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여기는 '맹금류 축사',
    힘겹게 올라 똥물 마시며 계면쩍게 웃다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2019년 05월 06일 0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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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는 누구인가? 최근 20대 남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한창이다. 반페미니즘, 정부 지지율 이탈 원인을 분석하며 자주 거론되곤 한다. 청년세대와 ‘쯧쯧세대’의 이견은 평창올림픽 단일팀 논쟁 때도 있었다.

    한국사회에 청년 담론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다. 다소 거칠게 훑자면 2007년 ‘88만원 세대’로 청년 빈곤이 가시화되면서 청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와 ‘루저’, 김예슬의 대학 거부 선언, 아프니까 청춘이라며 ‘노오력’을 다해 ‘넘사벽’에 도전하라, ‘소확행’ 등 청년들에게 낭만을 부추기다 가라앉는 세월호를 통해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을 확인시켰다. 구조조정, 노동유연화를 겪으며 청년들은 공동체 감각을 잃었고 ‘헬조선’ ‘수저 계급론’이 팽배했다.

    수렁에 빠진 청년에게 386 운동권은 “청년이여 토플 책을 덮고 짱돌을 들라”며 청년 당사자 운동을 설파했지만 이를 비웃듯 소위 반테제 정서 일베, 청년 우경화, 혐오 정치가 창궐했다. 청년 프레카리아트 노동은 노오력의 배신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카스트 하에 청년은 불가촉천민임을 확인했고 헬조선에서 탈조선 만이 유일한 출구였다. 정치권에선 청년 팔이에 여념 없이 연대를 요청하며 필요할 때만 청년을 들먹였다.

    이 엄청난 잡음의 장본인들은 청년이 아니라 기성세대였다. 이들은 냉소주의의 깊은 그늘로 청년담론을 제 각각 전유했다. 노동시장에서만 청년 착취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탁상공론과 사회학적 언설 내에서도 청년담론은 착취의 대상이었다. 이미 파이를 먹어치운 기성세대는 안락한 책상에 앉아 펜대 굴리며 자기 꼴에 비등한 꼴값에 전념했다. 청년문제를 해결하겠답시고 기성세대의 가늠자로 청년을 해부하는 동안 바뀐 건 없었다. 희망은 차라리 기만에 가까웠다. 불안정한 생존의 위협 속에 어디선가 썩은내가 진동했다. 미각과 후각이 마비된 어른들이 결코 모를 악취가 분명 ‘여기’ 있었다.

    「상류엔 맹금류」의 ‘나’는 제희와 오랜 연애를 했고 자연스레 제희의 가족사도 알게 된다. 제희 아버지는 폐암 투병중이고 그런 아버지를 돌본다고 어깨 통증과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어머니와 제희 위로 누나가 넷 있다. 제희 아버지는 제희가 어릴 적 사기를 당해 큰 빚을 진다. 가족은 흩어지지 않고 꿋꿋이 빚을 갚으며 살기로 한다. 자식들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도망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제희 부모들은 장차 며느리가 될 화자에게 과거사를 들려준다.

    “제희네 부모님은 왜 도망가지 않았을까, 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지 않았을까.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심뿐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보았을까. 빚을 떠안으면서 딸들에게 짐을 지운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을까. 자신들의 양심과 도덕에 따랐지만 딸들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는 부도덕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문학동네, 2014, 14쪽.)

    제희 부모의 도덕적 선택이 ‘나’에겐 부도덕으로 다가온다. 제희 부모님과 수목원에 가게 된 ‘나’는 가는 길 내내 불편해한다. 제희네 아버지가 신분증을 두고 온 일을 제희 어머니는 지나치게 타박했고 제희 어머니는 산책하기에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해 제희가 이고 다니게 했다.

    제희 어머니는 어린 시절 전쟁을 겪었다. 피난길에 폭탄이 터져 부모 형제 몸이 조각나는 전쟁. 어린 제희 어머니 등에 포대기로 감싼 막내가 피난길에 새카맣게 그을려 죽는 그런 전쟁 말이다. 슬펐냐는 제희의 질문에 제희 어머니는 말이 없다. ‘나’에게 제희 어머니는 전쟁고아에서 햅번 스타일로 머리를 만 여인, 오십견으로 고통받아 다리를 저는 노부인 사이에 서 있다. 제희 아버지도 그저 작고 인자한 노인일 뿐이다.

    그(아버지)는 부지런했고 주어진 일을 필요 이상으로 꼼꼼하게 처리했으며 한자리에서 긴 시간을 들여 해내야 하는 일을 잘했다. 보수정당의 오랜 지지자였으며 정치를 말할 기회가 있을 때는 약간 들뜬 채로 보수 성향의 신문에서 사용하는 어휘로 말했고 일기를 썼고 신문을 스크랩했고 재활용품을 깔끔한 솜씨로 손수 분리했고 밤에는 머리맡에 낡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두고 누웠다. 23쪽.

    수목원 산책은 힘겹다. 제희는 다쳤고 지쳤다. 모든 것이 곤욕스럽다. 하나부터 열까지 덜그럭 댔다. 이들에게 들은 과거사는 ‘나’에게 계속 사나운 심정을 준다. 끔찍하게 더운 날씨 탓에 제희 어머니는 짜증을 낸다. 제희 아버지는 공공장소의 규칙 같은 것은 문제 되지 않는 듯 출입 제한 영역인 계곡 쪽으로 내려가 돌을 옮기고 굵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을 만든다. 관리인이 그래선 안 된다고 했지만 “알겠다 이것만 다 먹고 올라간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인다. 제희네 부모님’은 “본래 이런 데 놀러 와서는 이런 물 옆에서 밥을 먹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밥을 먹는 일이 끔찍하게 싫다.

    나는 거기 내려가는 게 싫었다.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공공의 장소라는 검열도 작동했으나 무엇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장소가 싫었다. 나는 그곳에서 분명히 뭔가가 비참하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수목원이지만 본래는 숲이니까. 눈물이 날정도로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나는 말렸다. 28쪽.

    제희 부모님이 먹어도 되는 물이라며 목을 닦고, 입을 헹구고, 발을 씻은 그곳은 “맹금류 축사”였다. 나는 그 이상한 광경, 이상한 장소에 자리를 펼치고 밥을 먹고 있는 노부부와 울적한 젊은 남자, 그리고 그들을 등지고 앉은 ‘나’를 생각하다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나’는 그날 자신이 했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28쪽.

    당신들과 그 물을 함께 마시며 살기 싫다. ‘나’의 고백이다. ‘맹금류 축사’란 강한 짐승이 약자를 잡아먹고 배설한 똥물이다. 숲 상류에 힘겹게 올라 똥물을 마시며 계면쩍게 웃는 삶이다. 제희와 제희 누나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간 선한 무능에 악취가 난다. 단순히 당신들의 고통을 몰라서가 아니다. 어디선가 끈적하게 짓무르고 썩어가는 생의 악취를 몸속 깊숙이 맡아봤기 때문이다. 거기엔 어떤 수사도 불가능하다. 끔찍한 곤욕과 싫음, 수치가 현현한다. 제희 부모와 제희. 그리고 그런 제희를 사랑한 ‘나’ 모두 같은 계급이다. 다른 계급이 먹고 배설한 똥물을 마시며, 먹을 수 있는 물이라 착각한 채 살아가는 삶이다.

    이 불행한 삶에 내던져진 청년들의 후각과 미각은 예민하다. 불길한 전조를 모르는 척하다간 ‘나’도 그 똥물을 마시며, 자살도 도주도 모르는, 제 부모에게 잡아먹히고도 부모가 돼서 제 자식을 잡아먹는, 그리하여 질기고도 내밀한 가난을 대물림해야 한다. 섬뜩한 무책임 속에 서로를 방치한 시궁창으로 들어가야 한다. ‘뭔가가 비참하게 죽었을’지 모르는 그 습하고 부패한 똥물을 식수로 받아 마시는 삶, 생활은 없고, 생존만 남은 삶을 그래도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그저 사람 좋게 웃는 내 부모들처럼.

    자발적 신용불량자, 임시거처 안에 홀로 표류하는 비공식 난민, 비수도권에 살고 있는 청년들은 ‘똥통’, 가축처럼 직장에 길들여진 ‘사축’ 등의 신조어로 현실을 비관한다. 청년층 설문조사 결과 ‘차라리 모든 게 다 붕괴하고 다시 시작하길 원한다’ 는 청년이 압도적 다수다. 청년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온갖 언설 속에서 이들은 말한다. 이 세계는 강자가 포식한 뒤 싸질러 놓은 ‘똥물’뿐이라고.

    기성세대는 노력이 곧 정의라며 청년들에게 공정을 설파한다. 비정규직 청년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못한’ 상태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자본을 추구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에서 못할 게 뭐 있느냐, 우리 손으로 산업화도 일궜다, 부모는 채근한다. 경쟁을 뚫고 사회에 나와 가치 혼재를 겪는다. 그만둘 수도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 체념과 좌절, 절망이 일반화된 일상에서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손 쓸 수 없이 퍼진 환부를 도려낼 수도 없고 해결할 수 없어 죄의식을 내면화한다.

    죽이는 자와 죽는 자, 더 나아가 죽여서 먹는 자와 죽어 먹히는 상류엔 똥물이 가득하다. 제1야당은 기득권 사수를 위해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든다. 비난과 야유로 응수하지만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114석을 가진 야당이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이 옳다는 선량한 제희 부모에 의해, 산업화 민주화 IMF를 견뎌낸 또 다른 부모들에 의해, 강자는 더 강해진다. 약자를 밟고 상류로 간 강자들은 잔뜩 먹고 배설해 아래로 똥물을 흘려보낸다. 먹는 나와, 먹히는 나를 교체하며 상호 살육을 일삼는 동안 청년들은 죽기 전까지 여러 번 죽임을 당한다.

    청년이여 분노하라? 분노는 쉽지 않다. 상처와 불신이 버젓이 있어도, 지난한 세월 부모는 서글프도록 선량했다. 자발적 착취를 감내하며 애써 보이지 않는 희망을 말해왔다. 그러는 동안 쇠약해져 버린 부모의 존재가 청년을 추궁하고 심문한다. 이 고통의 연대에 휘말린 청년들은 영문 모를 죄의식에 뒤채인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 다. 상황을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이들은 청년이 아니다. 당신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어 이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다.

    어려운 시절 고통을 감내하며 상류에 올라 겨우 자리를 편 곳은 맹금류 축사였다. 끝내 자식들은 모를 거라 생각한 부모들. 환부에선 악취가 난다. 시대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는 그들의 선한 거짓이 눈물 날 정도로 싫다. 실상 감당할 수 없는 진실 앞에 마주 서야 할 것은 청년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아니었을까.

    기성세대여, 이제 저간의 사정을 고하자. 이런 시대에 삶의 조건을 만든 장본인이 나였다고, 빼앗길 때마다 더 빼앗기 위해 분투했고, 불리할 때마다 번번이 복무하고 공모했다고, 우리가 망실해 온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실직고 하자. 설령 비루한 진실과 마주할 지라도 자기모멸의 궁지로 내려가 시대의 책무를 다시 생각하는 일. 그리하여 희망 없는 젊음의 초상 앞에 맨얼굴로 나서는 일. 그때 비로소 그들의 곤경과 교섭을 시작하자. 청년문제는 단순히 ‘청년’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문제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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