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직 철학자의 철학적이지 못한 발언
        2006년 07월 05일 03: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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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철학자 존 롤즈는 공정(公正)이라는 개념을 정의(正義)와 동일시했다. 사회의 기본구조인 윤리체계는 마땅히 그 사회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으로 본 롤즈는 무엇보다 계약의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정한 계약이 가능하려면 먼저 계약에 임하는 사람들이 자유로워야 하고 편견이 작용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특정한 이슈에 대한 판단을 할 때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주장들을 비교 검토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전직 철학자인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한미자유무역협정(FTA)와 관련된 KBS와 MBC의 보도에 대해 “편파적” “과도한 정치적 색깔” “횡포”라는 말을 동원해 ‘공정성’을 문제삼았기 때문이다.

    정부 대변인인 김 처장은 4일 기자간담회에서 “FTA와 관련된 특집이나 기획 보도를 보면 공정성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며 방송사의 보도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김 처장은 지난달 방영된 KBS 일요스페셜 ‘FTA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에 대해 “협정 체결 당시와 오늘날 상황을 소개하면서 멕시코내 다양한 상황을 균형있게 짚어주기보다는 제작자의 정치적 관점을 과도하게 반영했다”며 “제작자의 관점을 제대로 거르지 못하는 시스템에 근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고 비판했다.

    또 4일 방영된 MBC PD수첩 ‘참여정부와 한미FTA’에 대해서도 “인터넷에 소개된 내용을 봤는데 ‘조작된 미래를 홍보하는 참여정부’라고 했다. 이 정도면 횡포에 가까운 것 아니냐”며 “이렇게 편파적인 내용을 담은 상태에서 공공성, 공정성, 공익성을 갖췄다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중앙일보 학술전문기자를 지낸 철학박사 김창호 처장이 롤즈의 사회정의론을 이해했다면 자신의 부서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며 한미FTA를 홍보하는 상황에서 이에 반하는 시각을 시민들에게 전달한 공영방송 프로그램이 가지는 ‘공공성’과 ‘공익성’에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

    김 처장이 말한 공정성은 ‘기계적 중립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미 언론학계에서는 기자저널리즘과 달리 PD저널리즘의 경우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고 의견을 주장한다고 해서 공정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라는 공감대가 형성돼있다.

    그 관점과 의견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고 사회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탐사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특정한 관점과 의견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창호 처장의 이번 발언은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담당부서의 수장으로서 PD저널리즘의 한미FTA 파헤치기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파장에 대해 초조한 마음에서 부린 심술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은 한미FTA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PD저널리즘에 대해 시비를 걸기 전에 국정홍보처가 이른바 ‘대안매체’라며 발행하는 <국정브리핑>이 한미FTA 홍보를 위해 하지도 않은 인터뷰를 한 것처럼 기사를 조작한 사건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반성부터 했어야 한다. 윤리학이 얘기하는 공정성(fairness)의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철학박사 김창호 처장이 소크라테스부터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악덕이나 죄는 무지의 소치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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