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살리려고
    선비들이 세운 안동교회
    [그림 한국교회] 선비정신과 신앙
        2019년 05월 10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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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화사한 햇살을 받으며 서울 북촌을 걸었습니다. 안국동 윤보선길에 꽃, 옷, 옹기를 파는 작은 가게들이 정겨웠습니다. 윤보선 대통령 가옥 앞 안동교회는 환대하듯 열려있고 담쟁이가 장식한 낮은 예배당과 지역사회를 위해 내준 한옥 ‘소허당’이 북촌과 어울렸습니다. 갑작스런 교회 종소리에 지나가던 이들이 깜짝 놀랐는데 열두 번을 쳐서 정오를 알려주었습니다. 요즘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추억이 서린 교회 종소리였습니다.

    낮은 건물에 자리한 갤러리, 음식점, 찻집들을 지나 옛 경기고 터의 정독도서관에 들어가 등나무 아래에서 뺨에 스치는 봄바람을 맞으니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은 중국인보다 서양관광객이 많이 보였고 점심시간을 쪼개어 산책하는 직장인들로 골목은 가득 찼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입구까지 갔다가 북촌 길로 다시 돌아오는데 ‘조선어학회 터’가 보였고, 마침 승용차가 들어가느라고 대문이 열린 틈으로 윤보선 가옥 안을 잠깐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덕귀 여사님이 더 생각났습니다.

    제가 1983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선교를 시작했을 때, 인명진 목사님의 제안으로 함께 공 여사님께 새해 인사를 갔었고, 그 후에도 서너 번 찾아뵈었습니다. 한옥 99칸 저택의 거실은 천정이 높아 서늘하였는데, 늘 단아하신 모습으로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여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부족할 것이 없었지만, 군사독재정권 시절 성매매 반대와 기생관광을 반대하는 여성운동에 참여하였고, 양심범가족협의회 회장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사장 등으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탄압의 방패막이를 감당하셨습니다. 특히 가난한 여성노동자들을 지원하느라고 경찰에 모욕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동일방직사건과 YH무역사건의 대책위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신 까닭에, 인 목사님이 감사하는 뜻으로 해마다 새해 인사를 드린 것입니다.

    공 여사님은 자택 앞 안동교회에서 여성교우들의 주체성 확립에 기여했으며, 1969년 여전도회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서울 안동교회의 역사가 특이한 것은 외국 선교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조선인 양반 세 분이 중심이 되어 유일한 상류층 교회를 세웠다는 점입니다.

    소설가 이용범은 책 “선비”(비움, 200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해서 모두 선비는 아니다. 아는 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한 사람만이 선비로서의 자격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뱃속에 사서삼경을 넣고 천하의 사서를 수백 번 읽었다고 자처한 사람 중에서도 알량한 이익을 위해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에 아첨하며, 나라까지 팔아먹은 자는 얼마나 많은가?”(P. 5.6)

    안동교회(그림=이근복)

    양반고을 북촌에 안동교회를 세운 양반들은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선각자들로서 존경할 만한 선비들이었습니다. “서유견문록”을 쓴 개화사상가 유길준의 동생 유성준은 일본 유학 중에 조선 선교사로 들어가려던 아펜젤러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그와 언더우드의 조선행을 안내하였습니다. 일본에서 법학을 연구하였고 일본유학생혁명혈약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갇힌 감옥에서 이상재, 이승만 등과 만났고 중생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외교관이던 박승봉과 함께 1908년 북촌에 기호학교(현 중앙고등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09년 유성준과 박승봉 등은 김창재의 집을 기도처로 모여 선교사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이 안동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기와집 한 채를 기증하여 교회 건축을 도운 양반 박승봉은 “기독교가 아니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야만 백성들을 빨리 깨우칠 수 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서울에서 회령까지 철로가 난다 하니 정거장이 서는 읍촌마다 교회와 학교를 세워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선비정신으로 교육과 신앙을 통하여 나라의 미래를 밝히고자 실천한 이들은 진취적이어서 한국 최초로 예배당 안의 남여석을 구분하는 휘장을 철폐하였고, 사랑과 헌신으로 북촌 양반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박승봉 장로는 미국공사관에서 2년여 근무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한 후 돌아와 법제국장으로 일할 때, 이준 등이 헤이그 평화회의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하였는데, 이 일로 평북 관찰사로 좌천되었지만 이승훈을 도와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는 3.1만세운동의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민족지도자들의 모임에 자기 집을 제공하였습니다.

    학교 교사로서 신앙적 열정이 넘쳤던 당대의 지사 김창재 선생은 YMCA를 중심으로 기독교문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장로 이윤재는 한글을 지키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유억겸 집사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지냈고 해방 후 과도정부의 문교부장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유각경 권사는 YWCA 초대 총무로서 여성운동과 절제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여성지도자였습니다.

    1910년에 부임한 제1대 한석진 담임목사는 주체성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1907년 장로교 평양신학교 1기생 6명과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일본에 파송 받아 많은 유학생들을 전도하였고, 안동교회에 부임하여 조선교회의 ‘자주, 자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선교사와 한국 목사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마펫 선교사에게 “이제 이곳에서의 사명이 끝났으니 돌아가라.”라고도 일갈하였답니다. 또 적극적으로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니 나중에 안동교회가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하는 토대를 놓은 것입니다.

    안동교회에 1976년에 부임하신 유경재 원로목사님은 제가 새문안교회 고등부에 다닐 때 경신중고 교목으로 계시면서 주일에 설교를 하셨습니다. 교회 설립자인 유성준 장로의 손자인 유 목사님은 서울대 학창 시절, ‘사상계’와 ‘씨알의 소리’를 탐독하고 예언서를 전공한 까닭에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 참여하시며, 군사정권 시절에 안동교회 설립자 선비들처럼 꼿꼿하게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잔잔한 예언자적 설교로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의식을 깨우셨고, ‘새시대선교회’로 예장(통합) 교회개혁운동의 문을 열고 ‘바른목회실천협의회’의 초대회장을 맡아 후배 목회자들에게 건강한 목회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28년간 시무하시고 2004년 조기은퇴하신 후 지금도 여전히 후배목회자들의 사표가 되십니다.

    안동교회는 ‘90 특별신앙운동’을 전개하여 환경보전과 통일, 경제정의운동의 사회선교운동의 실천으로 나아갔으며, 1992년에 ‘농촌목회연구원’을 세워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동행을 꾀하였습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사에 빛난 사건은 예장(통합) 총회가 여성안수를 결정하기 4년 전인 1991년에 박숙란 권사를 여성장로로 선출한 일입니다. 서울 북촌에 있는 교회답게 기독교문화선교에도 힘써서 1994년 파이프오르간을 봉헌한 것을 계기로 자주 연주회를 하였고, 문화포럼, 연극공연, 창작오페라공연 등 많은 문화행사를 열었습니다. 예배당 안에는 문순 화백의 예수 초상화들이 믿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안동교회를 섬기는 제12대 황영태 담임목사님을 만나보니 한국교회에 대한 염려가 컸습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를 2019년 표어로 삼은 서울 안동교회가 설립자 양반들의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이 시대와 교회의 희망으로 계속 나아가길 바랍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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