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반격의 기틀 마련
[국공내전⑳] 예상을 벗어난 장기전
    2019년 04월 04일 04: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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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국공내전⑲] 마오쩌둥, 섬북을 전전하다

장기전, 장제스의 예상을 벗어나다

내전에 폭발한 지 1년 가까이 지났다. 장제스와 국군 통수부 수뇌부는 3개월이면 비적들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했지만 전선은 완전히 혼전양상이었다. ‘서북의 매’로 이름난 후쫑난이 홍색수도 옌안을 점령했지만 섬북에서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서북 야전군의 지연전과 소모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린비아오의 동북 민주연군이 전열을 정비하고 틈만 나면 쑹화장을 건너 국군을 괴롭혔다. 화북의 허룽과 네룽전, 산둥의 천이와 쑤위, 중원의 류보청, 덩샤오핑도 기세가 등등하여 국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군은 점령지가 늘어날수록 움직일 수 있는 기동병력이 오히려 줄어들었다. 거기에 치고 빠지는 해방군의 소모전으로 이미 백만명 가까운 국군이 사살되거나 부상 당해 전투력을 잃었다. 해방군은 국군 포로를 보충병으로 편입시키고 노획한 무기로 무장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숫자가 늘어나고 무기가 충실해졌다. 1947년 6월이 되자 공산당군은 195만명에 이르렀으며 국군은 373만명이었다. 서로 끊임없이 병력을 보충했지만 국군의 숫자는 개전 초기와 비교하여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내전은 중국 민중에게 대재앙이었다. 수만, 수십만 대군이 맞부딪히는 전장과 주변지역은 초토가 되었으며 농사를 짓지 못하여 여러 지역에서 기근이 발생했다. 농사를 지어야 하는 청년은 군대로 징발되어 집에는 노인과 아녀자들이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수백만의 병사들은 일은 하지 않고 먹기만 한다. 입히고 재워야 하며 이동시켜야 한다. 병사들 몇 배의 민간인이 징발되어 전선 지원에 종사해야 했다. 국민정부와 공산당 쪽 모두 모든 비용을 군비로 써야 했다. 이런 상태가 중일전쟁 때부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니 민중들이 받은 고통을 헤아려 짐작하기 어렵다.

이런 고통에 대한 대부분의 원성은 국민정부 쪽에게 돌아갔다. 어쨌든 통치집단이었으며 국민당 쪽이 평화회담과 휴전협정을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장제스와 국민당 군대는 농민들의 고통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전투하는 와중에도 토지개혁을 지속하며 경자유전을 실현하는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장제스는 비적들을 쓸어버리고 속전속결하면 된다고 판단하였지만 전쟁은 이미 그의 예상 밖의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대기근 후난지역을 휩쓸다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온다. 후난성은 중일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가 가장 오랫동안 벌어진 곳이었다. 후난성 성도인 창사 방어전을 중심으로 중일 간 백만명이 장기간 대치하며 물고 물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후난성은 열 집이면 아홉이 빈집이라고 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웨한철도(粤漢鐵路: 광저우-우창간) 양쪽 수백리에 닭과 개조차 볼 수 없다고 하는 참상이었다. 논밭에는 잡초가 사람의 키만큼 무성하게 자랐다.

1946년 대기근으로 유랑하는 후난성 헝양의 민중들

1945년 중일전쟁으로 후난성의 옥토가 황무지로 변한 것이 1,450만무(1무는 200평이다.)에 이르렀다. 거기에 천재지변이 뒤따르니 1946년 후난성 남부와 서부에 가뭄이 들었다. 논은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수확한 것이 거의 없었다. 빈후(滨湖)지역에는 홍수가 나서 수백만무의 논에 물이 가득 들어찼다. 1945년에는 식량생산량이 예년의 삼분의 일에 불과했다. 내전이 시작되어 군인들 식량에다 일본군 포로 11만명이 이동을 기다려 그들까지 먹여야 했다. 국민정부는 160만석의 군량을 후난성에서 징발했다. 당시는 교통사정이 극히 열악하여 다른 성에서도 실어오지 못하게 되자 식량가격에 보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뛰어 올랐다. 사람들은 풀뿌리, 나무껍질을 먹다 못해 관음토라는 흙까지 먹었다.

8월이 되자 후난성에서 400만명이 굶어죽었으며 헝양에서만 9만명이 굶어 죽었다. 1946년과 1947년 사이 광둥성, 후난성, 광시좡족 자치주등 세 성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1,750만명에 이르렀다. 이런 참상은 중국 국내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는데 매체마다 국민정부에 그 책임을 물었다. 민심이 흉흉한데다 휴전의 기운은 없고 전쟁은 날로 격화되어 갔다.

5월이 되자 국민정부 통치지역 곳곳에서 쌀을 강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5월 2일 항저우에서는 수천명의 빈민들이 미곡상 300곳을 털었다. 쌀 강탈사건은 금방 전국으로 번졌다. 빈민들이 쌀을 빼앗는 것은 1946년 6월부터 시작되었다. 잇따른 흉년에다 물가앙등으로 빈민은 물론 노동자들도 먹을 쌀을 살 수가 없었다. 1947년이 되자 국민정부 통치구역 내 경제위기가 격화되었다. 노동자들은 물론 교원들도 먹고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곡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각지의 도시와 마을이 식량공황 상태가 되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빈민들은 쌀을 빼앗아 겨우 끼니를 때웠다. 5월부터 7월까지 쌀 강탈사건이 곡창이던 저장성을 비롯하여 장쑤, 안후이, 쓰촨, 후베이, 후난, 허난, 산둥, 섬서, 장시, 내몽골의 40개 도시로 번졌다. 국민정부 소재지인 난징과 상하이, 베이핑까지 소요가 번졌으며 미곡도시라 불리는 우시(無锡)와 라이후(萊湖)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사건은 국민당의 통치에 심각한 위기를 불러왔다. 반대로 공산당에게는 반 국민당, 반 장제스 투쟁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타이완 2.28 사건과 학생운동의 고조

1947년 2월 28일, 타이완의 타이베이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2월 27일, 국민당 전매국의 단속반이 타이베이(臺北)에서 사제 담배를 팔던 노점상 여인을 구타하고 이에 항의하는 연도의 시민을 총으로 쏘아 두 명이 죽었다. 격분한 군중들이 그날 저녁 국민당 타이베이시 경찰국에 모여 범인 처벌을 요구하였다. 아무 결과가 없자 다음날인 28일 타이베이 시민들은 철시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경찰국까지 행진하며 시위하며 청원하고 행정장관 공서에 범인 처벌을 요구하였다. 시민들은 손해배상과 전매국 폐지를 요구했는데 국민당 병사들이 다시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3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모인 군중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방송국을 점거하여 전 성의 민중들에게 들고 일어나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타이완 전성에 대규모 무장봉기가 일어나 군중들이 타이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놀란 국민정부는 타이완 행정장관 천이(陳儀)에게 ‘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여론을 가라앉히려 하였다. 그리고 2개 사단 병력을 이동시켜 3월 8일, 지룽(基隆)에 상륙시켰다. 국민정부군은 항공기와 군함까지 동원하여 타이완 민중들을 유혈 진압하였다. 3월 8일부터 13일까지 전 성에서 진압이 이루어져 약 3만명이 살해당했다. 남부의 까오슝(高雄)에서만 2,700여명이 살해당하는 등 타이완은 공포와 원한의 섬으로 변하였다.

1947년 2.28 사건에 항의하여 시위하는 타이완 시민들

타이완성의 무장기의는 담배 노점상 구타로 인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타이완성은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자 농업과 공업 생산이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타이완 민중들은 식량 부족과 물자 부족으로 고통 받는 것은 물론 대규모 실업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물가는 다락같이 오르는데다 타이완의 모든 기업은 물론 담배까지 국민정부가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여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타이완은 일본 식민지로 50년이나 유지되어 국민정부와 타이완 민중들의 사이가 그만큼 소원하였다. 그런데 힘으로만 억누르려 하였으니 누적되었던 고통과 불만이 우연한 계기에 폭발한 것이었다. 타이완은 대륙의 축소판과 같았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 및 사회의 불안, 그리고 민생의 파탄의 책임을 대부분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져야 할 형편이었다.

1947년 5월이 되자 국민정부 통치지역에서 대규모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이를 ‘5.20 애국 학생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1947년 5월 난징의 학생 시위를 필두로 전국 60여개 도시에서 청년학생들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기아반대, 내전반대, 탄압반대”를 외치며 국민당 통치를 뒤흔들었다. 이 시위 운동은 전국 각 계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1947년에 들어온 뒤 국민정부 통치지역은 경제가 흔들리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올랐다.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후난성 등 남부 지역은 대기근으로 엄청난 숫자가 굶어죽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정부예산은 모두 내전비용으로 들어가고 교육경비가 없어 교사와 학생들이 식사도 못할 지경이었다.

1947년 5월 20일 난징대학교 전신인 중앙대학교 교내 시위장면

1947년 5월 20일 난징에서 5,00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육을 살리기 위한 연합 대행진’을 벌였다. 이 행진에 대하여 경찰과 헌병은 물대포와 곤봉, 그리고 가죽 채찍으로 대응했다. 19명이 중상을 입고 90명이 경상을 입었으며 20여명이 체포되었다. 학생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기마경찰대와 6시간을 대치하였다. 그날 제4기 3차 국민참정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행진 대오는 대회장 밖에서 “기아를 반대한다. 내전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같은 날 베이핑의 여러 대학과 고등 중학교 등 7,000여명의 학생들이 베이징대학에서 출발하여 선전차를 움직이며 행진을 벌였다. 그후 전국적으로 내전반대, 기아반대의 학생운동이 전국으로 번져 후한, 충칭, 광저우, 항저우, 창사, 쿤밍, 푸저우, 난창, 구이린, 지난, 카이펑, 션양 등 60개 도시에서 시위와 행진이 잇따랐다.

중공 대표단 국민당 통치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다

1947년 3월 7일, 난징, 상하이에 파견되어 있던 중공 대표부가 옌안으로 돌아왔다. 상하이 판사처에 나가있던 ‘신화일보(1939-1947.2.28.까지 발행하던 공산당 신문)’ 책임자인 둥비우(董必武)를 비롯하여 첸즈광(錢之光), 통샤오펑(童小鹏)등이 미군기 4대에 나누어 타고 옌안에 도착했다. 둥비우는 떠나기 전에 발표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는 오늘 강압에 의해 이곳을 떠난다. 그 통분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10년 동안 이어져왔던 국공 간 연결이 국민당의 호전 인사들에 의해 오늘 끊겼다. 우리 중공 당원들은 처음 먹었던 마음처럼 평화와 민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다.”

공산당 인사들이 떠날 때 국민당의 장즈중, 샤오리즈(邵力子)와 민주동맹 대표인 뤄룽지(羅隆基) 등이 배웅을 나왔다. 충칭에 나가있던 중공 쓰촨성 서기 우위장(吳玉章) 등도 옌안으로 돌아와 국공 간에는 이제 최소한의 대화 통로마저 차단되었다. 이보다 앞선 2월 21일 국공과 미군 간의 군사적 조정을 담당하던 공산당 군사조정부 인원도 옌안으로 복귀하였다. 3월 2일 공산당은 성명을 내어 장제스를 비난하였다. “이것은 장제스 측이 결정한 것이다. 전쟁을 하는데 담판의 문을 완전히 닫아 건 것이다. 끝까지 내전으로 중공과 민주세력을 없애겠다는 음모이다. 그 책임은 모두 그가 져야 한다.”

전쟁을 하는 이들에게 민생은 뒷전이다. 그래도 고통 받는 백성을 대하는 태도는 국민정부와 공산당에게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장제스는 본래 있는 집 출신이었다. 부인인 쑹메이링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쑹씨 집안 출신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국민정부 쪽 고관이나 장군들은 상당수가 신해혁명이나 군벌전쟁 때 국민혁명을 위해 투신했지만 내전 때가 되면 모두 기득권을 가진 지배계급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이 대다수인 민중들의 고통에 무심했다. 1942년 허난성에서 가뭄으로 대기근이 들었을 때 국민당 장군 탕언보의 부대는 곡물세로 생산량의 30~50%의 식량을 징발해 갔다고 한다. 농민들은 식량 한 톨 없이 굶주리지만 군대의 창고에는 식량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적에게 식량을 주지 않기 위해 후퇴하며 들판의 곡식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견벽청야’ 전술을 예사로 썼다.

모두 지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민에게는 호박 한 개라도 공짜로 얻어서는 안 되며 정당한 값을 지불하라.”고 교육하는 공산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태도의 차이였다. 토지개혁을 놓고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첨예하게 갈렸다. 미국 저널리스트 잭 벨덴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한 뒤 국민당 군대가 돌아왔을 때 참여한 농민들은 철저한 보복을 당하였다. 농민들은 공개처형을 당했으며 소작료 감소 운동을 벌였던 농민은 때로 온 가족과 함께 산 채로 매장되었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돌아온 지주가 28가구의 24명을 죽이고 일부는 우물 속으로 내던져 버렸다. 우익 민병대는 갈취한 돈으로 군대로부터 총을 샀다. 토지개혁이나 농민을 대하는 공산당의 태도는 농민들의 직접적 혹은 암묵적 지지를 받았다 공산당 주력부대가 후퇴해도 지방부대들은 농민들의 지지 아래 계속 활동하였다.

국민당 인사들에게 부패는 하나의 생활방식이 되었다. 국채와 미국의 차관을 둘러싼 스캔들은 장제스의 측근까지 얽혀 있었다. 유엔구제 부흥기구(UNRRA)의 원조물자는 중국에 전달된 뒤 곧바로 암시장에 흘러 들어갔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장제스는 자꾸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반대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점점 근거지에 뿌리를 내리며 내전에 적응하여 갔다. 뿐만 아니라 국민정부 통치지역에도 유격대를 설립하여 후방을 교란하고자 하였다.

1947년 3월 8일, 중공 중앙은 ‘장제스 치하 농촌지역 유격전쟁에 관한 지시’를 발령했다. 각 지역 당조직에 농촌지역의 무장투쟁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물론 장정 소집에 대한 저항, 식량징발에 대한 항거, 세금납부 거부 등 각지 조건에 맞는 저항을 조직하라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농촌에서의 유격투쟁을 벌여 농촌 근거지를 세울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1947년 상반기에 각 지역에서 농민들에 의한 유격투쟁이 빈발하게 되었다. 타이후(太湖 : 장쑤성에 있는 호수, 포양후 퉁팅후와 함께 중국 3대 호수의 꼽힌다.) 일대의 농민들은 강남 민주연군을 결성하였다. 후난성에서는 수만명의 농민들이 기의를 일으켰으며 빈농단을 설립하였다. 쓰촨과 구이저우, 후난, 후베이성 등 네 개의 성 경계지역에는 유격사령부를 설립하였다. 광둥성과 푸젠성 경계, 후난성과 광둥성, 장시성, 안후이성, 하이난다오(海南島), 광시장족 자치주, 윈난성, 저장성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격전이 벌어졌으며 근거지가 설립되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로서는 내우외환이었다. 후방에 대한 공산당의 유격투쟁으로 국군은 병력 운용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네룽전 명예를 회복하다

펑더화이와 시중쉰, 왕쩐의 서북 야전군이 섬북에서 후쫑난의 대군과 지연전과 소모전을 펼치고 있을 때 화북과 중원에서도 공방전이 벌어졌다. 화북의 진찰기 군구(산시, 차하얼, 허베성 각 일부지역 관할) 사령원 네룽전이 허베이성 성도인 스쟈좡으로 출격했다. 그리고 중원의 허난성에서도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성 각 일부지역 관할) 해방군이 허난성 북부에서 국군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네룽전의 부대는 섬북의 후쫑난 집단군을 견제하고 푸쭤이 집단군에 밀렸던 근거지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류,덩 부대의 작전은 천이와 쑤위의 화동 야전군의 산둥성 라이우 지역 전투에 호응하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은 옌안을 빼앗기고 섬북을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전국의 전쟁을 지도하였다. 마치 장기를 두는 것과 같았다. 한쪽의 전황이 밀리면 다른 곳의 부대를 움직여 상대방의 부대가 지원하도록 강제하였다. 한쪽에서 대승을 거두면 인접한 부대들이 위협을 당하므로 그곳을 틀어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 대도시와 교통선을 지켜야 하는 국민당 쪽이 불리했다. 공산당은 농촌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으므로 이동이 더 자유롭고 보급이나 전선지원에서 유리하였다.

류보청과 덩샤오핑 휘하 해방군 부대는 3월부터 5월까지 20만명의 병력으로 핑한철로((베이핑에서 한커우간)와 다오칭 철로((다오커우道口-칭화清化) 연선과 허난성 신향(新鄕) 북쪽 지역을 공격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산둥성과 섬북을 중점 공격하는 장제스의 방침으로 다른 곳은 모두 수비태세로 전환하고 있었다. 장제스와 국군 지휘부는 산둥성에 있던 2개 사단을 급히 이동시키고 허난성에 있는 부대 등 5개 사단 10만명으로 맞섰다. 류보청과 덩샤오핑은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허난성 안양 등 여러 도시를 공격하여 국군 4만명을 섬멸하고 남북 150킬로, 동서 100킬로미터에 이르는 지역을 빼앗았다.

마오쩌둥은 옌안이 공격 당하기 전 1월 하순에 이미 진찰기 군구 사령원 네룽전과 부사령원 샤오커(蕭克), 정치위원 뤄루이칭(羅瑞卿)에게 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지침을 하달하였다. “일부병력으로 정면을 견제하고 주력부대로 적을 격퇴하라.”고 지시하였다. 옌안이 공격 당한 직후인 3월에는 국민당군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스쟈좡 전투에서 해방군의 전선지원에 나선 민병들

네룽전은 옌안 북쪽에서 전투가 한창 벌어지던 4월 4일, 스쟈좡으로 출격하여 시 외곽에서 국민당군을 기습했다. 네룽전의 부대가 진출한 곳은 서쪽은 옌시산의 타이위안 수정구였으며 동쪽은 쑨렌중의 바오딩 수정구 관할이었다. 네룽전은 서쪽의 국군을 공격하면 동쪽이 지원하지 않고 동쪽을 공격하면 반대로 서쪽이 지원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관할 경계지역에서 자신들의 병력을 소모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해방군이 스쟈좡 외곽 바오딩 수정구 관할 수비거점을 공격 점령하자 옌시산 군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스쟈장시가 위험해지자 수비군은 베이핑 행원 주임인 푸쭤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푸쭤이는 구이쑤이(지금의 후허하오터)의 변방에서 베이핑 지역을 관할하는 행원 주임으로 이동하였다. 푸쭤이의 능력을 장제스가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푸쭤이는 해방군과 여러 번 싸워 승리하여 상대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는 휘하 부대를 오히려 해방군 관할구역인 다칭허(大清河) 북쪽지역으로 출격시켜 해방군을 유인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유리한 지역에서 해방군과 결전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네룽전은 다칭허쪽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정타이철로(스쟈좡-타이위안을 잇는 철도) 서쪽으로 은밀히 이동했다. 네룽전의 부대는 국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옌시산의 거점인 낭쯔관(양孃子關)을 기습 점령하고 핑딩(平定)을 포위했다. 핑딩은 산시성 성도인 타이위안과 스쟈좡의 중간 쯤에 있는 현이다. 옌시산으로는 자신의 거점인 타이위안이 위협받게된 것이다. 깜짝 놀란 옌시산은 주력 2개 사단을 급파하여 해방군의 서진을 막으려 하였다.

옌시산의 지원군 파견은 네룽전이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네룽전은 지원군의 퇴로를 미리 차단한 다음 두 부대를 각각 분할하여 포위했다. 5월 2일 하루 동안의 격전 끝에 해방군은 옌시산의 지원군을 모두 섬멸하였다. 4월 4일 일스쟈좡 출격부터 5월 8일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네룽전의 진찰기 해방군은 국군 3만 5천명을 섬멸하고 화북의 불리했던 전황을 일거에 바꾸었다. 해방군은 정태철로 180킬로를 확보하여 타이위안과 스쟈좡의 연결을 차단했다. 스쟈좡은 고립되었으며 진찰기와 진기로예 해방구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네룽전으로서는 푸쭤이에게 잇따라 패배한 불명예를 씻었다. 마오쩌둥은 여러 차례 전보를 보내 각각의 전투에 대하여 크게 칭찬하였다.

황푸군관학교 교가

(첫 번째 것은 1924년 제정된 것이고 나중의 것은 1926년 바뀌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많은 학생들이여, 서로 사랑하고 정성을 기울이자. 삼민주의는 우리 혁명의 서곡이다.
혁명의 영웅, 국민의 선봉이 되자. 한층 분발하여 선열이 이룬 길을 뒤따르자.
같은 길을 가는 동창들이여, 가르침에 즐겨 따라 생사를 같이 하자. 오늘 우리 학교를 잊지 말자.
피로써 물들이자. 학교로 일으키자 와신상담의 노력으로 중화를 건설하자.

“莘莘学子,親愛精诚,三民主義,是我革命先聲。
革命英雄,国民先锋,再接再勵,繼續先烈成功。
同學同道,樂遵教導,终始生死,毋忘今日本校。
以血洒花,以校作家,臥薪嘗膽,努力建设中崋。”

1926년의 교가

성난 파도 일렁이고 당기가 펄럭인다. 이것이 혁명의 황푸다.
주의는 관철하고 기율은 강건하게, 분투할 선봉을 준비하자.
싸워서 혈로를 열자. 압박받는 민중을 인도하자. 손잡고 전진하자.
길은 멀지 않다. 두려워 마라. 사랑과 정성으로 영원히 지키자.
우리 학교 정신을 드높이자. 우리 학교 정신을 드높이자.

怒潮澎湃,黨旗飞舞,這是革命的黄埔。
主義须貫徹,纪律莫放松,豫備作奮鬪的先锋。
打條血路,引導被壓迫民衆,携着手,向前行。
路不遠,莫要惊,親愛精诚,继續永守。
發揚吾校精神,發揚吾校精神!

황푸군관학교의 교문 모습

황푸군관학교는 1924년 문을 열었다. 교사는 청나라의 육군학교와 해군학교터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중국 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다가 1926년 뒤에는 각지에 있던 군사학교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제1차 국공합작 시절 쑨원이 소련과 교섭하여 무기와 예산을 지원받았으며 공산당 주요 간부들도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장제스는 교장을 맡았는데 그 뒤로 학생들 사이에서 ‘교장’으로 불렸다. 자신도 스스로를 교장으로 부르며 휘하 지휘관들을 학생으로 지칭하였다. 사제지간의 끈끈한 정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밖에도 랴오중카이, 왕징웨이, 리쫑런, 천청, 구쭈통 등 중화민국의 유수한 지도자와 최고위 지휘관들이 주요 보직을 맡았다. 공산당쪽에서도 정치부 주임인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예젠잉, 네룽전, 천이, 둥비우, 궈모로우, 장궈타오, 샹잉 등 유수한 지도자들이 주임이나 교관을 맡아 활약하였다. 공산당에서도 린비아오, 천겅, 줘쳰 등 수많은 지휘관들이 이 학교를 졸업한 뒤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황푸 군관학교는 문을 연 첫해에만 2기의 학생을 입학시켜 훈련하였다. 그밖에 전국 각지에 10개의 분교를 두고 있었으므로 졸업생만 해도 엄청난 숫자에 이르렀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중일전쟁 기간에 살아남은 황푸 졸업생이 1만 1천명이었는데 생존율이 5퍼센트였다고 하니 대략 20만명이 황푸에서 훈련받은 셈이 된다. 이쯤 되면 사관학교라기보다 훈련소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 중에 초급 지휘관의 전사율이 워낙 높으니 대량으로 양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장제스는 황푸 출신들을 총애하였는데 특히 초기 졸업생들을 중용하였다. 워낙 졸업생이 많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제스는 1947년까지 교장직을 유지했는데 그 뒤에도 명예교장으로 남아 황푸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제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중 장제스가 가장 애통해 했던 한 인물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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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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