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경천동지의
반격 계획을 모색하다
[국공내전㉓] 황푸3걸 꼽히던 천겅
    2019년 04월 25일 09:36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국공내전㉒] 동북민주연군의 하계 공세와 ‘상승장군’ 린비아오

만주에서 린비아오가 한참 쓰핑을 공격할 때 마오쩌둥은 장제스가 놀라 자빠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오는 그때 후쫑난 휘하부대의 추격을 비해 섬북을 전전하고 있었다. 47년 6월부터 그는 샤오허춘(小河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호롱불에 의지하여 온갖 명령을 내리거나 편지와 군사논문 등을 썼다.

빨간 원 근처가 산시성 정볜현(靖邊縣)

중앙종대 사령원인 런비스와 군사위 부주석을 맡고 있는 저우언라이는 늘 마오쩌둥의 안전이 걱정이었다. 런비스가 “황허를 건너 허룽과 네룽전이 있는 산시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마오쩌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절대 황허를 건너지 않는다. 그들에게 짐이 된다. 해방군이 잘 싸워 이기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대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다. 천겅(陳赓)의 부대를 불러 펑더화이의 서북 야전군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천겅의 부대를 황허 양안에 두어 동쪽으로는 옌시산군을 견제하고 서쪽으로는 후쫑난의 대군을 막게 합시다. 천겅이 당양 장판파의 장비가 되는 거요.” 저우언라이는 “좋군요. 그렇게 되면 중앙의 안전도 보장하고 펑총의 서북군도 강화할 수 있지요.” 런비스도 거들었다. “천겅의 부대가 이미 서진하여 펑링두(風风渡: 산시성 서남쪽 경계의 도시)에 있어요. 그런데 후쫑난 부대가 아직 지원하러 갈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러자 마오쩌둥이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가 천겅의 부대를 부르는 것은 위위구조(圍魏救趙: 예전 손빈이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했던 사례를 말한다.)를 하자는 게 아니오. 나는 류덩 대군이 따볘산(大別山)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게 하려는 거요. 그것도 대거 출격하여 중원을 경영하자는 거요. 그리고 천이와 쑤위 부대를 산둥 서남부에 두어 장제스군 15개 사단 40만명을 견제하려는 거요.” 그때 저우언라이가 마오의 말에 끼어 들었다. “주석, 천겅이 명령을 받고 섬북에 와 있습니다. 먼저 만나 보시지요.” “좋소. 갑시다.”

섬강녕 주석 런비스

섬서성 정볜현 샤오허춘 마오쩌둥 임시거처

6월 14일, 마오쩌둥은 샤오허춘에서 류샤오치, 주더에게 편지를 한 통 썼다. “우리는 4월 중순경 따리허(大理河 : 산시성 정볜현(靖邊縣) 칭양차(靑陽岔) 앞을 흐르는 개천) 상류에 도착하였소. 그곳에서 두 달간 지냈는데 3월 9일부터 11일까지 류칸의 4개 여단이 우리를 뒤쫓았소. 우리가 있는 곳과 왕자완, 와뉴청(卧牛城), 칭양차 등을 한번 쓸고 지나갔소. 민중들이 조금 희생된 것 말고 우리 손실은 없소. 지금 류칸의 군대는 옌안과 바오안(保安) 사이로 돌아갔소. 변구의 3개월간 전황은 다음과 같소. 첫 번째 달의 지방공작은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다음 달에 본궤도에 올랐소. 당정과 군민이 견결하게 적과 투쟁하고 있소. 적은 서로 원망하는 것이 날로 늘어 사기가 떨어지고 앞날에 대하여 비관하고 있소. 우리는 믿음이 더욱 커지고 사기도 좋소. 펑총과 시중쉰이 지난달 말 룽둥(龍東)에서 칭마(靑馬: 칭하이(靑海)의 마부팡)하고 닝마(寧馬: 닝샤(寧夏)의 마홍쿠이)와 싸워 이겼소. 서쪽의 포위망이 뚫렸으니 이제 관중(關中: 섬서성 웨이허(渭河)일대 지역)으로 진격할 수 있게 되었소. 천겅과 셰푸즈(谢富治)의 종대는 이번 달은 휴식하고 7월 1일 서쪽으로 이동하도록 결정했소. 서북 야전군과 협력하여 서북의 전황을 타개할 계획이오. 동북은 상황이 빨리 호전되고 있소. 1개월도 안되어 적 6개 사단 이상을 섬멸하고 30개 성, 500만명이 사는 지역을 수복하였소. 지금 쓰핑을 공격하고 있소. 산둥은 적 74사단을 섬멸한 뒤 전황이 안정되었고 지금은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고 있소. 류보청과 덩샤오핑 부대는 이번 달은 휴식하고 월말에 출격을 준비하고 있소. 새로 4개 종대를 편성하여 이후에는 8개 종대로 작전할 수 있게 되었소. 전체 국면을 살펴보면 이번 달이 전면적 반격을 시작하는 기점이 될 것이오. 우리는 이후 6개월 내 진찰기(산시,차하얼,허베이 관할)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 토지회의를 잘 마치며 재경판사처(財經辦事处: 경제를 다루는 부서)를 설립하여야 합니다. 이 세가지 일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할 것이오.”

이틀 뒤 샤오허춘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다. 전선에서 한창 전투 중인 펑더화이도 전장에서 달려왔다. 펑더화이는 오자마자 마오쩌둥을 찾아 따졌다. “주석, 듣자하니 옌안에서 철군할 때 군복 1만벌을 후쫑난에게 빼앗겼다면서요? 지금 우리 전사들이 다 해져 걸레 같은 옷을 입고 사막을 헤매고 있는데…. 그렇게 바꿔달라고 해도 안주더니.” 마오쩌둥은 이미 린보취에게서 펑더화이가 군복 때문에 불같이 화를 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린보취는 그때 섬감녕(섬서, 간쑤,닝샤 관할) 정부 주석을 맡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펑더화이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밖에서 기다리다 살살 달랬다. “펑총, 당신 사막에서 정말 고생이 많다. 린 노인이 벌써 전화로 알려왔지.” “주석, 나는 주석에게 할 말이 있소.” “그래, 그래, 우선 땀부터 식히시지, 내 지금껏 펑총을 기다렸소. 허룽이 전선에서 빼앗은 사탕을 보내 왔거든. 우선 맛 좀 보시지.” “그런 것 안 먹어요.” “나도 처음 먹었는데 정말 달아. 맛보면서 화를 식혀.” 하며 사탕을 펑더화이의 입에 넣어 주었다. 펑더화이는 눈이 휘둥그래지더니 “어, 정말 달다.”하더니 한줌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참모들 생각이 났던 것이다.

천겅은 마오쩌둥을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 “주석, 신변의 부대가 너무 적군요. 무기도 한심하구요. 우리는 늘 걱정하고 있습니다. 연대장들이 전부 황허를 건너가 당신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천겅, 오느라고 고생 많았소. 요동으로 들어가 이야기합시다. 우리들 몇 사람이 모두 당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천겅은 저우언라이, 런비스, 펑더화이를 만나 인사하고 마오쩌둥을 따라 요동으로 갔다. 그후 며칠 동안 샤오허춘에서 회의를 하는데 천겅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천겅의 타이웨 종대 이동방안이 결정되었다. 본래의 섬북으로 이동시키려 하였다가 계획을 바꿔 황허를 서쪽으로 건너 허난성 서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진기로예 야전군 주력이 중원으로 진격하는데 협력하고 또 서북 야전군이 후쫑난군을 격파하는데도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마오쩌둥과 중앙의 이런 결정은 그만큼 천겅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운동 경기에서 적시에 투입할 수 있는 조커처럼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장수는 매우 드물었다. 회의에서는 또 서북 야전군이 위린(榆林)을 공격하여 타이웨 종대의 허난성 진격에 협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북 야전군을 강화하기 위해 섬감녕과 진수(산시성과 쑤이위안 :현재의 내몽골)의 후방공작을 허룽이 총괄하게 하였다. 펑더화이, 시중쉰, 왕쩐으로 서북 야전병단 지휘부를 구성하여 펑더화이가 총지휘를 맡았다. 저우언라이는 이 회의에서 일 년간의 내전 결산을 보고했다. 저우언라이가 인민해방군이 1년 동안 국군 112만명을 섬멸하는 위대한 성적을 냈다고 보고하자 마오쩌둥은 앞으로 5년이면 장제스 집단을 철저히 쳐부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샤오허춘 회의 뒤 기념촬영을 한 참석자들

마오쩌둥은 우선 허룽과 펑더화이를 불러 두 사람의 손을 잡고 말했다. “허룽 동지, 옛날 유방이 강적 항우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소하가 있었기 때문이오. 소하가 군량과 마초를 대주지 않았다면 유방이 어찌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겠소? 이제 허룽 동지가 펑총의 소하가 되는 거요.” 했더니 허룽은 “나는 당이 하라면 합니다. 주석의 안배에 아무 이의 없습니다.”하고 흔쾌히 대답했다. 허룽은 펑더화이 못지 않은 경력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허룽이 펑더화이의 보급 책임을 수락하자 마오쩌둥은 매우 유쾌하였다. 다음은 천겅의 차례였다.

천겅, 두 번이나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다.

천겅은 당시 타이웨 종대 사령원으로 주로 산시성에서 옌시산군이나 후쫑난의 섬서성 국군과 싸우고 있었다. 천겅은 해방군이 자랑하는 맹장의 한 사람으로 내전 뒤 국군과 싸워 패한 일이 없었다. 그가 창안한 “우세한 병력으로 적을 분할하여 섬멸한다.”는 전술은 마오쩌둥이 전술적 지침으로 만들어 전 해방군 지휘관들에게 보급한 일도 있었다. 그는 황푸 군관학교 1기생으로 황푸 3걸(1)로 꼽혀 장제스의 총애를 받았다. 천겅은 1922년 입당한 고참 공산당원으로 난창기의부터 장정, 항일전쟁, 내전에 이르기까지 싸움터에서 성장해온 지휘관이었다.

그는 후난성 샹샹(湘鄕) 출신이었는데 대대로 무장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쩡궈판(曾國蕃: 청말의 정치가, 학자. 상군을 조직하여 태평천국을 진압했다.) 휘하에서 상군 장수를 지냈다. 천겅은 두 번이나 장제스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이 있었다.

국공합작 시절 그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으로 있었다. 1925년 10월 중순, 장제스가 북벌과 동정으로 동분서주할 때 천겅은 장제스 경호중대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장제스가 군벌 천중밍(陳炯明)군을 토벌할 때 전세가 매우 불리했다. 장제스는 직접 전선에 나가 독전했지만 앞뒤로 포위되어 가망이 없었다. 장제스가 좌우를 돌아보니 지휘부 장교들은 모두 달아나 버리고 오직 천겅만이 자기 옆을 지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너무도 절망스럽고 한심하여 자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천겅이 극력 말리며 장제스를 부축하며 달아났다. 둘은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시내를 건너 비로소 추격에서 벗어났다.

광저우 상단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천겅은 또 한 번 장제스를 구해주었다. 그때 천겅은 전투 끝에 상단 두목 한명을 사로잡고 지휘도를 노획하였다. 부대를 검열할 때 장제스에게 지휘도를 바쳤는데 장이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잡혀 있던 상단 두목이 좌우의 병사들을 뿌리치고 달려와 칼을 빼앗아 장제스를 치려고 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 천겅이 칼을 든 손을 잡고 두목의 발을 차서 땅바닥에 쓰러뜨렸다. 그 일로 장제스는 천겅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천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공산당에 입당하는 게 급하지 않다. 젊었을 때는 앞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데 그러지 말고 나를 따르면 된다.” 즉 자신을 따르면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고 암시한 것이다. 그러나 천겅은 끝내 장제스를 따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난창기의부터 시작하여 누구보다 더 투철한 투사가 되어 국민당군을 괴롭혔다.

1931년 천겅은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비밀리에 상하이의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때 구순장이 배반하여 수많은 공산당 인사들이 체포되었는데 천겅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장제스가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천겅을 잘 치료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천겅을 직접 불러 투항하라고 권했다. “공산당질 그만두고 투항하라.”고 열심히 권했지만 천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장제스는 천겅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후쫑난 등에게 “동창의 정으로 천겅을 감화시켜라.” 하고 지시했는데 역시 말을 듣지 않았다. 장제스는 그것이 천겅의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천겅의 신념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때 후쫑난(胡宗南) ,후롄(胡蓮)、두위밍(杜聿明), 황웨이(黄维), 쑹시롄(宋希濂) 등 황푸 1기생들이 장제스에게 탄원서를 내어 천겅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만큼 황푸 군관학교에서 천겅의 인품과 재주를 아끼는 동창들이 많았던 것이다. 거기에 쑨원의 부인 쑹칭링까지 나서 장제스에게 천겅의 구명을 청했다. “천겅은 매우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그리고 당신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지 않느냐? 당신도 그를 살려줘라.” 결국 몇 달 뒤까지 장제스는 천겅을 죽이지 않았고 그는 마침내 탈출에 성공했다. 나중에 장제스는 천겅을 놓아준 것을 매우 후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천겅은 내전에서 국군을 가장 많이 섬멸한 지휘관 중 한 명이 되었다. 황푸의 동기생들도 당시에는 서로 내전에서 만나게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천겅은 비교적 단명했다. 1961년에 58세로 죽었으니 장제스보다 훨씬 단명했다. 장제스는 타이완에서 천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천겅

천겅은 홍군 초기부터 참가한데다 유머가 아주 풍부하여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는 펑더화이가 후난군 대대장일 때 휘하에서 일개 사병으로 복무하였다. 나중에 초급장교가 되었는데 장교들이 펑더화이에게 욕을 먹으면 늘 천겅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펑더화이가 휘하의 장교들을 한번 혼내면 모두 무서워 벌벌 떨었다. 펑에게 욕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천겅은 예외였다. 펑이 천겅을 잘 보았을 뿐 아니라 우스개소리를 잘해 보기만 하면 허허 웃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처럼 성격이 급하고 직설적이라서 그랬을까? 마오쩌둥도 나중에 천겅에게 이렇게 농담을 한 일이 있었다. 1955년 중국에서 장교들에게 계급을 줄 때 -중국군은 그때까지 직위만 있지 계급이 없었다.- 천겅은 대장 계급을 받았다. 그때 마오는 “그때 당신이 장제스를 따라갔으면 장이 대장군을 줄 수 있었겠소?” 하고 웃었다고 한다.

천겅은 성질이 급한 만큼 연애도 직설적이었다. 1926년, 공산당 5차 전국 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천겅은 참석한 왕건잉(王根英)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는 왕의 바로 옆자리에 앉더니 펜을 꺼내어 구애하는 편지를 썼다. “왕건잉 동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당신에게 정중하게 구혼을 하니 나에게 시집오기 바랍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동지를 시켜 왕건잉에게 주었다. 왕건잉은 갑작스러운 구애와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편지를 벽에 붙여 놓았다. 천겅은 당돌한 처녀가 더욱 마음에 들어 두 번째 편지를 썼다. 왕도 할 수 없이 한번 보더니 다시 벽에 붙여 두었다. 천겅은 다시 세 번째 편지를 썼다. 처녀는 읽지도 않고 벽에 붙였다. 회의가 잠시 쉴 때 참석자 모두 벽 위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되었다. 1939년, 왕건잉은 팔로군 129사단 보급부대 간부학교 책임자를 맡고 있었다. 그때 일본군이 보급부대와 학교를 갑자기 기습하여 전투 끝에 탈출했는데 왕은 갑자기 학교로 돌아갔다. 기밀문서를 두고 왔다며 가지러 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과 만나 싸우다가 32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천겅의 두 번째 부인 왕건잉과 아들

천겅과 가족. 오른쪽이 세 번째 부인 푸야이다.

천겅은 평생 세 번 혼인하였다. 천겅이 14세 때 집안에서 두 살 위 처녀를 며느리로 정해두고 혼인을 강압하였다. 그러나 천겅은 결혼식 날 밤중에 도회지로 달아났다. 두 번째 부인 왕건잉은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 천겅은 혁명동지 푸야(傅涯)에게 구혼하게 되었다. 푸야의 기억에 따르면 천겅은 구혼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첫째, 나는 당신의 혁명사업에 대한 신념을 존중할 것이다. 당신이 진보하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나는 당신이 내 주변에서 비서로 일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진심이다.” 천겅은 그의 약속을 지켰다. 푸야는 건국후 베이징시에서 일했다. 푸야는 천겅이 죽자 그의 일기를 정리해 출판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부인인 왕건잉과 사이에서 낳은 천겅의 아들을 자신의 아이들과 똑같이 키웠다. 그리고 왕건잉의 홀로 남은 모친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냈으며 왕건잉의 전기까지 출판했다고 한다. 푸야의 이런 태도는 중국의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보기 드문 미담이다.

천겅, 마오쩌둥에게 직언하다 혼쭐이 나다

다음은 마오쩌둥의 경호대원이던 리인차오(李銀橋)의 증언이다. 천겅은 성질 급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사람이다. 펑더화이와 함께 서슴없이 직언을 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이제 마오쩌둥에게 직간하다 혼쭐이 나게 된다.

샤오허춘에서 회의를 한 지 6일째 되는 날 마오쩌둥이 천겅을 자신의 요동으로 불렀다. 바늘과 실처럼 마오와 늘 붙어 다니는 저우언라이도 자리에 함께 하였다. 마오쩌둥이 조촐한 술자리를 만들어 놓고 천겅을 초대한 것이다. “천겅, 어서 오게, 한 잔 해야지, 나하고 언라이가 자리를 만든 걸세. 노독도 풀 겸 자네의 공도 축하해야지.” 저우언라이도 잔을 들고 건배하였다. 천겅은 일어서서 잔을 비운 다음 사례하였다. “감사합니다, 주석. 부주석에게도 감사합니다.” 마오쩌둥이 젓가락으로 요리를 집어주는 등 술자리가 매우 화목하였다.

그러나 술이 몇 순배 돌고나자 천겅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주석 지금부터 제가 직언을 좀 할 텐데 용서를 하시겠습니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할 말이 있으면 해야지.” 마오가 대답하자 천겅은 “주석, 이번에 저를 황허 서쪽으로 보내는 것은 영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저우언라이는 놀라는 기색이었으나 마오는 오히려 태연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당신 오늘 많이 마셨군, 더 이상 마시지 말게.” 하고 말렸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잔을 채워 천겅 앞에 놓더니 “계속 이야기하게. 귀를 씻고 듣겠네.”하고 재촉했다.

천겅은 이미 술이 올라 불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한잔 훌쩍 마시더니 마오쩌둥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주석과 부주석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직언을 좀 할 테니 용서하십시오.” 마오가 묵묵히 있자 천겅은 다시 “주석,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이번에 주석이 류덩 대군을 따볘산으로 진격하게 하고 천쑤 대군을 산둥 서남쪽으로 진격하게 한 것은 영명한 결정입니다. 두 부대가 남쪽으로는 우한을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난징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칼로 장제스의 심장을 찌르는 것과 같지요. 하지만 전국의 장기판에서 천겅이라는 패를 잘못 놓았습니다.”

저우언라이가 눈빛으로 천겅을 말렸지만 천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오쩌둥도 담배를 피우며 재촉했다. “마저 이야기하게 하시오. 다 말해보게.” 천겅은 “주석, 저를 황허 서쪽으로 건너가서 섬감녕을 지키라고 하는데요. 오히려 나를 밖으로 내보내야지요. 황허 건너 남쪽으로 가서 동쪽을 깨뜨리고 서쪽을 정벌하게 했어야지요. 적의 가슴에 칼을 한 자루 겨눠야지요. 섬감녕을 수비하게 하는 것은 근시안적인 발상입니다. 조금 건방지게 이야기한다면 대들보감을 서까래로 쓰는 격이지요.” 마오쩌둥은 “대들보감을 내가 왜 작게 썼을까?”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하지만 천겅은 “전국의 전황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리해지고 있지요. 하지만 우리 4종대를 섬북으로 되돌린 것은 공격의 주도권을 쥐려는 게 아니고 소극적으로 방어하자는 것 아닙니까? 그게 잘못된 것입니다.”하고 말을 끊었다.

“대담하구나.” 마오쩌둥은 참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마오는 성을 벌컥 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다, 천겅. 이번에 내가 당신을 황허를 건너게 한 것은 나 마오쩌둥을 보호하려고 한 것인 줄 아는가? 당신들 모두 중원에서 날고뛰며 통쾌하게 싸우기를 원하는데 왜 섬감녕이 텅 비어있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내가 당신을 부르지 못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당신이 가까이 있으면 나는 아무데도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당신이 장제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을 알고 있다. 설마 이번에는 나 마오쩌둥과 당중앙을 장제스에게 선물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다는 말인가?” 마오쩌둥이 격노하여 탁자를 여러 번 내리쳤다.

탁자 위에 있던 술병과 술안주들이 요동을 치자 천겅은 크게 놀랐다. 온몸의 술기운이 반은 달아나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석, 저는 단지 사견을 말한 것뿐입니다.” 천겅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주석, 저는 중앙의 결정을 견결히 집행하겠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였다. 경호원으로 자리에 있던 리인차오도 크게 놀랐다. 펑더화이 외에 마오쩌둥에게 저렇게 대담하게 직언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는 말인가? 저우언라이는 오히려 태평한 얼굴로 한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성미를 잘 아는 까닭이었다. 마오는 천겅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자 껄껄 웃었다. “천겅아, 천겅아. 네가 반은 죽다 살아났구나.” 마오쩌둥은 엄지와 검지로 권련을 집어 천겅의 코를 찌르며 말했다. “당신이 두려워할 게 뭐 있어? 당신 생각하고 중앙의 생각이 다를 게 없다구.”

저우언라이는 천겅을 잡아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주석의 뜻은 방금 당신이 했던 말하고 같다. 중앙은 이미 계획을 변경했어요.” 천겅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참 있어 정신이 들고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마오쩌둥은 손 위의 담배를 내려놓고 천겅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류덩 대군이 따볘산으로 진격하면 장제스의 닭도 놀라서 날고 개도 뛰어 오를 것이다. 후쫑난은 섬북에서 펑더화이에게 견제 당해 발을 뺄 수가 없다. 지금 허난 서쪽이 비어있다. 자네가 황허를 건너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 서쪽으로 통관(潼關:뤄양(洛陽)에서 시안으로 들어가는 요지), 정저우까지 800리 전장에서 저 어리석은 국군을 쳐서 깨뜨려야 한다. 그러면 동쪽에 있는 류덩 대군과 천쑤의 대군에 힘이 될 것이다. 서쪽으로는 섬북의 작전과 협력하여 배후에서 후쫑난의 채찍을 붙잡아라. 섬서와 간쑤등 후쫑난의 800리에 폭풍우를 몰아쳐라. 천겅, 자네는 잘못한 게 없네. 자네 말이 옳아.”

리인차오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한번씩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주석 곁에는 누가….” 마오쩌둥은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두려워하면 위험한 것이다. 나하고 언라이가 배수진을 치면 사지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 당신들이 나가 싸우도록 놓아줄 테니 대신 잘 싸워야 한다. 그러면 중앙은 안전하다.” 저우언라이는 술을 한 잔 따라서 천겅에게 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하고 주석이 주는 술이다. 천겅의 장도를 위하여.”하고 권했다.

다음날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천겅을 배웅했다. 헤어질 때 마오쩌둥은 천겅에게 물었다. “어떤 게 파부침주(破釜浸舟)(2)인가? 당신은 그 뜻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병사들이 강을 건너 전진할 때 뒤를 생각하지 않도록 결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디서 유래된 것인가?” “항우가 진을 칠 때 나온 것이죠.” “맞다.” 마오쩌둥은 웃더니 “지난밤에 언쟁을 한 한 것은 내 탓일세. 신경쓰지 말게나.”하였다. 천겅은 “제가 냉정하지 못해서 주석의 뜻을 몰랐습니다.” 저우언라이도 “우리 사나운 장비가 조자룡이 되었네.”하더니 웃었다. 마오쩌둥은 “조자룡이면 더 좋지. 온 몸이 담덩어리가 아닌가?”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당부했다. “당신, 부대를 이끌고 다시 이동해야 할 텐데. 황허 남쪽에서 잘 싸워야 하오. 중앙이 부여한 임무를 잊지 마시오.” 마오쩌둥도 “자네가 두 달 안에 효과적으로 후쫑난을 움직이지 못하면 섬북이 지탱하기 어려워지네.”하고 당부했다. 천겅은 “주석, 염려 마십시오. 황허를 건너 류덩과 천쑤 대군에 협력해서 반드시 중원 전황을 호전시키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천겅의 말이 떠나고 샤오허춘의 회의도 끝이 났다.

마오쩌둥의 반격 계획

난징의 장제스가 쓰핑을 방어한 천밍런을 불러 떠들썩하게 훈장 수여식을 하였지만 그 직후에 마오쩌둥이 무슨 일을 벌일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천청은 천밍런을 그렇게까지 예우해야 하느냐고 물었는데 장제스는 “그런 것이 정치”라고 대답하였다. 국군 지휘관들을 고무 격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장제스는 뛰어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 전략가라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장제스의 행동은 언제나 마오쩌둥의 계산 안에 있었으며 구체적인 계획은 첩자를 통해 공산당 쪽에 전해졌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늘 그의 예상 밖에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였다. 1947년 상반기 전황은 교착상태이기는 하였지만 분위기는 이미 공산당이 주도하고 있었다. 국군이 쓰핑을 겨우 방어하였지만 만주의 형세는 이미 공산당 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졌다. 몇 개 거점도시를 빼놓고는 만주 대부분 지역에서 동북 민주연군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던 것이다.

쓰핑에서 일진일퇴하던 6월 중순, 마오쩌둥은 이미 중원의 주도권 확보를 위한 복안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것은 마오쩌둥과 주더, 저우언라이 등 소수 수뇌부만 알고 있었으며 장제스나 국민정부 지휘부는 상상도 하지 못할 파격적인 책략이었다. 마오쩌둥은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을 황허 남쪽인 따볘산으로 진격시킬 계획이었다. 그것을 위해 피난지인 샤오허춘에서 회의를 열었으며 천겅을 불러 후쫑난군과 옌시산군을 견제하도록 안배했던 것이다. 대군이 황허를 건너려면 많은 배가 필요하다. 류덩 대군은 이미 황허 도하와 따볘산 진격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길게 보고 다음 단계 작전을 미리 구상하는 것, 그리고 상대의 의표를 찔러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것, 내전이 거듭될수록 마오쩌둥의 전쟁 지도는 더욱 노련해지고 자유자재하게 되었다. 그의 휘하에는 천겅과 같은 맹장들이 서로 공을 다투었으며 중앙의 명령이라면 불속이라도 뛰어들만한 기개와 결의를 보이고 있었다. 내전 일년차, 마오쩌둥은 여전히 후쫑난의 추격군에 쫓기고 있었지만 승리에 대한 자신감은 더욱 커져갔다.

<각주>

1. 황푸 3걸은 황푸군관학교 1기 졸업생 중 재학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 꼽힌 세 사람이다. 그중 장셴윈(將先云)은 1927년 군벌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나머지 두 사람이 공산당원으로 천겅과 허종한(賀衷寒).

2. 사기 항우본기에 나오는 말이다. “솥을 부수고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항우가 거록싸움에서 병사들의 결의를 높이기 위해 썼다는 책략이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