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에 언제까지 침묵할 수 있을까
        2006년 07월 05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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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이 쓰여진 시점까지는 대부분의 진보단체들이 북한의 태도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있었다. 북한이 결국 미국 독립기념일을 ‘기념’하며 미사일을 발사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앞으로의 며칠은 한반도 국제정세뿐 아니라, 남한 진보운동의 미래에도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월드컵이 아니었으면 어떡할 뻔 했나? 북한 로켓 실험과 납북되었다는 김영남씨 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침묵은 더욱 도드라졌을 게다.

    “북한 미사일 시험 발사는 상황 악화시킬 자충수”라는 참여연대의 논평,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가족의 품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모든 이들의 비극은 하루속히 해결돼야 한다”는 민주노동당의 논평 정도가 나왔을 뿐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북한에 관계된 문제에 대한 진보진영의 침묵이나 뜨뜻미지근한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침묵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북이 인공위성 발사 실험을 하는 등 군사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 북미 대화를 촉발시켜 북미 관계 정상화와 근본적인 한반도 평화의 단계로 더 빨리 진입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남녘 민심의 대세는 그런 힘을 가진 북과의 갈등보다는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치자는 쪽으로 흘러가게 될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본다([자주민보]).”

       
    ▲ 북한이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SS-21B
     

    범민련과 같은 단체들이 위와 같은 입장을 가지거나 북한이 곤란할 때 침묵을 지키는 것은 그 옳고 그름을 떠나 나름대로 수미일관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체제와 대내외 정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다른 단체들이 유독 북한 문제에 대해서만은 ‘침묵은 금’이라는 봉건적 관습에 따르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남한 정권이나 이러저러한 정치세력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북한 문제에 대해서만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북한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통일의 한 주체’라는 전제에 기반한다. 우리는 여기서 시민사회단체들의 크나큰 착각을 볼 수 있다. 북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함은 분명하지만, 그 주체는 외교권과 물리력의 보유자인 남한 국가이다. 즉, 남한 민중의 비판적 공론 형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북한 문제에 대해서만은 자신들이 마치 책임 있는 국가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착각의 집합으로 ‘내재적 접근법’이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북이 남과 여러모로 다르지만, 북의 처지에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므로, 남한의 눈이 아니라 북한의 입장에서 북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이다. 극우적 천박함은 넘어섰으나, 이 이론에는 너무 큰 헛점이 있다. 내재적 관점이 객관적 이론 틀이려면 1천만 명의 농민을 굶겨 죽인 스탈린, 후진 독점자본의 대리인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 20년 철권통치의 박정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내재적 접근법은 모든 역사, 모든 사회, 모든 정치행위에 대한 학문적 일반사면일 뿐이다.

       
    ▲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1,2호 (사진=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내재적 접근법과 같은 것,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은 20세기 제국주의자들을 교양하는 데는 적당한 도덕률이었지만, 지금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가꾸는 데 있어서는 낙후한 관점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상이한 문화 사이의 교류와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한 합의가 훨씬 늘어났고, 적어도 그런 합의에 대해서만은 ‘절대주의’라는 틀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침과 기복이 있겠지만, 남북 사이의 교류와 상호의존성 증대는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다. 곧, 남한 민중들은 남한의 진보세력에게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요구할 것이다. 노동운동에게는 이북 노동자의 근로조건에 대해, 환경운동에게는 북한 체제에서의 토지와 자연에 대한 수탈에 대해, 여성운동에게는 이북의 전근대적 가족 문화에 대해, 인권운동에게는 북한의 형사절차법을 벗어나 횡행하는 사형(私刑)에 대해, 통일운동에게는 북한 정권의 ‘반국적(半國的)’ 정책에 대해.

    극구 소련을 옹호하던 프랑스공산당은 양심적 지식인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동독의 자발적 간첩 역할을 했던 서독의 구좌파들은 신좌파에 의해 대체되었다. 러셀 재단은 어떠한 국가 폭력도 침묵의 권위 속에 묻어두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배울 건 이런 것이다.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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