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원 잔혹사,
    사회의 모든 편법 배우다
    [청년기자들] 현실에 대한 한 이공계 대학원생의 평범한 기록
        2019년 04월 26일 11: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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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청소년 관련(주체 혹은 주제) 기고 등의 기사에 대해서는 <오재영추모사업회>에서 원고료 일부를 지원 받아 지급한다. 고 오재영 동지가 진보정당의 조직사업에 오래 종사했으며, 진보는 청년·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발언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더 확장될 수 있다는 취지이다. 이번 달의 관련 기사들은 정의정책연구소의 청년기자단에서 보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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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와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대학, 학과를 익명으로 하고 필명으로 게재한다. 

    들어가며_ 교수임용의 한국적 특수주의

    서울권 모 대학교 졸업예정자 A 씨는 학부 때 배운 전공지식만으로는 깊이가 얕아 사회에서 전공을 전문적으로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A 씨는 취업도 어려운 데다가 전공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고 있을 때,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이번 학기부터 새로 부임한 교수 B씨가 보낸 메일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 취득 후 해외 유명 회사 미국지사 경영진을 역임했던 엔지니어 출신으로 이번 학기부터 정교수로 특별채용되었다. 사실 해당 교수의 전문분야는 학교가 임용한 분야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다른 명문대와의 경쟁을 위해 실질적인 실력과는 무관하게 채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대학원에 입학한 뒤의 일이었다.

    #미국과 한국의 교수임용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1960년대 과학자 사회가 과학지식을 생산해내는 이상적인 기준과 절차를 제시하였다. 그중 보편주의는 과학 활동에 있어서 성, 인종, 계급 등의 특수주의적 가치를 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지식의 사회적 공유와 확대를 위해 과학 활동에서 성, 인종, 계급 등의 차별을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미국대학의 교수임용에 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는 한국이 교수채용 과정에서 미국보다 훨씬 특수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분석하였다. (기사출처ㅣ’“’교수 되려면 학부 학벌 좋아야 한다’ 현실 확인’, 교수신문) 미국대학의 교수채용 과정에서 그러한 차별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대학 교수채용 과정의 경우 학벌주의와 성차별, 임용과정의 불투명성, 인맥과 학과 내부 정치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용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평가의 심도가 상대적으로 얕은데, 이는 지원자를 깊이 있게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가 적기 때문이며 이는 소규모성과 연관된다. 한국대학에서 교수임용 평가 경험이 있는 교수 22명 중 지원자들의 논문을 상세히 읽었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논문의 수와 논문이 실린 학술지의 명성 또는 인용지수였다.” “이러한 양적 실력주의와 더불어 대학의 글로벌주의는 대학순위에 매우 중요한 영어 논문을 잘 쓰고 영어 강의가 가능한 후보자를 교수로 임용하게끔 한다. 이러한 기준은 특히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보자에게 유리하다.”

    ”교수임용 과정에서 인맥은 중요한 변수다…. 한국과 미국 모두 학벌이 교수임용에 작용하지만, 출신 ‘학부’의 파벌이 교수임용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한국이다.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연고주의 (서울대와 ‘자대’ 사이의 갈등, 서울대와 비서울대의 갈등 등)는 교수임용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배받는 지배자,> 2016)

    A가 교수 B 씨를 찾아갔을 때, 교수 B는 자신이 외국계 대기업에서 수행한 수많은 프로젝트와 다양한 해외 현장경험을 어필하였다. 그는 A씨가 입학을 하면 다양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대학원 입학을 권유하였다. 평소 한국의 폐쇄적 조직문화에 염증을 느꼈던 A 씨는 그의 밑에서 열심히 배우며 경험을 쌓는다면 B 씨처럼 해외로 나가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었다. 그해 A 씨는 정식으로 그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입학후1. 대학원에서 가르쳐준 연구의 시나리오

    신생 연구실은 연구생들의 학비, 생활비와 급여 등의 자금을 조달에 필요한 연구과제부터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한다. 교수 B 씨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민간기업 한 곳과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민간기업은 국가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동시에 대학연구실은 연구실을 운영할 자금이 필요하기에 둘 사이에 경제적 공생관계가 성사되었다.

    #’조사 결과 ‘설문대상 기업의 32.5% 정도는 협력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기 위해 산학연 협력과제를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기업의 산학연 협력과 정책과제 보고서>,산업연구원,2016)

    첫 번째 – 교수님의 노하우
    : ’ 4차 산업 과제도 땄으니 이제 이게 뭔지 알아보자’

    그러나 국가지원 프로젝트로 채택되기 위해 ‘4차산업 기술의 사업화’을 핵심키워드로 무리하게 과장된 연구계획서가 심사에 통과되면서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다고 A씨는 회상했다.

    #2018년 정부 R&D 예산 중 과학기술 분야에 6조 920억 원의 가장 많은 예산이 편성되었다. 전년 대비 0.6프로 증가한 규모나 4차 산업혁명 대응을 위한 예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줄어들었다. 2018년 기준 1.52조 원의 예산이 4차 산업혁명 기술개발 투자에 배정되었다. AI(30억 원), IOT(47억 원), 블록체인(45억 원) 등 단기집중투자를 통해 기술 상용화를 지원하는 민학 협력과제가 전년대비 37% 이상 증가했다. (자료출처: 2018 정부 R&D 예산의 주요 현황과 특징, 한국과학기술평가원)

    프로젝트가 통과된 후 교수가 자신의 연구생들에게 가장 먼저 내린 지시는 자신은 해당 4차산업 기술을 잘 모르니 그것의 핵심 기술부터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프로젝트의 최종결과물은 현장에 바로 적용 가능한 상용화 단계까지 완성되어야 하지만 연구실에서 신기술 분야의 기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연구비를 분산하지 않기 위함과 동시에 학과 내 영향력 확보를 유지하려고 타 연구실의 전문가와 협력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결국 교수의 전문분야는 해당 프로젝트의 핵심기술과는 전혀 무관한 전공이었기에 오랜 기간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두 번째 – 협력업체 사장님의 노하우
    : ‘야, 돈도 주는데 다 해야 할 거 아냐’

    S# 1. 공식적 행정 업무: 연구실의 기업 하청화

    민간기업이 연구프로젝트와 연구자금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연구생들은 기업의 행정업무를 대신 수행해야 했다. 국가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엄격한 행정절차에 따른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은 행정시스템 자체를 파악하는 데에 상당한 시간을 소요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 평가 방식은 해마다 평가하고, 세부 항목까지 평가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대체로 5년 단위로 평가하고 큰 틀의 평가가 이뤄진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평가가 필요한 부분은 그렇게 해야 하지만 큰 틀의 평가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기사출처ㅣ’정권과 유행바람 타지 않는 과기정책을 말하다’, 사이언스온)

    국내 많은 연구실과 마찬가지로, 별도의 행정담당 직원 없이 대학원생들이 모든 회계, 예산, 집행 서류를 작성하고 관리해야 했다. 이와는 별도로 학교의 행정업무, 조교 장학금을 위해 교수의 수업보조 업무도 수행해야 했기에, 하루의 연구실 일과는 대부분 행정업무가 차지했다 (연구 외적인 일에 짓눌려 연구할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은 다른 연구실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다. 평가점수가 높은 외국 저널에 많은 논문을 싣기 위해 외국 학생들의 논문 작성에 한국학생들이 동원되는 경우도 많다고 A씨는 덧붙였다).

    # 을 중의 을인 연구노동자 대학원생

    대학원생은 연구자이자 노동자인 중간적 존재이다.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겠다는 목표로 1997년 당시 과학기술처가 도입한 연구과제중심제도(PBS)는 대학원생을 노동자로 만든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PBS는 연구 수주와 예산을 연계시켜 연구비 안에서 인건비와 운영비를 처리하도록 한 제도다. 즉 연구과제에서 인건비가 나오다 보니 대학원생은 자신의 연구주제와 관계없는 과제를 맡거나 행정업무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신 사무국장은 “PBS 때문에 내가 하고픈 연구를 하고 싶어도 프로젝트 목표나 방향성에 따라서 다른 일을 하게 된다. 노동자의 특성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사출처ㅣ ‘대학원생은 학생이자 노동자, 계약의 경계 명확해야 ‘갑질’사라질것’, 동아사이언스)

    이와 더불어 2000년대 이후 “기업이 의뢰하는 용역 연구 형태로 진행되는 산학협력에서 교수는 연구비를 제공하는 기업에 무기력한 ‘을’의 입장”이 되기 쉬운 환경에 있다.” (이덕환, ‘가습기 살균제만큼 위험한 산학협력)

    이런 두 가지 현상이 결합된 결과, 교수는 기업의 을이 되고, 교수 밑의 대학원생은 교수의 을의 입장에 놓이게 된다. 결국 대학원생은 이중적 을의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S# 2. 비공식적 대인 업무: 산학카르텔을 위한 유지보수

    학부 선후배 간 인맥으로 출발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기업은 교수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싶어 했다. 의견충돌이 발생했을 때에도 교수와 직접 논의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신경전과 기싸움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일처리가 늦어지고 생각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 기업 경영진은 연구책임자인 교수 대신 연구실행자인 연구생들에게 직접 질책하는 일이 점차 잦아졌다. 연구생들과 회사 실무진들은 경영진과 교수 사이에서 놓인 암묵적 갈등을 최대한 무마하는 과정이 야근노동보다 더 곤욕스러웠다.

    #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 대한 접근성과 네트워크가 미약하다. 기업과 학연과의 의사소통은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기보다 개별 기업의 연구개발 담당자와 학교 및 연구소의 교수나 연구자와의 개인적인 관계나 비공식적인 접촉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향이 많다.

    <국내 산학연 협력의 문제점>(자료출처: 기업의 산학연 협력과 정책과제 , 산업연구원)

    네트워크 정보 1)  기업과 학연 간 연계의 미약
    – 기업이 학연의 인적 자원과 지식을 활용할 네트워크 및 접근성 미약- 협력 상대 발굴을 위한 정보 획득 어려움과 매칭 실패
    협력체계 파트너 2) 공급자 중심의 형식적인 산학연 협력 체계
    – 정부 및 학연 주도형의 산학연 연계
    – 내부 정보 유출 우려로 인해 기업 핵심기술 분야의 산학연 협력 회피
    기술이전 사업화 3) 기술사업화 지향성 미비
    – 단기성과 위주의 기술이전 사업화 전략
    – 학연의 공급기술과 산업계 기술 수요 사이 불일치
    – 기술이전 사업화 조직의 전문역량 부족
    제도 4) 정부지원 및 제도상의 문제
    – 성과 배분의 이해관계 조정과 공동 소유 지식재산권의 활용 문제- 인력 교류 제약 요인
    – 정량적 성과 위주의 단일 유인체계, 평가, 지원체계

    이런 잡음 속에서 결과보고서 제출기한 직전까지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복잡한 용어와 추상적인 표현들로 최대한 채워 넣고 객관적 평가가 어렵게 만들었다. 목표데이터와 최대한 일치하도록 데이터 핸들링도 수행하였다. 그 자체로 엉터리 불법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보면 합법적인 선 안에서 이루어진 데이터 조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수준이라고 A 씨는 생각했다. 다행히 연구평가자들은 해당 4차산업 기술 분야를 잘 몰랐기 때문에 좀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라는 피드백과 함께 통과에 성공하였다.

    # ”우리나라의 인력 풀이 적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지기 힘들다. 흐리멍덩한 평가가 많고 연구성과가 좋으면 불법도 넘어가는 문제가 있다.” (기사출처ㅣ’정권과 유행바람 타지 않는 과기정책을 말하다’,사이언스온)

    S# 3. 해피 혹은 새드엔딩?

    결국 A는 해당 첫 프로젝트를 통해 ‘국가 돈으로 연구 없이 연구하는 법’을 성공적으로 배웠다.

    입학후2. 대학원에서 개인 연구하는 법

    1) 한 학기 700만 원짜리 수업 : ‘공부는 원래 너 스스로 하는 거야’

    ’ 대학원 문을 처음 두드릴 때 A는 학문적으로 좀 더 심화된 공부를 하고 싶었고 교수의 풍부한 경험을 어깨 너머로 배우고 싶었다. 교수는 학생을 응원하며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수는 경력상 현장경험이 풍부했을 뿐, 오랫동안 학계 경험이 없어 학문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대부분의 강의는 뚜렷한 방향성 없이 자신의 경험담을 전달하는 데에 그쳤다.

    #한국과 다른 미국의 교수채용

    미국은 신임 교수채용이나 석좌교수 임용 심사가 있을 때도 위원회가 구성된다. 해당 학과 교수와 관련 분야의 타 학과 교수, 단과대학의 학장이나 학생처장 등도 심의위원회에 참석한다. 특히 신임 교수를 채용할 때는, 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한 공개강의 또는 세미나를 대부분 개최하기 때문에, 학과 전체의 반응이 심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많은 경우, 학생들도 자발적으로 신규채용 교수 심사 위원회를 구성해 자신들의 의견을 제출하고, 공식 위원회가 이를 반영하도록 촉구한다. (‘위원회에 권력 분산, 공정성 강조’, 교수신문)

    A 씨는 부족한 전공강의의 질을 다른 유관한 학과의 대학원 수업을 통해 보충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전문분야의 복잡성과 기밀유지 등을 이유로 자대 대학원생들 외에는 수업수강은 물론, 청강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 학제 간 연구의 제도적 틀 미비

    최근 학교는 학제 간 융복합연구 명목으로 국가사업지원을 받은 융합학과들을 신규개설하면서 기존 비인기 학과들의 정원을 강제 삭감하였다. 진정한 융복합연구는 융합학과를 새로 만들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있는 학과들 간의 교류와 소통을 촉진하는 제도적 틀을 구축하는데 출발해야 한다.

    2) 동료들과의 관계 : ‘야 적당히 해라’

    A씨가 속한 전공은 그나마 취업이 잘된다는 공대지만 비인기 전공으로 산업 수요가 늘 보장돼있지 않아 취업률이 50~60%를 웃돌았다. 때문에 학부 졸업 후 바로 취업보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졸업생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 양극화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비교적 취업이 잘된다는 공대 안에서도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의 평균 취업률은 최대 30% 이상 차이가 난다. 흔히 전화기로 불리는 기계, 전자, 화공 분야가 8~90%대 취업률을 보이지만 생명, 환경 분야의 취업률은 60%대이며 이마저도 서울 상위권 대학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 참고: 상위 17개 대 공학 계열 취업률, 베리타스 알파)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 인력 확보를 위해 취업이 안 되는 졸업예정자들을 최대한 설득해 연구실에 일하게 하였다. 미리 취업한 선배들도 열악한 국내 근로환경보다 더 인간다운 환경의 직장을 얻기 위해 대학원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연구실 동료들에게는 이처럼 되도록 빨리 학위를 취득해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것이 대학원을 다니는 가장 주요한 이유였다. 그러므로 비록 연구실 내에 불합리한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이 개인으로선 가장 합리적인 선택임을 A 씨는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절차적 엄밀성보다는 결과적 효율성이 중시되는 조직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문적 욕구를 가지고 ‘탐구적 연구자(enquiring researcher)’가 되고 싶어 하는 A 씨와 같은 학생이 오히려 이상한 특이 케이스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학문에 매진하려 할수록 오히려 답답하고 유능하지 못한 사람으로 자주 취급받았다. 동료들과 인간적으로 소원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뿐만 아니라 동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A 씨는 이중적인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을 탈출하는 법_닫힌 대학원과 그 적들

    1) 금전적 문제: ‘등록금 새로 다 내셔야 해요’

    대학원을 다니며 학문을 제외한 다양한 사회경험을 배운 A는 연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연구 중심 대학원을 찾아보려 하였다. 처음에 그는 공대가 아닌 자연대의 다른 연구실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학과 행정실에 문의해본 결과, 1년간 수료한 학점을 모두 포기하고 학비도 입학금부터 학기당 700여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까지 전부 새로 지불해야 했다. 그동안의 석사과정도 인정되지 않았다. 이는 순전히 학교 측 행정상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A가 낸 등록금은 현재 A씨가 속해있는 학과의 예산으로 편성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학과로 전향한다면, 새로운 학과의 예산을 위한 등록금을 다시 내야하는 것이다. 교칙 상으로 총장의 승인이 있으면 전과가 가능하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대학원 전과는 학부와 달리 제도적으로 잘 구비되어있지 않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과제도의 미비는 폐쇄적 도제관계를 심화시켜 교수의 일방적 갑질 가능성을 증가시키고 또한 (요사이 한창 유행했었던) 학제 간 융복합연구를 가로막는 한 가지 제도적 요인일 수 있다.

    2) 연구 다양성의 문제: ‘돈 때문에 이거 하는 거지’

    그러나 설령 새로 입학금과 등록금을 지불한다 하더라도 금전적 문제 외에 더 근본적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의 타 학과 연구실들도 예컨대 4차산업 연구과제처럼 국가에서 주도하는 유행 분야의 연구를 대부분 수행하고 있었다. 즉 서로 다른 전공임에도 대부분 천편일률적인 같은 주제의 연구를 하고 있었다.

    #연구생태계의 다양성 상실의 한국적 원인

    원래 유럽의 전통에서 대학 활동 중 연구가 교육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정부가 천문학적 액수의 연구비를 과학연구에 지원하였다. 거대과학으로 불리는 중앙집권적 과학기술정책에서 ‘연구비는 특정 분야에 기초를 둔 프로젝트를 수행하여 결과를 내는 조건으로 지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외부 연구비 수주는 주로 단과대 혹은 학과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이뤄졌으므로, 이들 연구 그룹은 학과와 밀접히 연결되는 경향이 있었다(Slaughter, 1993; Larédo, 2003).’ 이러한 미국대학의 경쟁체제를 수용한 한국대학에서는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과별 연구성과 실적에 따라 예산 규모 편성을 학과별로 차등 분배한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변화한 지식경제사회에서 미국은 몇몇 거대 연구소에 집중되던 ‘정부의 연구비 지원 규모를 대폭 줄이기 시작하였다. 대학연구는 지역의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는 지방분권적 형태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지방의 대학들은 하나의 분야에 자신의 핵심 역량을 집중하는 ‘특화된 연구중심대학’로 발전하는 동시에 그들과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다른 대학, 연구기관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이러한 변화는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연결이 강조됨에 따라 단일한 거대 연구소 대신 여러 분산된 연구기관들의 네트워크 형성이 더욱 중요하게 된 과학기술 연구의 성격 변화를 반영한다.’(자료출처: R&D 환경변화에 대응한 대학 내 연구조직 지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그러나 한국은 아직까지 정부의 연구 지원금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으며 국가 주도의 탑다운 방식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90년대 이후 경제적으로는 미국식 글로벌 경쟁체제를 도입하였으나 아직까지 정책적으로는 산업화 시절의 국가주의적 유산이 혼재된 상태 속에서, 한국의 대학들은 학과별로 고립된 경쟁상태 속 한정된 국가 지원금을 최대한 지원받기 위해 결국 정권 입맛에 맞는 유사한 주제들로 몰리게 된다. 연구생태계의 다양성 상실은 한국 기초연구 부실의 제일 중대한 원인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민간 상용화 기술 발전에까지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결국, A는 하고 싶은 연구를 위해 그동안 받았던 학점, 장학금을 모두 포기하고 타 대학교의 연구실을 알아보는 중이다. 그러나 학과 홈페이지 등의 공식적 정보로 알 수 없는 정보들 즉 교수의 평판, 조직 분위기, 연구성과, 월급 등 사실상 핵심적인 정보들은 비공식적인 사실이라 인맥을 제외하고는 외부인으로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가능한 최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지만 A씨는 아직까지 새로운 출발 장소를 선뜻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아직 연구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서 마지막으로 다시 도전해본다는 그는 ‘새로 들어간 곳에서는 또다시 같은 일을 결코 겪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가며_합법이 판치는 대학원의 밤

    A씨가 대학원에서 겪은 일 중 대놓고 불법적인 것은 없었다. 바꿔 말하면 현재 한국의 대학원과 연구실에서 가장 흔하게 펼쳐진 합법적 지옥이었다. 대학원생에 대한 갑질, 폭력, 횡령 등의 뉴스들은 메인뉴스로 간간히 들려오고 그때마다 처벌과 감시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우리 사회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들은 교수 개개인에 대한 사법적 처벌과 신고기관 활성화로 사라지지 않고 유령처럼 다시 돌아오곤 했다. 취업이 힘들면 대학원 진학자 수가 는다는 과거 통계도 이제는 먹히지 않는 상황이다. 이공대 대학원 진학자 수는 줄어들고 있으며, 지방대의 경우 외국인 학생들이 그 줄어든 수를 채워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해소하려고 정부는 이공계 석사·박사과정 학생연구원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매달 기본 생활비를 지급하기로 하고 석·박사급 대학원생이 받는 학생 인건비 최저 지급 기준을 마련하기로 작년과 올해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엄밀한 질적 관리 없이 지원금 활당 방식의 현 산학연대 구조를 개선시키지 않고서는, 그리고 기술 다양성 확보를 위한 체계적 제도 마련 없이는 A와 같은 대학원생들이 줄지는 않을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A씨들은 대학이 탐구적 연구자들을 위한 장소로 기능할 날을 기다리며 묵묵히 오늘도 연구실의 밤을 밝히고 있다. (끝)

    필자소개
    H대 D과 4년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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