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헌헌법 정신의 실현
    조봉암 이념의 깃대와 지반
    죽산 서거 60주기 기념 심포지움 토론문
        2019년 04월 26일 02: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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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산 조봉암 서거 60주기 기념 심포지움이 25일 프레스센터에서 있었다.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가 발제를 하고 필자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아래는 발제문에 대한 필자의 토론문이다.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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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표문은 조봉암 사상을 기존 해석과는 다른 각도에서 재해석하려 한다. 그간 죽산 조봉암의 이념과 노선은 흔히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라 표현돼왔다. 반면 발표문은 실제 조봉암이 추구하고 성취한 바가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에 가깝기보다는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출현한 신생자유주의(new liberalism)와 일치한다고 평가한다. 흥미로운 재해석이며, 발표문을 읽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대목이 많다. 또한 좁은 의미의 진보좌파를 넘어 다양한 성향의 21세기 한국 시민들이 조봉암의 삶과 사상에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토론자는 몇 가지 토를 달고 싶다. 조봉암의 궤적이 신생자유주의 내지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가장 많이 겹친다는 발표자의 지적을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봉암 노선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자유주의로 수렴된 것이 그가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 ‘사회자유주의자’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념의 깃대를 그런 선택이 아닌 다른 어떤 정박지에 세운 실천가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서다.

    1. ‘민주사회주의자’라는 동시대인들의 증언

    역사 속 인물의 사상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것은 후대인의 권리다. 그럼에도 역사적 인물과 동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평가는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 물론 동시대인이라고 하여 꼭 후대인보다 그 인물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대인, 더구나 그 인물 곁에서 함께 활동한 이들에게는 후대인이 접할 수 있는 문서화된 자료 외에 다른 자료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문서화되지 않은 자료 혹은 될 수 없는 자료다. 그것은 시대의 한계 때문에 차마 공적 자리에서 꺼낼 수 없었던 말들일 수도 있고, 글로 기록될 수 없는 어조일 수도 있으며, 차라리 말이 아닌 어떤 몸짓일 수도 있다.

    조봉암의 경우는 특히 이 점이 고려돼야 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가 이념가라기보다는 실천가였다는 점이다. 조봉암은 좋은 의미의 진보적 대중 정치가였다. 그에게 늘 중요한 것은 자기 정치 여정의 출발점인 특정 이념 체계가 아니라 그 여정에서 이뤄낼 실제 변화의 성과였다. 이런 인물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기성 노선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맞춰 규정하거나 후대 학자들이나 관심을 가질 간판을 고르는 데 별 관심이 없다. 실제로 조봉암이 남긴 글은 그의 역사적 무게에 비하면 너무도 소략하다. 따라서 문서화된 자료만으로 그의 이념을 특정하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그가 살았던 시대 상황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공산당에 속해 항일 투쟁을 했지만, 해방 공간에서 몇몇 우발적 요인이 겹쳐 공산당을 이탈했다. 이후 그는 반-공산주의(또한 이것이 반-사회주의 혹은 반-좌파와 동일시되던)가 이념 지형의 절대적 한계선 역할을 하는 남한 정치에서 생존하며 성장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언어는 고도로 전략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속마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언어 체계가 해방 이전이나, (반-공산주의는 아닐지라도) 반-사회주의나 반-좌파의 중압감은 훨씬 덜해진 현재와는 다른 꼴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도 죽산 생전에 함께 했던 이들이 이 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데 이런 이들이 조봉암 노선을 규정하며 선택한 용어는 대체로 ‘민주사회주의’였다. 조봉암의 막역한 동지였던 윤길중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의 정치 신념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 병폐를 점진적으로 개혁하여 혼합경제로 부의 정의로운 분배를 모색하는 민주사회주의 노선이며 의회민주주의의 토착화이다.” (윤길중,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호암출판사, 1991. 21쪽)

    윤길중은 1955년에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을 만들며 염두에 둔 바가 이와 다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 광릉모임 후 나는 죽산과 동암[서상일] 그리고 신도성 씨와 자주 만나 협의했다. (중략) 강령전문에서는 사회적 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민주사회주의와 같은 것이고 이념적 계급정당이 아니며 국민대중정당이라고 했다.” (위의 책, 152쪽)

    역시 진보당에서 활동한 정태영은 조봉암 사상을 증언하면서 재평가한 저작 <조봉암과 진보당>(후마니타스, 2006)의 부제를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삶과 투쟁”이라 붙였다. 그는 이 책 서문을 다음 문구로 시작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던 조봉암과 진보당”. 이어진 단락에서 정태영은 이렇게 단언한다.

    “이 책 전체를 통해 말하겠지만, 그 핵심은 민주주의, 사회주의, 평화통일이다. 1955년 12월 22일 (중략) 강령 초안을 발표했을 때부터, 이들이 견지했던 정치적 지향은 매우 선명했다. 필자는 이것이 오늘날에도 가난한 민중의 삶을 보살피고자 하는 정치 세력의 좌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새로운 조봉암과 진보당을 필요로 하고 있다.” (<조봉암과 진보당>, 7-8쪽)

    이것이 조봉암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평가다. 그들은 “사회적 민주주의”를 “민주사회주의”와 동일시한 진보당 강령이 조봉암 자신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증언하며, 그에 따라 그를 “민주사회주의자”라 회고한다.

    2. 전후 영어권 민주사회주의의 함의와 영향

    하지만 이런 동시대인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발표문의 주요 명제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조봉암과 진보당의 “사회적 민주주의=민주사회주의”를 뜯어보면, 신생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자유주의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점은 1950년대에 반공국가 대한민국의 혁신정당들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좌파정당의 흐름이 그러했다는 사실을 통해 많은 부분 해명될 수 있을 것 같다.

    해방 후에도 한국 진보 세력은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에 비하면 서유럽 좌파의 영향은 간접적이었다. 독일 등의 소식은 항상 일본 좌파 문헌을 통해 접했다. 다만 여기에 한 나라는 예외였다. 영국이었다. 일본어를 제외하면 영어가 가장 친근한 외국어였고, 영어권에서 당시에 가장 강력한 좌파정당은 영국 노동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끝나자마자 집권해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한 영국 노동당 사례는 이미 해방 직후부터 한국 사회(조선공산당부터 한국독립당 이론가 조소앙까지)의 관심을 끌었다.

    영국 좌파의 영향은 다름 아닌 진보당 ‘강령’에 짙게 배어 있다. 이 강령의 대표 집필자는 이동화로 알려져 있다(김학준, 이동화 평전: 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 민음사, 1987). 이동화는 북한 체제를 경험하고 월남한 뒤에 남한에서 혁신정당을 지향하면서 소련/북한식 사회주의와 구별되는 사회(민주)주의의 이론 기반을 다지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가 해럴드 라스키(Harold Laski)다. 라스키는 1945년 노동당이 집권할 무렵 당 의장을 역임할 정도로 노동당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한 정치학자다. 이동화는 라스키를 중심으로 한 당대 영국 좌파 사상에서 분단/전쟁 이후 남한에서 생존하며 성장하려는 진보 세력의 자원을 찾고자 했다.

    진보당 강령 곳곳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진보당 강령은 제3장 “자본주의의 수정과 변혁”에서 미국과 함께 영국을 상세히 소개한다. 두 나라에 비하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및 핀란드 등 북구 제국”의 서술은 소략하며, 다른 유럽 국가는 언급되지 않는다(가령 서독, 오스트리아조차). 영국과 관련해서는 전후 노동당 정부의 개혁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1956년 현재 야당이라거나 재집권하면 정책 방향은 어떨 것이라는 등 강령에는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정세적인 언급까지 포함한다.

    또한 진보당 강령은 당 이념을 집약하는 “사회적 민주주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평등적 민주주의”와 “계획적 민주주의”가 사회적 민주주의의 두 축이라 제시한다. 강령은 특히 “계획적 민주주의”를 자유방임주의와 대비하며 반복 언급한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당대 영국 좌파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계획과 민주주의의 결합은 전후에 국유화와 경제 계획 확대를 추진하면서도 이를 소련식 사회주의와 다르게 전개하려 한 영국 좌파 지성계의 뜨거운 화제였다. 계획과 민주주의의 공존은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활동한 저명한 독일 출신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heim)이 만년의 화두로 삼은 주제였다. 한국에는 이런 문제의식이 주로 E. H. 카(Edward H. Carr)를 통해 소개됐다(E. H. 카, <새로운 사회>, 박상규 옮김, 서문당, 1996). 진보당 강령과 함께 집필된 진보당 정책은 카의 언급을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조봉암과 진보당>, 354쪽).

    토론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렇게 진보당 인사들에게 중요한 참고가 됐던 영국 좌파 지성계가 전후에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중첩과 수렴, 종합의 주된 무대였다는 점이다. 진보당 강령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듯이 전후 지구 자본주의는 미국에서 뉴딜을 통해 구축된 수정자본주의를 표준으로 삼았다. 미국의 뉴딜 자유주의자들은 J. M.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새로운 경제 이론을 바탕으로 시장과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했고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적 정책 가운데 상당 부분을 수용했다. 그런데 이들에게 이론적 무기가 된 케인스 경제 사상은 영국의 독특한 지적 풍토에서 자라난 산물이고, 그 뿌리가 바로 20세기 초의 신생자유주의다.

    자유주의의 이러한 변형과 동시에 사회주의 쪽에서도 자유주의 유산을 재해석하고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워낙에 자유주의의 고향이어서 그랬는지 영국에서는 19세기 말 페이비언협회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교류가 별다른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동화에게 큰 영향을 준 라스키는 노동당 안에서도 좌파에 속한 사상가로서 국유화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그런 라스키 역시 대륙 사회주의자들에 비해서는 자유주의 전통과 대화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1950년대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새로운 수렴점을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노동당 이념을 지배하게 되는 앤터니 크로슬랜드(Antony Crosland)의 저작 <사회주의의 미래(The Future of Socialism)>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대의 민주주의의 확대 + 적극적 재정 정책을 통한 완전고용 및 복지 확대”라 재정식화한다. 이렇게 되면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라는 간판에도 불구하고 실내용이 사실상 사회적 자유주의와 거의 구별이 안 되게 된다. 전 지구적인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합의의 시대에 조응하는 두 이념의 수렴 현상이었다 하겠다. 물론 197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부상과 함께 이 시대는 종결됐지만 말이다.

    크로슬랜드의 저작은 1956년에 나왔다. 진보당이 막 창당 작업에 부산하던 무렵이다. 따라서 이 책이 진보당 인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크로슬랜드의 현대판 수정주의(흔히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의 고전적 수정주의와 구별해 이렇게 부르곤 한다)는 크로슬랜드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전후 영국 좌파 전체의 고민과 토론의 산물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일본 다음으로 영국을 세계로 향한 창구로 여겼던 당시 남한 혁신계 인사들도 영국식 민주사회주의를 주로 참고하면서 비슷한 사상적 시간대 안에 있었다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이런 사상사적 배경은 조봉암을 민주사회주의자로 규정한 당대인들의 인식과 발표문의 문제제기 사이의 간극을 얼마간 메워준다. 조봉암의 실제 궤적이 신생자유주의/사회적 자유주의라 해석될 여지가 컸던 것은 그와 동지들이 주목한 전후 영국 좌파가 적극적으로 자유주의에 접근하고 융합을 추구하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조봉암과 동지들은 이를 당대 세계인의 시대정신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시대정신을 통해, 갑자기 세계인의 시간과 단절돼 버린 남한의 정치 현실과 대결할 힘을 얻으려 했던 것 같다. 전후 서구의 독특한 자유주의-사회주의 종합을 무기 삼아 그들은 단지 사회주의를 악마화할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공식 이념의 내용조차 배반하는 독재 정권에 맞섰던 게 아닌가.

    3. 제헌헌법 – 험난한 땅에서 그가 두 발을 디뎠던 이념의 지반

    그런데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조봉암은 이념가가 아니라 실천가였다. 최신 이념 사조를 교과서처럼 따르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 조봉암을 둘러싼 1950년대 남한 혁신파 정계가 영국 좌파 동향에 주목했을 수는 있었어도 조봉암 역시 이런 해외 사조에 따라 움직였다고 하기는 힘들다. 조봉암이 동의했으니 진보당 강령이 채택됐겠지만, 그가 이 강령을 직접 집필하지는 않았다. 대중 정치가로서 조봉암은 자신의 이념의 깃대를 훨씬 더 구체적이고 토착적인 지반 위에 세우려 한 것 같다. 살아남은 동지들이 “민주사회주의자”라 평하기는 했어도 조봉암 자신은 “(한국적) 진보주의” 말고 다른 언급이 없었던 데서 이런 태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럼 그 지반은 무엇이었을까?

    토론자는 대한민국 제헌헌법이 바로 그런 지반이었다고 생각한다. 조봉암은 제헌국회의원으로서 제헌헌법을 제정한 이들 중 한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는 헌법기초위원까지 맡았고, 신체의 자유를 규정한 제9조가 자유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데 맞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체포, 구금, 수색에는 법관의 영장이 있어야 한다. 단, 범죄의 현행 · 범인의 도피 또는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을 때에는 수사기관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사후에 영장의 교부를 청구할 수 있다”는 제9조의 단서 조항에 끝까지 반발했다. 즉, 조봉암은 제헌헌법이 결코 완벽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헌헌법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 지구적 시대정신을 상당히 훌륭하게 집약했다. 대공황, 반파시즘 투쟁, 식민주의 해체 등을 거치며 구축된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의 당대적 종합이 오롯이 담겨 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제18조의 이익균점권, 즉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는 조항 외에도 제6장 “경제” 전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제6장 경제

    제84조]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

    제85조] 광물 기타 중요한 지하자원, 수산자원, 수력과 경제상 이용할 수 있는 자연력은 국유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일정한 기간 그 개발 또는 이용을 특허하거나 또는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제87조]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의 통제 하에 둔다.”

    이 조항들은 발표자가 조봉암 사상을 재해석하며 환기시킨 신생자유주의의 적용으로 볼 수도 있으며, 당시 영국 노동당이나 서독 사회민주당이 지향하던 바와 비슷한 사회민주주의(그것도 지금 기준으로는 상당히 좌파적인)의 편린으로 볼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이러한 수렴이 전후 질서에서는 이념적 중앙지대(the Center)였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분단 직후에 남한만의 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런 헌법을 심의 ‧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좌파는 물론이고 대다수 중도우파 지도자들도 보이콧한 선거였지만, 그렇다고 보수우파만의 제헌국회는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승만 계열이나 한국민주당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고, 무소속 의원 가운데 상당수는 중도파나 더 나아가 좌파 성향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다름 아닌 조봉암이었다. 게다가 보수정파의 공천을 받은 의원 중에도 헌법안 심의 과정에서 진보적인 견해를 역설한 이들이 적지 않았다(가령, 나중에 민주국민당에 속하게 되는 지청천이나 조선민족청년단 공천을 받은 문시환 등). 덕분에, 제주도 등지에서 이후 수십 년간의 비민주적 질서를 예고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울의 의사당에서는 이런 비민주적 질서마저 끝내 가로막을 수 없었던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씨앗이 제헌헌법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조봉암에게 제헌헌법은 이승만 정권 하의 엄혹한 남한 정치 지형에서 이념의 깃대를 세워 놓을 가장 굳건한 지반이 됐다. 초대 농림수산부 장관을 맡아 지주 세력의 온갖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농지 개혁을 향해 뚜벅뚜벅 나아갈 때에 그의 발길을 인도한 별빛은 위에 인용한 제헌헌법 제86조(“농지는 농민에게 분배”)였다. 1956년에 드디어 독자정당 진보당을 창당하게 됐을 때에도 그와 동지들은 강령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이렇게 못 박았다.

    “8.15 해방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적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띠는 것이며, 대한민국의 수립과 동시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근대 민주주의적 제 자유에 관한 규정뿐 아니라 수정자본주의적 제 규정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헌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15 해방 후에 있어서의 우리 국내의 정치적 ‧ 경제적 및 사회적 혼란의 증대와 양대 진영 대립의 격화로 말미암아 이 헌법의 규정과 정신은 무시 ‧ 유린되고 일종의 한국판 ‘보나파르티즘’이 성립 ‧ 발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이름 밑에 일종의 반전제적 독재 정치가 행해짐에 이르렀다.

    우리 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될 때에는 우리는 우선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과 정신을 소생시켜 광범한 민중에게 민주주의적 제 자유를 보장하여주려고 한다.” (진보당 강령, <조봉암과 진보당> 344쪽)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조봉암의 사상은 무엇이었는가? 민주사회주의였는가, 아니면 신생자유주의였는가? 둘 다 맞고, 어쩌면 둘 다 틀리다. 가장 정확히 말하면, 조봉암의 이념은 대한민국 제헌헌법 정신의 실현이었다. 제헌헌법은 이승만 정권 아래서 신음하던 대한민국의 현실과는 너무도 상반되게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당대적 종합을 추구했다. 그랬기에 조봉암의 사상은 민주사회주의이기도 하고 신생자유주의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의 육성을 확인해보자.

    “우리가 헌법 운운하면 코웃음 칠 사람이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국민이 만들고 그 토대 위에 세운 정부를 가지고 있는 법치국가이니 만치 이 헌법을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 헌법은 전 국민의 의사를 표현하였고 모든 국민의 행동의 규범이니 만치 어떤 일이든지 헌법의 명시하는 지침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고 또 이것이 잘 준수되는 때에 비로소 우리나라의 안녕 질서가 유지되고 국민의 복된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모든 국민에 대해서 ‘누구든지 또 한 번 헌법을 읽고 다시 한 번 헌법정신을 체득하라’고 강조하고 싶다.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그것을 우리 손수 휴지화시킨다고 할 것 같으면 도의적인 의미에도 배신자가 될 뿐 아니라 민주건국의 초창기에 있어서 씻지 못할 악례를 자손만대에 남기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당면 과업」, 정태영 ‧ 오유석 ‧ 권대복 편, <죽산 조봉암 전집1 : 죽산 조봉암 선생 개인문집>, 세명서관, 1999. 202-203쪽)

    다음 인용문이 전하는 그의 음성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와 같이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요구하고 갈망하고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발을 붙일 곳이 없도록 할 수 있는 방법, 그 구체적인 원칙이 우리 헌법 가운데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 제정되는 모든 법은 주권자인 국민 대중 이익을 골고루 균등하게 보장되도록 정해져야 한다는 원칙이 서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민주주의와 더불어 경제적인 민주주의가 조금도 에누리 없이 문자 그대로 수행될 것이 명확히 약속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태어나서 특권을 보유한 사람도 없어야 되고 더 많은 국가적 혜택을 입어야 할 사람도 없는 것이고, 따라서 더 소홀하게 취급될 사람도 없고, 하물며 주권자인 국민 대중을 없이 보고 억누르고 할 수 있는 권리 있는 사람도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광복절 기념사」, 위의 책, 160-161쪽)

    조봉암이 이 광복절 기념사를 발표한 것은 1953년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피난 중에 이미 독재로 치달은 이승만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그 폐허 위에서 그는 제헌헌법에 기대어 “정치적 민주주의”만이 아닌, 무려 “경제적 민주주의”의 약속을 역설했다. 어떠한 특권층도 없고 주권자인 국민의 이익을 균등하게 보장하는 나라를 말했다. 이승만 정권이 조봉암을 ‘법살’하면서까지 짓밟으려 한 것은 결국 이러한 제헌헌법 정신의 생생한 구현이었다.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다음 방향이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한 지금, 조봉암이 우리 곁에 되살아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봉암은 그 방향이 어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대한민국이 처음 출발한 그때의 약속에 있다고 가리킨다.

    필자소개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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