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난 멕시코 민중들 '재개표' 요구 대중투쟁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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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10일 03: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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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에서 제2차 선거전투가 개시되었다. 투표는 지난 7월 2일에 공식적으로 끝났지만 개표를 둘러싼 전투는 7월 8일(한국시간 9일)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멕시코 시티 중심가의 광장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운집한 수십만 명(경찰추산 27만명, 주최측 추산 50만 명)의 시민들은 재개표를 요구하며 이구동성으로 “투표소마다 한 표 한 표” 다시 집계하라고 외쳤다.

       
    ▲ "웃자! 우리가 이길 것이다. 오브라도르 대통령!" 사진=박정훈
     

    연방선거관리위원회를 “부정선거관리위원회”라고 조롱하며 선관위 위원장을 선거부정혐의로 ‘수배’하기도 했다. 5일과 6일 양일간의 전자집계결과 0.58% 차이로 승리한 펠리뻬 깔데론(우파 국민행동당후보)가 “표를 훔쳤다”고 비난하면서 비센떼 폭스 현 대통령이 공정한 심판 노릇을 하지 않고 선거에 개입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비판했다.

    시민들은 차를 타고 민주혁명당(로뻬스 오브라도르 좌파 후보가 속한 정당)의 노란 깃발을 흔들며 집회장 부근에 도착한 뒤 손수 만든 피켓이나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서 거리를 행진해 대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한 시민이 데리고 온 애완견 등에는 “웃자!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슬로건이 담긴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시민들을 실어 나른 미니버스들에는 “우리에게서 희망을 훔쳐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분노의 글귀가 담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또다른 시민은 싸움닭 한마리를 치켜들고서 “끝까지 싸워서 이길 것”이라며 로뻬스 오브라도르가 자신들의 쌈닭이라고 주장했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정치학부에 재학중인 호르헤는 “선거과정에서 민주혁명당 당원들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구타당했다”고 전했으며 멕시코 시티 도매시장의 상인 후안은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일이 이번에도 비일비재했다”고 귀뜸했다.

    펠리뻬 깔데론 후보의 처남이 운영하는 회사가 개표 집계에 참가해 개표를 조작했으며 6시간을 기다리고도 투표용지가 없어서 투표하지 못한 사람들이 허다했고, 멕시코 주에선 투표용지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는 등 시민들의 고발은 끝이 없다.

    이들은 또한 멕시코 언론매체에 대한 불만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한 플래카드에는 멕시코 제1민영방송인 텔레비사를 사악한 악마로 묘사했으며 시민들은 “(언론매체들이 국민행동당 후보에 의해) 매수되었다”고 소리쳤다. 한 시민은 필자에게 “외국언론은 정확하게 보도해달라”며 강력하게 요청하기까지 했다.

       
     ▲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운집한 시위대. 사진=라 호르나다
     

    멕시코의 작가 페르난도 델 빠소는 연단에서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진 선거였다”고 주장했으며 “공공복리를 위한 동맹”(민주혁명당PRD, 노동당PT, 일치단결CONVERGENCIA 등 세 좌파 정당의 연합으로 공동후보로 로뻬스 오브라도르 후보를 내세움)의 선거대책위원장이자 상원의원 헤수스 오르떼까는 한 시민이 제공한 녹음 테잎을 공개하면서 제도혁명당(PRI)과 연방정부가 공모해서 선거결과를 조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목요일에 긴급히 소집한 집회인데도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을 바라보며 로뻬스 오브라도르 후보는 12일부터 멕시코 전국 각지에서 멕시코 시티로 향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평화대행진”을 벌이고 16일에는 다시 대광장에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또한 선관위의 개표 결과를 확정해 대통령 당선자를 발표하는 연방선거심판소에 개표취소 소송을 제기해 재개표를 요구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 집회에 앞선 외신기자회견장에서 오브라도르 후보는 비센테 폭스 현 대통령을 선거개입혐의로, 펠리뻬 깔데론 후보를 선거비용 과다지출혐의로 연방대법원에 제소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실 이같이 다각도로 투쟁을 벌이겠다고 천명했지만 오브라도르 후보가 선거무효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지지시민들은 자신이 목도하고 전해들은 얘기에 분노하고 “부정선거”라고 외치지만 투쟁 지도부의 “재개표” 요구 이상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 "투표소 마다 한 표 한표! 전면 재개표! 부정선거 반대!"가 씌인 종이로 얼굴을 가린 시민" 사진=박정훈
     

    한편 펠리뻬 깔데론 후보는 6일 밤 선거승리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고 “이미 개표는 끝났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근소한 표차를 의식해 경쟁한 정당들과 함께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제안하며 로뻬스 오브라도르 후보도 정부에 참여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7월 2일 개최한 선거를 지켜본 유럽연합 선거감시단장은 선거과정에서 부정행위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최대한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법적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재개표에) 동의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집회가 열리기 하루 전날 7월 7일자 뉴욕타임즈는 이례적으로 사설에서 “멕시코는 전면 재개표를 고려할 만하다”고 밝히면서 펠리뻬 깔데론 후보에게 이 같은 과정을 거부하지 말 것을 제안하면서 “(재개표결과) 승자로 확정된다면 통치가능성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멕시코는 선거부정에 관한 한 세계적인 악명을 갖고 있다. 지난 88년 대선에선 “시스템 다운”으로 개표결과집계가 일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는데 1위와 2위 순위가 뒤바뀐 적이 있다. 가짜 개표소를 만들어 집계하는 등 공공연하게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지만 선거무효가 선언되어 재선거가 실시되거나 재개표가 시행되지는 않았다.

    지금 멕시코 시민들은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고 있다. 그래서 “선거과정의 투명성은 승자를 더욱 이롭게 한다”는 지적은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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