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북의 싸움, 전환점 넘다
    [국공내전㉕] 마오쩌둥의 부부싸움, 웨드마이어 특사와 미국의 태도
        2019년 05월 09일 02:43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국공내전㉔] 해방군 중원으로 출격하다

    펑더화이, 위린(榆林)을 공격하다

    한편 해방군 서북야전군 사령원인 펑더화이는 3개 종대와 1개 교도여단 병력으로 섬서성 북부의 요지 위린을 공격했다. 류덩 부대에 대한 후쫑난 집단군의 압박을 덜기 위해서였다. 펑더화이 부대는 7월 31일 쑤이더에서 북상하여 8월 7일 위린성을 포위했다. 8월 10일부터 이틀 동안 성을 공격했으나 성벽이 굳고 튼튼한데다 화력 부족으로 함락되지 않았다.

    위린 전투에서 기관총 사격 중인 해방군

    후쫑난은 29군 8개 여단과 정편 36사단을 구원병으로 급파했다. 국군 36사단장 종송(鐘松)은 지원군 선두부대에 5일 동안의 휴대식량만 지참하게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게 하였다. 종송의 부대는 지원군 공격에 나선 쑤이더와 헝산의 해방군을 우회하였다. 그리고 바오안(保安), 정볜을 거쳐 장성 밖으로 나오니 해방군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진격이었다. 36사단이 위린성 주변에 포진한 뒤 성과 연락을 취하자 성안의 사기가 올랐다. 성이 튼튼하여 함락이 어렵고 지원군이 도착하면 안팎으로 협공을 당하게 된다.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펑더화이는 8월 12일 위린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8월 14일 종송은 위린성에 입성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종송은 위린성을 구한 공로로 나중에 4등 훈장을 받았다.

    위린성 구원으로 훈장을 받은 종송

    빨간 원 부근이 위린, 아래에 옌안과 시안이 보인다

    8월 15일 위린성의 포위를 풀고 철수한 펑더화이는 일부 부대와 후방 요원들에게 황허를 동쪽으로 건너게 하였다. 그러자 후쫑난은 펑더화이 집단군이 황허를 건너 철수한다고 판단하였다. 후쫑난은 1군과 29군의 9개 여단 그리고 36사단을 급파하여 추격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은 펑더화이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36사단은 사단장 이하 전 부대가 사쟈덴(沙家店)에서 해방군의 매복에 걸려 철통같은 포위망에 갇혔다. 8월 18일부터 19일까지 포위망을 뚫지 못한 36사단은 6,000여명을 잃고 여단장 류즈치(劉子奇)와 참모장 뤄추페이(羅秋珮), 연대장 두 명이 포로로 잡혔다. 종송은 차도 버리고 걸어서 포위망을 탈출했다. 위린성 실패를 딛고 승리한 사쟈덴 전투에 대하여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매우 높게 평가하였다. 8월 23일 서북 야전군이 여단장 이상의 간부회의를 소집했을 때 마오쩌둥, 저우안라이, 런비스가 참가하였다. 마오쩌둥은 그 자리에서 “사쟈덴에서 정말 잘 싸웠다. 서북 전황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제 가장 곤란한 시기는 지나갔다.”고 칭찬하였다.

    확실히 사쟈덴 전투는 해방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마오쩌둥과 당 수뇌부의 안전을 고려할 때 전과가 큰 것은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후쫑난은 25만 병력을 이끌고 섬북으로 왔는데 왜 소수병력으로 공격하다 서북야전군에 잇따라 각개격파를 당했을까? 펑더화이의 서북야전군이 칭화벤, 양마허, 판룽 등에서 잇따라 승리했지만 대부분 1만명 정도의 여단병력이었다. 사쟈덴 전투 전에도 섬북의 전황은 공산당에 매우 불리했다. 일년 동안 섬북을 전전하며 쫓겨 다니던 마오쩌둥과 중앙 수뇌기관은 말할 것도 없고 서북야전군도 국군 주력과 결전을 피하느라 계속 이동하며 싸우는 형편이었다.

    사쟈덴 전투 직전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지대, 그리고 서북 야전군은 우딩허(無定河) 동쪽 황허 서쪽의 사방 오십킬로 지점에 몰려 있었다. 섬북의 주요 도시는 물론 근거지를 모두 빼앗기고 손바닥만한 황토고원만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섬북의 대군을 두고 몇만명 정도의 병력만 보내어 매번 매복에 걸려 패배하곤 하였을까? 국군은 종송의 36사단만 하더라도 3만명에 달하였다. 서북야전군 전체 병력과 맞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군은 점령한 곳에 수비군을 남겨 두어야 했다. 드넓은 섬북의 곳곳에 수비 병력을 남겨 두니 기동할 수 있는 병력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쟈덴 전투는 종송의 36사단 병력 중 1개 여단이 전멸을 당하였다. 나머지 2개 여단은 그대로 보존하여 종송은 여전히 36사단을 지휘하였다.

    사쟈덴 전투 유적지

    마오쩌둥의 경호조장 리인차오(李銀橋)의 수기

    사쟈덴 전투는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를 위해 마오쩌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날 마오쩌둥은 경호조장인 리인차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였다. “인차오, 내가 홍샤오로우(红燒肉)(1)를 한접시 먹어야 하겠는데 자네 돼지고기를 구할 수 있겠나?” 마오쩌둥이 이런 부탁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리인차오는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홍샤오로우 한 접시를 만들어 올렸다. 리인차오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를 마오쩌둥 앞에 놓자 마오는 아주 신이 났다. 요리의 냄새를 맡더니 참을 수 없는지 곧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다 먹어 치우는 게 아닌가. 마오쩌둥은 젓가락을 놓더니 불현 듯 자기가 너무 빨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오는 리인차오를 보고 “혼자만 먹구, 걸신들린 것 같아 보였지?” 하고 겸연쩍어 했다. 그러더니 곧 “싸움에서 이겼으니까 그래도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물었다.

    리인차오는 마오가 그러는 것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싸움을 이기기까지 마오가 한 노심초사가 생각났던 것이다. 몇날 며칠 눈도 붙이지 못하고 이긴 싸움이었다. 그런데 겨우 홍샤오로우 한 접시를 달라고 하며 그렇게 멋쩍어 하다니. “아닙니다. 주석, 그런 정도야. 너무 소박합니다.” “아닐세, 전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진지에 돌격하는데 홍샤로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말을 죽여서 겨우 배를 채우는 형편일세.” 리인차오는 마오쩌둥이 홍샤로우를 즐겨 먹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마오 주석은 홍샤오로우를 먹으면 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리인차오는 그 뒤로 큰 싸움이 끝나거나 마오가 몇날 며칠 동안 문건을 쓰고 나면 홍샤로우를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필자가 후난성 샹탄 샤오산춘(韶山村)의 마오쩌둥 생가를 갔을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마오쩌둥이 살던 샤오산춘 생가에서 이백미터쯤 떨어진 곳에 마오의 친척 아주머니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홍샤오로우를 기가 막히게 맛있게 요리하여 어린 마오를 먹였다는 것이다. 마오는 어릴 때 먹던 맛을 잊지 못하고 늘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샹탄이나 후난성 성도인 창사에 가면 홍샤오로우를 만드는 음식점이 아주 많다. 마오쩌둥 집안에서 만들던 홍샤오로우는 모씨 홍샤오로우라고 하는데 후난성에서 파는 것들은 대부분 모씨 홍샤오로우이다.

    펑더화이, 마오를 불러 한 말씀 권하다

    전장에서 둥위안(東元村)촌으로 돌아온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함께 서북 야전군 부상자와 병사들을 찾았다. 그곳에는 환호성과 박수 소리로 가득찼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와 함께 잡혀 있는 포로 6,000여명을 사열했다. 포로들이 새카맣게 몰려 서 있는데 대오가 뒤죽박죽이었다. 한눈에는 포로들의 머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서북야전군 사령부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요동 내외부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요동안의 캉위에도 사람들이 가득 앉아있었다. 펑더화이가 마오쩌둥에게 “주석, 동지들에게 한 말씀 하시지요.”하고 청했다.

    마오쩌둥은 요동 중간에 서서 이야기하다 사람들이 앉으라고 권하자 캉위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오쩌둥은 담배를 피우며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동지들, 이번에 잘 싸웠소. 여러분은 장제스의 일장춘몽을 깨끗하게 깨뜨렸소. 후쫑난은 음험하고 악독한 인간이오. 아아, 후는 뜻은 크지만 재주가 없으니 안타깝구나. 그렇게 많은 군대를 가지고도 우리를 전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여러분이 지금처럼 계속 싸우면 후쫑난을 내쫓을 수 있을 것이오.”

    그때 시중쉰이 말했다. “후쫑난도 재주가 있습니다.” “오, 후쫑난이 잘하는 게 뭔가?” 마오쩌둥이 웃으면서 재촉했다. 시중쉰은 “후쫑난은 마오 주석이 계획한 대로만 움직입니다. 그게 재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하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마오쩌둥은 진한 후난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섬북의 전황은 이미 고개를 넘어갔소. 힘들고 괴로운 시기는 지나갔단 말이오. 그런 시기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오. 전쟁의 주도권이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인민의 손에 있다는 말이오.” 마오쩌둥은 오른손을 펼치더니 왼손으로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칭화볜, 양마허, 판룽, 사쟈덴 싸움에서 우리는 적 예닐곱 여단, 이만명 이상을 해치웠소. 우리는 상승장군이라던 후쫑난을 깨뜨렸소. 그의 4대 금강이라는 부하들 중 세 명을 이미 사로잡았소. 류즈치(劉子奇) 리쿤강(李昆崗), 그리고 또 누구더라.” 그때 옆에서 누가 거들었다. “리르치(李日基)입니다.” “그렇지 리르치. 여러분, 후난 말로 르(日)는 얼(二)이 되오. 그래서 리얼지(李二吉)가 됩니다. 우리가 그를 처음에 잡지 못했으니 한번 길한 것이고, 두 번째도 역시 잡지 못했으니 두 번 길한 게 되오. 그런데 이번에 세 번째는 길한 게 없으니 도망치지 못한 것이오. 여러분, 그렇지 않소?” 마오쩌둥이 리르치의 이름을 가지고 설명하자 모두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사람들은 한참 웃다가 크게 박수를 쳤다.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가 가라앉자 마오쩌둥은 웃으며 이야기했다. “우리 한번 봅시다. 국민당 안에 유명한 사람들, 장제스, 후쫑난, 옌시산 같은 부류들이 있는데 한 번이나 두 번은 요행을 바랄 수 있어요. 하지만 결국에는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나중에 그들이 어디로 달아나더라도 우리가 묶어 심판대에 세울 겁니다. 동지들, 내 말 모두 믿습니까?” “믿습니다.” 요동안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마오쩌둥은 사람들에게 전국의 형세와 서북의 전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서북 야전군의 지휘관들과 다음 작전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마오쩌둥이 양쟈차(梁家岔) 마을로 돌아가니 지휘기관들이 이미 주관자이(朱官寨) 촌으로 이전해 있었다. 이제 막 도착했던 장칭도 주관자이로 가고 없었다. 마오쩌둥도 일행과 함께 시내를 따라 산쪽으로 20리를 걸어 주관자이에 도착했다.

    마오쩌둥은 격무에 지쳐 매우 피로하였다. 사람들이 골짜기 쪽으로 1킬로만 더 가면 조용하고 깨끗한 곳이 있다고 권하였다. 무엇보다 장칭이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더니 “나는 그렇게 깨끗한 곳이 필요치 않은데, 잠이나 잘 수 있으면 되지.”하였다. 사람들이 마오쩌둥에게 비어 있는 요동에 들어가 한숨 자라고 하였다. 마오가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리인차오가 들어가 보니 요동 안이 부서진 데다 연기에 온통 그을려 새카맣고 어두컴컴하여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리인차오가 요동 밖으로 나오니 마오는 요동 앞에 걸상을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리인차오를 부르더니 저우언라이와 런비스를 불러 오라고 하였다. 회의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리인차오가 “좀 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마오는 “지금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면 고생도 조금 해야지.”하는 것이었다.

    1947년 9월 1일, 그 형편없는 요동에서 마오쩌둥은 ‘해방전쟁 2년의 전략방안’이라는 지시를 기초하였다. 해방군에게 전쟁을 국민당 통치지역으로 끌고 가라는 임무를 담은 것이었다. 그날은 해방군이 전국 규모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전환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었다. 사쟈덴 전투 뒤 후쫑난 집단군은 원기를 잃고 전개했던 부대를 뒤로 물렸다. 류칸(劉戡)도 더 이상 마오쩌둥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다. 9월이 되자 섬북의 형세는 더욱 호전되었다. 마오쩌둥은 기운을 차려 황허 서안의 농촌 조사에 나섰다. 가는 곳마다 마오쩌둥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연자방아를 돌리거나 타작을 하는 등 함께 일했다.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었다.

    량자자이 마을은 섬서성 류린시에 속한 자현(佳縣)에 있다. 현성에서 25킬로 떨어진 궁벽한 마을인데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가 임시지휘소를 설치하였다. 1947년 8월 19일 마오쩌둥과 런비스 등이 이곳에 와서 마을 주민의 집에 머물렀다. 서북야전군 총사령부는 이곳에서 5킬로 떨어진 둥위안춘(東元村)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오는 이곳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마오와 펑더화이가 함께 사쟈덴 전투의 작전을 의논했다. 회의가 끝난 뒤 마오쩌둥은 양쟈차로 돌아갔다. 마오는 양쟈차에서 5일간 머무른 뒤 주관자이로 이동하였다.

    마오쩌둥의 부부싸움

    하루는 서북군구 사령원인 허룽이 마오쩌둥에게 아주 좋은 말을 한 필 보내왔다. 마오쩌둥은 그 말을 타보지도 않더니 곧바로 비서인 예즈룽(葉子龍)을 시켜 전선으로 돌려보냈다. 마오는 “저렇게 좋은 말은 전방의 동지들이 타야지. 전방 동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고 고생하는데 당연히 좋은 말을 타야지.” 하며 고집을 부렸다.

    그날 장칭은 주관자이 계곡에 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군복을 벗어 빨래를 하고 새로 레닌복으로 갈아입었다. 장칭은 낭자를 다시 트는 등 단장을 마치더니 요동 앞에 걸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심심했는지 경호원들에게 역사 이야기를 하거나 수수께끼를 내는 등 한담을 하였다. 그럴 때는 장칭이 마치 큰누나처럼 보였다.

    그날, 경호원 장텐이(張天義)가 리인차오에게 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장님,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 테니 맞춰 볼래요?” “응, 뭔데. 말해 봐.” 리인차오가 재촉하자 마오가 옆에 있다가 거들었다. “그래, 우리 다같이 풀어보세.” 하는 것이었다. 경호원이 “네.” 하고 대답하더니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하루에 천리를 가고, 문무에도 다 능한 임금인데, 친자식인데도 성이 다르고, 사랑하는 마누라 옆에서 자지도 않고, 하는 일이 다 그 모양인 사람이 누구일까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듣더니 하하 웃었다. “그게 뭐야? 그것도 문제인가? 애들 앞에서 별소릴 다하는 군.” 마오가 들으니 장칭이 자기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장텐이는 잠시 어리둥절하더니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리고 무안한 얼굴이 되어 웃더니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그날 저녁, 리인차오는 주관자이 계곡 마오쩌둥 부부의 요동 밖에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때 요동 안에서 장칭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장칭에게 큰소리로 나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몇 번을 이야기했소? 특별한 대접을 요구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소? 허 총사령이 보낸 말은 내가 전선으로 보냈소. 그런데 왜 그걸 다시 가져오라고 하는 거요? 그게 전선에 더 필요한 거라는 걸 모른단 말이오? 당신까지 내 말을 안 들으니 어떻게 이럴 수 있다는 말이오?”

    리인차오는 듣고 있기가 민망하여 요동에서 조금 떨어진 것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금 있으니 장칭이 흐느끼며 요동 밖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저우언라이가 묵는 요동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리인차오는 마오쩌둥과 장칭이 부부싸움을 한 뒤에는 장칭이 언제나 저우언라이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우언라이와 대화한 뒤에는 돌아와 마오쩌둥에게 잘못을 인정하곤 하였다. 그날은 장칭이 돌아오기 전에 마오쩌둥이 요동 밖으로 나왔다. 리인차오가 있는 것을 보더니 “가자, 앞장서라.”하고 지시하였다. 마오쩌둥은 화가 나면 리인차오를 불러 한적한 곳으로 산보를 나가곤 하였다.

    달빛 아래 마오쩌둥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리인차오는 조심스럽게 뒤에서 따라갔다. 둘이 한참 걸어갔을 때 마오쩌둥이 입을 얼였다. “나하고 장칭이 싸운 거, 밖에 나가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집안 일이 새어나가면 안 돼. 알아들었나?” “네.” “너는 늘 내 곁에 있으니 바깥 사람이 아니다. 이런 일이 밖에 나가면 안 좋은 영향이 있다는 것쯤 잘 알겠지? ”네. 압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렸을 때 어머니도 제게 밖에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마오쩌둥은 반문하더니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모든 일이 꿈이로구나. 지난 일을 되새겨 보니 모습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이미 변하였네. 바라는 대로 행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轉燭飄蓬一夢歸,欲尋陳迹悵人非 天教心愿與身違……)”(2) 하며 싯구절을 읊었다. 리인차오는 마오쩌둥이 읊는 시를 알지 못했으며 그 뜻은 더욱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라 갔는데 마오쩌둥에게도 어려운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옌안 시절의 마오쩌둥과 장칭

    다음날 정오, 리인차오는 장칭이 만면에 웃음을 띈 채 마오를 만나러 온 것을 보았다. 리인차오는 “어제는 그렇게 싸우더니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왔네. 분명히 저우언라이가 무슨 말로 설득을 했을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장칭을 달랠 수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마오의 도량이 커서 그녀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닌가. 부부는 밤에 복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장칭이 왔을 때 마오쩌둥은 요동 안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장칭은 신이 나서 마오쩌둥에게 이야기했다. “주인 어론, 안잉이 편지를 보냈네요. 왕동싱이 보내왔어요. 리나도 그림을 그려 보냈네요.” 안잉이라면 장남 마오안잉을 말하는 것이고 리나는 허쯔전이 낳은 마오의 큰 딸이었다. “오, 빨리 가져와 보시오.” 마오쩌둥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놓고 편지를 받았다. 딸이 그린 그림을 보더니 “잘 그렸네. 참 잘 그렸어.”하고 감탄했다. 아들의 편지를 보니 겉봉에 “아버지에게 전해 주시오. 마오안잉”이라고 쓰여 있었다. 마오는 요동에 들어오는 햇빛에 비춰가며 편지를 읽었다.

    장칭이 리인차오에게 물었다. “샤오리, 어제 주인어른이 화가 많이 났나요?” “아닙니다. 제가 계속 주석 곁에 있었는데 화내는 거 보지 못했습니다.” “다행이군요.” 장칭이 안도하더니 리인차오에게 말했다. “주인 어른이 하는 일이 너무 많아요. 생각할 것도 많고, 어깨에 태산처럼 짐을 지고 있지요. 우리가 잘 보살펴 줘야 해요. 건강도 잘 돌봐줘야죠. 어떤 때는 막 화를 내지만, 주인이 화를 내면 꼭 내게 알려줘야 해요.” 리인차오는 “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장칭은 또 이렇게 말했다. “주인어른은 우리 당의 영수이고 우리 군대의 최고 통수에요. 전국 인민의 영수이니까 우리는 모두 주인어른을 위해 복무해야 합니다. 그게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이고 군대를 위하는 것이죠. 내 말 이해할 수 있죠?” “네.” 그렇게 해서 마오쩌둥과 장칭의 부부싸움은 완전히 끝이 났다.

    웨드마이어의 방문과 미국의 무기 금수조치

    1947년 7월 미국에서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emeyer)가 특사로 중국에 다시 왔다. 웨드마이어는 미 육군 대장 출신으로 2차 대전 때 연합군 중국전구 참모장을 지낸바 있었다. 장제스가 총사령관이기는 하였지만 미군 사령관이 웨드마이어였으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미국 국무장관이 된 마샬의 요청으로 중국에 온 것이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은 물론 한국까지 시찰하였으며 그 결과를 마샬에게 보고하였다. 웨드마이어는 성격이 부드럽고 평정심을 잘 유지하여 장제스와 잘 지냈다고 한다. 그의 선임인 스틸웰(Joseph Stilwell)은 불같은 성격에다 불만을 직선적으로 토로하여 장제스와는 물과 기름같이 지냈다.

    미국은 그해 1월 29일, 국군과 공산당간의 중재노력을 포기한 일이 있었다. 당시 마샬이 트루먼의 특사로 와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때 12,000여명에 이르던 미군 병사들도 모두 미국으로 철수하였다. 그후로 마샬은 중국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웨드마이어는 달랐다. 중국에 오래 체류한 경험 때문인지 그는 적극적으로 국민정부를 위해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국군의장대를 사열하는 웨드마이어

    웨드마이어는 동북을 시찰할 때 2차 대전 때 미군 폭격기가 푸순의 일본 제철소를 폭격하여 완전히 파괴한 것을 보고 놀랐다. 그가 시찰할 때까지도 복구가 안 되어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로 전황을 시찰하였다. 국군 병단 사령관인 랴오야오샹(廖耀湘)이 “소련군이 내전에 참전하고 있다.”고 주장하자 코웃음을 쳤다고 한다. 랴오야오샹은 또 “미국은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 미군이 훈련한 국군은 모두 끝장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웨드마이어는 “미국이 훈련한 군대는 이미 사라졌다. 병력의 반이 탈영하였고 반은 당신들이 엉터리로 지휘하여 무덤으로 가고 있다. 지금 있는 병사들은 만주에서 징집한 농민들 아닌가?”하고 반박하였다.

    시찰 후 난징으로 돌아온 그는 장제스와 국민정부 고위관계자들이 듣는 강연에서 몇 시간이나 국민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나는 중국에 와서 정부기관 곳곳이 마비되고 나태한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패배주의에 맥이 풀렸습니다. 백성들의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정치와 경제를 철저하게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군사력만으로 공산주의를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의 주장은 국민당과 국민정부 인사들에게 치욕적인 감정을 안겨 주었다. 국민당 원로이자 고시원장이던 다이지타오(戴季陶)는 분통이 터져 강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에 대하여 충심을 가지고 제의하였다. 중국 군대의 부패가 심각하니 이것을 수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국군이 진행하는 작전의 전반적인 부분을 토로하고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웨드마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중국 국민정부나 국군의 문제가 구조적이어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대신 장제스는 총사령관인 천청을 동북의 행영주임을 겸하게 하여 동북의 기강을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장제스로서도 웨드마이어 등 미국쪽 인사들에게 부패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쓰핑싸움의 영웅인 천밍런이 여기에 걸려들었다. 동북의 유지와 유력인사들이 천밍런을 독직 및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했던 것이다. 천밍런은 쓰핑전투때 미국이 제공한 밀가루 및 콩을 담은 부대를 바리케이드를 쌓는데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쓰핑에 있는 국민당 인사는 물론 유력인사들을 완전히 잡아놓고 달아나지 못하게 막았다. 민심과 군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천밍런은 군직에서 해임되어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훈장까지 받고 장제스와 함께 쑨원묘를 참배했던 그로서는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천밍런은 직후 수면제를 다량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장제스는 부인인 쑹메이링을 보내 위문하였는데 천의 충성심은 이미 금이 갔다. 그는 1949년 8월 국군 7만 5천명을 이끌고 기의하여 공산당에 중용되었다. 웨드마이어의 방문이 엉뚱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타임지 표지에 실린 웨드마이어

    웨드마이어는 미국으로 돌아가 조사보고서에 이런 말을 썼다. “국민당군은 이미 열세에 놓여 있다.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할 것이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에 대한 정치개혁을 전제로 미국에 국민정부에 대한 원조를 늘릴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그의 보고서는 거꾸로 국민정부에 대한 믿음을 더욱 떨어뜨렸다. 트루먼과 마샬은 장제스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컸다. 미국식 정치개혁은 커녕 연합정부 구성을 외면하는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하여 불만과 불신의 감정이 컸다. 트루먼은 웨드마이어의 건의를 보고 보고서를 2년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의 노골적인 지원이 소련을 비롯한 공산진영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킬까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국민정부에 대한 군수물자 제공및 차관에 관한 협정을 계속 확대하였다.

    미국은 국민정부와 ‘중미구제협정’ ‘중미 해군협정’ ‘중미 경제원조에 관한 협정’ ‘중미 농업협정’등에 조인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무기금수조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미국은 내전이 폭발한 직후인 1946년 7월부터 1947년 5월까지 새로운 무기와 군수품의 선적을 거절하였다.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미국의 노력을 장제스가 노골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국민정부군이 무기나 군수품 부족으로 하여 패배했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은 이미 39개 사단이 모두 미제 무기로 완전 무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무기를 주었으며 나머지 많은 사단들도 잉여무기를 제공받았다. 어쨌든 중국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무기 공급은 1948년 4월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재개되었다.

    <각주>

    1. 홍샤오로우(红燒肉) : 돼지고기 삼겹살을 고추에 버무려 찜한 요리이다. 본래 저장성 요리라고 하는데 마오쩌둥이 찾는 것은 모씨 홍샤오로우(毛氏红燒肉)로 후난성 샹탄의 자기 집안에서 먹던 요리이다.

    2. 중국 남당의 이욱(李煜)의 시이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