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중원으로 출격하다
[국공내전㉔] 삼로대군의 황허 도하
    2019년 05월 02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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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㉓] 경천동지의 반격 계획을 모색하다

마오쩌둥이 해방군의 중원 출격을 결심할 때, 그는 후쫑난 부대의 추격에 계속 쫓기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런비스와 함께 섬북의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내일이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옌안이 점령당한 지 겨우 3개월이 지났다. 후쫑난은 전파추적장치를 이용하여 마오쩌둥의 행방을 쫓았다. 마오쩌둥이 무전기나 전보를 통해 전쟁 지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마오쩌둥은 출력이 강한 무전기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후쫑난 휘하의 맹장 류칸(劉戡)은 수만 대군을 이끌고 집요하게 마오쩌둥을 추격하였다. 류칸의 이름 칸(戡)은 반란을 평정한다는 뜻이다. 국민당은 국공내전을 감란전쟁(戡亂戰爭: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이라고 불렀으니 마오쩌둥을 쫓기에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추적이 얼마나 집요했던지 마오쩌둥은 “내 류칸을 사마의로 만들어 주겠다.”고 농담하곤 하였다. 제갈량이 공성계로 사마의를 놀린 것을 두고 한 말인데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몇 달씩이나 쫓아다니면 증오심이 생길만도 하다. 마오쩌둥은 화가 나면 “류칸은 사마의가 아니다. 사마사다.”하고 조롱하기도 하였다. 사마사는 사마의의 큰아들로 일찍 죽어서 동생인 사마소가 위나라의 병권을 쥐게 되었다. 그 아들 사마염이 위나라를 이어 진나라를 창건했으니 류칸도 마오쩌둥을 잡기만 하면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 내전드라마를 보면 마오쩌둥은 장대비 속에서 말도 없이 도보로 도망친다. 비틀거리고 미끄러지며 섬북의 황토고원을 허덕거리며 달아난다. 국군 추격부대와 산속에서 조우하여 숨도 쉬지 못하고 하룻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노숙도 예사로 하였으며 도망치다가 발 닿는 곳이 곧 숙소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전문으로 작전을 지시하고 공산당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방침을 써냈으니 대단한 의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믿음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 조직과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일수록 그는 언제나 예상 밖의 길을 찾아내곤 하였다. 장정 때에 마오는 몸이 아파 들것에 실려 가면서도 왕밍으로부터 지도력을 빼앗았다. 그는 ‘항일 북상론’을 내세우며 ‘쓰촨 근거지’를 주장하는 장궈타오에 맞서 끝내 자신의 노선을 관철하였다. 섬북을 장정의 종착지로 정한 것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 섬북의 험한 지형 때문에 소규모 군대가 웅거하며 실력을 키우기에 그만한 곳이 없었다.

장제스의 마지막 토벌이 임박했을 때는 뜻밖에도 장쉐량의 ‘서안사변’이 발생하였다. 그때 마오와 저우언라이 등은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는 일부 지휘관들을 설득하며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장제스를 죽이더라도 국민당 내 다른 강경파가 토벌에 나설 것이기 때문이었다. 국공합작 기간 공산당은 근거지를 보존했을 뿐 아니라 착실히 실력을 키웠던 것이다. 이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추격부대에 위태롭게 쫓기는 가운데 오히려 주력을 중원으로 출격시킬 발상을 하였으니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판단과 배짱이 아니다.

마오쩌둥은 내전 전체 상황을 면밀히 살핀 끝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 마오쩌둥이 구상한 중원진출과 따볘산 진격은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이미 1946년 11월에 황허를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황허사령부를 설립하였다. 처음에는 국군의 황허 도하 등을 방해할 목적이었으나 점차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선박의 건조, 황허에서의 작전 등을 전담하게 하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이미 1947년 2월부터 해방군의 황허 도하를 염두에 두고 배를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2월이면 국민당군이 산둥과 옌안에 대한 중점 공격을 펼치기 시작할 때였으니 그 준비와 면밀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이 적기에 황허 도하와 중원 출격을 결심하게 된 것은 휘하 지휘관들의 이런 대비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장제스의 병력 운용은 다소간 경직되어 있었다. 그는 1947년 상반기에 휘하 병력중 60개 사단을 산둥을 비롯한 화동지역에 배치해 두고 있었다. 20개 사단은 좁은 섬북에 배치하여 마오쩌둥을 잡고자 하였다. 이른바 전면공격에서 중점공격으로 전환한 뒤의 부대 배치였다. 장제스가 보기에 산둥은 공산당 군사의 중심이었으며 섬북은 정치 중심이었다. 장제스는 늘 “산둥의 비적을 섬멸하면 내전에서 군사문제의 십분지 육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장제스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자신의 전쟁 방침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전쟁은 결국 물력과 인력의 싸움이다. 공산당 근거지를 빼앗으면 병력 보충과 보급을 할 수 없게 된다. 마오쩌둥은 장기전을 하려 하지만 조만간 근거지 없이 떠도는 비적이 될 것이다.” 장제스의 지론은 일면 당연한 것이었다. 내전이 발발한 뒤 일년간, 주요 전투는 언제나 공산당 근거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장제스는 전국의 전황이 아직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주력을 황허 너머로 보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내전 드라마에서는 국방부장인 바이충시가 “만약 공산군이 황허를 도하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잠시 언급하는데 모두 묵살하거나 부인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바이충시가 탁월한 군사가였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황허는 공산당과의 대치 길이가 2,000킬로에 달하지만 24개 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장제스는 황허가 천연의 방어선이므로 공산당 대군이 감히 도하하여 남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였다. 지금까지 공산당이 그렇게 대규모로 공격에 나선 경험이 없으므로 그의 판단이 무리는 아니었다. 나중에 40개 사단으로 증원하였지만 해방군의 황허 도하 및 중원 출격은 그의 머릿속에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상대는 상식을 거부하는 마오쩌둥이었다. 황허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장제스는 또 한 번 쓴맛을 보게 되었다.

류덩 대군, 황허를 건너다.

“수도를 빼앗기고 자신은 쫓기지만 전국의 전황은 나쁘지 않다.” 마오쩌둥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947년 6월, 만주에서는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이 주도권을 되찾았으며 산둥의 천이와 쑤위도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하고 있었다. 이제 마오쩌둥은 중원지역에 가장 가까이 있는 류보청, 덩샤오핑의 진기로예(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성을 관할) 야전군을 중원으로 진출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으로 서북의 요지인 위린(柳林)을 공격하여 후쫑난군이 류덩의 대군을 뒤쫓지 못하게 할 계획이었다. 마오쩌둥과 중공 중앙은 천겅과 셰푸즈의 병단에 병력을 더해 10만명으로 독립집단군을 편성하였다. 천겅의 부대는 후쫑난군을 견제하고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 작전에 호응할 예정이었다.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은 중원쪽을 넘보게 하여 국군의 병력을 붙잡아 둘 계획이었다.

류덩 대군의 황허 도하를 두고 마오쩌둥은 이렇게 비유하였다. “장제스가 섬북과 산둥을 공격하려고 두 주먹을 한꺼번에 뻗었다. 그럼 가슴이 텅 비지 않소? 빈 가슴팍에 한방 먹여야지. 하하하.” 마오쩌둥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피난처인 샤오허춘에 주요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병력배치 계획을 의논했던 것이다. “결정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회의 때 마오쩌둥이 한 말이었다. 류덩 대군에게 황허를 건너라고 지시했지만 준비된 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류덩 대군이 도하할 수 있는 지역의 배는 국군이 모두 거둬들여 파괴하였다. 황허 도하 지점은 강폭이 넓어 나룻배를 이어붙인 부교를 놓을 수도 없었다. 해방군은 부득이 배를 새로 건조하여 건너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뱃사공으로 해방군을 실어 날랐던 허난성 타이쳰현(臺前縣)의 왕화이신(王怀信)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국민당군이 민가의 배까지 모두 거둬들여 파괴하였다. 해방군 청사령이 오더니 나를 수병이 되라고 하였다. 말이 좋아 수병이지 뱃사공으로 해방군을 실어 나르라는 것이었다. 청사령은 청셴후이(曾憲辉)로 당시 황허방어지휘부 사령이었다. 당시 그는 류덩 대군의 도하 책임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는 수병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젊어야 한다. 배를 잘 다루는 것은 물론 수영도 잘해야 한다.“고 하였다. 수병이 되었더니 일반병사와 같이 밥도 주고 월급도 주었다. 우리 마을에서만 30여명이 수병으로 입대했다. 모두 같은 옷을 입었으며 저녁에도 집에 갈 수 없었다. 배를 다루고 수영하는 등 훈련을 거듭했다. 해방군은 배를 새로 건조했다. 큰 것은 1개 중대를 실을 수 있었다. 가장 작은 것은 십 몇 명을 실었다. 가장 큰 배에는 수병이 된 뱃사공 10명이 타서 조종했다. 보통 배에는 예닐곱 명의 뱃사공이 탔다. 당시 우리 지역인 타이첸현에만 다섯 곳의 조선소가 있었다. 황허 주위 십리 안에 있는 마을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목재를 벌채해왔다. 우리는 마을 뒤의 나무그늘에서 작업을 하였다. 국민당군 비행기가 보면 폭격을 하기 때문에 조선공들은 생명을 걸고 일하는 셈이었다. 조선공들은 모두 풍찬노숙을 해서 지내기가 매우 곤란했다. 하지만 모두 신이 나서 일했다. 천로우(陳樓) 조선소에서 길이 8.5장(丈: 중국에서 1장은 3.33미터이다.) 넓이 4장인 가장 큰 배가 완성되었을 때는 경축 행사를 벌였다. 그 배는 ‘애국호’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1947년 7월 4일 밤에 도하할 때 류보청과 덩샤오핑 등 원정군 수뇌부가 탑승하였다. 이렇게 계속 배를 건조하여 천로우 조선소에서만 28척을 만들었다. 타이첸현 전체에서는 120여척의 큰 배를 건조하였다. 그 배는 한 번에 1개 중대 병력과 자동차 다섯 대를 실을 수 있었다. 그 배들은 물 있는 곳에서 몇 리나 떨어진 곳에서 만들었다. 나중에 그 배를 물까지 끌어가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나뿐 아니라 모든 간부와 병사,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배를 끌었다. 그 배를 끌어내고 나서 나는 며칠이나 피오줌을 누었다. 병사와 백성들이 죽을 고생 끝에 배들을 모두 나루터에 옮길 수 있었다.”

그는 자부심에 차서 증언을 계속하였다. “1947년 6월 30일 저녁 해방군이 도하를 개시했다. 내가 탄 배는 선봉호였다. 나와 마을의 동료 다섯 명이 배 앞머리에서 조종했다. 출발할 때 청사령이 우리 어깨를 두들겨 주더니 “두려운가?” 하고 물었다. “두렵지 않습니다. 다같이 건너잖아요.”하고 대답했다. 그때는 황허가 지금보다 물도 많았고 폭도 훨씬 넓었다. 대안에 접근하니 국민당군이 총을 쏘는 등 공격하기 시작했다. 배가 뭍에 닿지도 않았는데 해방군이 물에 뛰어들었다. 우리는 엉거주춤 서서 필사적으로 배를 몰았다. 배에 설치한 해방군 기관총이 대안을 향해 사격하기 시작했다. 해방군이 이쪽(도하시작점)에서 포격하기 시작하자 국민당군이 달아났다. 해방군이 대안을 점령하자 소대장이 백색 신호탄을 쏘았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더니 도선이 일제히 출발했다. 그날밤 우리는 여섯 번이나 왕복하며 해방군을 실어 날랐다.”

왕화이신은 그날 낮에 부상을 입었다. 밤새 해방군을 실어 나르고 낮에 자고 있는데 국군 항공기가 그의 숙소 부근을 폭격했다.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입원 끝에 살아남았다. 그는 신중국 성립 후 타이첸현 황허수운공사에서 일하다 1983년 정년으로 퇴직하였다.

도하중인 해방군

목선을 타고 황허를 건너는 류덩대군

타이첸현 기록보관소에 소장된 자료에 이런 기록이 있다. “6월 30일 밤 12시 지휘부에서 도하명령이 내려왔다. 2종대 선발대가 12척의 작은 배에 올랐다. 배 앞에는 기관총을 설치했는데 활에 잰 화살처럼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적이 발견하더니 맹렬하게 사격해왔다. 선발대도 응사했는데 북안에서 엄호하던 우리 부대가 대포로 포격하며 엄호하였다. 15분도 안되어 선발대가 대안에 닿자 국군 방어진지에 돌격했다. 국군 토치카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대군이 도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

하룻밤 사이에 류덩이 지휘하는 해방군 12만명은 황허변의 길이 300리에서 일제히 도하하여 국민당군 40만명이 지키던 황허 방어선을 일거에 돌파했다. 기세를 탄 류덩의 해방군은 산둥성 서남부를 휩쓸었다. 해방군은 7월 10일 산둥성 윈청(鄆城), 딩타오(定陶)를 공격 점령하고 차오현(曹縣)을 탈환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민당군 정편 55사단 및 지원하러 온 제153여단을 섬멸하고 동쪽으로 진출하였다. 7월 14일 밤에 국민당 원군 정편 제 70, 32사단 등 모두 4개 사단을 류잉지(六营集)에서 섬멸하고 정편 66사단(199여단 제외)을 양산지(羊山集)에서 포위하였다.

의표를 찔린 장제스는 7월 19일에 급히 산둥과 시안, 한커우 등에서 8개 정편사단 2개 여단을 이동시켜 증원하였다. 그러나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해방군의 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7월 22일, 류덩 대군은 완푸허(萬福河) 북쪽에서 지원 온 199여단을 섬멸하고 국민당 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기회를 틈타 28일에 양산지를 수비하던 정편 66사단 주력을 섬멸하였다. 산둥 서남부 전투중 류덩 대군은 국민당군 4개 정편사단 등 모두 6만여명을 섬멸하였다.

해방군 따베산으로 맹진격하다

황허를 도하한 류덩 대군의 최종 목표는 따베산 지역이었다. 따베산은 안후이, 허난, 후베이성을 끼고 있는 큰 산으로 남북 180킬로, 동서 350킬로에 이르는 매우 큰 산이다. 해방군이 이곳을 장악하면 왼쪽으로는 우한, 오른쪽으로는 난징을 바로 위협할 수 있게 된다. 허베이, 산둥, 산시성과 섬서성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해방구와는 한참 떨어진 곳으로 그야말로 국민당 통치지역 한복판이었다.

빨간 표시 부분이 따볘산

1947년 7월 23일 마오쩌둥은 류보청과 덩샤오핑에게 전보를 보냈다. “뒤를 생각하지 말고 보름 안에 따베산으로 진격하라.” 7월 29일 마오는 다시 급전을 보냈다. “지금 섬북의 상황이 매우 급하다. 천겅과 세푸즈, 류보청 덩샤오핑 부대가 두 달 안으로 후쫑난군 일부를 끌어내지 못하면 섬북은 지탱할 수 없다.” 진기로예 야전군 주력은 이미 1개월 동안 계속 전투를 치른 뒤였다. 피로가 쌓여 있는데다 사상자도 많아 휴식을 해야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전보에 A자를 세 개나 써서 보냈다. A자 세 개는 중앙이 정한 가장 긴급하고 극비를 요하는 전보라는 뜻이었다. 류보청, 덩샤오핑은 전보를 본 뒤 숙의 끝에 회신을 보냈다. “중앙의 결정에 완전히 따를 것이며 보름 뒤 행동에 들어가겠다.” 류덩은 전보를 받고 겨우 9일 뒤에 행동을 개시했다. 12만 병력이 폭 100리에 걸친 주둔지에서 일제히 따베산으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이 결정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산둥성 서남부에서 따베산까지는 천리 거리이다. 진격로에는 룽하이루(龍海路), 황판취(黄汎區), 샤허(沙河), 궈허(渦河), 루허(汝河), 화이허(淮河) 등의 철길과 저습지, 그리고 강물 등 장애물이 잇따라 펼쳐져 있다. 부대의 뒤에는 국군 십 몇 개 여단이 추격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혹독한 더위와 우기로 인한 강물의 범람, 진흙탕 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원들은 출발하기도 전에 피로에 지쳐 있었다. 마오쩌둥의 기상천외한 결정은 실행에 옮기기에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정 때 린비아오도 ‘사도적수’(1)에 화가 나서 펑더화이에게 지휘권을 넘기자고 주장하다 혼쭐이 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전 때 마오쩌둥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상징성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출발 전 결의대회에서 덩샤오핑은 부대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앞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 첫째, 따베산에 도착하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부대는 이 땅에서 소멸될 것이다. 둘째, 우리가 따베산에 도착하더라도 발을 붙이지 못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유격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 우리가 무사히 도착하여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결과를 극력 피해야 한다. 동지들, 그렇지 않은가?”

류덩 대군을 기다리고 있는 첫 번째 난관은 “죽음의 지역”이라 부르는 황판취였다. 황판취는 1938년 6월 장제스가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다고 황허제방을 무너뜨린 곳이었다. 그 바람에 그해 89만명이 굶주림과 추위로 사망했으며 1,0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그중 390만명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전에는 140만호의 농가가 있었으나 이제는 무너진 민가 몇 채가 있을 뿐 모두 저습지로 변해 있었다. 물이 무릎 높이까지 고여 있었으며 깊은 곳은 배꼽을 넘었다. 바닥은 질퍽질퍽한 진흙탕으로 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었다. 주변에 민가가 없으니 행군은 물론 먹고 마시고 자는 일이 모두 불가능했다. 8월 17일, 류덩 대군은 온갖 곤란을 뿌리치고 황판취를 건넜다. 18일에는 샤허를 건넜으며 8월 20일 루허를 향해 진격했다.

장제스는 류덩 대군의 도하는 물론 남쪽으로의 진격을 상상하지 못하였다. “마오쩌둥 이 자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는 게야?” 장제스는 깜짝 놀라 직접 전선에 가서 독전했다. 장제스는 정편 35사단을 핑한루를 통해 남하시켜 루허 남안을 수비하게 하였다. 국군으로 하여금 루허에 있는 모든 도선을 거둬들이거나 부수게 하였다. 그리고 다른 부대로 류덩 대군을 요격하게 하였다. 앞에는 국군이 가로막고 뒤에도 국군이 뒤를 쫓는 형국이었다.

류보청은 “막다른 길에서 서로 마주치면 용감한 자가 이기는 법”이라고 지휘관들을 격려했다. 덩샤오핑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루허를 건너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군 선두부대가 소총에 총검을 꽂은 뒤 수류탄을 뽑아들고 강 연안의 국군진지에 돌격했다. 수비군을 일소하자 해방군은 8월 24일부터 25일까지 하루만에 4만명이 루허를 건넜다.

따볘산 진격 상황도. 난징 왼쪽 아래 원이 따베산지역

마지막 난관은 화이허였다. 8월은 마침 우기여서 수위가 변화무쌍했다. 그런데 대군이 건너기에는 나룻배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때 추격하던 국군 선두부대가 이미 후미에 따라붙어 해방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형세가 급박해지자 류보청은 한밤중에 직접 나서 배를 탔다. 램프 불빛에 의지하여 대나무로 수심을 재는데 상류 쪽에 소를 몰고 건너가는 사람이 보였다. 즉시 부하를 시켜 확인하니 도보로 건널만하였다. 류덩대군이 도보로 화이허를 건넌 뒤 추격병이 북안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홍수가 밀어닥쳤다. 천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만 명의 국군 부대는 강물을 바라보며 탄식할 뿐이었다.

해방군은 20일동안 천리를 행군하여 8월 27일 마침내 따베산에 도착했다. 이 소식이 섬북에 전해지자 마오쩌둥은 크게 기뻐했다. “우리는 결국 고난에서 벗어났다. 20년 넘게 우리의 혁명전쟁은 계속 방어만 해왔다. 이제 류덩대군이 남쪽으로 출격했으니 우리 전쟁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격 태세로 전환하였다.”

따볘산 진격 기념관

장제스는 난징에서 ‘따베산 전투 검토회’를 열고 “화중 초비사령부‘를 설립하였다. 그는 오히려 속을 썩이던 류덩 부대를 섬멸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즉시 국군 대병을 동원하여 따베산에 대한 전면적 포위토벌을 시작하였다. 류덩대군은 후방도 없고 양식도 없는 가운데 스스로 먹는 문제와 추위를 해결해야 하였다. 류덩대군의 따베산 진격은 국민당군의 전략적 종심에 날카로운 칼을 찔러 넣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해방군은 국군 8,500여명을 섬멸했다. 그중 포로가 4,400여명이었으며 전상자가 4,100명이었다. 덩샤오핑은 따베산 진격에 대하여 나중에 이렇게 평가했다. ”그것은 대단한 전략적 행동이었다. 마오 주석의 결정에 따라 우리는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시험에 합격하였다.

천겅, 중원에서 맹활약하다.

10만명의 병력으로 새로 집단군을 편성한 천겅과 셰푸즈의 부대는 서북 야전군의 작전과 류덩 부대의 따베산 진격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즉 후쫑난 부대가 류덩 대군을 뒤쫓거나 차단할 부대를 다른 전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겅 집단군은 8월 22일과 23일 산시성 남부와 허난성 북부에서 황허를 건너 허난성 서부로 진격했다. 8월말까지 허난성 서부를 휩쓸고 다니며 신안(新安), 뤄닝(洛寧)등을 소도시들을 점령하자 후쫑난군 부대 주력 중 일부가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류덩 대군을 추격하던 부대 일부도 되돌아와 수비했다.

9월 2일, 천셰 집단군은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제 9종대는 뤄양 동남부에서 국군 제 5병단을 저지하도록 남겨 두었다. 그리고 일부 병력으로 푸뉴산(伏牛山) 북쪽 산기슭을 개척하고 주력은 국군이 없는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8월 17일 허난성의 링바오(靈寶) 등 소도시를 휩쓸고 다니다 출동해온 후쫑난군 휘하 국군 섬서 동병단을 전멸시키고 섬서성 통관(潼關)을 위협했다. 국군은 부득이 10개가 넘는 여단을 시안과 통관 사이로 이동시켜 수비를 강화했다. 11월말까지 천셰 집단군은 허난성과 섬서성을 오가며 국군 5만여명을 섬멸하였다. 현성 36곳을 점령했으며 악예섬(鄂豫陕) 해방구 행정부서와 39개 현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악예섬 군구와 8개 군분구를 설립했다. 과연 천겅은 마오쩌둥의 기대대로 후쫑난군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류덩 대군에 대한 국군의 압력을 완화하였다. 싸우는 틈틈이 룽하이루 철로를 파괴하거나 차단하여 국군의 이동을 방해하였다.

화동야전군 허난과 안후이, 장쑤성으로 출격하다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은 류덩, 천셰 두 부대의 중원해방구 창건에 호응하여 움직였다. 천쑤 부대는 9월 2일, 3개 종대를 인솔하여 9월 2일 산둥성 슈장(壽張)지역에서 황허를 도하했다. 9월 7일에서 9일 샤투지(沙土集)에서 국민당군 정편 제 57사단을 섬멸하며 국군이 산둥과 따베산 지역에서 4개 정편 사단을 되돌려 지원하게 하였다. 9월 26일, 천이와 쑤위는 2개 종대를 계속 산둥성 서남부에서 남겨 국군을 견제하도록 남겨 두었다. 그리고 주력을 룽하이 철도를 넘어 허난성과 안후이성, 장쑤성 경계지역으로 진격하여 전개하였다. 류덩 대군의 따베산 진격에 대한 국군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10월말, 국민당군 보안단 만여명을 섬멸하고 성 24곳을 점령하여 예환소(허난, 안후이, 장쑤성을 관할) 해방구를 확대하였다. 그리고 3개 전원공서(2)와 군 분구를 새로 설립하였다. 부대는 11월 8일에서 17일까지 룽하이 철도와 진푸철도 파괴작전을 벌였다. 150킬로의 선로를 파괴하였으며 국민당군 및 보안단대 1만1천명을 섬멸하였다. 그리하여 쉬저우를 위협하여 국민당군이 황망히 15개 여단을 증원하도록 하였다.

3로대군 중원 진격

3로대군은 느닷없이 중원에 출격하여 품자(品字)형 진세를 형성하였다. 즉 맨 위에 천겅과 셰푸즈의 집단군이, 그리고 남부의 왼쪽에는 류덩 대군이, 오른쪽에는 천이와 쑤위의 부대가 포진한 것이다. 장제스는 중원이 위협받자 33개 여단 병력을 이동시켜 따베산 지역의 류덩 대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제5병단과 정편 5군등 부대를 배치하여 천이와 천쑤 두 집단군을 견제하였다. 이런 정황에 따라 중공 중앙군사위원회는 3로대군이 안팎에서 협력하고, 기회를 보아 적을 섬멸하여 국군의 따베산 포위공격을 분쇄하기로 결정했다.

1947년 12월 상순과 중순경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3개 종대(그중 2개 종대는 막 따베산 지역으로 진입하였다.)를 각각 장한(江漢), 통바이桐柏, 화이시(淮西)지역으로 다시 전개하게 새로운 근거지를 창건하였다. 따베산 지역에 남아 있는 3개 종대는 지방부대와 협력하여 민활하게 기동, 1개월 동안 포위공격에 반격하였다. 이 작전에서 국군 1만여명을 섬멸하고 국군의 토벌을 좌절시켰다. 천쑤, 천셰 두 집단군은 12월 중순 핑한루와 룽하이루 파괴전투를 벌여 월말까지 400킬로미터에 이르는 선로를 파괴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5병단 본부와 정편 제3사단 등을 섬멸하여 국민당군이 따베산에서 4개 정편 사단을 이동시키도록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국군의 따베산 포위공격을 무산시켰다.

삼로대군은 5개월간의 작전에서 국민당군 19만 5천명을 섬멸하고 100곳의 현성을 점령하였다. 창장과 화이허, 황허와 한수이 네 강 사이에 새로운 중원해방구를 개척하였으며 국민당군 90개 여단을 이동시켰다. 이로써 내전이 국민정부 통치구역으로 이동하였다. 마오쩌둥이 섬북을 도망다니고 있는 가운데서도 입버릇처럼 말하던 외선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은 해방군의 따베산 진격과 삼로대군의 중원 출격 시점부터 전략적 반격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각주>

1. 사도적수(四渡赤水) 장정때 마오쩌둥이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자 구이저우성 츠수이를 네 번 건너게 한 작전을 말한다.

2. 전원공서(傳員公署): 성이나 자치구에서 현이나 시를 관할하기 위해서 설치했던 파출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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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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