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미의병, 맥켄지 그리고 조용익
    [역사의 한 페이지] 제천에서 납치된 통역관 찾기
        2019년 05월 03일 09: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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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한 페이지㉓] 진관사, 우남사 그리고 우남역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들을 위해 감시를 해 주고 있습니다…….우리들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F.A. 맥켄지. [조선의 비극] 중

    1907년 한 푸른 눈의 서양 기자가 의병들을 찾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맥켄지(Fredric A. Mckenzie), 런던 데일리 메일의 아시아 특파원이었다. 39세의 스코틀랜드계 캐나다인이었던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의병의 전투 지역을 실제로 여행했던 유일한 백인’이었다. 의병을 직접 만나기 위해 경기도·충청도·강원도의 산중을 헤매며 취재한 그는 의병 활약상을 생생한 르포 형식의 기사로 서방 세계에 알렸다. 경기도 양평(楊平) 부근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맥켄지는 바로 양평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그곳에서 한 무리의 의병 부대를 만나게 된다. 의병장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그가 물었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줄 알면 일본군이 틀림없이 이리로 올 텐데, 야간 공격에 대한 어떤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나요? 보초는 세워 놓았나요? 개울 쪽 도로는 방비하고 있습니까?”

    글의 앞머리에 인용한 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의병장의 대답이었다.

    [사진] 왼쪽은 의병을 취재했던 F.A. 맥켄지, 오른쪽은 맥켄지의 저서 [조선의 비극]에 실린 의병 사진이다.

    1907년 이렇게 맥켄지가 의병들을 찾아다니고 있을 때, 당시 충청북도 관찰부(觀察府; 오늘날의 도청)에서도 행방불명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용익(趙容益), 당시 일본어 통역관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이 조용익에 관한 것이다.

    2017년 3월경 재미있는 문서 하나를 수집하였다. 대한제국기 등사본 훈령(訓令)으로 발신자는군수 윤태흥(尹泰興), 수신자는 산내이상면장(山內二上面長) 송영수(宋榮洙)였다. 충청북도 관찰부에서 내려 온 훈령을 받은 군수 윤태흥이 다시 관내의 면장들에게 하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충청북도에서 ‘산내이상면’을 검색해보면 청주군에 소재하고 있던 면(面) 지역이다. 이를 통해 윤태흥은 당시 청주 군수였을 것이다. 윤태흥이라는 이름 밑에 찍인 도장을 자세히 보면 ‘청주군수’라는 한자도 확인할 수 있다. 훈령은 제천군에서 ‘폭도’에게 붙잡혀 간 통역관 조용익의 생사를 알 수 없으니 철저히 수색할 것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훈령이 내려진 시점은 융희 원년, 즉 1907년 11월 13일이었다.

    훈령은 이렇게 시작한다.

    산내 이상면장 송영수 좌하(座下)

    금일 간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 통역 조용익은 본래 경성 서린동 63통 4호 사람으로 올해 9월 9일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제천군에 출장 왔다가 동월 22일에 폭도에게 포박(捕縛)되어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未詳)하기로……..

    [사진] 청주군수 윤태흥이 이상면장 송영수에게 내린 훈령이다. 가로 34cm, 가로 28cm 크기로 한지에 등사한 문서로 군수이름과 면 이름, 면장 이름만 직접 붓으로 적었다. (박건호 소장)

    1907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서 속의 ‘폭도’는 누구를 말하며, 통역관 조용익이 납치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조용익이 납치된 지역 ‘제천’은 어떤 곳인가?

    112년 전 1907년으로 돌아가 보자.

    정미의병, 의병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다

    1907년 7월 20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황제 양위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하는 일본의 강압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구 황제 고종과 신 황제 순종 모두 이에 항의하여 양위식 불참을 결정한다. 이에 일본은 내시들에게 황제 복장을 입힌 채 행사를 강행하였다. 황제 없이 황제 아바타들로 진행된 기묘한 형식의 양위식이었다. 이 고종 퇴위에 분노한 대한제국의 신민(臣民)들은 즉각 의병을 일으켰다. 이 해가 정미년(丁未年)이라 역사에서는 이를 정미의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의병 봉기가 발발한 지 며칠 뒤 여기에 기름을 붓는 일이 일어난다. 황제 양위식 나흘 뒤인 7월 24일 일제는 새로 즉위한 순종을 강압하여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데, 이 조약의 비밀각서에는 ‘군대 해산’이 규정되어 있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전 미리 무장 해제를 해놓겠다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순종 황제는 7월 31일 군대 해산 조칙을 내린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비용 절약을 위해서 군대를 해산하겠다니!

    국방보다 더한 ‘오늘의 급선무’가 뭐란 말인가? 일본의 강압 때문에 군대를 해산한다고 하더라도 그 해산 이유치고는 너무 군색한 것이었다. 해산 조칙 다음날인 8월 1일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이 군대 해산식에 참여한 군인에게는 모자와 견장을 회수하고 고향에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대신 하사에게는 80원, 병사 1년 이상자에게는 50원, 1년 미만자에게는 25원의 은사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무기를 반납하고 군대 해산식에 들어가던 군인들에게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참령 박승환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여 권총으로 자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군인들은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사들은 반납했던 무기를 다시 회수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진] 왼쪽은 1907년 황제 양위식을 보도한 이탈리아 화보신문, 오른쪽은 군대 해산 직후 대한제국의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을 보도한 프랑스 화보신문이다. (박건호 소장)

    해산 군인들의 저항은 8월 이후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이어졌다. 고종 황제 퇴위를 계기로 이미 시작된 의병운동이 군대 해산을 계기로 더욱 활성화된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간 시위대 군인들이나 각 지방 진위대 군인들은 무기를 지닌 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차츰 충청도, 호남 일대로 내려가면서 의병 부대에 합류하거나 아니면 직접 부대를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다. 을미의병, 을사의병에 이어 이제 시즌 쓰리(3)로 마지막을 장식할 정미의병이 본격화되는 순간이었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와 이 땅의 국권을 지키려는 의병세력은 바야흐로 마지막 결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이미 그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소박한 무기들로 강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는 어차피 불가능한 꿈이었을지 모른다. 패배와 죽음이 예정된 전투였기에 이들의 항쟁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맥켄지는 이 ‘측은한’ 의병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매우 측은하게 보였다. 전혀 희망이 없는 전쟁에서 이미 죽음이 확실해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몇몇 군인의 영롱한 눈초리와 얼굴에 감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았을 때 나는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가엾게만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아마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그들은 보여주는 표현 방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은 자기의 동포들에게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F.A. 맥켄지. [조선의 비극] 중

    이렇게 정미의병이 항쟁을 전개하고 있을 때, 대한자강회 등 애국계몽운동 계열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07년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지고 있던 나라 빚 1300만원을 국민성금으로 갚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의병들이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을 추구했다면, 애국계몽운동계열에서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방법은 서로 달랐고 또 서로 상대방을 비난했지만,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공통된 목표는 하나,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이었다.

    스테노카라(Stenocara)!

    아프리카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나미비아 해안에 사는 스테노카라라는 이름의 딱정벌레가 있다. 이 벌레는 척박한 사막지역에서 물을 얻기 위해 물구나무한 채 날개를 활짝 벌려 바다에서 몰려오는 안개 속 습기를 날개 위에 응결시켜 이를 입으로 흐르게 해서 물을 얻는다. 스테노카라가 공기 중에서 습기를 짜내 물방울을 얻듯이, 식민지가 되어가던 가혹한 현실에서 한국인들 다수는 그들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극한까지 쥐어 짜내고 있었다. 의병들은 의병대로, 애국계몽운동계열은 또 그들 나름대로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해보려고 마지막 힘을 모으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인들을 스테노카라 딱정벌레로 비유한다면, 이는 너무 짠한 비유일까?

    의병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제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당국은 광주 시민과 시민군을 ‘폭도’로 불렀다. 물론 지금도 이렇게 부르고 싶은 자들도 있다. 1907년 당시 국권 회복을 위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이들을 우리는 ‘정미의병’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일제와 친일파 관료들이 장악한 정부에게 이들은 ‘비적(匪賊)’이나 ‘폭도(暴徒)’일 뿐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훈령에서 조용익을 포박해 잡아간 사람들, 즉 ‘폭도’로 불린 이들은 다름 아닌 이 정미의병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조용익이 잡혀간 곳은 제천 아니던가. ‘제천’은 정미의병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천이라는 지명 때문에라도 훈령 속 ‘폭도’가 정미의병이었음은 더더욱 확실해진다.

    충북 제천(堤川)은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 중의 하나였다. 제천에서 의병으로 활동했던 회당 박정수(朴貞洙)가 했다던 “제천은 의병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고장”이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제천 의병의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1907년 8월 제천 천남전투였다. 윤기영, 민긍호, 오경묵, 정대무, 이강년 등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 부대들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4시간이 넘는 접전을 벌여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13명을 부상시킨 전투였다. 며칠 뒤 일본군은 천남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제천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린다. 트럼프식으로 말하면,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그리고 ‘완전한 파괴(totally destory)’였던 것이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이른 가을 더운 날이었다. 눈부신 햇빛이 시가가 내려다 뵈는 언덕위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쪼이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을 비추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시내와 재의 산더미 위를 걸었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철저한 파괴를 본 적이 없었다. 1개월 전까지는 번잡하고 유복하던 촌락이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기와 조각과 회색의 잿더미, 타다 남은 찌꺼기 더미가 줄지어 있었다. 온전한 벽도, 한 개의 대들보도 파손되지 않은 옹기도 없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재를 파헤치면서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제천은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나는 산길을 따라 이천으로 가는 연도의 마을을 내려다보았을 때 친구들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일본의 폭력수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마을이 차례차례로 잿더미화한 것을 보았다. 파괴는 모두가 완전했다. 단 하나의 집이나 벽도 남아 있지 않았다. 

    -F.A. 맥켄지. [조선의 비극] 중

    초토화된 제천을 취재한 후 쓴 맥켄지의 기록이다. 이렇게 제천은 1907년 정미 의병 당시 일제와 의병 두 세력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지점이었다. 제천 의병을 정미의병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런 역사를 이해해야 왜 지금 제천에 ‘의병전시관’, ‘의병도서관’, ‘의병기념탑’과 ‘의병광장’ 등 의병 관련 기념물들이 수도 없이 들어서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왼쪽은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된 제천의 모습으로 맥켄지의 [조선의 비극]에 실려있는 사진이다. 오른쪽은 2015년 10월 9일 제천시의 의병광장 현판 제막식 장면이다. 의병 역사에서 제천의 비중이나 의미를 알면 이런 기념물들도 예사롭지 않게 보일 것이다. (충청매일 사진)

    다시 훈령이다.

    훈령에 따르면 조용익이 의병들에게 잡혀 갈 때의 직책은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 통역’이었다. 1907년 9월 9일 일본어 통역관 조용익은 제천에 출장을 오게 된다. 당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1905년부터 화폐정리사업이 진행되던 중이었고, 용익은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에 통역을 위해 파견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던 중 조용익은 제천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에 의해 납치가 된다. 그 날은 9월 22일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천은 이미 8월에 초토화된 상태였고, 제천 의병도 나름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일부 의병들은 여전히 제천 일대에서 활동을 지속했던 것이고, 급기야 일본어 통역관 조용익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특히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재정과 금융을 지배해가고 한국인의 화폐자산이 크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화폐정리사업 관련하여 통역을 하던 조용익은 의병들에게 일본의 앞잡이이거나 혹은 일본과 한통속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훈령에 조용익이 9월 22일 “폭도에게 포박(捕縛)되어 잡혀”갔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일 의병들은 조용익을 죽이지 않고 줄로 묶어 데려갔다. 아마 그가 일본어 통역관이라는 특수 직책상 의병들에게 유용한 일본 측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의병들이 일본군을 포로로 잡았을 경우 일본어 통역관이 있으면 심문을 보다 쉽게 할 수도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사진] 1891년 설립된 관립 일본어학교의 교관과 학생들 사진이다. 정부는 이 학교를 통해 일본어 통역관을 양성하였다. 조용익도 분명 이 학교 출신이었을 것이다. 아주 우연히 이 사진 속 인물 중에 조용익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조용익이 의병들에게 잡혀가 행방불명된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용익의 생사는 여전히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경성 서린동(현재 서울 종로구 소재)에 살았던 그의 가족들은 관청에 몰려가 연일 용익을 찾아달라고 울부짖었을 것이다. 한국통감부도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어 통역관에 대한 수색을 요청했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천을 관할하던 충청북도 관찰부에서는 조용익을 수색하여 생사를 확인해 보고하라는 훈령을 도내 각 군에 하달하게 되고, 각 군수는 다시 이를 각 면장에게 훈령을 내리게 된다. 필자가 수집한 훈령문서는 이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조용익은 흉터가 있고, 신체 건강하고 비만”

    이제 그들과 함께 조용익을 찾아보기로 하자.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아직 사진이 일반화되지는 못한 시절이었다. 1883년 서울에 사진관이 첫 영업을 시작한 이래 시간이 꽤 흘렸지만, 아직 대중화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의병들의 얼굴을 그린 벽보를 통해 의병들을 수배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불충분하다. 그러면 무슨 방법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신체 특징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람을 찾을 때 가장 일반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은 이것이었다.

    “피고 정두성, 나이 39세, 키는 중간 정도, 얼굴은 구릿빛이며 수염이 적고 눈이 둥글다. 오른쪽 눈썹 위에 흉터가 있는데 손톱으로 할퀸 듯하며 색은 푸른 색이다.”

    1899년 강화부윤 한인호가 남편 정두성의 지속적인 구타로 음독자살한 나씨의 검안 문서 말미에 붙인 도망간 남편 정두성의 인상착의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 사람을 찾을 때는 그 사람의 신체 특징을 글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조용익을 본격적으로 찾기 전에 옛날 신분증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떠나도록 하자.

    먼저 조선시대 신분증인 호패.

    호패 제도는 조선 초기 태종 때부터 시행되었다. 당시 사진이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호패에 소지자의 신체 특징을 기록하게 했다. 이 호패에는 원래 3품 이하의 관리나 공이 큰 관리의 아들은 관직과 성명, 거주지를, 일반 백성들은 이름과 사는 곳 외에 얼굴빛과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를, 노비는 연령, 거주지, 얼굴빛, 키, 수염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주인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세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번거로웠던지 실제 호패를 보면 그 길이와 폭, 두께가 불규칙하고 그 기재 내용도 제 각각이라 실제의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여러 점의 호패를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 또한 많은 호패들을 박물관이나 책을 통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체 특징을 기록한 호패는 극히 드물었다. 필자가 확인한 것은 단 한 점뿐이었다. 필자 소장의 윤재흡(尹載翕)의 호패이다. 조선 후기로 추정되는 호패인데 윤재흡은 충청도 청양군 정산 사람이다. 무오년생으로 유학(幼學:관직에 나가지 못한 유생)인데, 이 호패에는 다른 호패와 달리 신체 특징을 원칙대로 기록하고 있다.

    호패 뒷면에 새겨진 윤재흡의 신체 특징은 “赤面(적면)”이다. 원래부터 얼굴빛이 붉었던지, 아니면 늘 술을 달고 살았던지 얼굴이 붉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였지만 이 호패를 통해 우리는 윤재흡의 얼굴을 대략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자료이다.

    [사진] 조선후기 윤재흡의 호패 앞면과 뒷면 사진이다. 특히 뒷면에 윤재흡의 신체 특징으로 ‘적면(赤面)’이라고 쓴 부분이 보인다. (박건호 소장)

    지금의 주민등록증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은 1968년이었다. 여기서는 신체특징을 기록한 난은 없다. 그 대신 사진을 붙였다. 그러니 굳이 신체 특징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주민등록증이 나오기 전에도 신분증이 존재했는데, 미군정기의 ‘등록표’와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만들어진 ‘도민증’(혹은 시민증)이 그것이다. 등록표나 도민증(시민증)에는 사진을 붙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 등록표와 도민증에는 신체 특징을 적게 되어 있었다. 사람을 보다 쉽게 구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호패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는 신체 특징을 기록한 것은 매우 드물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신체 특징을 기록하고 있는 신분증은 소수였다. 신체 특징이 기록된 신분증에 적히 기록들은 이런 식이다.

    ‘주근깨’, ‘얼굴 황색’, ‘얼굴 길고 백색’

    [사진] 위쪽의 왼쪽 사진은 미군정기 송손순의 등록표이다. 신체특징란에 ‘주근깨’라고 적혀있다. 위쪽의 오른쪽 사진도 미군정기 정돌출의 등록표로 신체특징란에는 ‘면황색’(얼굴이 황색)이라고 적혀있다. 아래는 이규옥의 경기도 도민증이다. ‘인상특징’란에는 이규옥에 대해 ‘신장 5척3촌, 체격 보통, 눈 보통, 얼굴 장형(長型) 백색(白色), 두발 삭발’이라고 적어놓았다. (위쪽 두 장의 등록표는 코베이 사진, 아래쪽은 자치안성신문 사진)

    조용익을 찾는 훈령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훈령의 마지막 부분이다. 청주군수 윤태흥이 산내이상면장 송영수에게 수색 결과를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에 ‘좌개(左開)’라고 하여 조용익의 용모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인데, 요즘말로 조용익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적어 사람들이 조용익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조용익이 어떤 용모를 가졌는지 훈령 끝 부분을 살펴보자.

    …….(조용익이 폭도들에게) 잡혀간 후로 생사의 소식이 미상하기로 해인(該人; 그 사람)의 용모를 좌개(左開; 좌측에 붙여놓음)하여 훈령을 내리니….훈령 도착 즉시 본 면내에 상세 조사하여 생사간(生死間) 수색 보고하되 없으면 없다고 보고할 것.

    융희 원년 11월 13일

    본(本) 군수 윤태흥

    <좌개(左開)>

    조용익 용모
    나이: 23세
    신장: 5척 3∼4촌
    머리: 비교적 크고 머리 뒤통수가 조금 돌출
    얼굴: 보통이고 조금 네모남
    눈: 둥글고 큰편
    코: 크고 네모짐
    입: 크고 네모짐
    입술: 윗입술은 보통이요, 아랫입술은 두툼한 편
    치(齒): 백색이고 바르게 배열
    눈썹: 보통
    수염: 없음
    머리카락: 단발
    두흔(痘痕; 마마자국): 없음
    기타특징: 머리 오른쪽 뒤에 길이 일촌되는 신일형(新日形; 갓 해가 떠오른 모양)의 흉터가 있고, 신체 건장하고 비만. 일본어를 잘하고 발음이 좋음

    조용익의 인상착의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조용익의 용모가 상상이 되시는가? 우리더러 112년 전 이런 인상착의를 가지고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면 조용익을 찾을 수 있었을까?

    <사진> 훈령의 마지막 부분 사진이다. 여기에서 여러 항목을 나누어 조용익의 용모를 꼼꼼히 설명해주고 있다. 그는 키가 5척 3,4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대략 160∼164cm로 환산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미 단발했음도 확인할 수 있다.

    납치된 조용익은 이후 어찌 되었을까?

    의병들은 그를 데려가자마자 바로 죽였을까? 아니면 의병들에게 끌려 다니다가 일본군이 의병을 진압할 때 같이 죽었을까? 아니면 구출되었을까? 그도 아니면 몇 개월 뒤 탈출에 성공, 경성에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을까? 안타깝지만 우리로서는 더 이상 뒷이야기를 알 수는 없다.

    <참고자료>

    김호, 100년 전 살인사건, 휴머니스트, 2018

    멕켄지 저·김창수 역, 조선의 비극, 을유문화사, 1984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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