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협약 끼겠다는 주제넘은 시민단체들에게
        2006년 06월 26일 06: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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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풀어야 할 과제가 많긴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인내를 갖고 이견을 하나하나 좁혀나갈 것이다.”

    저출산고령사회 기본협약을 이끌어낸 연석회의 관계자의 이 말은 거짓이다. 인내를 가지겠다는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전제는 완벽한 거짓이다. 2005년에는 ‘투명사회협약’이 있었고, 2004년에는 ‘일자리 사회협약’이 있었고, 1998년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이 있었다.

    그리고, 2004년의 일자리 사회협약 내용이었던 ‘해고 회피’, ‘비정규직 처우 개선’ 같은 정책이 조금이라도 실천되었다면, 출산 중단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소득과 고용 불안정(50% 미만 하위 소득 가구)’이나 ‘자녀 양육의 경제적 부담(150% 이상 상위 소득 가구)’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 지난 20일 있었던 저출산·고령화대책 연석회의 사회협약 체결식 (사진=국무총리실 홈페이지)
     

    참여연대는 지난 6월 8일, 정부의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을 “발상의 전환 없는 짜깁기 대책”이라고 비판했었다. 불과 12일 후 참여연대는 이번 협약에 참가하는데, 참여연대의 양대 요구 중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계획은 10%P 확대로 수용된 반면 아동수당제 도입은 여전히 빠져 있다. 이럴 때 참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여연대로서는 곤혹스럽겠지만, 참여연대 주장이 옳은 줄 알았던 시민으로서는 당혹스럽다.

    이번 협약에는 ‘효도는 나라의 근본 운동’, ‘결혼 장려 운동’, ‘출산 서약 운동’과 같이 실로 놀라운 계획이 포함돼 있다. 반면 여성운동의 요구였던 동거 부부나 미혼모 자녀에 대한 공공 지원은 제외되었지만, 여성단체들은 꿋꿋이 참여했다. 하긴, 시부모 잘 섬기는 효부들 출산율이 높기는 하다.

    종교단체나 여성단체, 노인단체, 또는 시민단체라 칭해지는 단체들은 사회협약(Social Dialogue, Social Corporatism)의 주체일 수 없다. 한국의 노인단체는 노령인구 대변자보다는 극우 정치조직으로서 더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성단체가 출산의 주역이라는 발상은 ‘대동아 전쟁’ 때에나 통용되던 것이다. 노조 쪽 주장을 물타기 하려는 정부와 재계의 전략 전술, 그럴듯한 자리에는 꼭 끼고 싶어 하는 사회단체들의 관변 콤플렉스, ‘손잡고 사진 찍기’ 전통이 사회협약을 알맹이 빠진 넝마로 만들고 말았다.

    어느 나라에서든 노동자․자본가․정부라는 삼자주의(Tripartism)가 관철되는 것은 그 삼자가 자본주의 사회정책의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이고 투쟁과 타협, 협약 이행 강제력을 가진 주체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헌법과 노동관계법, 공직선거법에서 준국가 기구로서의 특수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노동조합을 흉내 내, 시민사회단체들이 사회협약에 한 자리 끼겠다는 것은 한 마디로 주제 넘는 짓이다.

    이번 협약의 모태가 된 정부 계획안의 80% 가까이는 이미 시행되고 있거나 시행 예정된 정책이다. 크게 이루어진 게 없으니, 끼어도 그만 안 끼어도 그만이거나, 괜스레 끼어들어 발목 잡히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도 두 노총은 협약에 참여했다.

    협약 참여의 성과는 만족스럽기는커녕 불안하기 그지 없다. ‘탄력근로시간제 등 근로시간제도 유연화’, ‘파트타임 근무 등을 기업 지침으로 제공’과 같은 언급이 어떻게 구체화되어 어떤 피해를 낳을지 너무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산하의 몇몇 거대 산별연맹들이 산업정책 개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은 이해할만 하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산별연맹 이해의 산술합이 민주노총의 사회협약으로 자연스레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 시점에서 총노동 또는 대자계급의 이익은 이러저러한 산업정책보다는 한미 FTA와 같은 신자유주의 거시정책에 의해 거의 전적으로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 정책 협약보다는 고도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현 시기에 더 적합한 태도일 수 있다.

    사회적 코포라티즘 노선은 한국 노동운동의 바람직한 중기 전략이다. 하지만, 몇 차례의 사회협약 시도 중 유일하게 실천된 것이 정리해고 뿐이라는 사실은 그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한국 노동운동이 사회협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음, 더 근원적으로는 사회협약의 조건이 조성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모든 사회협약은 계급타협이고, 모든 계급타협의 전제는 계급투쟁이다. 그렇다면 짚어 보자. 한국에서 계급투쟁이라 일컬을만한 게 언제 있기나 했던가?

    이 글은 시민의 신문(ngotimes.net)에도 함께 실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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