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공동묘지가 돼가는 시네마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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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7월 01일 01: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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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4일부터 8월 29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필름으로 볼 기회가 주어진다. (일정 및 장소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http://www.dsartcenter.co.kr 참고. 이 행사는 주한프랑스문화원의 후원으로 연초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네 프랑스” 프로그램의 하나다).

이미 5년 전에 프랑수아 트뤼포 회고전이 국내에서 열린 바 있지만, 이번 상영작 목록을 들여다보면 그때 소개되지 못했던 몇 편의 영화들도 포함되어 있기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프랑수아 트뤼포 (사진=동숭아트센터 홈페이지)
 

그런데 한국에서 트뤼포 영화제가 열릴 때마다 무슨 이유에선지 좀체 상영되지 않는, 그럼으로써 점점 더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개인적으로 스크린을 통해 꼭 다시 보고픈 이 영화는 트뤼포가 1978년에 발표한 <녹색 방>이라는 작품이다. <400번의 구타>, <피아니스트를 쏴라>, 그리고 <줄 앤 짐>과 같은 초기작들이 영화사의 정전으로 추앙되고 거듭 보여지는 동안 안타깝게도 트뤼포 후기 경력에서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걸작이라 할 <녹색 방> 만큼은 영화광들 사이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비운의 작품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단언컨대 앙트완 드와넬 연작 –  <400번의 구타>,  <앙트완과 콜레트>, <훔친 키스>, <부부의 처소>, 그리고 <사랑의 도피>에 이르는, 트뤼포가 배우 장 피에르 레오를 기용하여 20여 년에 걸쳐 만들어낸 자전적 연작 시리즈를 말한다 – 전체에 맞먹을 만큼의 가치를 지닌 이 작품이 무시되고 잊혀져 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트뤼포 특별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문득 <녹색 방>이라는 작품을 다시 떠올리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사자(死者)들에 대한 강박적인 애도의 무드로 가득한 이 영화가 어쩐지 오늘날의 영화문화에 대한 불길한 암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랄까.

사실 이 작품은 트뤼포의 전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진정 개인적인 영화라 할 만한데, 여기서 트뤼포는 자신의 삶을 자전적으로 담아내기보다는 통렬한 알레고리에 기대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있다. <녹색 방>은 그가 진심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영화이며 결국 그는 영화의 주연까지 스스로가 맡아 연기했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후반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이다. 주인공 쥘리앙은 <더 글로브>(The Globe)라는 잡지의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1차 대전 당시 죽은 동료들과 일찌감치 세상을 뜬 아내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벗어나지 못한다기보다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삶 전체를 그들을 위한 애도에 바친다. 그의 아내가 생전에 쓰던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심지어 그는 죽은 아내의 모습을 닮은 조각상을 주문 제작하기까지 한다.

또한 그는 파리로 가서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 생활을 해 보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기구독자들 대다수가 세상을 뜬 철지난 잡지 <더 글로브>에 머무르려 한다. 한편으로 그는 부고기사만큼은 놀랄 만큼 잘 써내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쥘리앙의 집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화재로 인해 아내의 방이 불타버리자 그는 아예 공동묘지 한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전쟁 당시 파괴된 예배당을 사들여 그곳을 자신만의 애도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 <녹색 방> 포스터
 

예배당 벽면은 쥘리앙과 관련되었던 모든 이들, 그가 숭배했던 예술가들 – 물론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 의 초상으로 가득 채워지고 또한 그들 각각에겐 촛불 하나씩이 헌정된다. 쥘리앙은 자신이 그들을 기억하는 한 그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들을 위한 촛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지킬 것을 다짐한다.

트뤼포적 인물 특유의 수집벽은 음산한 죽음의 빛을 띠기 시작한다. 쥘리앙은 오직 죽은 사람들만을 사랑한다. 또한 그는 언젠가 우리 모두에겐 살아 있는 자들보다 죽은 자들을 더 많이 알고 있게 되는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고도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영화란 결국 사진적 이미지의 연쇄이다. 사진적 이미지는 거기 담겨진 것들이 더 이상은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암시한다. 그런 까닭에 사진적 이미지는 죽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건의 죽음. 때로는 거기 담겨진 인물의 죽음까지도. 따라서 영화에 매혹된다는 것은 결국 죽음에 매혹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평생토록 무한한 애정을 바쳤던 영화가 이러한 도착적 매혹을 요구하는 매체라는 사실을 트뤼포는 애써 외면하려 들지 않는다. 즉 <녹색 방>은 영화를 향한 사랑의 어두운 이면을 응시하는 영화기도 하다.

트뤼포의 ‘영화(만들기)에 관한 영화’인 <사랑의 묵시록>(1973)이 영화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낙천적 비전으로 넘쳐난다면 <녹색 방>은 그 이면의 모습을, 일종의 뒤집힌 ‘음화’(negative)를 보여주는 작품인 셈이다. 하지만 영화는 애초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 트뤼포는 자신이 숭배하던 예술가들이 하나씩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언제부터인가 자신 또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녹색 방>은 쥘리앙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는 자신이 만든 애도의 공간에서 숨을 거두며 그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은 그를 위한 촛불을 하나 밝힌다. 돌이켜 보면 이 불길한 결말은 <녹색 방> 발표 6년 뒤 트뤼포의 (너무 이른!)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보이기에 더더욱 소름끼친다. (프랑스 누벨바그의 동료들 –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에릭 로메, 클로드 샤브롤 등 – 가운데 가장 어렸던 트뤼포가 일찍 세상을 뜬 반면 그의 동료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동시대 가장 중요한 프랑스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는 <녹색 방>을 (안타깝지만 비디오로) 다시 보면서 오늘날 우리의 기이한 시네마테크 문화, 혹은 영화광 문화에 관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불과 수 년 전과 비교해 보아도 지금 한국의 영화광들은 상당한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시로 고전영화 상영전이나 감독 회고전이 개최되는가 하면, 많은 예술영화들이 DVD로 속속 출시되고 있으며, 게다가 한 달이 멀다 하고 각종 영화제들이 열리고 있다. 특히 서울아트시네마와 필름포럼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는 낙원상가 건물 4층은 어느새 고전영화팬들의 은밀한 ‘소굴’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이 영화폐인들과 소수의 취향공동체를 위한 도피처라고 말하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사실 요즈음의 분위기를 보자면 그런 식의 조롱에 선뜻 반박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즉 이 소중한 공간이 쥘리앙의 예배당과 같은 애도의 공간이자 예술적 공동묘지가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말이다.

   
 ▲ <녹색 방>의 한 장면
 

간혹 유명감독이나 배우들을 내세운 상영회가 열릴 때면, 또는 정전의 자리에 오른 유명한 영화가 상영될 때면, 또는 제법 구색을 갖춘 이벤트성 행사가 열릴 때면 구름처럼 몰려드는 관객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대개는 서른 명 남짓한 관객들이 띄엄띄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스크린에 영사된 흐릿한 그림자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을 자주 찾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나는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가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러다 다소간 기이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영화광들이 꽤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요즘 영화들은 예전 영화들에 비하면 시시하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 영화들이 시시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사실 요즘 영화들을 거의 보지 않는 이들이라고 밖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견해를 내세우는 이들은 점점 더 과거의 망령에 빠져든다. 아니 과거를 망령화한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현재와 그리고 세상과 대화하려 하는 대신 자족적이고 상상적인 수집에 강박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식의 영화보기는 그저 자신만의 상상의 예배당에 모셔둘 작품의 목록을 늘리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혹은 기껏해야 오마주라는 핑계를 내세워 ‘베낄’ 만한 영화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한 탐욕스런 답사에 불과할 뿐이다.

<녹색 방>은 영화비평의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할 기회를 마련해 준다. 특정 영화감독의 회고전이 열릴 때 대개의 경우 저널에 실리는 소개기사들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으며 어떤 경향의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의 발전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때로 동시대의 어떤 감독들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는가를 덧붙이기도 하고 그의 작품이 오늘날 보아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애도’ 비평의 사례라 할 만하다. 혹은 비평을 가장한 뒤늦은 부고기사인 셈이다.

지금의 우리가 <녹색 방>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의 무한한 생성’이 없는 삶은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돌아보고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을 살피고 내다보는 일 또한 마찬가지다.

쥘리앙의 비극은 후자를 지나치게 경시하거나 전자에 지나치게 빠져든 자의 비극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영화를 현재(의 영화)와 함께 사유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관계의 무한한 생성’을 가능케 하는 영화보기 혹은 글쓰기란 어떤 것일까?

트뤼포 특별전 소식을 접하면서 떠오른 상념은 여기에 이르렀다. 나는 여러분이 트뤼포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그리고 지금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숱한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이런 고민에 빠져들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예술적 공동묘지가 되어 가고 있는 시네마테크를 ‘관계의 무한한 생성’을 위한 떠들썩한 장터로 바꾸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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