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증명서 속의 1946년 그리고 오늘
[역사의 한 페이지] 호열자, 해방 조선을 덮치다
    2019년 05월 22일 09:5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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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페이지] 정미의병, 맥켄지 그리고 조용익

신이시여! 모든 사람의 몰골이 어떻게 저럴 수 있습니까! 거리에서 오가는 대화는 온통 죽음에 관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도심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이 버려진 재난 지역 같습니다.

– 새무엘 피프스의 일기에서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불리는 페스트가 가장 맹위를 떨쳤던 1347년부터 1351년 사이에 2천만 명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는 당시 유럽 인구의 대략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사망자 수로 보자면 페스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었다. 새무엘 피프스의 일기는 흑사병이 창궐했던 1660년대 런던의 거리 풍경을 그리고 있다. 최악의 상황이었던 14세기와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흑사병이 덮친 지역의 처참함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전염병은 그 모습을 바꾸어가면서 끊임없이 인류를 괴롭혀 왔다. 그렇게 보면 인류 역사는 자기들끼리의 전쟁사(戰爭史)이기도 하지만, 전염병과 맞서 싸워 온 역사이기도 하다. 질병사가(疾病史家)들은 인류에게 가장 큰 공포를 준 전염병으로 페스트와 함께 콜레라를 꼽고 있다. 페스트와 함께 인류를 끔찍한 공포에 빠뜨렸던 콜레라, 오늘 이야기는 이 콜레라와 관련된 것이다.

지금부터 5년 전인 2014년에 해방 직후 만들어진 증명서 한 장을 수집하였다. B5보다 조금 작은 종이에 인쇄된 이 낡은 증명서는 전남 무안공립농잠학교에서 이 학교 1학년 재학생인 장상기에게 발급한 것으로 학교가 무기 휴교와 함께 학생들에게 귀향 조치를 취하면서 발급한 증명서였다. 발급 시기는 1946년 8월 29일, 휴교 이유는 다름 아닌 ‘호열자 창궐’이었다. 호열자는 콜레라의 우리식 이름이다. 해방 후 꼭 1년이 되는 1946년 8월 무렵 조선에 호열자가 덮친 것이었다.

[사진] 콜레라의 창궐을 화보로 실은 프랑스 [Le Petit Journal] 1912년 12월 1일자.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거대한 낫으로 사람들을 풀 베듯이 베고 있다. 콜레라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정치사 너머의 역사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정치사 중심으로 특정 시대를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그 당시 사회를 가장 잘 포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필자가 작년 8월 레디앙에 썼던 ‘병자년 대가뭄에서 ‘븅자년 죽빵’까지!’에서도 다루었듯이, 1876년 병자년(丙子年)은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병자년이기도 하지만 ‘병자년 대가뭄’의 병자년이기도 하였다. 민중들 입장에서는 정부가 일본과 맺은 ‘조일수호조규’라는 조약보다는, 그들의 생업과 직접 관련된 그해 가뭄이 더 큰 걱정이었다. 조일수호조규의 영향은 아직 미지의 것이었고 게다가 멀리 떨어진 것이었다면, 가뭄은 지금 당장 그들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시대를 살았던 서민에게 1876년 병자년의 경험을 묻는다면, 그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강화도조약보다는 19세기 최악이었던 병자년 대가뭄의 참상을 구구절절 증언할 개연성이 높다. 이건 역사적 중요성을 논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내가 병자년 가뭄의 고통을 노래하는 한글 가사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내 머리 속의 1876년은 그냥 ‘강화도 조약’으로만 기억되었을 것이다.

내가 장상기의 증명서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46년 8월이라는 시점 때문이었다. 해방 후 1년 뒤의 그 시대를 나는 주로 정치사적으로만 이해해왔지 정치사 너머 그 시대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필자의 대학 학사 졸업 논문 주제가 ‘해방 3년사’였음에도 그랬다. 정치사적으로 보자면 1946년 8월의 모습은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다.

1946년 8월 당시의 사회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여기에 참여할 단체의 범위 선정을 둘러싼 미·소의 갈등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5월 무기휴회로 돌입한 지 석 달이 지나고 있던 때였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다시 재개될 기미도 없는데다가 6월 4일에는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빨리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한 후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몰아내자는 ‘정읍 발언’이라는 내놓는 바람에, 이러다가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완전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도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7월부터 몽양 여운형과 우사 김규식은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여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해방 조선 1년 만에 우리 역사는 분단의 길이냐? 통일 정부 수립이냐? 이 두 갈래의 길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호열자 역시 1946년 8월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호열자의 창궐까지 아울러야 그 시대 민초들의 삶을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증명서에 관심이 가졌던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정치사가 잘 주목하지 않는 이야기를 통해 그 시대를 보다 풍부하게, 민중의 입장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6년 8월 해방 직후의 조선 민중들은 좌우합작 운동에 열광하거나 반대하는 민중일 뿐만 아니라, 호열자에 의해 고통 받고 죽어가는 민중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대 그들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호열자였을 것이다. 민중 입장에서는 좌우합작 운동은 저기 멀리 있고, 호열자는 오늘 당장 여기에서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난동을 부리는 살인자와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금부터 장상기가 발급받았던 ‘증명서’ 한 장을 통해 호열자가 무엇인지, 호열자가 우리말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또 호열자가 습격한 1946년의 조선의 사회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자.

호열자? 호열랄?

먼저 호열자, 즉 콜레라에 대해 알아보자. 호열자는 전염병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병으로, 이 병에 걸리면 구토와 설사를 하고, 경련과 실신을 거듭하다가 죽어 간다. 호열자는 한자로 ‘虎列刺’라고 쓰는데 ‘호랑이가 살점을 찢어내는 것만큼 고통스럽다’는 뜻으로 읽히지만, 알고 보면 콜레라의 중국 표기인 ‘호열랄(虎列剌; hǔ liè là)’을 옮기는 과정에서 ‘랄(剌)자’를 ‘자(刺)자’로 혼동한 것이다. 두 글자는 한자 모양이 거의 비슷하다. 비록 호열자가 콜레라의 음을 빌린 것이었다 하더라도, 호랑이에게 살점을 찢길 만큼으로 그 고통의 크기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꽤나 잘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호열자’라는 이름을 줄여 ‘호역(虎疫)’이라고도 한다.

[사진] 1903년 대한제국 의학교에서 편찬한 콜레라 예방서이다. 책이름은 [虎列剌病豫防注意書(호열랄병예방주의서)]라고 되어있다. ‘랄(剌)자’가 ‘자(刺)자’와 비슷해 이후 ‘호열랄’은 ‘호열자’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이 병이 처음부터 ‘호열자’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이 이름을 얻기 전에 콜레라는 그냥 ‘괴이한 질병’이란 의미의 ‘괴질(怪疾)’이었다. 병에 걸려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갈 때의 당혹감이 이 이름 속에 담겨있다. 말 그대로 콜레라는 괴이하기 짝이 없는 미스터리한 질병이었다. 이 병이 조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21년 즉 순조21년 음력 8월이었다. 당시 평안도 감사 김이교는 다음과 같은 장계를 조정에 올려 괴질이 휩쓸고 있는 도내 상황을 보고하였다.

평양부 성 안팎에서 지난 그믐 간에 문득 괴질이 돌아 사람들이 설사 구토하고 근육이 비틀리면서 순식간에 죽어버렸습니다. 열흘 안에 1,000여 명이 죽었으나 치료할 약과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유행이 그칠 기미가 없고 인근 마을 각 곳으로 번졌습니다. 이 병에 걸린 자는…….10명 중 한 둘을 빼놓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평안도부터 시작해 여러 읍에 전염되는 속도가 마치 불이 번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1년 8월 13일 기사

이 장계가 올라온 그 다음날인 8월 14일 비변사에서는 평안도뿐만 아니라 황해도에서도 이 병이 펴지고 있다고 보고하며, 이 정체불명의 병을 ‘난명지질(難名之疾)’, 즉 ‘이름을 알기 힘든 병’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병의 정체를 모르니 그 대책 역시 뾰족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이 병에 대해 비변사에서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해당 감사들에게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라는 것이 고작이었다. 콜레라와 조선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은 이 괴이한 질병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전염병이 우리말에 남긴 흔적들

“염병하네”

2017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이 말을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특검에 출석하는 최순실이 “이 나라는 민주주의국가가 아닙니다.”라고 외치자, 특검 건물 청소부 아주머니가 불쑥 내뱉은(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다. 염병(染病)은 전염병(傳染病)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전염병 일반을 뜻하는 보통 명사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전염병 중 장티푸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염병을 매우 불길하고 무서운 병으로 인식하였다. 불길하여 귀에 아주 거슬리는 소리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 “염병에 까마귀 소리”라는 속담도 이런 맥락 속에서 나온 말이다.

염병에 대한 이런 인식 때문에, 특정인을 극히 미워하고 저주할 때 쓰는 말로 정착된 것이 “염병할 놈(년)”이다. 염병이나 걸려 죽으라는 욕이니 섬뜩한 욕이 아닐 수 없다. “염병하네”는 “염병할 놈(년)”에서 다시 파생된 말이다. 앞으로 염병에 걸려 죽을 놈이 아니라 아예 지금 염병이 걸려 죽어가는 것이다. 이를 걱정해주는 대신 고소하다는 듯 비웃는 말이 “염병하네”라는 말이다. 앞에 ‘지랄’을 붙여 “지랄 염병하네”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염병하네”라는 욕보다는 훨씬 강한 느낌을 준다.

[사진] 2017년 1월 25일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강제 소환되는 과정에서 “여기는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라며 고성을 지르자, 한 청소 아주머니는 이에 “염병하네”라는 말로 일침을 가했다. (인터넷 사진)

장티푸스가 우리말에 저런 흔적을 남겼다면, 그 위력이 장티푸스를 훨씬 넘어서는 호열자가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리 없다. 1946년 전남 무안의 장상기를 만나기 전에 호열자가 우리말에 남긴 흔적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쥐나다”라는 표현이 있다. 갑자기 다리 근육에 경련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쥐가 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다리의 경련 현상을 왜 하필 ‘쥐난다’고 표현했을까? ‘쥐’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호열자는 다른 말로 쥣통(痛)이라고도 불렸다. 이 병에 걸리면 쥐 같은 것이 사지(四肢)로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 같으며, 운신도 마음대로 못하고 뼈만 남아 죽기 때문에 쥣통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호열자를 막기 위한 주술의식으로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열자에 걸리게 하는 악귀를 쥐 귀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천적인 고양이 그림을 붙여 쫓고자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서양 선교사의 다음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인들은 쥐 귀신이라는 악귀가 몸 안으로 스며들면 콜레라에 걸리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쥐가 오른 것처럼 발에서 시작해서 몸 위쪽으로 잠입해 올라가서 복부에 이르며 그로 인해 근육에 쥐가 난다고 믿었다. 시내를 걷다보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이 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는 쥐 귀신을 잡기 위함이다. 어디를 가도 이러한 어리석음의 실례를 볼 수 있었다.

-O.R. Avison, [Cholera in Korea], 1895

그러니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 “쥐가 발을 물어 근육에 쥐가 오르는 것”같다고 간주하고 호열자에 걸리지 않았는지 의심했던 것이다. 검색을 해보면 ‘쥐나다’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다. ‘쭈그리다’의 옛말인 ‘주리켜다’에서 ‘쥐’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는 설명도 특이하긴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쥐나다’에 나오는 ‘쥐’는 그냥 ‘쥐(鼠)’다. 콜레라로 인한 다리 통증을 ‘쥣통’이라고 부르고 그 ‘쥐 귀신’을 잡기 위해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풍습까지 있었는데 이 정도면 명확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놈의 쥐가 문제였다. 서양의 페스트(흑사병)라는 것도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가 검은 쥐와 같은 설치류에서 서식하는 벼룩을 통해 인간에게 감염됨으로써 발병하듯이, 조선인들에게 호열자라는 병 역시 ‘쥐 귀신’이 몸 안에 스며들어 생기게 된 것이니 말이다.

두 번째는 ‘바가지 긁다’라는 표현이다. 보통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잔소리할 때 이런 표현을 쓰는데, 이 말도 호열자와 관련이 있다.

호열자가 걸리면 고양이 그림을 대문에 붙이는 것 말고도 사람들이 취한 방법들은 또 있었다. 부적을 붙이는 방법, 멀리 피신하는 방법, 콜레라를 쫓기 위해 동네 어귀에 가시가 많은 아카시아 나무를 세우는 방법 등등. 그런데 호열자에 대한 마지막 필살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기분 나쁜 소리로 콜레라를 쫓는다고 밤새 바가지를 긁는 것이었다. 호열자를 쥐통이라 하지 않았던가. 당시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쥐를 쫓을 수 있듯이, 바가지를 드득드득 시끄럽게 긁으면 쥣통을 쫓을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나름 창의적인 발상이었다.

바가지 긁는 소리는 매우 거슬리고 듣기 싫었을 것이다. 시끄럽게 바가지를 긁어 대는 소리는 쥐도 싫어했겠지만,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가지 긁는다’라는 말은 여기서 파생했다. 남의 잘못을 듣기가 싫을 정도로 귀찮게 잔소리하는 것을 표현한 것인데, 이 말은 특히 아내가 남편에게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이런 유래를 이해한다면 이 말은 남편들에게 유쾌한 말이 아니다. 바가지 긁어 내는 시끄러운 소리로 콜레라를 쫓아내고자 했듯, 보기 싫은 남편을 닦달하여 쫓아내고자하는 기세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 따르면 남편은 콜레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진] 일제 강점기였던 1920년 인천의 한 동네에서 위생경찰과 한 조를 이룬 의사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콜레라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 1919년과 20년에 창궐한 콜레라로 11,084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대정9년 호열자병 방역지]에 실린 사진이다.

1946년 8월 전라도 무안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증명서가 발급되던 1946년 8월 장상기가 다니던 학교가 있던 전라남도 무안으로 가 볼 차례다. 보다 실감나는 이해를 위해 장상기를 주인공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보기로 하자.

상기는 무안공립농잠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1년 전 해방이 되었을 때 천지개벽할 세상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각종 공출이 사라지긴 했으나 살림살이는 고만고만했다. 일본 기업인들의 철수로 공장 가동률은 떨어지고, 중간 모리배의 매점매석으로 물가는 치솟고, 흉년으로 쌀은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좌우대립은 점점 격화되고 있었고, 북쪽에서 남한으로 전기 공급을 했다가 끊었다가를 반복하여 남한은 전기 상황도 불안하였다. 설상가상 해방된 지 1년이 된 지금 조선에서 또 하나의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바로 ‘호열자’의 창궐이었다. 이 와중에 콜레라까지 창궐하다니…….

상기는 걱정이 앞섰다.

‘이 콜레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인가’

당시 유행한 유언비어들은 이런 불안한 민심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또 허무맹랑한 유언비어가 많이 나돌았다. 정도령이 나와야 난세가 끝난다는 정감록의 변종에다가, 역병이 돌아서 사람 구경을 못한다느니 백리지경에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느니 하는 별의별 해괴한 소리가 다 돌았다. 또 예방을 위해서는 뒷간에서 묵힌 수수가루를 빻아서 온수에 타 먹어야 한다느니, 부적을 어디 어디에 붙여두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도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서 제각기 어른들한테 들었다는 소문을 교환했는데 불길한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에서

상기가 다니는 무안농잠학교도 요즘 호열자로 비상이다. 상기는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태어나서 지금 나이가 열일곱 살이다. 해방이 오면 전쟁도 끝나고 좋은 세상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은 질병과의 전쟁을 힘겹게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 호열자는 중국 쪽에서 왔다고 한다. 이미 석 달 전인 1946년 5월 귀환동포 3150명을 싣고 중국에서 온 수송선 안에서 호열자가 퍼져 2명이 사망했다. 미군은 시체를 부산 영도 바닷가에 수장했는데, 이것이 인근 마을로 호열자를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호열자는 부산을 덮쳤고 이때 부산에서는 하룻밤에 80명씩이 호열자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부산을 통해 들어온 호열자는 이미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사진] ‘40호 부락이 전멸 상태’라는 제목으로 콜레라의 참화를 보도한 영남일보 1946년 8월 4일자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는 콜레라를 호열자의 다른 이름인 ‘호역(虎疫)’으로 표현하고 있다. 경북 달성군 논공면 하동에 30명의 콜레라 환자가 발생해 13명이 사망하여 온 마을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단 기사에는 ‘호역 사망자 2천명 돌파’라는 기사도 보인다.

이와 함께 온갖 흉흉한 소문들도 돌고 있었는데, 어떤 곳에서는 호열자 환자를 장롱에 감추다 한 동네가 몰살당했다느니, 또 어떤 곳에서는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운 연기가 날아온다고 화장터를 부수는 소동도 있었다고도 한다. 그 확산 속도에 미군정 당국은 속수무책이었다. 단지 호열자 예방 전단을 공공장소에 붙이거나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미군정이 만들어 배포한 전단지에는 ‘호열자 예방’을 위한 여러 실천 사항들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겁내지 말고 다음과 같이 호열자를 방지하자.

  • 파리를 죽이자. 파리채와 파리약으로.
  • 음식물은 반드시 뚜껑을 덮어 파리가 없는 장소에 보관하자.
  • 소독치 않은 물은 반드시 끓여 먹자.
  • 음식 먹기 전과 대변 본 뒤에는 반드시 손을 씻자.
  • 난데없는 살인자가 되지 말고, 제각기 방역 규칙을 지켜 동족에게 균을 전염시키지 말자.
  • 이웃이나 가족 중에 설사하고 토하는 사람은 주저치 말고 당국에 신고하자. 호열자는 결국 부주의한 사람에게만 전파하게 된다.

당시 콜레라의 사망률은 거의 100퍼센트였다. 치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 정맥을 통해서 대량의 수액을 공급해주는 것인데, 당시에는 그런 약이 거의 없었다. 일제 때 쓰고 남은 의약품들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였고, 가뭄에 콩 나듯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군들이 정기적으로 충분한 양을 공급해 주지도 않았다. 상당한 시일이 지나고 공급이 다소 원활해지면서 사망률은 70∼80퍼센트 정도로 낮아지긴 했지만, 이 정도도 세계적으로 콜레라 환자의 사망률로는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비율이었다. 의사들은 치료 수단을 뻔히 알면서도 약이 없어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의사들이 지나가면 죽어가는 환자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정도의 기력이라도 가진 환자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부모 형제도 없었다. 마치 지옥도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환자가 병원에 올 때는 트럭에 실려 왔는데, 지금 같으면 앰뷸런스겠지요. 보호자도 겁이 나고, 경찰관의 제지도 있고 해서인지 거의가 가족이 안 따라 왔어요. 그리고 환자가 죽어도 가족들이 시체를 찾으러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환자들은 올 때도 트럭, 죽고 난 뒤에도 트럭에 실려서 화장터로 가는 거죠. 죽음 앞에서는 부모형제나 부자간도 멀어진다고 봐야겠지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 1946년 콜레라 창궐 당시 수련의로 활동했던 박희명의 증언, [8.15의 기억](한길사) 중에서

아침 조례시간에 담임교사는 상기를 포함한 학생들에게 당시 퍼지고 있던 호열자에 대한 전달 사항을 전달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를 단행될 것인데, 무안농잠학교도 내일부터 무기 휴교할 예정이라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나누어주는 ‘귀향 명령 증명서’를 반드시 휴대하고 다닐 것도 당부했다. 콜레라 유행으로 이동 통제가 심하니 그때마다 이 증명서를 내보이라는 것이었다. 상기는 선생님이 나누어 준 증명서를 살펴본다.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증명서
주소: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월암리 86번지
씨명: 장상기(張祥氣)
서기 1929년 8월 23일생
우인(右人)은 본교 제1학년 재학중인바 금번 본교 소재지 부근에 호열자 창궐로 인하야 임시 조치로 무기휴교하야 귀향을 명령하였음을 이에 증명함

서기 1946년 8월 29일
무안공립농잠학교장

[사진] 1946년 무안공립농잠학교에서 장상기에게 발행한 귀향 명령 증명서이다. 1946년 여름 콜레라 창궐 당시의 사회상을 증언하고 있다. (박건호 소장)

상기와 학생들은 술렁거렸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지금 무기 휴교를 하면 언제 다시 학교가 문을 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교실에 있는 친구들 중 휴교가 끝나고 다시 모였을 때 혹시 콜레라로 죽어 돌아오지 못하는 친구는 없을까?

죽음이 주변을 배회하는 시대!

불안감과 걱정으로 하늘빛마저 우울한 8월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해방 1주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학교 앞 거리 풍경은 황량하기만 하였다.

2019년 다시 창궐하고 있는 전염병…

이 증명서를 받았던 8월 말 이후 상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1946년 이 해 콜레라로 5만7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 이중 3만6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콜레라의 유행이 극심했던 7,8월 여름이 지나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환자 수는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부산, 경남, 대구, 경북 지역이 콜레라의 중심 지역이었으므로 상기의 학교와 가족이 있던 전라도 무안은 중심 지역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는 점, 그리고 상기가 증명서를 발급받고 무기 휴교에 돌입한 것이 콜레라의 기세가 한풀 꺾이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점에서 상기는 이후에도 안전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해방된 나라에 신고식을 하듯 혹독하게 조선을 강타했던 콜레라는 이후에도 잊혀질만하면 발생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러나 1980년 이후에는 간헐적으로 100명 내외의 환자가 발생하더니, 2001년 132명의 콜레라 감염을 끝으로 최근까지 환자 보고가 없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16년 다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하여 보건 당국이 긴장하기도 하였으나, 괴질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들어왔던 1821년 조상들이 느꼈던 공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위력은 줄어들었다. 콜레라는 이렇게 힘이 크게 꺾인 채로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대략 200년 만에 우리는 콜레라의 공포로부터 거의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사진] 이 표창장은 1963년 11월 보건사회부장관이 부산의 한 의사에게 준 것으로 콜레라 방역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를 기리는 것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콜레라는 연례행사처럼 찾아왔고, 보건당국은 그때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박건호 소장)

이렇게 콜레라가 길들여져 조용하게 잠들어 있는 2019년 올해 콜레라와는 성질이 다른 두 개의 전염병이 우리 앞에 고개를 치켜 들고 창궐하고 있다.

첫 번째는 홍역(紅疫)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올해 초부터 3개월간 전 세계 홍역 발병 건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배 늘어났다고 밝혔다. 아프리카는 지난해보다 홍역 발병이 700%, 유럽은 300%, 미주 지역은 60%, 동남아시아는 40% 증가함으로써 전 세계가 홍역 비상이 걸렸다. 급발진성 바이러스인 홍역은 전염성은 높지만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 이후 사실상 퇴치된 질병이었다. 그런데 올 들어 국내에서도 대구, 경기, 대전을 중심으로 홍역이 발병하여 확산되고 있다. 2019년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는 ‘홍역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조금만 관심을 놓치면 그 틈새를 노리는 것이 전염병이다. 우리가 늘 주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두 번째는 홍역, 콜레라와는 성질을 달리하는 전염병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몸을 망가뜨리는 기존의 전염병과 달리 사람들의 정신과 영혼을 망가뜨리는 지독한 병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과 소위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세력들이 진원지이다. 이 전염병은 ‘망언병’ 다른 말로는 ‘막말병’이란 것으로, 민주주의 정체를 표방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빛나는 항쟁과 저항의 역사를 부정하는 병이다.

그 이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간헐적이어서 심각하지 않았으나, 2019년 2월 자유한국당이 주최한 소위 ‘5.18 진상 규명 대국민 공청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창궐하여 그 위험성이 매우 커진 바이러스다. 이 공청회에서 이 당의 국회의원들 몇몇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주장하지를 않나,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하지 않나, 5.18 유공자들을 국민들의 세금이나 축내는 괴물집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 공청회에 연사로 초청된 모 인사는 심지어 전두환을 영웅이라고 찬양하였다. 이 망언 바이러스는 그 후 수그러들지 않고 확대에 확대를 거듭하더니, ‘반민특위’와 관련한 망언, 대북 평화정책을 펴는 대통령을 김정은 대변인 역할로 매도하는 망언, 대통령의 여성 지지자를 ‘창녀’로 표현하는 망언 등 영역을 점점 확장하고 있다.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심지어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인 5월 18일 (감히!) 광주 금남로에서 5.18을 폄훼하는 집회를 여는 집단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 집회에서 그들은 ‘부산 갈매기’라는 노래를 부르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도 한다. 세월호 진상을 촉구하는 광화문 단식 농성장 앞에서 ‘피자 치킨 파티’를 벌인 2014년 9월의 일베 회원들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좌와 우를 떠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과 애정이 없는 행동들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건전한 상식의 문제이고, 인간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문제이다. 정상적인 상식이 파괴된 상태에서 그들끼리 모여 주변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막말을 퍼붓는 이들의 행동은 이 신종 바이러스의 특이한 증상이기도 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한 이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병은 멀쩡한 사람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린다.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정체성과 근간을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언행은 이전에 우리 사회를 덮쳤던 여러 전염병에 비해 결코 그 해악이 적지 않다. 공동체의 정신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정치 혐오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우호와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를 말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치가 아니라 증오의 정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상생의 정치가 아니라 살생의 정치를 도모하기 때문이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보다는 강자의 힘의 논리만 내세우기 때문이다. 남북 화해 협력의 마스터플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북 빨갱이타령만 읊조리면서 대립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한 희망적 변화가 아니라 과거로의 수구적 퇴행을 원하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진행형인 이 악성 바이러스 ‘망언병’을 어찌 할 것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특효약이 하나 있긴 하다. 시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결코 그들의 논리에 타협하지 않고, 귀 기울이지 않는 단호함이다. ‘사람이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말아야’ 하겠다는 결기이다. 지체된 현실 인식에 대해 비판하고 그들의 논리를 과감히 부정하는 용기이다. 이제 그들을 더 이상 정치판에서 다시 보지 않겠다는 준엄한 심판이다. 그러고 보니 내년이 총선이다.

전염병과의 전쟁은 끝이 없다.

[사진] 위쪽은 지난 2월 8일 자유한국당이 주최한 소위 ‘5.18 진상규명 대국민 공청회’에서의 망언 3인방이다. 그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이라고 표현하고, 5.18 유가족들을 ‘종북 좌파가 만든 괴물집단’으로 표현했다. 아래쪽은 당시 공청회 당시 기념사진이다. 이 공청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지만원씨는 5.18을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한 사건으로 규정했고, 전두환을 영웅이라 치켜세웠다. (위 연합뉴스, 아래 데일리안 사진)

<참고자료>

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 2004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

문제안 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서울대병원병원역사문화센터, [사진과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의료문화사], 웅진지식하우스, 2009

스콧 크리스텐슨 저· 김지혜 역, [세상을 바꾼 100가지 문서], 라의 눈, 2015

필자소개
박건호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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