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넘은 짓 아니다. 교조적 비판 그만 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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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06일 10: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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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출산·고령화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협약’에 대한 시민사회의 평가가 여러 갈래로 제기되고 있다. ‘협약이 정부 기본계획과 다르지 않다’는 비판적 평가와 ‘아쉬운 점이 있지만 구체적 성과와 진전을 보았다’는 긍정적 평가가 엇갈린다. 상반된 양측면의 평가 모두 일부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다소는 수긍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다. 지난주 시민의 신문 칼럼을 통해 <레디앙> 이재영 기획위원이 주장한 일부 문제가 그러하다. 참여연대의 실무대표로 협약 전 과정에 참여한 필자로서는 해명과 반론의 필요성을 느낀다.

    이재영 위원은 정부의 저출산 기본계획을 비판했던 참여연대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협약에 참여한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 가지 사실은 이 위원도 짐작한 바처럼 참여연대 내적으로는 협약 참여 여부가 최종 순간까지 논란거리였다는 점이다.

    협약 내용과 그 절차가 흔쾌히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성과조차 과소평가될 이유는 없다. 국공립 보육인프라 확충이 지난 10년간 언명 수준으로 표류하고 정부 기본계획 조차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서 최소한 3조원 이상 재원이 투여될 보육시설 확충목표를 확고히 한 것은 이번 협약의 최대 성과의 하나이다.

    아동수당제도 도입도 그렇다. ‘아동수당제도 도입 시기를 검토한다’는 협약 문구가 다소 불만족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더 이상 도입의 필요성과 효과에 대한 지루한 논란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전히 경제계 등에서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협약의 결론은 아동수당제도 도입 필요성 논란을 넘어선 것이다. 이 위원이 지적한 ‘효도는 나라의 근본 운동’, ‘결혼 장려운동’, ‘출산서약’등의 우려스러운 단어들은 일부 단체가 각자 실천계획으로 언급한 것일 뿐 협약의 본 내용과는 상관없는 것들이다.

    이 위원은 협약의 모태가 정부의 기본계획이라고 지적했다. 다 지은 집에 벽돌 한 장 더 얹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문제제기다. 이 같은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자. 기존 정책과의 완전한 단절만이 협약의 순수성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큰 방향을 돌려놓고 핵심요소를 플러스하는 것으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이나 아동수당제도만이 협약의 성과는 아니다. 근래까지 정부 기본계획상 언급되어 오던 ‘보육료 상한규제 예외시설 허용’ 일명 ‘보육료 자율화’라는 시장화 방침은 협약 과정에서 사실상 철회되었다. 정부 기본계획에 보육의 시장화가 포함된다면, 노동계와 여성계 그리고 시민단체가 협약체제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일관된 방침이었다.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필수 조건의 하나인 ‘산전후 휴가’와 ‘육아휴직’의 비정규직 확대를 협약에 명시한 것도 작지 않은 성과다.

    더 중요하게는 출산과 양육이 개인과 가족의 책임이 아닌 사회화의 영역이며 남녀가 동등하게 일과 돌봄을 분담하는 것이 문제해결 방향이라는 전환의 계기를 만든 것이 이번 협약을 그간의 정부 정책과 동일시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위원은 시민사회단체들이 사회협약의 주체일 수 없으며, 협약 참여를 ‘주제넘은’ 행동으로 평가했다. 임금, 성장, 고용, 복지 등에 대한 노사정 3자간의 거시적 협의와 교환의 틀인 사회적 대화체제에 헌법적 시민권이나 대표성이 없는 시민단체가 노동조합을 흉내 내며 개입해 협약을 누더기로 만들고 사회적 합의주의(Social Corporatism)의 왜곡을 가져왔다는 비판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대화체제가 역사적으로 3자주의(Tripartism)에 기초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선험한 나라들의 사회경제 구조와 사회적 대표성에 근거한 것일 뿐 교조(Dogma)가 될 수 없다.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10%에 머물러 있고, 기업별 교섭체제를 갖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최소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서고 강력한 산별체제와 중앙교섭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서유럽 국가들의 경우처럼 노사정 3자만이 사회적 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과연 타당한가?

    이 같은 주장은 또한 사회적 협의와 협약의 추세가 나라별로 사안별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최근의 경향을 간과한 원론일 뿐이다. 이 위원이 3자주의의 근거로 제기한 ‘대표성’의 논리 즉 노사정이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정책의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이며, 협약이행의 강제력을 갖고 있다는 것도 교과서적 일반론이다. 오히려 한국의 노동운동이 그동안 복지와 조세, 여성, 가족과 같은 일반적인 사회정책의 진전에 어떤 책임성과 대표성을 보였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위원은 사회협약 또는 사회적 대화가 ‘시기상조’임을 지적했다. 노동운동 입장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는 유의미한 중기전략이지만, 현재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계급타협의 이니셔티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좋은 지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이니셔티브를 확보할 것인가?

    그 해답은 사회연대적 실천에 있다. 주제넘은 얘기겠지만 이 위원이 언급한 ‘계급투쟁’의 현재적 핵심은 노동운동이 ‘양극화해소’와 같은 당면한 사회경제 개혁의 요구를 정치적, 정책적으로 내재화하고 사회연대적 실천을 선도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문적 사회협약에 참여하는 것이 유의미한가는 의제와 사안에 따라 판단하면 되는 그다지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정작 문제는 주체의 현실이다. 민주노총이 수년째 표방하고 있는 ‘사회개혁투쟁’은 손쉽게 ‘합의주의’로 매도되고 소모적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중운동은 이 현실에 발목이 잡혀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돌이키기 싫은 장면이지만 지난해 거듭된 민주노총 대의원 대회의 파탄은 노동운동 내부만이 아닌 이를 지켜본 건강한 시민들의 신뢰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 657호에도 같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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