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진압, 피로 강요된 신자유주의 기원
        2006년 07월 08일 0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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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서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 축적구조가 시작된 것은 바로 1980년 광주항쟁의 진압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의 세계화 추진이나 1997년 외환위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한국의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 기원을 1980년 5월 광주진압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신좌파의 상상력>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연구소(소장 조희연 사회과학부 교수, 사회학)가 7일 성공회대 승연관에서 개최한 7월 포럼(레디앙 후원)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미국 대사관의 자료와 세계은행의 통계, 그리고 1980년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의 회고 등을 토대로 당시 미 대사관의 주요 관심사는 한국의 경제자유화와 미국 은행들의 지속적인 투자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발제문 요약.

    신자유주의와 광주항쟁(Neoliberalism and the Gwangju Uprising)

    한국에서의 반미는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미국이 전두환을 지원했으며 신군부가 광주를 진압하는 것을 조장했던 것이 명백해지자 반미감정은 급속히 확산됐다.

       
    ▲ 80년5월17일 광주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진압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연합뉴스
     

    광주항쟁 이후 광주와 부산의 미문화원에 대한 공격이 있었고 서울의 미문화원이 학생들에 의해 점거되는 일도 벌어졌다. 1986년 인천에서, 그리고 1987년 6월의 대항쟁에서도 반미 구호가 뚜렷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해질수록 반미는 사라질 것으로 기대했으나 2002년 한국과 미국 사이의 월드컵 경기가 있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폭력사태를 우려해 경기장에 가지 않기로 결정할 정도로 반미는 심각했다.

    이 즈음에 생일파티를 하러 가던 두 명의 여중생, 심미선과 신효순이 미군 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고의 책임이 있는 미군 병사들은 미군 법정에 섰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무죄로 풀려나자마자 기자들과 만났을 때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던 것이다. 수개월 동안 서울에서 촛불시위와 미군부대 밖 시위가 벌어지자 부시 대통령이 공식적인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북한을 공격했을 때 한국의 대응을 묻는 질문에 북한을 도와야 한다는 응답(40.9%)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는 응답(41.3%)과 비슷한 분포를 보였다.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철수(47.3%)와 계속 주둔(51.6%)이 비슷하게 나타났다. 한반도의 통일을 가장 반대하는 나라로는 미국(35.3%), 일본(35.2%), 중국(13.4%)의 순이었다. 또 53%는 미국에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봤다.

    가장 최근에는 용산의 미군기지를 평택으로 확장이전하는 것을 놓고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5월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병사들이 피난민을 사살하겠다는 존 무초 대사의 편지가 보도됐다.

    한국의 반미는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행동에 의해 촉발됐다. 군부독재가 무너진 이후 국회가 처음으로 한 일은 광주청문회를 개최한 것이었다. 아직도 논란중에 있는 미 국무부의 광주백서에서 미국은 특전사가 광주로 이동하는 것을 사전에 알지 못했고 그럴 권한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 백서는 반미감정을 다시 촉발시켰다.

    피로 강요된 신자유주의 축적구조

    한국인들은 정치체제의 자유화를 원하고 있었지만 미국 정부는 한국경제의 자유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자 ‘레이거노믹스’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정부가 대기업 성장을 촉진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론) ‘공급측면 경제’ 등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정책이 추진됐다.

    글레이스틴 대사는 광주가 진압된 지 3일 후인 5월30일 미 상공회의소가 발행하는 <네이션스 비즈니스> 6월호에 보낸 기고에서 “한국 경제는 지난 20년 동안의 급성장에서 안정적이고 시장지향적인 경제로 변모할 것”이라며 “한국 경제발전의 다음 단계는 강력한 중앙통제의 경제에서 시장의 힘에 의지하는 자유화”라고 지적했다.

    ‘중앙통제’에서 ‘시장의 힘’으로의 이전은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 개혁이나 1997년 동아시아에 몰아닥친 IMF 위기로 이어졌다. 이로써 광주항쟁 진압의 의미는 새로워진다. 그것은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피로 강요한 것이었다.

    1980년 5월22일 오후 4시에 열린 백악관 회의에서 광주항쟁 진압이 승인됐고 이와 함께 미 핵발전 설비 수출과 서울지하철 확장 등을 논의하기 위해 존 무어 미 수출입은행장이 6월에 방한하는 것도 승인됐다.

    광주진압 이후 핵발전 설비 수출 로비

       
    ▲ 83년 11월 청와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후 손을잡고 나란히 회의장을 나서는 전두환과 레이건 ⓒ연합뉴스
     

    안보와 경제 이슈가 한 자리에서 결정된 것은 두 문제가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몇 시간 뒤인 5월23일 서울에서는 글레이스틴 대사가 박(충훈) 총리에게 “단호한 폭동진압 조치”를 취할 것을 충고했다. 워싱턴에서는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이 카터 행정부는 “남한에서 안정과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카터 대통령은 5월31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안보 이익이 때로는 인권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의 경제적 관심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고, 종종 안보우려에 가려져 있었다.

    미국 내 반핵운동으로 핵발전 설비들이 갈 곳을 잃은 상황에서 남한은 편리한 해결책이 됐다. 이미 한국은 수출입은행의 최대 채무국이었다.

    광주학살이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존 무어 수출입은행장은 서울을 방문해 웨스팅하우스(미국의 전력회사)를 위해 로비를 했다. 같은 시기 캘리포니아 지역 농업 관련 산업은 남아도는 쌀을 한국에 수출하기를 원했다. 64만4천 톤의 쌀을 팔기 직전에 캘리포니아 농민들은 톤당 1백 달러씩 가격을 올렸다. 또 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아메리칸 홈 인슈어런스 그룹과 판 아메리칸 항공 또한 한국 시장 진출을 위해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미국의 조장 하에 ‘정화’ 사업 실시

    6월3일 무어와 글레이스틴이 총리와 만났을 때 전두환 장군은 광산노련 최정섭 위원장을 사퇴시키려고 압력을 넣었다. 미 대사관은 최정섭에 대해 “한국노총 사람들 가운데 보다 자주적인 성향의 노조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노조 돈 횡령을 이유로 들었지만 최정섭은 사북 광부들의 파업에서 어용노조에 반대하는 쪽을 지원한 전력이 있었다. 미국의 조장 하에 전두환 정권이 실시한 ‘정화’ 사업으로 광산노련 21명의 지도부 중 17명이 해고됐다.

    광주항쟁 진압은 한국에 신자유주의 축적체제를 피로 강요한 사건이다. 미 대사관 문서와 세계은행 데이터는 1980년대에 한국에 신자유주의가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는 미 대사관이 한국의 경제학자들보다도 먼저 한국경제의 향후 경로를 그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미국 보스턴에 있는 웬트워스 공과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있으며, <새로운 사회과학 New Political Science>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또 정치적 변화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결성한 비영리조직 ‘새로운 정치학을 위한 코커스’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국제적인 연대 실천에 힘을 쏟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이후, 1999)과 <정치의 전복 : 1968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이후, 2000) 등이 있다. 2000년 광주항쟁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는 <광주 코뮨 : 20년 이후>를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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