기와 스물 네 번의 촛불 항쟁을 거쳐 이제는 현장에서 동지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때부터 결코 떨쳐낼 수 없는 의심이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한가운데 솟구치곤 한다. “대체 이 집회가 세상을 어떻게 바꾼다는 걸까?”

촛불항쟁 현장이라면 차라리 거대한 함성 속에서 큰 힘이라도 느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우리는 광주로 가곤 한다. 그러나 나머지 남은 긴 시간, 학교 현장에서, 사업체 투쟁장에서, 복지관 앞에서, 쌩쌩 달리는 차와 무심한 만보객을 옆으로 하고 폴리스 라인 안에서 투쟁을 외치는 것은, 큰 소리로 울리는 확성기 소리 속에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헝클어진 농성 텐트와 길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저들은 그저 슥 훑고 지나쳐갈 뿐이다. 우리의 연설은 이어폰을 낀 행인들에 의해 무시되고 사라지곤 한다. 뒤풀이 자리에서 울리는 동지들의 격려와 감사는, 한편으로 이 운동의 장이 우리가 스스로 의미를 어떻게든 찾아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하다.

사실 그렇다. 직접행동에 정치 체계 내의 의사 결정 기구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제도 내에 직접행동의 위치는 보장된 바도 없고 그것을 강제하는 규칙도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집단적인 대중 감정을 통해 물리적 충돌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은 명백하다. 일상을 부수고 보장 없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할 사람이 많다.

신자유주의 초기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아주 명확히 간파했다. 영국의 대처 총리는 1984년 광산 파업에서 혹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단식 투쟁에서 투사들의 목소리를 철저히 괄시했다. 오로지 억압받는 목소리를 대중으로부터 분리하고 차별하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뿐이다. 그나마 대처는 소통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지, 피노체트는 아예 비판자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납치와 의문사를 자행했다. 대처도 기마경찰의 발굽으로 노동자들과 소수자들을 짓밟았다. 존엄할 자격을 박탈하는 것, 그것이 그들이 꿈꾸던 소박하고도 원대한 꿈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놀라울 정도로 잘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남긴 것을 금융화와 작은 정부와 유연화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부르주아 계급의식을 가진 소시민 집단을 만들었다. 작은 정부의 기치 아래 자본에 의한 공적 영역의 장악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시민권의 영역이 사실상 사장됨은 불가피해졌다. 양극화의 물결이 저소득층을 휩쓸 때 누군가는 부동산 붐과 주식 투기 열풍에 편승해 새로운 시대의 부를 쌓았다.

소시민은 체제의 편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는 신자유주의적 인간의 맥락에서 사고한다. 체제가 자신을 배불리고 있으니 자신 또한 체제를 더욱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이 열심히 익힌 체제에서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공적 영역을 논할 시간은 없다. 요컨대 빼앗기는 권리보다 시위하는 시간이 더 아까운 것이다.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휩쓸려간 ‘저 가난뱅이들’이 존엄을 누릴 권리가 없음은 당연한 것인데, 왜냐하면 노력하고 자산을 쌓아야 할 시간에 저들은 할 일 없이 시위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 현장에서는 자교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보며 개탄하곤 하나, 사실 이는 요즘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90년대 이후 좌파는 노동자를 배신하고 제3의 길을 운위하며 신자유주의에 영합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중이 선택할 수 있는 변혁의 선택지는 정치 체계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체제에 불만을 갖고 있더라도 좌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준거할 수 있는 판단의 틀마저 해체되어 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혁운동을 보고 냉소하며 정의는 이제 옛말이라 읊조리는 모습은 사실 여기서부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2000년대 이후 정치는 파편화의 정치가 된다. 새로 등장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 등 정보기술들은 정보의 이동 속도를 높이고 맞춤형 정보를 만들었다. 이는 도리어 숙고와 토론의 시간을 줄였는데, ‘뉴스피드’라는 말이 상징하듯 사람들은 이제는 떠먹여주는 정보에 익숙해져 자신 바깥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인터넷의 발달은 익명성과 동질화라는 현상을 낳는데, 그 결과는 오늘날 ‘세 줄 요약’과 맥락 없는 ‘팩트’로 상징되는 극도의 게으른 정보 소비의 모습이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발언의 공간과 동질적이지 않은 것들은 무시해도 되는 뉴스피드의 장에서, 자신의 계층이 아닌 것들은 ‘사이다’ 같은 언어 속에서 존엄할 가치를 박탈당한다. 오프라인에서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듯 각 계급 간의 파편화가 진행되고, 온라인에서는 ‘사이버 발칸화’로 적대적인 소규모 집단들이 난립한다.

노회찬은 6411버스의 투명인간들을 호명했다

새로운 보나파르티즘의 시대?

2010년대는 가히 새로운 보나파르티즘의 시대가 된다. 변혁의 길을 잃은 정치 체계와 사회의 파편화 경향은 극우 포퓰리즘 세력의 준동으로 진화한다. 상호 적대하는 소규모 집단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르펜, 살비니, 트럼프 등 새로운 루이 나폴레옹에게 열광하며 공통의 적인 이주민과 소수자에게 증오를 퍼붓는다. 기존의 중도 세력을 지키기 위해 나타난 것은 마크롱이나 클린턴 같은 아주 우스울 뿐인 자유주의 지도자이다. 그 상황 속에서 독일 녹색당이나 영미의 샌더스와 코빈과 같은 지도자들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도 결정적인 파도를 타고 메인스트림을 장악하기에는 부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장의 변동은 신자유주의의 기획을 단 한 번도 정도를 벗어난 바 없이 아주 충실히 집행한 결과이다. 오늘날의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젖은 소시민, 특히 청년은 결코 탈정치화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체제를 아주 잘 알고 그 바탕에서 생각한다. 그렇기에 직접행동을 향한 비웃음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현장에 한 번 가보지 않고 입으로만 정치를 운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지 어리석은 영웅 놀이에 젖은 이상주의자들일 뿐이다. 그들이 언뜻 보았을 때 대중집회는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차라리 노동을 실컷 착취당하고 오면 월급이라도 생길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이미 직접행동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 직접행동은 사람을 남긴다.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기층 조직을 만들고 소통하는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바로 이들 중간 매개자인 시민사회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직접행동은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직접행동에 사람들을 동참하라고 설득해야 할 때 이 논리는 난관에 봉착한다. 남는 것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그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들은 조직활동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조직을 당하는 것인가? 운동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당하는 것인가?

물론 다시,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운동은 민중을 권력의 주체로 만든다. 하지만 이 시대, 민중이 권력에 결합되는 데에 기반이 될 계급의식이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있는 이 시대에, 그들은 권력의 주체가 될 의지가 있을까?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는 소시민만을 만든 것이 아니다. 난민화 또한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현상이다. 삶의 터전이 액화되는 시대, 직업은 비정규직으로 쪼개기 계약과 꺾기로 끝없이 유연화되고 주거는 젠트리피케이션에 휩쓸려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시대에, 대중은 더 이상 시민으로 설 수 없게 된다. 빈민이 사는 구역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사람들은 도심 속 고시원과 쪽방으로 흩어져 계급의식이 형성될 기반은 이미 자리를 잃었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이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이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두 개다. 난민화된 민중에게 어떻게 계급의식을 다시 불어넣을 것인가, 비웃음의 원천인 부르주아 계급의식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워버린 것을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가장 명확한 변혁의 상 말이다. 그것도 민중을 직접 건드리는 가장 정확한 수사와 감정을 사용해서 말이다.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매혹이라 한다. 사회를 보는 가장 넓은 시선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제공하는 것, 즉 사회를 보는 근본이 되는 핵심적이고 정확한 명제와, 거기서부터 시작해 모든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 이것만이 민중을 매혹시키는 방법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대체 이게 어떻게 세상을 바꾼다는 것일까?” 바로 민중의 삶 한가운데에 있는 문제 하나하나에 정확한 답을 눈앞에서 제시함으로써 변혁이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부문운동 하나하나에서 비롯된 문제가 하나의 깃발 아래 공통의 상징을 가지고 같은 전선 아래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 말이다. 상상력은 1968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좌파는 복지국가 자본주의에 영합하고 국회에는 야당조차 존재하지 않던 소부르주아의 시대는 오늘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1968년의 혁명은 도무지 같은 선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보이던 부문운동들 하나하나가 모여 같은 깃발 아래 모여 만들어낸 결과이다.

오늘날 공통의 깃발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한 가난의 감각 위에 세워진다. 이미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괴롭힘에 대한 분노는 뿌리 깊은 공감의 발판을 얻었다. 자본주의 내에서 유동화된 민중은 이제 보편적 복지와 재벌에 대한 통제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 앞에서 부르주아 계급의식은 단지 서울 4년제 대학 속에서 주식 투자에 정신이 팔린 한줌에게나 뿌리 깊을 뿐이다.

비판적인 지식인이 되고자 진보를 시작한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대중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대중은 서울 바깥에 있다. 물론 사업장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쉽게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난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 감정과 실의 그리고 절망의 순간들이 우리 모두가 가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싸움을 통해 대중을 조직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그런 가난의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데에 목표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가난하다는 것을 은폐하는 부르주아 계급의식을 걷어치우고 새로운 계급의식을 주입하는 것이 운동의 목표이다. 그 상징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가난의 감각에 기초한 활동을 해야,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모이고, 그것이 행동이 되고 힘이 되어 변혁을 이끌 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 탓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이 진보정당, 대한민국을 실제로 움직여온 수많은 투명인간들을 위해 존재할 때, 그 일말의 의의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은폐된 체제가 투명인간들에 의해 무너질 때, 바야흐로 변혁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 매혹의 정치가 필요하다.

필자소개
정의당 고려대 학생위원회. 사회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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