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단체는 주고 받을 게 없다
        2006년 07월 12일 10: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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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고 고맙다. 지금까지 쓴 칼럼 중 처음으로 시민단체 간부의 비판 글을 받게 되었으니, 이 연재에서 바라는 바 절반은 얻은 셈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먼저 밝혀두자면,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노동운동이 사회정책 개입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시민단체들도 그런 데 참여해야 한다는 정책이나 공약을 제시해 왔다. 그럼에도 지난 글에서는 구체적 시기에 구체적 협약이 타당했는가, 그리고 그 협약에서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긍정적이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협약을 보며 두 가지 딜레마를 느끼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도대체 누가 ‘자격 있는 시민단체’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협약에서 시민단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점이었다.

    박원석 처장의 말마따나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10%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10%라는 것도 유명한 시민단체 회원의 100배 가량 될 뿐더러, 한국보다 조직률이 뒤지는 남유럽의 노동조합들 역시 사회협약의 독점적 주체라는 사실도 함께 인정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사회협약의 우선권을 가지는 것은 그 구성과 운영의 공식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요즘에는 진입 장벽이 훨씬 낮아졌지만, 불과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조합 하나 만드는 게 혁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고, 그런 어려움을 돌파하며 ‘10%’가 이루어진 것이다. 노동조합및노동쟁의조정법 등에 의해 구속되는 노동자가 매해 100~2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은 노동조합의 공식성 그리고 그에 따르는 권리가 피와 교환된 것임을 보여준다.

    왜 참여연대는 사회협약에 낄 수 있고, 함께하는시민행동은 안 될까? 크기와 영향력이 달라서? 규모나 영향력을 따지자면 요식업중앙회가, 이번 협약에 참여한 모든 시민단체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막강하다. 왜 여성계 대표로 여연과 여협이 참가하면서도, 현 정권의 전직 관료가 수장으로 있는 여성재단에 시민단체 몫이 중복 할애되는 것일까? 학계 대표 두 명은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뽑혔을까?

    크든 작든 유명하든 그렇지 못하든 시민단체는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확립된 노동조합의 공식성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시민단체가 자격 있는 협약 주체인가 하는 선택은 결국 주관적 임의성에 따를 뿐이다. 이런 것은 재야 서명운동식의 유명인 이름걸기나 386출신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관제 쇼에 가깝다. 이런 걸 책임 있는 사회협약이라 하지는 않는다.

    정부와 정당은 법률과 국가재정, 행정명령 등을 통해 사회협약을 이행할 수 있다. 사용자단체는 매해 봄마다 임금가이드라인을 내리는 것처럼 기업들에게 직장보육시설 설치 부담을 설득해야 한다. 노총들 역시 산업노조와 기업노조에 육아휴직을 위해 임금 손실을 감수하라는 단체협약 지침을 내려야 한다.

    시민단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성단체들이 그 회원들에게 출산을 종용할 수 있나? 노인단체 회원들이 스스로 정년을 연장할 수 있나? 저출산 고령화 사회협약 부속 문서에는 돈이 없어 못했던 각 단체의 숙원 사업들이 나열돼 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천렵을 하자면, 누구는 그물을, 누구는 솥을 가져오고, 누구는 고기를 잡고 누구는 요리를 한다. 여기에 시민단체는 숟가락을 하나 더 얻었다. 실제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말 봉사’ 뿐이다.

    사회협약의 자격권이 문제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협약 이행의 책임성이 협약 과정 자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간부는 협약 잘못하면 쫓겨나고, 그런 부담이 협약 과정에서의 진지함으로 나타난다. 시민단체에서도 협약 잘못하면 쫓겨날까? 천만의 말씀이다.

    박원석 처장은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의 파탄은 …… 건강한 시민들의 신뢰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고 말한다. 맞다, 개망신이었다. 한편, ‘건강한 시민들’의 시각의 일단은 마치 1980년대 한국 민주주의의 혼란스러운 전진을 바라보는 미국의 우려와 비슷하다. 그런 혼란과 파탄을 우리는 민주주의라 불러 왔다. 권리는 민주주의 수준만큼만 주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노동조합이 권리를 갖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노동조합보다 더 유능하고 진실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회정책의 진전에 책임성과 대표성”을 보인 것 역시 노조가 아니라 시민단체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능하고 진실한 사람들 스스로 시민사회의 공식적 대표인 정당이나 노동조합을 선택하지 않고 임의적 옵저버인 시민단체 활동을 택했다. 옵저버가 옵저버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세월이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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