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당에 '개혁'없고 한나라에 '민생'없고
    민주노동당에는 '혁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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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27일 04: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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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서 상투어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상투어는 항상 올바른 것으로 전제되기에 날카로운 비판과 반성의 칼날에서 비껴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린우리당이 이야기하는 ‘개혁’이 의심스러운 것이고, 한나라당의 ‘민생’이라는 게 석연치 않은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NL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주’도, PD(아직도 이런 용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집단이 있다면)의 입에 밴 ‘평등’도, 극좌 정파들의 전가의 보도인 ‘혁명’도 이런 의혹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 민주노동당에게 그런 상투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혁신’이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노동당은 ‘혁신’, ‘혁신’을 이야기해왔다. 거의 창당 때부터가 아니었을지? 특히 작년 가을 재보선 실패 이후에는 당 안의 누구나 목청을 높여 ‘혁신’을 외친다. 2기 최고위원회 선거는 그 절정이었다.

       
    ▲ 민주노동당 창당대회(사진=한국노동사회연구소 홈페이지)
     

    너도나도 다 ‘혁신’을 들고 나와서 어느 후보가 어느 정파 소속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에 ‘개혁’이 없고 한나라당에 ‘민생’이 없는 것처럼 민주노동당도 ‘혁신’이란 말의 성찬에 비해서는 실제 새로워지는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필자는 여기서 누구누구 때문에 당의 혁신이 안 되고 있다거나 뭘 어찌 어찌 했으면 이렇지 않았을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 대체로 인기 있는 건 이런 글들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이런 식의 논리 전개야말로 ‘혁신’을 상투어로 만들어 버리는 대표적인 상투적 행위들이다.

    당이 이런 게 다 누구누구의 잘못이라는 식의 비판은 결국 그런 비판을 하는 자신은 비판의 칼날에서 면제시켜 버린다. 그래서 민주노동당과 노동자․민중운동 전체가 현재 직면한 위기 상황의 ‘근본성’을 실감하지 못하게 한다. ‘근본적 위기’라고 말은 해도 몸으로는 절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뭘 어떻게 했으면 잘 됐으리라는 식의 주장은 잘해봐야 주의(主意)주의의 반복일 뿐이다. 의지주의, 그 일상적 표현은 ‘승리주의’고 그 종국은 ‘패배의 때 이른 승인’이다. 진보정당에서 선거만 끝나면 울려 퍼지는 주의주의적 ‘반성’과 거기서 나오는 대안들이 도달할 종착역은 무엇인가? 바로, ‘토니 블레어’다.

    참을 수 없는 ‘혁신’의 무거움

    이 글의 주목적은 민주노동당이 ‘혁신’을 외치는데도 그게 뭔가 공허하고 미덥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짚어보려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게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하려면, 너무나,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민주노동당이 당 안팎의 기대에 걸맞게 제 자리를 찾으려면 일대 사건이 있어야만 한다.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매듭으로 기억될 대격동이 한 차례 이상 있어야 한다. 한국 정치에서는 보수정당들조차 이런 집단적 경험 없이 ‘날(生)로’ 성장하거나 집권해본 적이 없다.

    양김 씨가 권력을 향해 다가가는 데에도 6월 항쟁이라는 준혁명적 사건이 필요했다. 심지어는 열린우리당이라는, 우리가 항상 얕잡아보는 세력이 원내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서도 탄핵 사태라는 대중 동원을 거쳐야 했다. 하물며 진보정당임에랴?!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의 ‘혁신’을 이야기할 때 그 핵심은 당이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태세를 갖추고 그것에 일로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정당을 만들어서 의회에 진출시킨다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낯설면서 또 엄청난 과제다.

    지금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다들 ‘혁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이 정도의 전망과 그 무게를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여기서부터 막히는 것이다.

    둘째, 민주노동당이 ‘혁신’이라고 말하면서 보여줘야 할 것은 정치노선과 조직체계의 단순 땜질이 아니라 과감한 단절이 동반된 ‘실험들’이다. 사실 당은 기존 보수정당들과의 평면적 경쟁에서는 할 만큼 했다.

    외국 진보정당들과 비교해도 외양은 다 갖췄다. 그런데 그 성과는 미미하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런 평면적 경쟁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보정당 표준형의 겉모습만 따라 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뭔가 새 출발이 필요하다. 모든 여정의 출발이 다 그렇듯이 이것은 어디로부턴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목적한 종착지에 닿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한 마디로 실험이고 내기다.

    노동운동과 관련해서는 일부 재벌 대기업 노동조합과 선을 긋자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작 어렵고 또 중요한 과제는, 앞으로 등장할 초기업단위 노동조합들이 진정 노동‘계급’을 대변할만한 요구안을 갖고 싸우도록 제안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노동자 당원들이 소속 노동조합에서 그런 요구안, 단기적으로는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들에게 손해가 될 수도 있는 요구안을 앞장서서 외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당은 그 때의 충격과 반발, 일시적 혼란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지역에서는 좁은 의미의 당 지역조직을 넘어서는 무모하기까지 한 시도들을 벌여야 한다. 협동조합이 됐든 뭐가 됐든 주민들과 생활 속에서 만나고 함께 하는 공동체들을 만들어야 한다. 일단 시도라도 해봐야 한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에게만 어렵고 낯선 과제는 아니다.

       
    ▲ 지난 1일 열린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
     

    한국의 진보운동 자체가 민주화 투쟁 시절부터 지역 민중들 사이에 깊숙이 뿌리내려서 뭘 해본 적이 별로 없다. 수십 년 고착된 이 역사를 민주노동당이 깨야 하는 것이다. 깨지 않고서는 당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형편이다. 하지만 한 번도 운명을 걸고 시도해본 적이 없는 일이니 발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의원단 활동 문제가 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의원단 활동의 비판적 재검토를 주장해왔다(<말> 2005년 4월호에 실린 글과 국회 보좌관 워크숍 발제문을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지방선거가 끝나자 모두들 지난 2년간의 의정 활동이 ‘실패’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얼마나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인지 우리는 과연 절실히 깨닫고 있는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의 활동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17대 국회에서 최고였다. 의회정치의 덕목들에서는 최상의 활동들을 벌였다. 문제는, 그런데도, ‘실패’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제의 소지가 훨씬 깊은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뭘 더 했어야 하는데 하지 못했거나 한 게 아니라 애초의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의 덕목들을 충족시키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그 문법을 거스르고 뒤집는 활동 방식이 필요했던 것일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이 무슨 혁명 정치를 지지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경쟁 상대인 양대 보수정당들의 싸움판이 원래부터 의회민주주의의 고상한 잔디밭 경기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시도했어야 할 대안적 활동의 상이 무엇이었는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의원단 활동의 ‘혁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거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는 추상적 당위론은 원내 진출 이전에나 의미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 이상의 지침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 내의 사회주의 정파들조차도 정치평론가의 펜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돈키호테’들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민주노동당의 ‘혁신’은 참으로 벅차게 느껴진다. 그래서 불교의 ‘돈오점수’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도 바울의 구호보다도 더 난해하기만 하다. 어쩌면 이제부터 민주노동당은 선거 결과에 대한 성급한 기대는 버리고 묵묵히 자기혁신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지난 5월 1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 집회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제도권 정당인 한, 현실 정치 일정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길을 간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유의미한 정치 세력으로서 2007년 대선을 넘기고 2008년 총선을 맞이해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18대 총선에서 양적 비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최소한 17대 총선의 성과 정도는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17대 총선과 양적으로 비슷한 결과라 할지라도, 그 내용은 전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좌파적 압력 세력 정도로 인정받은 2004년 때와는 달리 2008년에는 독자적인 좌파정당의 정체성으로 그만큼의 지지 수준을 획득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당의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혁신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 정치 일정에 대응하기. 필자는 연초에 발표한 한 글(‘민주노동당의 화두 – 진보적 대중정치’, <연대와 실천> 2월호)에서 이것을 “진보적 대중정치의 ‘가나다’부터 다시 학습하면서 동시에 대선 국면에서 대중정치세력으로 살아남는” 것이라고 표현했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정치평론가의 어법일 뿐이다. 실천적 정치가라면 “~하면서 동시에” 식의 정식을 제시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노동당에 필요한 것은 “~함으로써 동시에”의 제안이다. 당의 근본적․장기적 혁신과 대선․총선 대응을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하여 추진할 계기들을 제안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 안에서 누가 그런 제안을 하고 있는가? 과연 그런 제안은 있는가? 썩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어도, 뭔가 시도해보려는 몸짓은 없지 않다. 최고위원 선거에서 ‘사회주의’ 정당으로의 성격을 분명히 하자고 외친 후보가 있었다.

    지방선거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당 혁신의 출발점으로 제시한 후보도 있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다. 치기 어린 주장이라는 비난도 있다. 이념적 출발점의 제시가 만병통치약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도 당장은 ‘낙선’과 ‘참패’였다.

    하지만 필자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도 그런 제안과 시도들이 당장의 선거에서 몇 % 더 득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지금 민주노동당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돈키호테’들이라고. 뭔가 꿈을 제시하고 그것을 향해 과감히 첫 발을 떼며 그 성공도, 실패도 모두 제 것으로 떠안는 정치적 리더십이라고. 그것이 없이는 모든 ‘혁신’의 외침은 허망한 주절거림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단호히 말하건대, 민주노동당 대권 주자들의 공개경쟁이란 것도, 이러한 정치적 리더십의 경쟁이 아니라면, 또 다시 김빠진 맥주 꼴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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