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이산가족 자유 왕래 과감하게 허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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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28일 0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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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4월23일은 사이프러스의 역사적인 날로 기록된다. 남북사이프러스 당국자들은 분단선인 ‘그린라인’을 열어젖히고 최초로 남북사이프러스인들의 자유방문을 허용했다. 1974년 터키의 침공에 의해 남북이 갈라진 뒤 29년째가 되던 해였다. 분단 30년이 다가오면서 남북사이프러스 당국자들이 가장 서둘렀던 일이 바로 남북 사이프러스인들의 자유왕래였다.

    분단선이 열리고서 일년이 지난 2004년 5월에 나는 사이프러스의 분단선을 두 번이나 넘어서 남북사이프러스를 오고 간 적 있었다. 한번은 도보로 그린라인(분단선)을 넘었고, 두 번째는 자동차로 남북사이프러스로 연결된 도로를 통해 분단선을 넘었다.

    북에서 남으로 넘어오는 터키계의 사이프러스인들과 마주치면서 걸어서 북사이프러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단선에 위치한 남북통제소에서의 절차는 너무나 간단했다. 남북사이프러스인들은 모두 간단한 주민증 확인절차만 거쳐 남북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었다.

    분단된 사이프러스는 1974년의 터키 침공으로 인해 남과 북이 전쟁을 치렀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다. 더구나 남쪽의 사이프러스인들은 그리스계이고 북쪽은 터키계로서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타민족들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남북한과 비교가 되는 부분이다.

    이산가족 불법 만남 중국에 엄청난 수입

    1992년에 중국과 한국이 상호간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가장 환호했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남북 이산가족들이었다. 철통같이 막힌 휴전선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북쪽의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던 남한의 이산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나마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 남북으로 분단된 사이프러스의 수도 니코시아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산가족들은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미화 수천 불을 가슴 속에 품고서 중국의 두만강 국경지대로 다녀오고 있다. 지금도 조선족 지역에는 북한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면서 북한의 관료들을 뇌물로 구슬려 이산가족들을 빼내오는 브로커들이 대기하고 있다. 남한의 가족들이 브로커를 통해 북쪽의 가족들을 불법적으로 만나 사나흘 지내는 데 수천 불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리고 최근에는 남한의 가족들이 북한에 사는 가족들에게 북한의 북쪽지역에서 사용 가능한 중국의 휴대폰까지 주어 통화를 한다는 사실도 들은 적 있다. 이산가족들의 불법적인 만남은 모두 중국을 무대로 행해지기 때문에 중국에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6.25전쟁 뒤 헤어진 가족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나보려는 이산가족들의 몸부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 이들이 상봉하는 장면은 민족전체의 가슴을 메어지게 만든다. 지금 금강산에서는 1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면 1백년 걸려도 이산가족 다 못 만난다

    아흔 살이 넘은 어머니가 팔순이 다 된 아들에게 밥을 떠먹이는 사진이나 고령의 아들이 아버지를 업고서 기뻐하는 사진을 보면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는 나 자신이 놀라울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헤어지는 순간만큼은 절망적이다. 최악의 비극이 연출된다.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이 가족들의 얼굴에 서려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면서 그나마 만남이라도 가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면서 처절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선다. 헤어진 가족들을 만난 사람들은 추첨에 당첨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산가족들은 정해진 인원수로 인해 계속 상봉신청만 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남북이산가족들이 만난다면 백 년이 걸려도 다 만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40년 전에는 남북 이산가족이 1천만 명이라고 했지만 차츰 세월이 지나면서 5백만, 지금은 70만으로 줄어들었다.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들은 그 동안 한 번도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갔고 지금 살아남은 이산가족 1세대들은 고령으로 매일 세상을 떠나고 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돌아본다면 동서독인들의 상호방문은 우리가 부러워할 정도로 자유롭고 활발했다. 1971년의 일명 ‘베를린협정’으로 불리는 ‘베를린 4자협정’이 조인된 후로는 한 해에 5백만 명 내지 7백만 명의 서독인들이 일정한 조건 하에서 관광객으로서 동독을 자유롭게 방문했다.

    라디오와 TV의 자유로운 청취와 시청, 우편물과 전화의 교환은 이 당시부터 시행됐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부분은 동독의 경우이다. 동독정부는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방문을 가능한 한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65세 이상의 동독노인들의 서독방문은 언제나 자유롭게 허용했다.

    나중에는 동독을 탈출했던 동독인들까지도 서독여권을 가지고 동독을 방문하여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최소한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게 하려는 인도주의적인 실천은 냉전의 격랑 속에서도 동서독은 보여주었다.

    2차대전의 나치전범국가로 분단된 독일은 오래 전에 통일을 이뤄냈고, 지금은 월드컵을 개최하여 전후 최초로 통일독일의 기쁨을 마음껏 외치고 있다. 사실 독일의 통일은 한반도의 통일보다 더 어려운 과제였다. 독일이 통일되기를 원했던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독일이 통일된 뒤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되는 상황을 유럽의 어느 나라도 원치 않았다. 동서독의 통일과 비교한다면 한반도의 통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갈라진 가족들이 남북통일의 확실한 매개체

    현재 엄격한 통제 속에서 제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남북한 이산가족들의 상봉은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남북간의 전면적인 자유왕래가 현재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남북한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자유로운 왕래만이라도 허용돼야 한다.

    남북통일을 위한 매개체는 남북 정부도 남북 정상도 아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확인해주는 남북에 갈라진 가족들이다. 이들이 자유롭게 만나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남북통일이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절망감 속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이산가족들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유치하지만 너무나 근본적인 한 가지 의문이 스쳐간다.

    ‘누가 이들을 만날 수 없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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