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과
부산지역의 경제적 배경
    2019년 05월 29일 10: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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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박정희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던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는 그 의미와 배경, 사회경제적 분석이 비교적 많이 이뤄졌지만 부마민중항쟁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이다. 이번 글은 부마민중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 특히, 부산지역의 경제구조적 배경과 연관하여 분석한 논문이다. <사회사상과 문화> 제22권제1호에 실린 논문으로서 편집부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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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계엄령 선포 후 부산지역에서 이동하고 있는 계엄군과 탱크의 모습

Ⅰ. 서론

2019년은 부마민주항쟁 40주년을 맞는 해이다. 1979년 10월 발생한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18년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킨 실질적인 출발점이다. 부마항쟁은 여러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한미 간의 외교 갈등, 1978년 야당이던 신민당의 국회의원 선거승리와 강경노선의 확대, 1979년 4월 YH사건과 이와 관련된 야당 당수 김영삼 제명 등이 부산 민심을 자극했다. 사회적으로는 유신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과 저항의식의 성장을 들 수 있다. 몇몇 학생들의 우발적인 선동이 부산대 학생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어 부산도심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으며 거리에서의 시민들의 강한 호응과 참여를 통해 저항은 도시봉기로 발전했다. 항쟁의 참여자들은 파출소 타격하고 세무서를 공격했다. 박정희 정부는 부마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시위 진압 과정에서 1563명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의 실질적인 붕괴를 이끌어낸 역사적 의의가 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항쟁의 진행과정에서 도시 하층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발생한 배경에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불만이 고조된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부마항쟁의 역사적 의미에 비해 사회경제적 배경을 깊이 있게 연구한 선행연구들은 매우 희박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빈곤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부마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홍장표·정이근(2003)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1989)는 1970년대 본격적으로 진행된 중화학공업화의 모순에 주목한다.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모순이 중첩되어 저임금 사업장이 많았던 부산-마산 지역의 노동자, 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학생 시위는 도심의 봉기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홍장표·정이근, 2003;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1989; 부산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위원회, 2013). 부마항쟁에 대한 이후의 다양한 연구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설명을 수용하고 있다.

윤소영(2006)과 손호철(2003), 김원(2006) 등은 이에 더 나아가 중화학공업화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1979년 4월 발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부마민주항쟁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도입되면서 중화학투자조정, 금융운용의 개선, 부동산 투기 억제를 위한 제도개선 등의 안정화 정책이 과잉팽창과 과열경쟁으로 위기에 처한 한계기업들의 도산을 촉진하고, 그로 인한 물가고와 생활고가 집중되면서 도심봉기가 발생했다는 주장이다. 윤소영(2006)과 손호철(2003)은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은 중화학공업화의 위기로 인해 경제가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면서 한국은 IMF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IMF의 요구에 따른 구조조정이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유신 이후 한국에서 최초의 대중시위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김원(2006)은 이와 같은 전제를 수용하면서 도심저항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필자는 지금까지 부마민주화항쟁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대한 선행연구들의 논의에는 몇 가지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첫째, 선행연구 모두 1979년의 경제상황과 1980년 위기를 연속적인 것으로 다루며 중화학공업화의 모순 및 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경제안정화 정책이 민중들의 삶의 위기로 진화되었다고 제시한다. 하지만 1979년의 경제상황과 한국경제의 위기가 폭발하는 1980년을 다른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고 본다. 1979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제위기라고 인식하기보다는 호황의 정점에서 위기로 진입하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호황의 정점에서 민중들이 직면하는 삶의 위기와 경제적 붕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에서의 경제위기는 다른 측면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둘째, 선행연구들에서는 과도한 중화학공업화가 경공업 중심으로 구성된 부산 경제의 침체를 야기했고 이것이 도시봉기의 배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본고는 부산경제가 전국 단위의 경제적 성과에 비해 뒤처지면서 시민들의 불만이 가중되었다는 종래의 관점이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확인되지 않음을 제시한다. 1970년대 후반 일반적인 의미에서 부산경제는 결코 위기가 아니었으며 중화학공업화가 심화되었다고 해서 부산경제의 객관적 지표가 더 악화된 것도 아니다. 셋째, 선행연구들은 중화학 공업화의 모순과 부산경제의 상대적 침체를 논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 중화학공업화로 인한 위기인지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대부분의 선행연구는 1970년대 후반의 부산·마산의 경제적 현실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중화학 공업화의 모순을 경기의 급속한 팽창과 도시 민중들의 삶의 위기로 재해석 한다. 즉 경제위기가 아니라 호황 국면의 마지막 국면에서 도시 민중들의 삶의 위기가 폭발적인 도심봉기의 배경이 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Ⅱ. 1979년 부산·마산은 경제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는가?

  1. 중화학공업화의 모순이 폭발한 것인가?

부마민주항쟁은 초기 학생들 주도로 이뤄진 시민항쟁이 야간시위로 확산되는 국면에서 도시 서민,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하층민의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이틀째부터 이뤄진 야간투쟁에서 지역 노동자들,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부마민주항쟁은 폭발적인 성장과 그 격렬함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와 같은 항쟁의 진행상황은 부마민중항쟁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주목하도록 한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1989)는 이 쟁점과 관련하여 최초의 심층적인 분석을 제시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970년대 중화학 공업중심의 산업화는 70년대 말 축적위기로 귀결되었으며, 위기가 부과하는 압박으로 인해 생존권 확보를 위한 민중들의 투쟁은 자연스럽게 분출할 수밖에 없었다(부마항쟁기념사업회, 1989: 229-230). 군부권위주의 정권이 독점자본 중심의 자본축적을 지원하는 반면 민중 생활 개선을 억압함으로써 대중투쟁이 정치체제의 지양 즉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민중들은 독점자본 중심의 축적 과정에서 소외되었으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고통에 노출된 대중의 분노가 응축적으로 표출된 항쟁이 부마민주항쟁이다(부마항쟁기념사업회, 1989: 243-245).

홍장표·정이근(2003)은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통해 1979년 전후 한 부산경제의 현실을 재구성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부산지역 산업은 합판, 섬유, 신발 등 경공업 중심으로 수출산업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윤율은 전국 산업에 비해 낮았다. 이는 1970년대 당시 한국 제조업 수출품이 저가격으로 세계시장에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부산지역 제조업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임금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었으며, 경쟁력 기반이 열악했다. 이와 같은 저임금 구조는 중소기업만의 현실이 아니라 부산소재 대기업에서조차 일반적인 현실이었다(홍장표·정이근, 2003: 130-136). 홍장표·정이근에 따르면, 중화학공업부문으로의 과잉투자와 이로 인한 위기는 저임금 사업장이 집중된 부산 경제에 큰 타격을 줌으로써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1989)의 입장을 보다 구체적인 실증자료를 통해 뒷받침 한다.

그러나 이 두 연구는 경제위기를 해석함에 있어서 심각한 결함을 갖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 초반 안보위기, 경제위기, 정권위기에 직면하여 중화학공업화를 급속히 추진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1973년 국민투자기금법 제정이나 간접세 비중의 지속적인 확대, 대기업 법인세 감면 등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기 위한 공적자금의 활용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구본호·이규덕, 2018; 이재은, 1988). 1975년 이후 한국경제는 급속히 성장했다. 1979년 제조업은 가동률이 하락하고 있었지만 이는 경제위기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1979년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의 영향으로 인해 경기가 약화되는 국면이었다. 위기로의 진입이라고 할 만큼의 위축은 존재하지 않았다. <표 1>과 <표 2>는 이를 잘 보여준다.

자료: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2018)
주: 1) 국내총투자율=명목총투자율-생산자물가상승률

자료: 구본호·이규덕(1991, 228쪽)이 구축한 자료를 필자가 재구성

<표 1>에서 보듯이 1979년 현재 한국의 총생산증가율, 국내총투자율, 설비투자증가율은 그 전해 3년간의 성장률에 비해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표 1>에서 보듯이 한국경제의 음의 성장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1979년이 아니라 1980년이다. <표 2>의 아시아 주요국의 명목임금상승률을 보아도 이를 잘 보여준다. 당대 한국인들의 노동현실이 장시간-저임금 노동체제였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다른 아시아국가들에 비해서도 달러표시 임금은 매우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특히 중동 붐으로 인한 인력의 역외유출, 중화학공업화로 인한 노동력의 초과수요가 발생하면서 일시적인 노동력 공급부족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은 매우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서울사회과학연구소, 1991: 229-230; 구본호·이규덕, 1991: 227-228). 1979년 말 평균적인 노동자는 중화학 공업화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 국면에 향상된 협상력으로 인해 급속한 임금상승을 향유하고 있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는 특정 분야에 과잉투자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1979년에 경제 전체적의 과잉중복투자로 인한 모순이 전개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해석은 1980년의 위기를 그 전시기로 환언시켜 설명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1979년 시점에서 당대의 관료들이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경제위기를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1979년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도입하던 시점의 경제기획원, 한국경제개발연구원의 정책입안자들은 경기과열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수출품의 달러표시가격 상승이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약화시킬 수 있고 금리 불안정이 거시적 균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구조적 위기와 불황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없었다(박지훈, 2007; 이형구·전승은, 2003). 안정화 정책이란 경기과열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만 상기해보아도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1978년 이란에서의 이슬람혁명으로 인한 유가상승과 1979년 8월 미연방준비위원회에 새로운 의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Paul Volcker)의 이자율 상승으로 인한 미국경기 위축이 한국의 수출주도 제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은 1980년이다. 1978년 배럴당 12달러이던 국내 수입 석유가격은 1979년 17달러 내외로 국내에 공급되었다(강창화, 2011). 가격인상폭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20달러는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1980년 8월이 되어야 석유수입 가격이 32달러가 된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이자율 상승을 시도했던 1979년 9월 연준 이자율은 11% 수준이었다(Lindsay, Orphanides and Rasche, 2004). 당시 미국상품시장의 예측자들 조차 연준의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Goodfriend and King, 2004). 미국 이자율이 20%로 폭등하고 한국 제조업 수출을 위축시키기 위해서는 아직 몇 달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979년 10월 한국은 화폐적 안정성이 희생되고 있었지만 경제가 심각한 위기로 진입한다고 당대인들이 느끼지는 않았다. 1979년 10월의 한국 경제는 경기과열의 최정점에서 폭력적인 조정을 앞둔 시점이었다. 그러므로 『부마민중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에 나온 다음과 같은 경제적 조건의 설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제2차 석유파동의 직격탄을 맞은 한국 경제는 돼지 가격 폭락, 부동산 경기 침체, 수출 부진, 물가 급등, 중화학 공업 부진 등이 겹치면서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구조적 위기에 봉착하였다.”(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2013: 41)

  1. 1979년 부산경제

홍장표·정이근(2003)과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1989), 김원(2006), 전재호(2009)는 중화학공업화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부산경제의 모순이 가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들은 모두 부산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중심의 경제구조 하에서 임금과 노동조건이 열악했다고 주장한다. 부산의 주력산업이었던 섬유, 의복, 나무 및 나무제품, 화학-고무 등은 모두 낮은 임금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산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낮은 소득으로 인해 부산-마산 민주항쟁이 도심봉기와 같은 양상으로 전개된 이유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1970년대의 현실에서보자면 설득력이 매우 취약하다. 1970년대 한국 중화학공업은 비교열위에 놓여있었다. 국가의 특혜에 준하는 지원이 없다면 사업을 유지하기조차 쉽지 않은 수준이었다. 중화학공업화 초기 당대의 재벌기업들조차 중화학공업에 진입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재벌기업들이 중화학공업에 진출하게 되었다(박찬종, 2014). 당시 한국의 주력산업은 중화학 공업이 아니라 섬유, 신발 등 경공업 제조업이었다. 1970년대 수출을 주도하고 있던 섬유, 신발산업은 외부의 경제적 지원이 적고 높은 법인세 하에서도 사업을 지속할 수 있을 만큼 상대적인 안정을 지녔다. 1970년대 한국은 경공업의 수출성과에 토대를 두고 중공업을 발전시키는 상황이었다. 부산 노동자들이 당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저임금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1970년대 한국의 경공업은 주력산업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중화학공업화의 모순이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상황을 더 열악하도록 만들었는가? <표 3>은 1970년대 부산지역 제조업의 산업별 구성비를 보여준다. 각 산업별 구성비율의 추이를 보면 1970년대 산업별 비중은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다. 1979년 음식료품, 섬유의복의 비중은 큰 차이 없이 유지된다. 화학고무의 경우 비율은 중화학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1973년 25.1%에서 1979년 30.2%로 증가한다. 이는 석유화학 산업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부산의 주력 상품이었던 신발산업이 화학 고무 산업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 제조업의 주력상품들은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비금속광물이나 1차 금속의 비중도 거의 변화가 없다. 조립금속의 비중은 오히려 1974년에 비해 1979년이 크게 감소한다.

자료: 경제기획원, 『광공업통계조사보고서』 각 년도에서 작성
주: 1) 1990년 이전 제조업 분류에 따른 비율추이

그렇다면 부산경제는 위축되고 부산지역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중화학공업화로 악화되었는가? <표 4>에 나타난 부산과 전국의 제조업 현실은 그와 같은 설명이 설득력이 낮음을 보여준다. <표 4>에서 보듯이 1979년 현재 부산 제조업의 총생산증가율은 여전히 양의 값을 보이고 있다. 비록 전국상승률 보다는 낮지만 실질성장률은 4%였다. 제조업 노동생산성 증가율의 경우 전국 평균은 –6.2%로 낮아졌지만 부산은 오히려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다. 더군다나 부산실질임금상승률은 1979년 13.4%를 기록하고 있다. 전국 평균 12.6%보다 높았다. 부산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 평균 상승률보다 더 높다는 것은 부산제조업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선행연구들에서는 부산제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전국 평균에 미달한다는 점을 들어 중공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결과라고 분석하지만 부산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뚜렷이 개선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 개선은 경제위기 담론과 부산 노동자 현실을 결합시켜 부마항쟁을 설명하는 선행연구들의 한계를 보여준다.

자료: 통계청 광업제조업조사통계(2018)
주 : 1) 실질임금상승률(실질), 총생산증가율(실질) 및 노동생산성증가율(실질) 계산은 명목증가율-생산자물가상승률

김원(2006: 425-427)은 1979년 부산지역 제조업체의 연쇄부도와 실업률 증가로 인해 도시빈민, 실업자, 노동자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으며 양극화가 심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김원(2006)의 주장과 반대였다. 부산의 실업률 추이를 보면 1979년 시점까지 부산경제가 경제위기로 진입하거나 부산노동자들의 고용조건이 악화된다는 어떤 징후도 발견할 수 없다. <그림 1>에서 보듯이 1970년 이래로 부산의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했다. 1972년 부산 실업률이 상승한 것을 제외하면 전국 실업률과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림에서도 보듯이 1979년은 전국실업률과 부산실업률의 격차가 가장 크게 감소하는 시점이었다.

자료: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1980) 및 부산광역시(2004) 『20세기 부산지역 경제통계의 이해와 부산경제의 변동분석』

1970년대 부산의 실업률이 전국평균 실업률보다 높았던 것은 부산의 경제적 상황이 열악해서가 아니라 부산의 인구증가율이 전국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크게 높았기 때문이다. 1970년에서 1979년까지 10년 동안 부산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4.9%로 전국 연평균 인구증가율 1.7%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공업 중심지였던 부산으로의 인구유입 규모가 부산 산업의 일자리 창출능력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부산의 실업률은 전국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림 1>에서 보듯이 부산의 높은 인증가율에도 불구하고 실업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었다. 이것은 부산지역에서 일자리 창출이 꾸준히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김원(2006), 전재호(2016) 등이 가정하듯이 1979년 부산의 경제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거나 경제위기로 인한 실업률이 증가함으로써 도시저항이 폭발했다는 주장은 실증 자료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는다.

  1. 부마항쟁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저항이었는가?

윤소영(2006: 29)과 손호철(2006: 167)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에 대한 또 다른 해석상의 오류를 보여준다. 윤소영과 손호철은 부마민주항쟁이 1979년 4월에 발표되었던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최초로 맞선 민중항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와 같은 근거는 한국이 이 시기 IMF에 경제 원조를 요청하면서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수용했으며 이로부터 출발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민중들의 삶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이에 저항하며 폭발적으로 등장한 것이 부마민주항쟁이라는 것이다. 전재호(2016: 76-79) 역시 이와 같은 입장을 따른다.

그러나 1979년 4월에 발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구제 금융을 제공하는 대가로 IMF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신정권 하에 있었던 경제 관료들 주도로 이뤄졌다. 3장의 <표 6>에서 보듯이, 1975년 이후 경제호황이 지속되면서 물가상승률이 매우 높아졌다. 물가상승률이 높게 유지되면서 서민층의 고통 가중, 계층간 불화가 심화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 관료들은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가상승률이 꾸준히 높게 유지되었던 이유는 통화 공급량이 35% 이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실질임금 상승률도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배영목, 2016; 이형구·전승은, 2003). 통화 공급량이 지속적으로 높아졌던 이유는 수출이 년 평균 30% 이상 성장하고 있었고, 적극적인 외자유치와 수출금융의 활성화, 무역적자 폭이 빠르게 감소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표 2>와 <표 4>에서 보듯이 실질임금상승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대중의 수요력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경제기획원 중심으로 안정화 대책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 4월에 발표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에는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금융긴축, 재정건전화, 수입자유화를 통한 물자부족 해소, 가격통제를 통한 소비자물가 상승 억제, 노동생산성과 임금상승률의 연동 정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정책을 초기에 기획한 이들은 1978년 한국개발연구원에 소속된 경제학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연구팀이었다. 이들 보고서의 초안은 1978년 작성된 <한국경제의 당면과제와 대책>, <전환기의 장기정책 과제> 등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안들은 1979년1월 남덕우 총리에게 보고되었지만 남덕우 총리는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1979년 2월 박정희는 한국은행 등 다른 경제기구들의 물가안정 대책 또한 경제기획원과 한국개발연구원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같은 방향임을 확인한 후 <경제안정종합시책>을 전격적으로 승인한 것이었다(장준경·최수복, 2015).

1979년 2월 <경제안정종합시책>은 윤소영(2006), 손호철(2006) 등이 주장하듯이 IMF의 요구사항이 아니라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들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개발연구원의 입장이 크게 반영된 정책전환이었다. 당시 한국 관료들은 부과가치세 도입 등 경제정책을 실행함에 있어서 IMF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한성언, 2003: 261). 그러나 이것은 처음 실행하는 정책에 대해 선진국 관료들에게 자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 1997년과 같이 경제위기를 이유로 IMF가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1979년 <경제안정종합시책>은 채택되었지만 박정희 체제 안에서 올곧이 실현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정부가 가동한 총수요 억제 정책은 경기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었고 유가의 상승 또한 팽창된 경기를 냉각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1979년 당시 경제기획원은 안정화시책에 따라 중화학공업 분야의 투자축소를 과감히 주장하고 있었으나 상공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팽팽히 맞섰으며, 대통령은 종합시책 발표를 승인했지만 동시에 “수출통계를 보면서 수출증가율이 회복될 수 있도록 수출금융을 원상회복하라고 지시”한 상황이었다. 수출금융 확대조치는 “긴축재정 일각의 정책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정책이었다.” 수출금융확대 조치 과정에서 안정화시책을 주도한 신현확 총리와 경제기획원은 철저히 배제된 상황이었다(장준경·최수복, 2015).

1979년 실시한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한국경제에서 최초로 신자유주의적 이행을 알리는 정책적 실현이라 할 수 있다(윤소영, 2006: 29; 박지훈, 2007: 36-37; 박찬종, 2018: 93-96). 그러나 재정안정, 금융자유화, 개방화, 투자조정 등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의 주요 내용은 박정희 정권에서 실행된 것이 아니라 전두환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된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므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경제안정화 정책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Ⅲ. 경기과열과 도시 서민의 삶의 위기

경제위기가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필자의 견해는 부마민주항쟁의 원인이 전적으로 정치적인 쟁점에서 비롯되었거나 김영삼 총재 제명과 같은 지역정치인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입장을 정당화 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항쟁 기간 동안 격렬하게 진행된 투쟁의 참여 주체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도시하층민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차성환(2014; 18)은 민주항쟁의 주체들이 합리적, 이성적 참여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도시하층민들을 이와 같은 민주의식에 토대를 둔 주체성의 범주로 개념화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김원(2006: 425-426)의 주장처럼 광주대단지 투쟁과 같은 도시봉기의 분출로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다. 여기서 도시하층민은 도시에 거주하는 사회경제적으로 주변화된, 타자화된 집단을 의미한다. 이들에는 저임금 노동자, 도시 빈민, 서비스직 노동자와 같이 조직되지 않으면서 항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이다. 주류언론에서는 이들을 ‘폭도와 깡패’라고 분류하기도 했다.

필자는 이들 도시하층민들이 어떻게 학생들이 주도한 거리시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가를 경제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보았듯이 부산민주항쟁이 중화학공업화로 인해 야기된 1970년대 말의 경제위기와 부산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이 조우하면서 발생했다는 입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리는 부산경제의 호황이 부산 도신 하층민들의 삶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고 이것이 도시봉기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김원(2006)의 입장이 부산민주항쟁을 도시 하층민의 도시봉기로서의 의미를 부각한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다만 그는 이 봉기의 경제적 원인을 선행연구들과 같이 바라본 점에서 필자들과 입장을 달리한다. 김원 또한 중화학공업 투자로 인한 위기와 오일쇼크 등에 대응하고자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시행했으며 이것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도시의 노동자와 서민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책당국자들에게 1979년 부산경제가 심각한 불황에 직면했다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한 주체들은 경기불황에 대한 걱정보다는 물가폭등으로 인한 계층간 불안 조성, 부동산 투기의 심화로 인한 사회적 부의 축적 왜곡, 실질임금 상승으로 인한 가격경쟁력 약화를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준국유화된 상업은행들의 금융 중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금융시장을 통한 금리의 조정능력이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이형구·전승은, 2003: 347).

이와 같은 위기 인식은 부마민주항쟁이 발발했던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의 문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밀 해제된 10월 26일자 미국중앙정보국 문서에 따르면, 사건발생 직후 최규하 국무총리는 관계 장관 및 실무자들과 부가가치세의 개정 가능성, 저소득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어떻게 더 늘릴 것인가를 논의했다(지주형, 2016). 더 나아가 중앙정보국은 그들이 접촉한 한국 경제 관료들이 위기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소득분배에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대중의 생각임. 대중들은 기업 중역과 노동자들 사이에 거대한 소득차를 인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자들이 저소득층은 받을 수 없는 불공정한 세금혜택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 관료들은 상품가격 폭등을 또 다른 문제로 지적하고 있으며, 1979년 25∼30%, 그리고 1980년은 20%에 달하는 물가상승률을 예상하고 있음. 이에 맞춰 경제기획원 관료들은 한국 대중의 저축성향이 감소했음을 지적했음. 또 하나의 문제는 저소득층에 대한 대출을 막는 높은 은행 이자율임. 대중들은 정부정책이 기업 직원과 정부고위 관료들에게 일반시민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우호적인 대출금리 지시하고 있다고 알고 있기 때문임(지주형, 2016: 336 부록).”

필자는 이와 같은 미국중앙정부국의 진단이 당대의 상황을 더 정확히 재현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1975년 이후 한국경제는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표 1>에서 보았듯이 설비투자증가율과 총투자증가율은 매우 높았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노동생산성 상승률을 상회할 만큼 크게 증가하면서 대중의 소비력도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경공업의 호황과 함께 중공업 제품들의 수출이 증가하자 무역수지가 개선되었다. 무역수지 개선은 국내의 통화팽창을 부추겼다. 정부는 외자유치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선택적으로 기업 투자를 지원하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통화량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또한 도시로의 급속한 인구이동은 도시 인프라와 주택 등이 제때 공급되지 못한 상황에서 주택수요 및 토지수요를 높였으며 이는 도시지가를 크게 높였다.

정부의 부가가치세는 물가상승을 더욱 부추겼다. 유신정부는 197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법인세 부담을 낮추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농업지원의 일환으로 지속되던 양곡관리기금과 비료계정 등은 정부 재정 적자를 누적시켰다. 조세저항이 심한 도시노동자들에게 노동소득세를 높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부가가치세는 조세체계를 단순화하고 현대화하며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는 수단이기도 했다.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정책 입안자들은 간접세가 조세저항 없이 세수를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판단했다(한성언, 1991; 이재은, 2000; 양재진·민효상, 2003; 이형구·전승은, 2003). 그 결과 선택된 것이 부가가치세의 도입이었다.

<표 5>는 전체 내국세구조와 추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표 5>는 부가가치 도입과 관련된 조세구조의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우선 부가가치세 도입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고 있던 1975년을 기점으로 직접세의 비중은 크게 낮아지는 반면 간접세의 비중이 크게 증가한다. 직접세의 경우 법인세뿐만 아니라 소득세 비중의 감면 폭이 매우 크다. 반면 1977년 이후 부가가치세를 포함한 간접세 비중은 61%를 넘어섰다. 이와 같이 간접세 비중의 증가는 세금부과가 기업들, 부자들에게 유리하고 일반 시민들, 도시 하층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불만을 증대시키기에 충분하다.

자료: 나성린(1997), 양재진·민효상(2013: 74)에서 재인용
주: 1) 인지세와 과년도 수입이 제외된 수치임

이와 같은 조세구조를 만들고자 한 것은 조세저항을 낮추면서 세수를 안정화시키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기업들의 세부담 감면과 부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으로 귀결된 것이다. 실제로 이재은(2003)에 따르면 조세감면 혜택이 대기업에 집중되었다. 1978년 50억 이상 매출하는 대기업의 실효세율은 11.9%인 반면, 1000만원에서 3억 사이의 중위소득 구간에 있는 기업들에게는 34.2%, 300만원 이하 최소소득구간에는 24.3%가 적용되었다. 세금인하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기업은 대기업이며 중위소득 구간 기업의 실효세율이 가장 높았다. 뿐만 아니라 도시서민경제의 구성부분이던 소상공인의 법인세 부담률이 대기업보다 더 큰 역진적 조세체계였다. 이것은 명백히 자본에 대한 감세이자 노동자, 도시 하층민에 대한 증세였고, 계층간 역진적인 조세부담 체계였다(한성언, 1991).

도시 하층민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킨 것은 부가가치세의 과세가 그렇지 않아도 크게 상승하고 있던 물가를 더 높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이든 상인이든 부가가치세가 제품가격에 10%씩 붙어서 정부수입으로 귀속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공급자들은 제품가격을 10% 상승시켜서 시장에 공급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부가가치세는 그동안 적용되었던 거래세, 영업세, 주세 등을 대체하는 것이었지만 시장에서는 세금이 추가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시장의 오해였다. 또한 부가가치세는 제품가격에 10% 붙는 것이긴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각각의 공급자가 부담하는 세금은 그가 창출한 부가가치의 10%였지 상품가격의 10%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조업 생산자이든 서비스 공급자이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공급자들이 각자 자신의 제품 가격을 10% 인상시켰다. 통화 공급량 증대로 꾸준히 상승하던 물가는 부가가치세의 부과로 인해 더 높이 상승했다.

물가상승은 부동산 가격을 높였다. 통화량의 증대, 실질임금의 증가, 도시로의 인구유입이 결합되면서 도시의 지가는 물가상승률을 훨씬 상회했던 것이다. <표 6>은 이를 잘 보여준다. 간접세의 비중이 증가하는 1975년 이후 물가상승률은 매우 높다. 그런데 1977년, 1978년 지가 상승률은 물가상승률의 두 배 이상이었다. 특히 대도시의 지가상승률은 물가상승률의 각각 4배, 5배 이상이었다. <표 6>에서 보듯이 부산의 지가변동 폭은 전국지가변동률 뿐만 아니라 대도시평균지가 상승률보다도 훨씬 높았다. 특히 1978년 부산의 지가는 93.59% 폭등하였다. 부산의 지가폭등은 인구증가로 인한 주택수요의 증대, 투기 붐이 결합하면서 가중된 결과였다.

<표 1>에서 보았듯이 1978년, 1979년은 여전히 경제성장이 지속되는 국면에 있었다. 1979년 후반기에 제 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유가폭등의 소식이 전해졌지만 이것이 한국 경제의 공급측면에 끼친 영향은 1980년과 비교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금리, 재정, 임금 등에 미친 영향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1980년 이후이다. 1979년의 시점에서만 보자면 1975년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중공업 투자 과정에서 시중에 유동성이 엄청나게 확대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오르는 실질임금은 경기를 극적으로 과열시켰다. 이에 “편승된 부동산 투기는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벼락부자들이 생겨나도록 만들었고 뜨네기 부자들이 자가용을 타고 룸살롱에 가서 술을 마시는 현상이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대기업들은 수출금융을 통해 저리의 융자를 받아서 이를 부동산에 투자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누리기도 했다.”(한성언, 1991)

자료: 한국감정원, 전국지가동향(2018)

사태의 심각성은 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다. 1978년 8월 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제 및 신고제를 도입했으며 부동산 소개업자에 관한 허가제, 양도소득 등 부동산 세제 보완, 도시개발공사 설립을 통한 공공개발을 천명했다(이형구·전승은, 2003). 부동산투기 억제 효과는 197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이미 부동산 폭등으로 인한 도시 하층민들의 삶의 위기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불만 또한 크게 고조되었다.

부산은 지속적인 인구유입으로 인구밀도가 증가했으며 부동산 가격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크게 폭등했다. 반면 도시하부구조도 미비했으며 이로 인한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표 7>은 시민들의 불만이 집단민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구체적인 추이를 보여준다. <표 7>은 1970년대 부산에서 발생한 집단민원의 내용과 수가 년도 별로 제시되어 있다. <표>에서 보듯이 1979년 집단민원은 폭등한다. 1977년, 1978년 집단민원의 수는 42개, 37개였지만 1979년은 95개로 두 배 이상 증가한다. 민원 내용을 보면 도로 및 교통문제, 공해환경, 권리침해 및 도시정비 등이 주를 이룬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도시 건조 환경은 미비 되어 있었고, 그 결과 관련 민원이 폭증한 것이다.

자료: 자료는 김석준(1992: 476) 부표 7-3.
주1: 김석준(1992)은 1968-1989년간 『부산일보』에 게재된 공공소비수단 부족에 대한 의의제기에 관한 기사를 전수 조사한 결과를 부표로 만들었다. 표는 필자의 재구성.

이상의 자료가 보여주는 바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1989), 홍장표·정이근(2003)이나 김원(2006), 손호철(2006), 윤소영(2006) 등이 주장하듯이 1970년 후반기의 경제위기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도시 하층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킨 것은 급속한 경기 팽창의 결과였다. 1970년대 전 기간을 걸쳐 부산의 실업률이 전국 평균보다 높았던 것은 중화학 공업화로 인해 부산이 소외된 결과가 아니라 부산의 빠른 경제성장이 더 빠른 인구유입을 촉진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1977년 이후 부산의 실업률은 지속적으로 낮아져서 1979년에 이르면 전국 평균에 접근하고 있었다. 오히려 경기팽창, 부동산 투기를 통한 벼락부자의 출현과 위화감,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한 삶의 위기, 도시 인프라의 미비로 인한 생활불편, 부가가치세 부과에 따른 불만 고조 등이 도시 하층민들의 봉기 참여를 촉진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Ⅳ. 결론

1979년 박정희 정권의 위기는 다양한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1979년 박정희 체제의 붕괴는 한미간 불협화음과 외교마찰, 신민당의 약진과 김영삼씨의 의원직 박탈, YH 노동조합의 투쟁, 수년간 지속된 유신체제의 피로감, 정권 내부에서의 강경파의 등장과 이에 맞서는 야당의 강경한 노선, 물가폭등과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인한 삶의 위기 등 다차원적으로 진행된 일련의 사태의 응집된 결과였다. 그러므로 1979년의 부마민주항쟁을 단지 경제적인 원인으로 환원해서 분석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마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에는 주목할 이유가 있다. 김원(2006)과 김선미(2016)가 보여주듯이 부마민주항쟁은 도시봉기적인 요소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도시 하층민의 봉기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경제적인 요소가 작용한다. 선행연구들에서는 도시 하층민들의 봉기 참여를 경제위기와 중공업화의 모순에서 찾았다. 중공업화에 소외된 부산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더 열악한 지위에 놓여 있었기에 도시 봉기에 하층민들이 참여했다고 분석한다. 더불어 선행연구들은 경제위기의 심화, 높은 실업률, 민중 봉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분석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다. 도시저항을 분석할 때 연구자들이 쉽게 빠지는 것이 바로 경제위기론이다. 경제위기로 인한 실업, 도시민들의 삶의 파탄이 대중적인 저항을 초래한다는 입장이다. 부마민주항쟁의 경제적 배경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선행연구들은 경제위기를 강조하거나 중공업화에서 소외됨으로써 부산의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지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이는 다수의 선행연구들이 정치위기의 배경에 경제위기가 있다는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여겨진다. 본 논문은 부마민중항쟁을 분석함에 있어서 이와 같은 환원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을 제기했다.

다음은 이 논문의 핵심 결론이다. 첫째, 선행연구들에서 1980년을 경과하며 본격적으로 진행된 경제위기 국면과 1979년 경제 상황을 연속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를 부산 시민들의 봉기의 경제적 배경으로 분석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우리는 1979년과 1980년 국면을 구별해야 함을 제시했다. 1979년 부산은 경기과열의 마지막 국면에서 여러 문제들이 누적되었고 시민들은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물가폭등, 부동산 투기 과열과 빈부격차 확대, 미비한 도시 인프라가 도시 하층민들의 불만을 일으킨 실질적인 이유이다.

둘째 선행연구들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무리한 중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해 경공업 중심지였던 부산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았고, 이것이 다른 지역이 아니라 부산에서 부마항쟁이 발발하게 된 이유라고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1970년대 당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경공업이 한국의 비교우위 산업이었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중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국면에서도 부산산업의 성장률, 임금상승률, 실업률 등 모든 지표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악화었다는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부산은 경기과열의 중심지였고 도시민의 유입이 컸으며 일자리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셋째 우리는 1979년 부산 민중의 저항은 경기호황의 마지막 국면에서 빚어진 도시 하층민의 삶의 위기와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도시 대중들의 사회적 불만은 경제위기 국면에서도 폭발할 수 있지만 경기과열 국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도시로의 인구집중, 부실한 도시 하부구조, 지가 폭등과 전세 값 폭등으로 인한 주거 위기, 불평등의 심화와 조세의 역진성으로 인한 위화감 등은 도시민의 저항을 촉발하기에 충분한 물질적 조건이 될 수 있다. 1979년 부산은 그와 같은 상황의 중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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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성환. 2007. “부마민주항쟁과 지역노동자 대중.” 『기억과 전망』 17: 238-263.

(3) 미간행 논문

강창화. 2011. “오일쇼크가 한국경제 미친 영향,” https://gscaltexmediahub.com/energy/ (2019. 02.08. 검색).

부산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2013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 http://www.ohminju.or.kr/images/report. (2018.01.05 검색).

Lindsay, D., A. Orphanides and R. Rasch. 2005. “The Reform of October 1979: How It Happened and Why?”, Conferrence on Reflections on Monetary Policy 25 Years After October 1979. (https://www.federalreserve.gov/pubs/feds) ( 2018. 01.08 검색).

Marvin Goodfriend & Robert G King(2004), The Incredible Volker Disinflation. The Carnegie-Rochester Conference on Public Policy. www.carnegie-rochester.rochester.edu. (2018.01.05. 검색).

필자소개 :

남종석(제1저자)은 부산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부경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쳤다. 현재 부경대 경제사회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전공분야는 산업조직론, 경제사,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현재 한국의 산업생태계의 특징 및 구조변동에 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원동필(교신저자)은 부산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부산대 박사후연수과정에 재직하고 있다. 전공분야는 서양현대사, 영국사이며 핵무장반대운동, 반전운동, 마르크스주의, 영국 신좌파에 관한 논문을 서술하였다. 최근에는 영국 반전운동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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