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이와 쑤위 대군,
    산둥성 멍량구 결전 승리
    [국공내전㉑] 국민당 장제스, 최강의 부대와 장군 장링푸를 잃다
        2019년 04월 11일 04: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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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국공내전⑳] 해방군, 반격의 기틀 마련

    장링푸는 황푸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다. 그는 본래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가 학비가 없어 중퇴하고 황푸에 입교했다. 장링푸는 젊어서 부인을 총으로 쏘아 살해한 일로 중국 여성계의 지탄을 받았다. 부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확인하고 격분하여 죽였다고 하는데 다른 이야기도 있다. 부인이 장링푸가 소지한 군사비밀 문건을 빼돌렸는데 추궁해도 묵묵부답이자 살해하였다고 한다.

    1936년 당시 그는 후쫑난 부대의 연대장이었다. 후의 부대는 쓰촨과 섬서성에서 홍군 4방면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부인이 공산당 비밀조직과 연결된 것으로 의심했는데 그런 이유를 밝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장링푸는 그 뒤 곧바로 난징으로 가서 자수하였다. 그때 장쉐량의 부인이던 위펑즈(于鳳至)가 격분하여 이 일을 쑹메이링에게 알리고 쑹이 장제스에게 고발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격분하여 “황푸 졸업생이 이유 없이 부인을 살해한다는 말이냐? 당장 잡아다가 조사하라.”고 명령하였다. 장링푸는 군사법정에서 10년형을 받고 ‘모범수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석방되어 종군하였다.

    중일전쟁 중 그는 난징 방어전에서 연대장으로 전투에 참여하다가 오른쪽 어깨에 총알을 맞았다. 하지만 전선을 떠나지 않고 하루 밤낮 적과 격전을 벌였다. 1939년에는 난창에서 일본군을 공격할 때 그는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며 싸워 승리하였다. 그러나 돌격하던 중 오른쪽 무릎에 기관총탄을 맞아 병원에 후송되었다. 치료가 끝나기 전에 급히 전선으로 되돌아간 그는 부상 후유증에 계속 시달렸다. 이후 장링푸는 “장 절름발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그 후에도 쉬저우 전투, 우한 전투, 창사방어전 등 중일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그는 불굴의 투지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도 굴하지 않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투지를 보여 장제스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74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그는 난징 위수사령관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어림군 총사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장링푸

    내전 중 그는 천이와 쑤위의 대군을 가장 괴롭힌 국군 장군이었다. 그가 지휘하는 74사단은 중일전쟁 때 74군을 개편한 부대였다. 중일전쟁과 내전 초기 중국의 사단들은 병력을 제대로 보충하지 않아 많아야 1만명, 적으면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다. 내전이 시작되고 부대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는데 병력과 장비가 사단 규모에 이르면 정편 사단이라고 불렀고 그렇지 못하면 잠편 사단이라고 하였다. 과거 군으로 편제했던 부대가 사단이 되고 사단은 여단으로 이름이 격하되어 개편되었다. 장링푸의 정편 74사단은 국군 가운데 정예 중의 정예로 이른바 ‘5대 주력부대’(1)에서 첫 번째로 꼽는 부대였다. 74사단은 3개 여단으로 이루어졌는데 병력이 3만명에 이르렀다. 미제 무기를 완비한데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받았다.

    내전이 시작되자 그는 쑤위가 지휘하는 장쑤성의 공산당 해방구를 치고 들어가 양회(兩淮)를 공격 점령하였다. 양회란 화이안(淮安)과 화이인(淮陰)으로 장쑤성 해방구는 물론 공산당 안에서도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요지 중의 요지였다. 특히 화이인은 마오쩌둥이 일찍이 옌안에서 수도를 옮기려고 검토한 도시였다. 공산당사에서는 쑤위가 장쑤성에서 일곱 번 승리한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치적 의미로 보면 장링푸가 두 도시를 일거에 점령한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때 장링푸의 74사단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이 장쑤 북부에서 천이가 쳐놓은 3개의 방어선을 잇따라 돌파하여 천이는 쑤위에게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쑤위가 대병을 직접 인솔하고 구원을 왔으나 세불리하여 끝내 두 도시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중원 남부의 요지를 놓고 해방군은 7월부터 9월까지 두 달간 밀고 밀리는 격전을 펼쳤으나 장쑤성에서 밀려났다. 쑤위의 대군은 부득이 산둥으로 철수하여 천이의 부대와 통합하여 화동야전군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그 뒤에도 장링푸는 장쑤 북부에서 두 번이나 렌수이(漣水)로 밀고 들어가 천이의 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때 천이의 휘하 부대 중 6종대는 1개 사단의 전사자가 6,000명에 이르는 등 피해가 가장 컸다. 화가 난 천이는 6종대 사령원 왕비청(王必成)을 잡아다 심문을 하기도 하였다. 왕비청은 “나는 어떤 처벌을 받아도 원한이 없다. 다만 74사단과 싸울 때 꼭 종군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74사단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맺혔던 것이다. 쑤위는 “전투에서 패한 것은 왕비청 혼자만의 책임이 아니다. 여러 원인이 있으니 처분을 유보하자. 그리고 나중에 74사단을 칠 때 왕을 참여시켜 만회할 기회를 주자.”고 설득하였다. 천이도 쑤위의 의견에 따라 왕에 대한 처분을 보류하기로 하였다.

    국공, 산둥의 형세를 놓고 멍량구(孟良崓)에서 대결하다

    1947년 4월 18일, 국민정부는 정부조직을 선포하고 위원 명단을 발표했다. 국민당 홀로 제헌 국민대회를 소집한 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선언하였다. 장제스는 국방위원회와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연석회의에서 국민정부 위원과 5원 원장을 선임하였다. 4월 18일 공포된 위원 명단을 보면 장제스가 국민정부 주석을 맡았다. 쑨원의 아들인 쑨커(孫科)가 부주석을 맡았으며 장췬(張群), 쑨커, 쥐정(居正), 다이촨셴(戴傳賢), 위유런(于右任)이 각각 행정원장, 입법원장, 사법원장, 고시원장, 감찰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쑹즈원, 샤오리즈 등 19명이 국무위원을 맡았다. 그중 국민당 인사는 17인이었으며 청년당 4인, 민사당 4인, 사회 저명인사가 4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각 정치세력을 안배하고 각 부서에 권력을 나누었다고 했지만 공산당은 국민당이 사실상 전체를 장악한 장제스의 독재정부라고 비판하였다.

    그 과정에서도 장제스는 섬북의 후쫑난 집단군으로 옌안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한편으로는 대병을 동원하여 산둥의 천이와 쑤위의 화동야전군과 결전하기로 하였다. 난징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제스는 쉬저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육군 총사령관 구쭈통을 보내 병력을 통일 지휘하게 하였다. 구쭈통이 지휘하는 국군 총병력은 24개 사단 45만명이었다. 이에 맞서 싸울 해방군 화동야전군 총병력은 27만명이었다.

    구쭈통은 해방군이 장기로 하는 분할 및 각개섬멸 작전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휘하 부대에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부대들이 밀집하여 전진하고 서로 엄호하며 차근차근 진격하게 하였다. 국군은 과거 장시성의 공산당 중앙소비에트를 공격할 때 이런 작전으로 크게 효과를 보았다. 5차 포위토벌전에서 루이진의 홍군을 몰아내어 장정에 나서게 하였던 것이다.

    구쭈통은 공격군을 3개 기동병단으로 편성했는데 해방군을 물량으로 압박할 계획이었다. 그중 탕언보가 지휘하는 1병단은 8개 사단으로 20만명이었다. 이 부대의 선봉은 국군에서 손꼽히는 맹장인 장링푸의 74사단이었다. 나머지 2개 병단은 산둥성 북쪽과 남쪽을 맡아 공격할 예정이었다. 그밖에도 제2수정구의 5개군은 칭다오-지난 사이 등 산둥성 동북쪽 지역에 배치했으며 제3수정구 2개 정편사단도 예비대로 두어 필요할 경우 지원하게 하였다.

    국군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한 국군은 강력한 공중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해방군은 4월 하순까지 국군에 싸움을 걸어 보았지만 72사단 주력을 섬멸한 것을 빼고는 전체 전선이 교착상태였다. 마오쩌둥과 중앙군사위는 천이와 쑤위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서두르지 마라. 적이 밀집해 있으면 공격하기 힘들다. 참고 기다리면 적을 섬멸할 기회가 온다.” 두 번이나 같은 지시를 반복하자 천이와 쑤위도 기다리며 부대 배치를 조정하였다.

    5월 상순이 되자 천이는 주력부대를 동쪽으로 후퇴시켜 국군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3개 종대를 감춰두어 필요하면 출격하도록 준비하게 하였다. 해방군이 후퇴하자 장제스가 걸려들었다. 장제스는 해방군이 피로가 쌓여 결전할 힘이 없다고 생각했다. 5월 10일 장제스는 공격부대에 명령을 내려 즉시 해방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구쭈통은 3개 병단을 산둥성 중부지역의 이수이현(沂水縣)까지 진격하게 하였다. 그때 우익의 1병단은 나머지 병단을 기다리지 않고 급히 추격에 나섰다. 장링푸의 74사단은 구보로 강행군하여 다른 부대보다 20킬로 앞서서 공격목표인 탄부로 향했다.

    74사단은 5월 11일에서 13일까지 멍량구 지역 둬장으로 북진하여 양쟈자이(陽家寨), 포산쟈오(佛山角), 마무츠(馬牧池) 등을 잇따라 점령했다. 이때 정편 83사단, 25사단이 엄호했으며 74사단은 14일에 탄부(坦埠)를 공격하여 점령할 준비를 했다. 파죽지세의 기세였다. 쑤위는 불리한 전황을 놓고 고심했다. 그는 천이 등 화동 해방군 수뇌부에게 강적인 74사단을 멍량구에서 포위 섬멸하자고 제안했다. 쑤위는 멍인(矇陰)현 멍량구의 산악지역에서 74사단을 가로막고 주력을 74사단의 양쪽에 투입하여 74사단과 나머지 부대의 사이를 갈라놓자고 역설했다. 산악지역이라 다른 사단들이 따라붙기 어렵고 미제 차량과 무기로 무장한 74사단이 강점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천이는 이 제안을 놓고 한참 고민했다. 강력한 적을 포위해놓고 제때 섬멸하지 못하면 금방 국군 대병이 들이닥쳐 커다란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74사단은 이미 우리 정면에 와 있습니다. 지금 아니면 섬멸할 기회가 없습니다.” 쑤위가 제안하자 천이는 “좋다. 적이 용맹하면 우리라고 기개가 없나? 장제스의 왕패군을 여기서 때려잡자.”고 단안을 내렸다.

    빨간 부분이 산둥성 린이 시 멍인현 멍량구 지역

    명량구 전투 상황도. 붉은 색은 해방군 푸른색은 국군이다. 가운데 붉은 원이 멍량구이다.

    5월 13일, 해방군은 74사단을 멍량구 산악지역에서 5배에 이르는 대병으로 완전히 포위한 뒤 총공격했다. 타오용(陶庸), 쉬스유(許世旭), 예페이(葉飛), 왕젠안(王建安) 등 화둥해방군의 내로라 하는 맹장들이 74사단 섬멸을 위한 작전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롄수이 전투에서 장링푸에게 쓴맛을 보았던 왕비청의 부대가 직접 돌격을 맡았다. 해방군은 작전의 기밀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하여 무전기 사용을 금지하고 참모들이 말과 오토바이를 타고 전선에 직접 가서 작전명령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리고 천이는 지휘소에서 휘하 부대를 지휘하고 쑤위는 직접 전선으로 가서 독전하기로 하였다.

    74사단이 넓게 쳐놓은 그물 안으로 들어오자 해방군은 즉각 포위망을 좁히며 장링푸의 사단을 멍량구의 산악지역으로 몰았다. 그리고 강력한 포격을 시작으로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5개 종대를 동원한 해방군의 공세에 74사단은 산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했다.

    장제스는 74사단이 포위된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공산군을 섬멸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74사단의 전투력이 강력한데다 지형도 유리하여 얼마간 버티면 우세한 병력으로 포위한 해방군을 역포위할 생각이었다. 장제스는 장링푸에게 전보를 보냈다. “링푸의 74사단이 멍량구에서 포위된 것을 지금 알았다. 심히 놀라고 또 기쁘다. 74사단은 진지를 굳게 수비하라. 공산당 주력을 끌어들이면 10개 사단을 이동시켜 지원하겠다. 안팎에서 호응하여 공산당과 결전하라.” 과연 장링푸는 장제스의 기대대로 이틀간 완강하게 버텼다. 해방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총공격했으나 그의 투지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멍량구 전투를 지휘하는 쑤위 (왼쪽 두번째)

    천이와 쑤위는 국군 지원부대 진격로에 해방군 부대를 배치하여 요격하게 하였다. “우리 부대들이 장제스 부대를 며칠이나 저지할 수 있겠소?” 천이가 묻자 쑤위는 “3,4일은 버틸 겁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럼, 이틀 내로 74사단을 반드시 섬멸해야 하오.” 천이가 생각하기에 이 전투는 위험이 너무 컸던 것이다.

    과연 74사단은 이틀간의 악전고투에도 여전히 멍량구 진지를 사수하고 있었다. 진지마다 뺏고 빼앗기는 격전의 연속이었으며 육탄으로 부딪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중과부적, 계속 밀어닥치는 해방군의 공격에 장링푸의 병사들은 쉬기는커녕 먹고 마실 것도 다 떨어졌다. 전세는 점점 해방군 쪽으로 기울어 갔다. 5월 15일 밤, 직속 지휘관인 1병단 사령관 탕언보가 장링푸에게 전문을 보냈다. “장 사단장, 귀 부대가 분전한 지 며칠이 지났으니 어려운 점이 많을 것이오. 각 부대에 신속히 전진하여 귀 부대를 포위하고 있는 적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소. 계속 노력하여 전공을 이루기 바라오.”

    16일 오전 10시, 장제스가 독전명령을 하달했다. “산둥의 공비 주력이 총출동하여 침범하고 있다. 지금 아군이 공비를 섬멸하여 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의기소침하거나 망설이지 마라. 돌아보거나 나아가지 않고 도중에 멈춰서면 우군이 존망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비적이 두려워 싸움을 피하거나 전황을 그르치면 엄중히 추궁하여 논죄할 것이다. 분발하여 그르침이 없기를 희망한다.”

    16일 오전 탕언보는 다시 휘하 부대에 전문을 보내 74사단 지원을 명령하였다. “각 부대는 과감히 행동하여 돌아보지 말고 밤낮으로 진격하라. 만약 배회하며 나아가지 않거나 위험을 보고도 구하지 않으면 우리 동포들이 참지 않을 것이다. 언보도 참지 않을 것임을 말해둔다.” 16일 오후 1시, 탕언보는 장링푸에게 전문을 보냈다. “귀 사단이 외로운 군대가 되어 밤낮으로 싸운 지 며칠이다. 그 충성과 용기가 굳으니 참으로 탄복한다. 각 사단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격하라 명령했으니 형들은 견결히 분투하기 바란다. 원군과 내외로 호응하여 비적을 섬멸하고 혁명의 영광을 완성할 것을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지원군은 끝내 오지 않았다. 장제스와 탕언보의 독전에 국군 부대들은 죽을 힘을 다하여 길을 뚫었으나 천이와 쑤위가 미리 배치해둔 해방군의 포위망을 뚫을 수 없었다. 국군 부대는 74사단 5킬로 전방까지 접근했으나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했다.

    장링푸는 사태가 비관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장제스에게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

    <장링푸가 장졔스에게 보낸 마지막 전문>

    소직의 사단은 몇 배가 넘는 강적과 3일 밤낮을 싸웠습니다. 장교와 병사가 거의 다 죽었습니다. 원군은 오지 않고 다시 싸울 힘이 없습니다. 당과 국가가 준 사명에 욕을 더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싸워 공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목숨을 바칠 결심입니다. 전보를 보낸 뒤 소직 등은 집단 자살로 교장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장링푸의 유언>

    1947년 5월 6일 ‘장링푸가 장중정에게 드립니다.’

    소관의 사단이 멍인(蒙阴)을 점령한 뒤 비적들은 우리가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대부대가 집결하였습니다. 아군 주력이 분산할 때 섬멸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이 산지를 점령하여 신속히 집결하여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토벌하러 나온 뒤 소관은 작전에 효과가 있다고 느꼈으나 만족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세월을 허비하였음을 알았으니 우리는 비적이 장대해진 것을 좌시하였고 적극적이고 철저하게 타격하지 못했습니다. 용기 있는 자는 스스로 나아가고, 겁을 먹은 자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희생하는 자는 자신을 희생시킵니다. 재주가 있는 자는 스스로 뜻을 이룹니다. 상으로만 밝게 하기 어렵고 벌을 주어도 감당하기 어려우니 수가 많아도 서로 관망만 합니다. 협력은 어렵고 각자가 꾀를 내니 동상이몽입니다. 비적은 진퇴가 종잡을 수 없고 오고 감이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일진일퇴하는 데 많은 견제를 받습니다. 저는 비적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는 자가 아군 장령의 귀를 통일시킬 수는 없습니다. 저의 고언대로 급히 개선하지 않는다면 비적을 소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소관은 천성이 곧으나 어리석습니다. 감히 아는 게 없어 어리석은 소견을 피력하니 훈시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장링푸의 죽음

    과연 장링푸는 마지막까지 전투를 지휘하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여러 정황을 보면 장링푸가 자살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장링푸의 죽음을 놓고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중국의 전사에서는 장링푸를 교전 중에 사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이와 쑤위가 중공 중앙군사위에 한 최초 보고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증인이나 증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장링푸가 포로가 되었는데 해방군이 분풀이로 죽였다는 설도 있다. 장링푸에게 원한이 커서 이송 중 사살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 역시 구전으로 전해진 설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장링푸의 죽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는 것은 너그럽지 못한 처사라고 본다. 전문이나 유언이 가장 분명한 근거가 아닌가? 자살 말고 다른 여러 주장들은 해방군이 그만큼 장링푸에게 골탕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링푸가 전사한 멍량구에는 기념비가 서 있다. “장링푸를 사살한 곳”이라고 적혀 있는데 애초에 세울 때는 승전 축하의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의 드라마에서는 천이가 “장제스 때문에 희생되었지만 장링푸는 항일명장이다.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다. 투항한 국민당군을 개조시켜 함께 신중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국민당쪽 사람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진 것이다.

    장링푸 사살 기념비

    장링푸의 묘비. 그의 부인 왕위링이 세운 것이다.

    국민당쪽은 장링푸의 죽음을 “살신성인이며 당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고 선양하며 “링푸가 대세가 어려움을 알고 각 부대 장교들을 소집한 뒤 지휘소에서 선서하게 하였다. 죽음으로 보국하기 위해 수행원을 지휘부 밖으로 내보내고 자살했다.”고 하였다. 장제스는 “74사단을 애도하는 격문”에서 74사단이 “물이 끊기고, 식량과 탄약이 다한 가운데 전 사단이 고립된 채 사면의 적을 맞았다. 진지에서 스스로 죽는 사람이 잇따랐는데 사단장 장링푸 등 고급장령 20여명이나 되었다. 비장하고 참혹한 일이다.”하고 애도하였다.

    국민당군의 전사에서는 이 전투를 평하기를 “공산군은 아군이 운집한 지역 안에서….. 대담하게도 병력을 집중하여 아군 74사단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이 기습한 것이 패인이라고 볼 수 있다.” 고 하였다.

    이 전투는 쑤위가 지휘한 유명한 싸움 중 하나이다. 쑤위는 “백만 대군 속에서 상장의 수급을 취했다.”는 명예를 얻었다. 마오쩌둥 주석은 쑤위에게 “이 전역은 중국의 두 사람이 예상하지 못하였다. 한 사람은 장제스이고 한사람은 마오쩌둥이다.”하고 칭찬하였다. 이 전투에서 화동 야전군은 국민정부군 3만2천명을 섬멸하였다. 해방군 사상자는 1만2천명에 이르렀다. 해방군은 옌안 점령 뒤에 네 번 잇따라 승리하여 차츰 전장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산둥성에서도 국군 대병력의 공격을 물리치고 승전하여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내전이 발발한 지 일년 만에 해방군은 불리한 전세를 완전히 만회하였으며 공세로 나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장제스로서는 뼈아픈 실패였다.

    뒷이야기

    장링푸가 산둥성 롄수이를 공격할 때 천이로부터 면직당할 뻔한 왕비청은 명예를 회복하였다. 멍량구에서 국군 74사단을 공격할 때 그의 휘하 부대는 앞장서서 고지를 기어올랐다. 그래서 지휘소를 직접 공격하여 장링푸를 전사시키는 공을 세웠다. 멍량구 전투 중 국민정부 국방부 작전청장 궈루구이(郭汝瑰)는 국군의 작전계획 초록을 중공 지하 공작원인 런리엔루(任廉儒)에게 넘겨 주었다. 궈루구이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고 산둥 포위공격 계획을 직접 입안하였다. 그것을 공산당에 넘겨 주었으니 장제스가 이 싸움에서 이기기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국군의 진정한 패인은 내부의 첩자로 인하여 군사기밀이 유출된 것, 그리고 최고 지휘관인 장제스의 엉터리 지휘 때문이었다. 또 장링푸의 유언대로 국군 지휘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주춤거린 것도 패배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그에 비해 해방군은 마오쩌둥과 천이와 쑤위 등 현지 지휘관들의 호흡이 잘 맞았고 중간 지휘관들도 왕비청의 예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투지를 보였다. 산둥 중부지역 군중들은 국민당 군대가 공격할 때 집을 비우고 들판을 불태웠다고 한다. 양초와 정보를 얻을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화둥야전군이 출격할 때는 모두 집으로 돌아와 밥을 하고 물을 주며 작전을 지원했다. 공산당 지역 조직들은 20만 농민과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전선을 지원하여 전투의 승리에 공헌했다.

    멍량구에서 식량을 나르는 소년 민병들

    이 견벽청야의 작전을 민중들이 스스로 원하였을까? 해방구 공산당의 지시에 마지못해 따른 것이었을까? 장제스는 멍량구 패전 뒤 74사단을 구원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1병단 사령관 탕언보를 직위해제했다. 그리고 74사단에 인접했던 25사단장 황바이타오와 83사단장 리텐샤도 사단장직에서 해임하였다. 비록 1개 사단이 전멸당한 전투였지만 장제스로서는 가장 총애하던 장군을 잃었다. 그리고 대병을 동원하여 산둥성의 천이와 쑤위 부대를 섬멸하려던 그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가장 큰 피해는 국군에서 가장 강한 부대가 완전히 섬멸 당해 국군 지휘관들에게 해방군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한 것이었다. 이로써 해방군은 사기를 완전히 회복했으며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각주>

    1. 국민정부 5대 주력은 장링푸의 74군, 황웨이(黄维)의 18군, 랴오야오샹(廖耀湘)의 신6군, 정동궈(鄭洞國)의 신1군, 치우칭쳰(邱清泉)의 제 5군을 가리킨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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