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도 언젠가 변화할 거라는 환상을 작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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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11일 10: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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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각 님의 <소개하기 정말 난감하게 만드는 영화들 소개하기>에 소개된(?) 김경묵 감독의 <얼굴없는 것들>에 대한 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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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동성애가 계속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남성들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지, 또는 서로를 아껴주고 관심을 가지는 순수한 정서적 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여부일 게다. 레즈비언을 포함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 상당한 정서적 대가를 치르지만 –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할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들은 정서적인 유대 관계를 맺거나 오래 지속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며, 여성의 도움이 없는 한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남성 동성애는 자주 이러한 남성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하나의 케이스로 간주되기 쉽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는 오해의 소지가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여성의 감정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남성에 대한 절망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가 깔려 있음을 무시하기 힘들다.

여성들의 사랑을 받는 남성들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상대 여성을 섹스 파트너 또는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대상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소수의 남성들은 사회화된 남성성에 혐오를 느끼고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안식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존중을 받는 데 실패하거나, 자신이 가진 성적 자원과 감정 노동을 남성이 제공하는 물적 자원과 교환하는 오래된 가부장적 물물 교환 구조에 흡수되기 마련이다.

성인 이성애를 기반으로 이원화된 사회에서 남성 이성애자들은 대개 사랑을 여성과의 관계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남성 동성애자는 –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부터 – 성관계와 정신적 사랑이 서로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인 사회적 컨텍스트 속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거기에다 성적 취향과 별도로 가부장제가 선사한 마초적 성향을 가진 게이들은 도대체 어떠한 정서적 관계를 경험할 것인가의 문제 또한 존재한다. 오랫동안 문명 사회는 정서적이고 유대적인 사랑과 감정 그리고 관계의 문제를 중요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인간도 인격적인 관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오랫동안 그 역할을 여성들이 맡아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대체 남성 동성애자들은 어디서 그러한 유대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경험할 수 있는지 난감해진다.

게이 로맨스를 다룬 많은 텍스트들은 이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동시에 레즈비언과 이성애자를 막론한 많은 여성들은 게이에 대한 수많은 텍스트들을 통해 남성도 진정한 여성적 사랑을 경험하거나 실천하는 모습을 가상체험하며 남성들도 언젠가 변화하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러한 환상을 여지없이 작살낸다.

<얼굴없는 것들>에 등장하는 ‘아저씨’는 거의 모든 –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 여성들이 관계를 맺게 되는 폭력적인 남성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강간과 성관계를 혼동하거나 – 또는 일부러 호도하며 – 가부장제가 남성들에게 용인하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체제에서 쾌락을 독점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적 취향이 아니라 섹스에서 이루어지는 권력 관계이며, 상대는 절대적으로 그보다 약한 상대여야 한다. 그는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상대의 시선을 봉쇄한 채 섹스를 통해 자신의 우위와 권력 관계를 확인한다. 그 상대가 소년인지 소녀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력과 인종, 연령에서 평등할지라도 – 게이들의 평등하고 유대가 넘치는 관계는 가능한 것인가의 질문에 이 영화는 단호히 노라고 대답하는 것 같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역학 관계가 존재하듯이, 게이와 게이 사이에도 폭력과 힘의 관계가 존재한다.

더구나 상대가 ‘예비 남성’이기 때문에, ‘아저씨’의 합의된 강간은 여성에 행해지는 것보다 더욱 폭력적으로 비친다(아저씨는 민수에게 교복을 입은 모습을 ‘섹시하다’고 칭찬하면서 군입대 시기를 묻기도 한다). ‘민수’는 – 많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 아저씨와 정서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만 내내 좌절되고 ‘얼굴없는 것’의 강간 대상이 된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인데, 독립영화계가 곤혹스러워하는 부분은 감독이 상대의 동의를 받고 직접 촬영했다는 2부이다. 사실 1년에 1백여 편의 영화를 섭렵하는 필자조차도 영화사상 가장 과격한 스너프 필름이 아닐까 생각되는 부분이다. (아, 사드 후작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구나!) 한마디로 2부는 리얼한 배설물 페티시의 향연이다. 만약 감독이 미성년을 갓 벗어난 청년이 아니었다면 영화계에서 매장당할 정도의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1부에서 보여주었다시피 게이의 정체성이란 가부장제가 제공하는 단물만 빨아먹으며 여성과 소년을 가리지 않고 강간하는 쓰레기같은 인간이라면, 도대체 그러한 인간과 이루어지는 성관계란 무엇인가?(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다)

일체의 영혼의 교감 없이 이루어지는 섹스, 더구나 상대가 여성이 아니라 소년이라면 – 감독은 아직 자기 자신을 성인 남성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다 – 그러한 섹스가 산출하는 것은 결국 남자의 몸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한 페티시가 아닌가?

페티시란 아무 의미없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라면, 사랑이 불가능한 게이들간의 성관계는 페티시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는 섹스일지라도 여성의 몸에서는 아기가 나오지만, 남성의 몸에서는 똥과 정액밖에 나올 것이 없다. 이것이 감독이 인식하는 게이 정체성의 극단적 형태이다.

일체의 정서적 가능성을 거세당한 자들의 섹스, ‘죽을 운명에 처한 자들’간의 사랑은 이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게이의 몸을 가진 채로 사랑을 성취할 것인가? 게이로서의 성적 취향을 가진 채로 정서적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가부장제에 물들어 있고, 가부장제는 사랑과 영혼의 풍부한 영토를 여성들에게만 허용하고 있으며, 남성들의 영혼은 가부장제의 폭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것밖에 없다.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여성에게도 사랑 없는 섹스는 정말 재미없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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