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꿈의 계절은
    슬픈 눈물에 닿아 있다
    [폴소리의 한시산책] 벗 이란귀에게 꽃구경 가자며 보낸 윤선도의 편지
        2019년 04월 11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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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
    은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바다로 열려 있는 항구는 늘 자유의 냄새가 납니다. 얼었던 대지에서 솟아나는 봄날의 화창한 햇살과 꽃들 역시 자유를 연상시키니 봄과 항구는 같은 시어로 읽히나 봅니다.)

    때로는 꽃샘추위가 시샘하지만 4월의 봄은 찬란합니다. 매화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나고, 살구꽃 벚꽃이 피어납니다. 버드나무 귀룽나무로부터 시작한 애기연두빛 이파리들이 하루가 다르게 황량한 산빛을 바꾸어 갑니다.

    저는 꽃 피는 봄날이면 벗들과 함께 꽃잎 띄운 술잔을 나누곤 합니다. 벚꽃 복사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꽃그늘에서의 한잔은 더더욱 좋고요. 옛 선비들도 봄이면 꽃구경을 했겠지요. 당연히 술도 한잔 했을 거구요. 지금처럼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 편지로 벗을 부르고 만나고 했을 겁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詩)는 벗에게 꽃구경을 가자고 초대하는 편지입니다. 계절은 바야흐로 복사꽃이 막 피어나고 살구꽃 꽃잎이 바람에 날리는 한창 봄날입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벗 이란귀에게 청학동으로 꽃구경 가자고 편지를 보냅니다.

    참고로 이란귀(李蘭貴 1584년(선조17)~1644년(인조22)) 선생은 자(字)가 자형(子馨)이고 『슬곡일고(瑟谷逸稿)』라는 문집을 남긴 문인(文人)입니다. 윤선도(1587년(선조20) ~ 1671년(현종12)) 선생이야 워낙 유명하여 따로 설명할 것도 없을 겁니다. 문학적으로는 조선 최고 시조시인으로 손꼽히면서,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남인(南人)의 대표적인 이론가이기도 했습니다.

    (매화가 피고 꽃잎이 떨어질 즈음 살구꽃이 피고, 살구꽃 꽃잎이 떨어질 즈음 복사꽃이 피어납니다. 복사꽃이 피면 산에 들에 꽃들이 가득한 완연한 봄날입니다.)

    청학동에 유람하자고 벗에게 보내는 편지

    복사꽃은 갓 피고 살구꽃은 날리고
    버들은 푸르디푸르고 풀빛은 연하고
    나 그대를 청학동에 데려가고 싶나니
    봄 찾아 달빛이 옷에 묻어날 때까지

    將遊靑鶴洞寄李子馨(장유청학동기이자형)

    桃花初發杏花飛(도화초발행화비)
    柳色靑靑草色微(유색청청초색미)
    我欲携君靑鶴洞(아욕휴군청학동)
    探春直到月生衣(탐춘직도월생의)

    멋지지요. 복사꽃이 막 피어나고 살구꽃이 지기 시작하는 철은 서울을 기준으로 보면 4월 중하순입니다. 고산 선생이나 이란귀 선생이 살던 전라도를 기준 한다면 4월 초순일 겁니다. 복사꽃이 필 때면 앵두 자두 산벚꽃도 피는 철이니 그야말로 세상은 온통 꽃대궐이겠죠.

    꽃만 아름다운 철은 아니죠. 이제 막 피어나는 새잎들이 만들어내는 애기초록은 사람들을 꿈속으로 이끌기 충분하니까요. 그런 철에 신선들이 산다는 청학동은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함께 유람을 청하는 한시로 된 편지도 멋지고요.

    그러나 이렇게 찬란한 계절은 짙은 슬픔과 맞닿아 있습니다. 가까이는 4.16 세월호가 그렇고 멀리는 4.19 학생혁명이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게 맞이하는 갑작스런 이별은 늘 우리의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가슴 절절한 이별의 슬픔을 노래하여 오랫동안 우리 선인들이 애창했던 고려(高麗)의 가객(歌客)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이별)」이라는 시를 보겠습니다. 한때 고등학교 국어책에도 나온 시입니다.

    이별

    비 갠 긴 언덕엔 풀빛이 푸르른데
    남포로 님 보내며 슬픈 노래 울먹이네
    대동강 물이야 어느 때 마를거나
    해마다 이별 눈물 강물에 더하는 것을

    送人(송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벚꽃은 살구꽃보다는 늦게 피고 복사꽃보다는 일찍 핍니다. 벚꽃이 필 때면 강나루 긴 언덕은 초록빛으로 물들겠지요.)

    곧 있으면 「4.19 혁명」 59주기가 다가옵니다. 그날을 생각하며 이영도의 시 「진달래」를 이번 한시산책의 마지막 시로 올리려 합니다. 「4.19 혁명」에서 스러져간 붉은 넋을 기리며 노래한 시입니다.

    진달래

    – 이영도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참고> 이번에 인용한 한시 번역은 존경하는 고전번역원 이상현 선생님과 정선용 선생님이 번역한 것이라서 제목을 빼고는 모두 두 선생님이 번역한 것을 원문으로 실음을 알립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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