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냐, 삼성이냐
[기고] 이율배반에 빠진 ‘촛불’정부
    2019년 05월 21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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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냐 삼성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물음은 촛불의 힘으로 집권한 현 정부가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판가름할 갈림길이었다. 예수가 ‘신과 마몬(화폐)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했듯이, 촛불과 삼성 역시 함께 섬길 수 없는 두 개의 가치를 대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전 참여정부의 개혁 실패 원인 중 하나로 정부와 삼성의 과도한 친밀관계를 꼽기도 한다.

그런데 이재용 부회장이 석방되자마자, 대통령은 그를 재벌총수들과 함께 (이 정부의 대표업적인) 남북 정상회담에 동석시키고 최근까지 총 7회나 만남을 이어갔다. 문재인 대통령은 4월 30일 취임 후 처음으로 삼성전자 공장을 방문하더니, 다음날인 노동절에는 ‘노동계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며, 상생과 생산성 향상에 힘써야 한다’고 발표했다.

정말인가? 5년 전 이맘때,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원 고 염호석 씨는 삼성의 노조 탄압에 대한 항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경찰은 시신을 탈취했고, 일부 경찰관들은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유가족이 노조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이번 발표에는 이런 삼성의 ‘80년 무노조 경영’에 대한 언급은 없다. ILO 협약을 비준하겠다는 자신의 공약을 지키겠다는 발표도 빠져 있다. 그러더니 다음날엔 정부가 삼성전자의 반도체산업 성장을 위해 22조에 걸친 세액공제를 해주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정황이 드러나고, 공장 바닥에 노트북 수십 대를 숨긴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정부는 ‘경제 회생’이라는 명목으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것인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이 정부는 ‘촛불정부’를 표방한다. 촛불시위 당시 수많은 시민들은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재벌의 지배체제를 개혁하고 경제를 민주화하라고 요구했다. ‘촛불’정부는 이 촛불의 요구를 스스로 거스르려는 것인가?

노동은 대통령의 인식대로 정말로 오늘날 더 이상 약자가 아닌가? 지난 5월 11일에는 3천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서울 대학로 집회를 열었다. 고 김용균 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최근 5개월간 무려 5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근무 중 사망했다. 참여자들은 ILO 핵심협약 즉각 비준, 차질 없는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 불법파견 처벌 등을 요구했다. 모두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후보시절 공약들이다. 이 때문에 시위 참석자들은 “이것이 촛불혁명이 원했던 나라인가” 하고 물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해고는 대학 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한편에서는 대학 강사들이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일어난 대량해고에 항의하기 위해 시위에 나섰다. 전국적으로 7만 5천명의 강사들 중 1만 5천 명이 대학에서 해고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과연 이들이 더 이상 약자가 아닌가?

촛불정부가 촛불의 요구를 이율배반적으로 그 스스로 부정할 때, 노동자들과 서민,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수자들이 아니라 거대재벌과 기득권을 대변할 때, 개혁의 염원을 외면하고 우경화와 타협의 행보를 보일 때, 촛불 시민들 스스로 이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한, 촛불이 추구했던 새로운 민주주의는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와 재벌이 아니라 다수의 인민(demos)이 바로 주권자임을 선언했던 광장의 함성이 정부와 주권자 사이의 이 이율배반적 상황에서 침묵해선 안 되는 이유다.

필자소개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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