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죄 위헌 입법과제,
    ‘사유·주수 제한’으론 한계
    정의당, ‘낙태죄 위헌 결정의 의미와 성·재생산권 보장 입법과제’ 토론회
        2019년 05월 16일 06:4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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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인공임신중절)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후 국회에선 낙태죄 폐지를 위한 법안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핵심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보장이다.

    정의당 정책위원회·여성위원회는 16일 오후 국회 본청에서 ‘낙태죄 위헌 결정의 의미와 성·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입법과제’를 주제로 한 전문가 초청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헌재 불합치 판결이 나온 후 국회에서 가장 먼저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기존 사유 외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포함하고, 임신 22주까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주수 제한’을 두는 것을 골자로 한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왔던 여성·시민사회단체는 강하게 반발했다. 사유 규정과 주수 제한에 무게를 두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과 건강권 보장이라는 헌재 판결에 역행한다는 비판이었다. 여성계 안팎에선 헌재의 판단 이후 시작될 법안 논의의 폭을 현격하게 좁혔다는 우려까지 나왔다.

    이후 정의당은 관련 세미나를 연달아 개최하고 이날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했다. 법안 발의 당사자인 이정미 대표, 그리고 김용신 정책위의장 등 당 지도부들은 토론회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 이날 토론회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 내용 역시 ‘이정미 법안’에서 문제가 됐던 사유 규제와 주수 제한이었다.

    토론회 모습(사진=유하라)

    사유 제한 방식, 그 자체로 한계···‘여성의 주체적 결정 방해’

    헌재는 이번 판결에서 임신이 여성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데다 낙태죄가 임신중단률을 낮추는 실효성 있는 수단이 아니라며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임신중단을 허용할 필요성을 인정했다. 다만 사회·경제적 사유의 범위를 정하는 데에 있어선 국회의 몫으로 남겨뒀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인공임신중절 허용은 불법의 영역을 좁히고 임신중단을 합법의 테두리로 포섭하는 역할을 한다”면서도 “이를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러한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사회·경제적 사유를 규정하는 방식은 포괄적, 구체적 방법으로 나뉜다. 구체적 규정 방식은 여성의 연령, 자녀 수, 혼인 여부, 경제적 여건, 생활 조건 등을 법에 명시하는 것이고, 포괄적 규정 방식은 사회적 사유, 경제적 사유 등을 명시해 보다 임신중단의 허용의 범위를 넓히는 방식이다. 하지만 두 방식 모두 임신중단의 허용 여부에 있어 여성이 주체적인 결정권자가 되지 못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김 부연구위원은 “낙태죄를 유지하면서 어떤 ‘사유’를 예외로 두는 한 임신을 유지하도록 강제할 것인지 중단하도록 허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사유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사유를 제한하는 방식으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신체의 완전성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수 없다”고 짚었다.

    특히 이러한 사유를 두는 것이 또 다른 차별을 재생산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김 부연구위원은 “사회・경제적 사유 하에서 여성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출산할 수 없는 모성으로서 재현된다”고 지적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인 김민지 씨는 “‘사회경제적 사유’ 나 ‘태아의 장애’ 와 같은 사유에 대해 논란이 분분한데, 앞으로의 입법이 새로운 차별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사유를 규정해야 하는 경우라도 최대한 여성의 의사를 존중하며, 여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처벌을 중심으로 한 사유 제한은 임신중단 과정의 비효율도 초래한다. 사유를 입증하기 위한 절차적 요건들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김 부연구위원은 “사유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지도 문제가 된다”며 “사회·경제적 사유들은 객관적 기준을 마련할 수 없고 성폭력 등은 아예 입증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유 확인 절차는 누가 확인하고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전문가 집단이나 공무원의 판단을 요할 경우 의학적 판단 이외에 허용 사유의 조사와 판단에 추가적 시간이 소요된다”며 “결국 임신한 여성의 판단에 따른 임신중단에, 절차적 복잡성과 시간의 부담만 가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처벌을 중심으로 한 주수 제한은 불가능

    헌재는 세계보건기구에서 정한 기준인 22주까지를 임신중단 가능 시한으로 정했다. 단순위헌 의견에선 ‘마지막 생리기간의 첫날부터 14주 무렵까지’를 1삼분기로 제시하면서 사유를 제한하지 않고 임신한 여성 자신의 숙고와 판단 아래 임신중단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임신 기간에 따라 임신중단을 규제하고 처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 부연구위원은 “임신 기간에 따라 규제를 달리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임신 기간을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중대한 한계에 직면한다”면서 “낙태죄의 맥락에서 임신 주수는 범죄 구성요건이 되므로 명확히 확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임신 시점의 명확한 판단은 불가능해 필연적으로 명확성 원칙을 위반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임신 기간에 따라 처벌을 달리 하기 위해서는 임신 일자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임신 전 마지막 월경일이라는 기준은 태아가 수정된 날이 동일하더라도 서로 다르게 처벌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관계에서 수정까지의 기간도 일률적이지 않고, 임신 전 마지막 월경일이든, 초음파 진단이든 임신 일자를 추정하는 데 불과하다”며 “여성이 마지막 월경 일자를 얼마나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 또는 의사에게 솔직히 말했는지, 월경 주기가 규칙적인지 불규칙적인지, 의사의 진단이 정확한지, 임신 원인이 되는 성관계를 특정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따라 처벌이 좌우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형법이 명확한 기준을 제공하지도 못하고, 개인에 따라 처벌이 달라질 수 있다면 이는 정당화되기 어렵다”며 “더구나 월경일이나 성관계 날짜 등을 낙태죄의 처벌 대상자 본인인 여성의 진술에 의존해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처벌의 한계가 된다”고 설명했다.

    주수 제한이 필요하다면 처벌이 아니라 여성의 건강과 안전이 그 근거가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인의협 김민지 씨는 “임신중지가 이른 시기에 이뤄지면 여성의 건강에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주수라 해도 출산으로 인한 위험보다 크지는 않다”면서 “임신 8주의 임신중지 사망률은 10만 건 당 0.1건 미만이며, 임신 21주 이후의 임신중지 사망률도 10만 건 당 8.9건으로 선진국의 출산관련 모성사망률 10만 건 당 12건보다 더 낮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주수의 제한을 두는 이유는 가능한 빨리 임신중지를 시행할 수 있어야 여성에게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주수제한이 법안에 포함된다면 여성의 건강권 보장을 위한 목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김 씨는 “주수를 벗어날 때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고 임신유지를 강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상담과 다른 선택지의 제공을 통해 여성에게 최선의 선택을 찾아나갈 수 있게 독려하는 방향의 입법과 정책수립이 필요하다”며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에서 처벌은 임신중지를 막지 못하며, 안전하지 못한 임신중지만을 늘리는 것이 밝혀져 있다”고 지적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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