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의 본질,
이론·역사와 그 현대적 기원
[지구화시대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 ②
    2019년 05월 31일 04: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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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시대의 자본주의 : 후기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연재 시작하며 ①

3. 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역사

신자유주의는 그간 근 백년의 발전을 경과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 관련 학파가 무수히 생겨났으며, 이로 인해 그 사상과 이론체계가 방대하고 잡다해졌다. 협의의 신자유주의는 주요하게는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이다. 이에 대해 광의의 신자유주의는 이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런던학파 외에도, 프리드만으로 대표되는 화폐학파, 루카스로 대표되는 이성예측학파, 부캐넌으로 대표되는 공공선택학파, 라프 및 페이얼더스탄으로 대표되는 공급학파 등이 포함된다. 그중 영향이 가장 큰 것은 런던학파, 현대화폐주의학파, 이성예측학파 및 공급학파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들은 다음 사항들을 강조한다. 즉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시장경제만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를 실현할 수 있으며, 나아가 효율, 경제성장, 기술진보, 분배의 공정성 등 측면에서 경제성과가 가장 최적 상태에 이르게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국가는 재산권을 설정한다든지, 계약의 이행을 보장한다든지, 화폐의 공급을 조절하는 등의 제한된 경제기능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시장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국가의 관여는 단지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이 같은 국가 관여가 가져오는 문제는 아마도 그것이 해결하는 문제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신자유주의는 이상과 같은 사회사상과 이론으로서의 측면뿐만 아니라, 현실정책으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주장은 먼저 국내적 차원에서는 복지국가의 잔여인 국가통제주의를 제거하는 데서 집중적으로 표출된다. 예컨대 기업에 대한 규제를 느슨하게 한다든지, 국유기업이나 공유자산의 사유화,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제한과 축소, 기업과 투자자에 대한 세금감소 등이 그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신자유주의는 또한 노동력을 제외한 나머지, 즉 상품·서비스·자본·화폐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이동을 제창한다. 달리 말해서 기업과 은행 및 개인투자자는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이전하고 영리를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유일하게 노동자의 국경을 넘는 자유로운 이동은 신자유주의의 고려범위 내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1)

이상의 신자유주의의 이론 및 정책적 주장과 함께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것의 역사적 변천과정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경제·정치·사회 각 방면의 모순발전의 산물이며, 그것의 생성과 발전은 그 주변 여건의 변화와 자신의 내적 발전 논리에 따라 대체로 다음 네 개 단계를 경과하였다.

즉 초기 성립시기, 비주류 학파로 냉대 받으면서 자기 연마에 집중하던 시기, 주류학파인 케인스주의를 밀어내며 본격 부흥하던 시기, 그리고 최종적으로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정식 정책으로 채택되어 정치화함과 함께 전 세계로 유행한 시기가 그것이다.

(가) 초기 성립시기

하나의 경제학이론이자 사조로서의 신자유주의는 1920~1930년대에 탄생하였다. 이는 당시의 사회경제 및 정치적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에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남과 함께 독일황제 빌헬름2세가 퇴위하고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100년 통치가 종식됨으로써 봉건적 잔재가 철저히 일소되었다. 또 자본주의는 이 무렵 자유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독점자본주의 단계로의 본격 전환을 이룬다. 다른 한편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승리하고 인류 최초의 소비에트정권이 수립되는 전대미문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아기의 혁명정권은 내전과 주변 자본주의 열강의 간섭을 이겨내면서 계획경제에 입각한 초기적 발전을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운동 중인 사회주의 국가와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상 두 가지 요인은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요인은 의미가 다소 중층적이었는데, 유럽 봉건체제의 최후의 잔재들이 전쟁을 거치면서 청산된 점에 있어서는 부르주아지의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이론에 있어 일종의 긍정적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에 있어 새로운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독점’ 현상의 출현은 기존 자유주의 경제이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번째 요인 즉 소비에트 국가의 존재는 부르주아지의 고전적 자본주의 경제이론에 대해 전체적으로 일종의 심각한 억압이자 자극으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 같은 복잡한 시대적 상황 하에서 과거 아담 스미스 이래의 ‘고전적 자유주의’는 새롭게 변모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는 초기 자유주의 사조가 출현하는 배경이 되었는데, 때마침 20세기 20~30년대에 소위 ‘경제 계산문제’에 관한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인 프리드리니 하이에크를 대표로 하는 일군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폴란드의 오스카 랑게를 포함하는 좌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었다. 그 논쟁은 애초 소비에트 계획경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중 어느 쪽이 우월한지를 입증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지만,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가 역사적 무대로 등장하는 데 있어 직접적인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나) 자기 연마의 시기

1929년 폭발한 경제 대공황은 1930년대 전반기 내내 전체 자본주의 세계를 휩쓸었다. 이 대공황은 당시까지 아직 횡행하던 자유방임적인 시장경제의 폐단을 철저하게 폭로시켜 주었다. 그것은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신봉하던 ‘세이 법칙(Say’s law)’, 즉 공급은 스스로 필요한 수요를 창출한다는 고전파 경제학자 세이의 명제에 대한 한 차례의 전면 부정이었는데, 이는 또한 사실상 자유경쟁 자본주의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는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정부지출을 확대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할 것을 촉구하는 케인스주의가 때맞춰 등장하였다. 미국의 ‘뉴딜정책’은 실제 정책적 실천을 통해 케인스주의의 유효성을 입증해 주었다. 이로써 케인스주의는 자본주의 국가의 주류경제학이 되었으며, 이후 이들 국가들에서 거시적 경제운영을 40년 동안이나 주도하였다. 이렇게 케인스주의가 각광을 받고 있는 동안 신자유주의는 줄곧 주변적인 학문으로 냉대를 받아야 했다. 신자유주의의 초기 신봉자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이론을 더욱 정밀하게 가다듬고 체계화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들은 미국의 시카고대학 등을 근거지로 삼아 이후 빛을 보게 될 신자유주의의 많은 중요한 저술들을 생산하면서 소위 ‘대학에서의 수련시기’를 착실하게 거쳤다.

(다) 본격 부흥 시기

1970년대 들어 두 차례 세계적인 큰 경제위기가 폭발하면서 서구의 많은 자본주의국가들이 ‘스테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현상에 빠져들었다. 이는 한편에선 인플레이션이 출현하면서 동시에 저성장과 고실업이 발생하는 것을 지칭한다. 기존의 케인스주의 경제교과서에 따르면 상호 모순되는 이 같은 현상의 출현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플레이션은 경기과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완전고용과 고성장 하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쳤던 케인스주의로서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현상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테그플레이션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여 자본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날로 격화됨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국독자 하의 자본주의는 공급측면에서는 기술진보로 인해 생산성이 급속도로 향상되지만,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이는 또한 실업의 증가를 초래한다. 즉 생산성이 높아진 만큼 노동자를 해고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경제의 과도한 개발은 에너지의 결핍과 그 비용의 신속한 상승을 초래하게 만들며, 정부의 지나친 관여는 정부기구의 팽창, 정부지출의 증가, 그리고 기업의 세금부담 가중과 같은 부작용을 낳게 만든다.

이렇듯 당시의 스테그플레이션 현상은 여러 가지 복합적 원인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단순히 과도한 국가의 경제 관여와 이에 따른 정부지출의 증가 탓으로 돌리면서 주류경제학인 케인스주의를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경제 관여에 대한 반대를 자신 경제이론의 핵심으로 삼는 특징을 분명히 하였다. 신자유주의는 계속해서 그것을 체계적인 이론수준으로까지 상승시켰는데, 마침내 오랫동안 냉대 받던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 왔다. 미국과 영국에서 레이건과 대처가 각각 집권하면서 이들의 주장을 실제 정책에 적극 반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전반적인 케인스주의를 부정하는 시대적 분위기를 등에 업고 신자유주의는 먼저 영국과 미국에서 주류경제학의 지위를 점령하게 된다.

(라) 정치화와 전 세계로의 만연 시기

국내에서 과잉생산 문제와 함께, 1980년대 들어 첨단 과학기술혁명이 본격화되고 생산력 발전이 한 단계 진척함에 따라 자본주의는 국내 시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개방화와 지구화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신자유주의는 이론과 학술 면에서 정치화 및 국가 이데올로기화하는 새로운 질적 전환을 겪게 된다.

신자유주의의 이 같은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가 많이 거론된다. 그것은 1990년 미국 국제경제연구소가 주도하고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 재무부 및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일부 학술기구 대표가 참가한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합의한 10개 항의 정책수단을 일컫는다. 그 기본원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무역경제의 자유화, 시장에 의한 가격결정, 인플레이션의 제거, 그리고 사유화이다. 이러한 ‘워싱턴 컨센서스’의 출현은 신자유주의가 특히 패권국가인 미국의 국가적 이데올로기와 주류의 가치 관념으로 변질되었음을 상징한다. 이렇듯 신자유주의는 미국과 영국 등의 국제독점자본이 지구일체화를 추진하는 데 있어 그 이론체계의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었으며, 또 상응하는 정책을 제공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2)

우리는 이상에서 신자유주의가 그간 겪어온 몇 차례 중대한 역사적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신자유주의는 처음 태어날 무렵인 1920~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록 당시 새로운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얼마간 자체 변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체로 고전적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를 옹호하는 일반적인 이념사조 차원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특히 두 차례의 질적 전환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초기 자신의 면모를 크게 탈피하였다.

첫 번째 전환은 1950~60년대에 이루어졌다. 당시 주류경제학으로서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개입을 강조하는 케인스주의에 맞서 자신을 그 대립물로 정립시켰다. 이를 통해 ‘시장’을 중시하는 이론으로서의 자신을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가다듬을 수 있었으며, 이는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혁명에 대한 ‘반혁명’을 완수하고 마침내 주류경제학의 지위를 탈취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 전환은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국내적 차원을 벗어나 자본주의 국제화를 추진하는 이념과 정책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자유주의는 비판의 초점을 국내의 재정적자나 인플레이션에 관한 문제로부터, 차츰 각국의 개방화와 자유화와 관련된 것으로 바꾸어 갔다.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 두 번째의 변모를 통해 오늘날 지구화시대를 여는데 있어 첨병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4. 현대 신자유주의의 기원문제

* 현대 신자유주의가 시작된 시기는?

앞 절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현대 신자유주의는 한 차례 큰 변화를 겪은 것이 분명하다. 즉 1970년대까지의 신자유주의가 주로 국내적 차원에서 국가개입에 반대하고 시장기능을 강조하던 케인스주의의 대립물이었다고 한다면, 1980년대 이후 그것은 점차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패권적 이념과 정책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환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그 자체 내부의 자연스러운 발전이기보다는, 이 시기를 즈음하여 발생한 자본주의 전반의 중대한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국내학계에서는 이 같은 신자유주의의 그간의 발전과정에 별반 주목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마치 신자유주의가 처음부터 국제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였던 양 취급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내내 주로 국내정책을 놓고 케인스주의와 격전을 벌였다. 국가의 경제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에 맞서 시장의 자율기능을 강화하자는 것이 주요한 골자였다.

그런데 여기서 ‘시장’을 강조하는 것과 ‘금융(업)자본’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서로 별개의 문제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시장을 강조하는 것은 금융자유화도 포함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부분일 뿐이다. 그 외에도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완화, 국유기업의 사유화, 사회복지계획의 축소, 투자자에 대한 감세와 같은 다른 내용들도 포함할 수 있다. 물론 이들 조치들로 인해 금융업자본도 이득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이 같은 조치들은 일차적으로 기업(주로 산업자본)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좀 더 크게 보더라도 자본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조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같은 신자유주의가 언제부터 금융(업)자본의 이해를 전면적으로 반영하는 이론과 정책으로 변모되었다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있던 필자의 눈에 마침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띠었다.

“브레턴우즈 체제와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한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는 1970년대 들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1971년 미국의 금태환 중지 선언을 계기로 브레턴우즈 체제의 근간인 금태환 본위제와 자본이동 통제가 종말을 고하고, 변동환율제와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새로운 지구 정치경제 질서를 규정하게 된 것이다. 금태환 없이도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공인받고 세계 자본주의가 급속히 투기화 되는 동시에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의 힘이 강해졌다. 또한 케인스주의에 대적하여 국가 개입의 철회 및 자본이동과 금융의 자유화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지배적인 정치경제 패러다임으로 대두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금융적 축적이 증가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지구적 질서가 탄생했다.”(3)

우리는 여기서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금융자본 중심론의 출발지점을 대강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970년대 초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이다. 신자유주의는 이때부터 금융자본을 위한 정치경제 패러다임이 되었으며, 이로부터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지구적질서의 자본주의가 탄생하였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관점은 일정하게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으로서의) 현대 신자유주의의 기원에 관한 해답을 주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렇듯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로부터 직접 지금의 금융(업)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의 출발점을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시간상으로 볼 때 맞지가 않는다. 금태환과 고정환율제를 근간으로 하는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 과정은 사실 1960년대 내내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막상 현실화된 것은 1971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달러의 금 태환 중지 조치와 1973년 변동환율제로의 이동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앞서도 지적하였듯이, 1970년대는 신자유주의가 국내적 차원에서 케인스주의의 공격에 열중하던 무렵이다. 또 금융자유화가 국제경제 관계에서 본격적인 이슈가 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며, 특히 그것이 실제로 범지구적 차원에서 실현된 것은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IT혁명이 본격화한 1990년대 들어서서의 일이다. 때문에 위 인용문 저자의 주장과 실제 역사와는 최소한 15~2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결국 국가의 경제개입에 반대하고 시장기능을 강조하던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해서 국제 금융(업)자본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치경제 패러다임으로 변신하였는지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사실 문제를 좀 더 파고들자면 계속해서 의문이 더해간다. 브레턴우즈체제가 어찌해서 1970년대 초에 들어 붕괴하게 되었는지, 이후 왜 국제통화체제는 금 태환 없는 달러와 변동환율제로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 이러한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근저의 자본주의 변화는 도대체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들부터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위의 인용문을 통해 이 같은 의문만 쌓일 뿐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다. 위의 글에서는 신자유주의의 질적 전환과,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와 금융자본주의시대의 개막은 그야말로 ‘우연적인 만남’을 이룰 뿐이다.

물론 위의 인용문의 저자는 자신의 서술의도가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관련된 ‘출발점’만을 얘기한 것일 뿐,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금융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체제 수립을 곧바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명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는 확실히 일정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직 문제는 남는다. 이후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체제의 성립과정은 어떠한 것이었으며, 그리고 완성된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위 저자의 글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에 따른 자본이동의 자유화(재산처분권의 확대) 및 변동환율제(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로의 이행과 직접적인 친화성이 있다. 이러한 국제금융질서의 변화 가격 변동과 거래 리스크를 증가시켜 금융차익거래와 파생상품거래, 노동 유연화와 지구적 생산네트워크의 건설을 촉진했다. 하지만 금융과 생산의 지구화만으로는 전체적으로 안정적 축적이 불가능하며 금융시장을 확대할 수도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 질서를 형성할 수도 없다. 따라서 헤게모니적 힘이 축적을 뒷받침해야 한다.” (일단 이렇게 문제를 지적한 후, 인용문은 곧 이어 이에 조응하는 상부구조의 구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여기서 규제 개편과 위기관리를 통해 축적에 상대적인 안정성을 부여하고 금융‧자본시장 개방으로 투자시장의 확대를 이끌어낸 것은 위싱턴 DC의 미재무부와 초국적 통치기구, 슘페터적 근로연계복지 탈국민국가에 의해 뒷받침된 달러-월스트리트 체제였다. 간단히 말해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가 초국적 자본 주도의 지구적 금융투자(포트폴리오투자, 차익거래 및 파생상품거래), 노동 유연화, 초국적 생산네트워크의 건설(대외직접투자)로 이루어졌다면, 신자유주의적 축적을 특정한 방식으로 안정화한 일종의 지구적 조절 기제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라 할 수 있다.” (4)

위 글을 보면 나름대로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에 따른 국제금융질서의 변화가 어떻게 다른 중요한 변화, 예컨대 노동유연화와 국제 분업(지구적 생산네트워크 건설)을 초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다. 그리고 인용문은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라는 상부구조에 관해서도 서술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라는 전 지구적 범위에서 성립된 하나의 체제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위 글은 단지 국제화와 관련한 중요 요소들에 대한 묘사에 그칠 뿐 이들 간의 관계에 대한 엄밀한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 글에 의하면 마치 국제금융질서의 변화가 지금의 지구화 시대의 자본주의와 관련된 모든 일련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진앙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들 변화하는 요소들 간의 관계를 보면 수긍되지 않는 측면이 많이 있다. 예컨대 금융차익거래와 파생상품거래가 증가하는 것과, 노동유연화나 지구적 생산네트워크와 같은 국제 분업의 발전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가 그것이다.

위 글은 비록 양자관계에 대해 ‘촉진’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위 글의 의도를 보면 분명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단지 그냥 조금 ‘촉진’하는 정도라고 한다면, 브레턴우즈체제의 붕괴와 같은 국제금융질서의 변화가 당대의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시대를 가져왔다라고 말하려는 위 글의 원래 취지와는 매우 다르게 된다. 그 정도의 ‘촉진’은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일으켜질 수 있다. 예컨대 국제상품거래의 증가 및 이에 따른 자본간 경쟁의 격화 역시도 노동유연화나 지구적 생산네트워크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더욱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의 연관도 성립할 수 있게 된다. 즉, 지구적 생산네트워크와 같은 ‘국제 분업의 발전’이 더욱 국제 금융거래를 활성화시켜 이에 따라 금융차익거래와 파생상품거래의 증가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위의 글은 지구화의 중요 요소 간의 상호관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지구화의 전개과정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다음 호에서 계속)

<각주>

1. 이상, 신자유주의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정리는 [美]大卫· M.科茨,”全球化与新自由主义”, 《全球化与新自由主义》, pp3-4의 내용을 참조하였음.

2. 이상 내용은, 何秉孟 主编, 《新自由主义评析》, pp5-8을 참조하였음.

3. 지주형,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과 기원》,p53. 인용문중 고딕체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4. 위의 책, pp.88-89. 인용문중 고딕체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필자소개
김정호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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