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애국심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2006년 07월 04일 08: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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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다. 이날 미국 곳곳에서는 불꽃놀이를 하며 독립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올해 독립기념일을 전후해 미국의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애국심’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영장없는 도청, 금융거래 정보 감시 등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를 놓고 “애국적이지 않다”는 우파진영의 공격이 거듭되면서 무엇이 애국적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은 얼터넷(Alternet)에 실은 글을 통해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의미를 되짚어보고 편협한 국가주의의 틀을 넘어 미국의 애국심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애국심과 독립기념일’(Patriotism and the Fourth of July)이란 제목의 하워드 진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문은 http://www.alternet.org/story/38463에서 볼 수 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을 기리는 연설이 곳곳에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숨을 바친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것처럼 조국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정부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이다. 국가와 정부의 차이는 7월4일이면 반복해서 인용되지만 그것의 의미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독립선언문의 핵심적인 부분에 나와 있다.

    독립선언문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서이다. 거기에는 정부가 “그 정당한 권력이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민에 의해 위탁된, 인민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창조물이라고 나와 있다.

    게다가 독립선언문에 나와 있듯이 “어떠한 정부이건 간에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언제든지 정부를 변혁 내지 폐지할 권리를 갖는다.” 인민, 인간생명의 존엄과 자유의 증진이라는 이상은 미국이 가장 중시하는 것이다.

    미국의 이상 “인간생명의 존엄과 자유의 증진”

    정부가 이윤과 권력의 어리석은 동기로 젊은이들의 생명을 무모하게 소모하면서도 자신들의 동기가 순수하고 도덕적이라고 강변할 때(파나마 침공시 작전명은 “정당한 명분”이었고 현단계에서는 “이라크 자유” 작전이 행해지고 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독립선언문상의) 약속을 위반하고 있다. 전쟁은 거의 언제나 그 약속에 대한 위반이다. 전쟁은 행복의 추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슬픔을 가져다줄 뿐이다.

       
      ▲하워드 진
     

    미국의 필리핀 침공을 비판한 죄로 ‘매국노’로 불린 마크 트웨인은 “군주제 애국심”(monarchical patriotism)라고 조롱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제 애국심의 신조는 ‘왕은 무오류’라는 데 있다. 우리는 노예근성으로, 대수롭지 않게 말만 바꿔서 이를 채택했다. ‘우리의 조국, 옳거나 그르거나’로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귀중한 자산-깃발과 조국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이에 반대할 권리-을 내팽개쳤다. 그것을 내팽개치면서 우리는 그로테스크하고 우스꽝스러운 단어, 즉 ‘애국심’에 있는 정말로 존중할만한 모든 것을 함께 팽개쳐버렸다.”

    최상의 선의에서(군주제적 의미가 아니라) 애국심이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면 과연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저 멀리 필리핀의 섬에서 6백 명에 달하는 남성, 여성, 아이들에게 미군 병사들이 저지른 학살에 박수를 보낸 테오도어 루스벨트인가, 아니면 이를 고발한 마크 트웨인인가.

    루스벨트와 마크 트웨인, 누가 애국자인가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어가는 미군 병사들은 조국을 위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시와 체니, 럼스펠드를 위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은 석유카르텔의 야욕을 위해 죽어가고 있으며, 미 제국의 확대를 위해, 대통령의 정치적 야망 때문에 죽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은 정부가 국부를 훔쳐 죽음의 기계를 사들인 것을 감추기 위해 죽어가고 있다.

    2006년 7월4일 현재 2천5백 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이 이라크에서 사망했고 8천5백 명 이상이 다치거나 불구가 됐다. 오래 전에 이라크 전쟁 “임무완료”가 선언됐지만 미국의 군사력 아래에서 우리는 향연을 즐기며 미 제국이 유익하다고 주장할 것인가.

    미국의 역사는 사람을 신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제국’은 우리가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웠듯이 “서부로의 확장”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진보”와 “문명”의 이름으로 이 대륙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들에 대해 미국이 행한 절멸 혹은 추방을 의미하는 완곡된 표현이다.

    그것은 20세기 들어서면서 카리브해로, 그 다음엔 필리핀으로, 그 다음엔 중미에 대한 해병대의 침공으로,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에 대한 오랜 군사점령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 <타임>, <라이프>, <포춘>지의 발행인인 헨리 루스는 미국이 세계를 “우리가 적당하다고 보는 대로” 구성하는 “미국의 세기”를 얘기했다.

    실로 미군의 힘의 확대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와 중동에서 지나치게 자주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들 군사독재정권들이 미국의 기업과 정부에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력은 미국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부시의 허풍에 담긴 사기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애국심 다시 정의할 때다”

    미국인들은 미국의 힘의 확대가 전세계 많은 이들의 노여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도 이를 환영해야 할까. 우리는 5명 중 한명의 아이가 가난 속에서 자라고 있는 현실에서 보건, 교육, 아동빈곤에 쓰여야 할 돈으로 국방예산을 엄청나게 늘이는 것을 환영해야 하는가.

    미국 군사력의 무용을 경외하는 대신 우리는 인권에 전념하는 것으로 존경받기를 원해야 한다. 나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적인 미국인이라면 다른 비전으로 행동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는 애국심에 대한 재정의에 착수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일으킨 편협한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애국심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나라간의 경계가 (“세계화”라고 얘기되는) 무역의 장애물이 돼서는 안 된다면, 그것은 또한 동정심과 관대함의 장애물이어서도 안 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우리의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렇게 할 경우 지금 이 시대 항상 아동에 대한 공격인 전쟁이 문제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현명함으로 다른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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