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마음 못 정했지만, 내 기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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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4일 08: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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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신당파의 동의 지점이란 단지 ‘안티 NL’외에는 많지 않습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 일각에서 나오고 있는 사회주의 반자본주의 변혁 정당 혹은 혁명적 노동자계급 독자정당 건설 주장이 우리의 대안인지에 대해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일 이러한 노선이 채택된다면 그러한 당으로 이룩하려는 대안 사회의 상은 무엇인지, 그 당에 의한 일당 국가를 지향하는지, 또한 사적 소유와 시장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방향 설정이 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활동가 중심의 끝없는 이념논쟁과 대중

    이후 이 문제 역시 봉합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반복되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그후 그 이상의 분당과 분화는 제게는 관심 밖의 영역입니다. 다만 활동가 중심의 끝도 없는 이념 전쟁에 그 어느 정당도 사회 변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고, 사회와 노동 대중을 저들의 손에 남아 있게 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한, 설사 이후의 활동이 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아니라 체제 유지에 복무하는 것으로 비추어진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계급 투쟁에서의 승리의 형태가 아니라 때론 지배계급과 협상을 넘어 청원하는 것처럼 비추어지더라도, 노동 대중의 운명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되 것입니다.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부유세 채택 투쟁, 고소득 세금탈루자 철저 징수, 공평한 과세, 주택, 토지의 공공성 획득 투쟁 등을 위한 투쟁에 대한 교조적 원리주의에 입각한 비판은 종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 대중의 운명보다는 자기 이론의 확인을 위한 자기 만족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종북주의만이 문제는 아니다. 자기만족적 교조주의 역시 진보정당운동의 장애물이다.
     

    실제로 소위 계급운동, 민중운동 단체들은 사람 수의 문제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 이전에 이념적으로 노동자 파업 투쟁이나 반자본주의 투쟁이 아닌, 위에서 언급한 사민주의적 정책 채택 싸움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민주의자들에게는 위의 정책들이 실현만 되어도 시장 폭력을 크게 제어하고 계급 지배 질서를 뒤집는 변혁의 일환이며, 이 땅의 지배자들과 가진 자들에게는 저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자신들이 누려 왔던 자본 권력/시장 권력에 대한 거대한 제한이자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횡적 연대와 종적 연대

    따라서, 이를 위해서 당은 좌우로의 횡적 연대보다 이념적 지형이 다르더라도 시민 사회와의 종적 연대에 대해 더 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당이 위에서 언급한 모든 정책을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다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한 의원의 부동산 불평등 문제 전문 보좌관이 민주노총이든 당이든 이 문제를 운동으로 채택해 나가기를 어려워한다며 탄식했지만, 많은 이들이 실천으로 옮기기 어려워하는 데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분야에 따라 전문적인 시민 운동 단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소수 활동가 중심의 이념적 좌우 연대에 대한 고민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위에서 언급한 정책들이 채택되려면 혁명 이상으로 오랜 기간의 힘겨운 싸움일 터인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 대중 조직 외에 각종 시민 단체들과도 강고한 항상적인 연대의 틀을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그건 비계급적 시민 운동인데 왜 우리가 해야 해?"라는 식의 일부 좌파들의 전통적인 자세인데 이제 이러한 모습은 지양해야 합니다.

    이건 정말 중요한데, 서구에서 정립된 이론과 역사에 따라, 현재 전세계적으로 공통적인 경향을 보이는 환경 혹은 생태,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의 운동 의제화, 공론화, 대중화에 대해서는 여전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비서구적/한국적 지형의 차이가 크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원칙론적이거나 서구중심적 의제가 많이 사용되어져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150만에 이르는 성매매 여성들, 기업에서 공식적으로 대규모 비용을 대주는 한국식 성접대 문화, 어마어마한 숫자의 성매매 업소를 그대로 두고, 농림수산업을 다 합친 정도인 GDP의 6% 이상을 차지하는 성산업에 대한 반대 없이는 성평등 사회를 위한다는 어떠한 운동도 다 형식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년에 6조원에 이른다는 기업의 성 접대비를 복지비로 전환하고, 한 집 건너 하나씩 있는 각종 여성 모멸적 성매매 업소를 지역 사회 복지 센터로 전환하는 등 좌파의 기발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선거 시기에도 이러한 공약은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음은 물론, 여성의 압도적 지지를 받을 수 있으며, 부유세처럼 가진 자들의 저항의 명분도 없는 훌륭한 정책입니다. 추상적인 논리를 동원해서, 실질적으로는 여성의 인권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파괴하는 성매매의 확산을 가져오는 정책을 채택하면서 진보 정당 운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일보 인터뷰를 자제해야 하는 이유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가지 전술적인 지적도 하고 싶습니다.

    먼저, <조선일보>에 인터뷰하는 것에 대해 일단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고는 곧 반동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에는 물론 반대합니다. 조직의 역사가 반동적이고 지도부가 반노동자적이라고 한국노총이라는 노동 조직 자체를 적으로 삼을 수 없으며, 소속 노동자마저 통째로 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정말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조선일보>의 사주나 경영진이 아닌 언론 노동자도 언젠가는 언론 노동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오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성 권력이 반노동자적 작태를 태연하게 자행하고, 특히 삼성 사무직 사원들은 절대로 자신들을 선택 받은 엘리트라고 생각한다고,  삼성 소속 노동자 전체를 적대시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구독자가 가장 많은 <조선일보>를 이용할 필요도 있지만, 적어도 이번과 같은 좌파 내부의 갈등에 대한 것과 같은 것은 저들에게 직접 노출할 필요는 절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필요한 부분만 확대, 왜곡시키지만 언젠가는 탄압을 위해, 좌파를 민중들로부터의 격리를 위해 크게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북주의 비판 중 핵무기에 대한 부분도 그렇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종류의 핵에 대해 반대해야 합니다. 핵의 존재가 도리어 전쟁 억지력을 가져 온다는 이론도 있고,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떨고 있는 국가 국민들의 공포를 가라앉게 하는 역할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핵은 반대해야 하며, 더더구나 아무리 전쟁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타국인 남한이 핵을 타국의 방위 수단으로 인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이라도 무조건적으로 같은 원칙을 적용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나 이란의 핵무기 문제에 있어서 그들이 아예 계획이 없던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등 서방의 의도가 핵 자체에 대한 위험성 경고가 아니라 침략의 이유 만들기에 있다면 그 지적의 타당함과 핵 반대의 우리의 원칙이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전술적으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북주의 비판, 다른 언어로

    또한 종북 문제를 조금은 다른 언어로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기영 당원 사건의 경우, 지금은 다른 논리로 비판하고 있지만, 법원이 간첩으로 판결했으니 간첩이라는 식의 논리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갑제도 입맛을 다셨듯, 지배자들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종북의 문제를 크게 확대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확대되어 마녀 사냥이 자행될 수도 있고,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 운운하는 일부 좌파로도 불똥이 튈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자체로서도 사상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기에 문제가 되지만, 이러한 적절한 ‘반북적’ 공안 정국 조성은 다시금 종북주의자들의 입지를 키워줄 수도 있고, 많은 이들에게 동지를 사지로 몰아 넣은 이들로 비판을 뒤집어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또 다시 민족주의 언저리에 있는 저항적 대중, 급진적 대중을 다시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조금씩 친재벌 정권의 반동성에 대해 저항감이 생겨나게 될 민중들에게 저항의 주요 주체들, 좌파라는 집단이란 역시 종북주의자들이라고 또 다시 싸잡아 인식되도록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북한)국가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은 비판자 자신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며, 현재 아무도 국가사회주의를 모델로 하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분석이나 비판 없이 원론으로 회피하여 돌아 가는 것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민중에 대해 무책임한 모습입니다.

    종북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을 비판하여 당까지 버리고 나가는 것에 아쉬움을 두지 않는 좌파들이라면 대상만 바꾼 종북주의자들과 똑같은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좌파, 종북주의자 오류 반복해선 안 돼

    과거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은 ‘원전에는 이런데 왜 지금 책에 안 나와 있는 짓을 해?’라든가 ‘모 아니면 도’식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고, 이러한 의식에 기반하여 적대적인 집단마저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다수를 획득할 수 있는 유연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한국적 상황에 맞는 기발하고도 창의적인 상상력으로 대중을 얻는 정책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활동가 중심의 좌우 확장이 아닌 노동대중 조직, 그리고 전문적 시민 단체들과의 다양한 종적 확장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촘촘한 기득권 망을 분쇄할 수 있는 의제를 선점하는 대안적 정책 싸움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 했지만, 설사 당이 추구하는 정책이 활동가 머리 속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다르고, 심지어 자본주의체제 개량 노선이라고 욕을 먹을지라도, 그것이 다수 노동 대중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득을 위해 싸우는 정당이라면, 저는 기꺼이 그 당을 택할 것이며,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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