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고 존엄? 생일이 뭣이 그리 중헌디!
    [역사의 한 페이지㉒]김장환 일기로 보는 1950년대
        2019년 03월 29일 10: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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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역사의 한 페이지-21] “송종섭 석방 청하는 진정서 한 통”

    이승만 대통령은 예수나 석가처럼 아무런 ‘나’도 없고 어떠한 ‘사(私)’도 없이 민족의 자유와 독립,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개척하는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삶을 살아왔다….우리 한국의 창건자! 세계의 민주 선봉! 세계의 위인! 민족을 위하여 형극의 길을 걸어오신 현대의 성자! 이 나라 한국을 위하여 이 겨레 3천만을 위하여 길이길이 만수무강하심을 비는 바이다!

    – 공보처장 갈홍기, [대통령 이승만박사 약전](1955)에서

    해마다 3월 26일이 되면 다소 의미가 다른 두 개의 기념식이 열린다. 하나는 안중근 의사 추모식으로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 거사로 투옥되었다가 그 이듬해인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의 나이 만 31세였다. 순국 109주기가 되는 2019년 3월 26일 올해의 추모식은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렸다.

    또 하나의 기념식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황해도 평산군 능내동에서 1875년 3월 26일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가 용꿈을 꾸고 낳았다고 하여 아명을 ‘승룡(承龍)’이라고 하였다가 나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승만(承晩)’으로 바꿨다. 올해는 이승만 대통령이 태어난 지 144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날을 기념하여 2019년 3월 26일 서울 중구 정동 제일교회에서는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신철식) 주관으로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4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신철식 회장은 이날 기념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며…….최근의 어지럽고 위험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우리가 자유대한을 수호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승만 건국 아버지의 건국이념을 되새기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진] 2019년 3월 26일 두 개의 다른 기념식이 동시에 열렸다. 위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기 추모식 장면, 아래는 정동교회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 탄신 144주년 기념식’이다. (순서대로 아시아경제, 조선일보 사진)

    안중근 의사야 이념을 불문하고 한국인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라 그 추모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겠지만, 4.19혁명으로 퇴출당한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 축하 행사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부터 두 세대 전인 195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1950년대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일 축하 행사의 열기와 규모는 지금의 관점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최고 존엄’이 있었다

    1950년대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는 지금 북쪽의 김일성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을 당시에는 국부(國父)로 불렀으며, 지폐나 동전에도 이승만의 얼굴이 새겨졌으며, 우남공원, 우남정, 우남도서관, 우남회관, 우남로 등 공공건물이나 공원, 도로명도 이승만의 호를 따서 바꾸기도 하였다. 이러니 집권 자유당과 정부는 생일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80회 생일을 맞았던 1955년은 그 정도가 심해도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에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비는 송수탑(頌壽塔)을 세우는가 하면, ’80회 탄신경축중앙위원회’ 주관으로 남산에 25미터짜리 초대형 동상 건립에 착수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체신부에서는 80회 탄신기념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했으며, 학교에서는 탄신 기념 글짓기 대회를 개최하였고, 서울 시내에는 대통령의 원색 사진과 꽃으로 장식한 전차가 달렸고, 야간 불꽃놀이가 남산과 중앙청에서 열려 분위기가 마치 국경일 같았다. (실제 1956년부터 3월 26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어 4년간 유지되었다.) 이런 축제 분위기를 극대화하고자 정부는 야간 통행금지도 2시간 줄여주는 ‘은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말 그대로 국부(國父), 즉 왕과 같은 존재였다.

    [사진] 왼쪽은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남한산성에 세워진 송수비 앞에서 찍은 어느 가족의 기념사진이다. 송수비 위에 장식된 동물은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이다. 이 송수비는 4.19혁명 후 4미터 가량의 탑 본체와 청동 봉황상을 분리하여 탑 부분은 기단 앞 땅 아래 묻었고, 청동 조각은 남한산성 공원 측이 보관하던 중 유실되었다. 오른쪽은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맞아 실시된 글짓기 대회에서 이재유 학생이 가작으로 받은 상장이다. 지금 만약 이런 식의 글짓기 대회가 열린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도 많이 변했다. (두 자료 모두 박건호 소장)

    이날 서울운동장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열렸는데 여기 동원된 학생들은 매스게임을 통해 ’80’이라는 숫자와 ‘만수무강’이라는 글자를 만들었다. 이날 학생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동원되었는데, 서울운동장에서 경축행사가 열릴 때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고,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대규모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날 저녁에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25년 만에 고국에 귀국하여 직접 지휘한 경축 음악회가 열렸다.

    공보실은 이 날을 기념하여 대통령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시를 묶어 [헌수송(獻壽頌)]이란 책으로 출간하였다. 언론도 이승만을 찬양하는 글을 싣기에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문인들도 이승만 찬양에 나섰다. 시인 김광섭도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는 헌시를 [서울신문]에 실었는데, 김광섭은 이 시에서 이승만을 ‘세기의 태양’이라고 표현하였다.

    “북악산 줄기 찬 기슭에서
    세기의 태양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봄은 꽃보다도 일찍 오고 바람은 향기 앞에 부드럽다….
    강토에 뿌리박힐 불멸의 영혼 이미 생사를 넘어
    전신을 바쳐 반만년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흰 머리칼 선생을 맞아
    봄빛에 날리니 아 여기 섰도다.
    이 나라 지키는 정신”

    1950년대에 한반도에는 태양이 동시에 3개가 떠있는 정말로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의 태양 말고도 남한에 ‘이승만’이라는 ‘세기의 태양’이, 북한에 ‘김일성’이라는 ‘민족의 태양’이 떠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지금도 김일성의 생일날인 4월 15일을 ‘태양절’이라고 기념하고 있다.)

     

    [사진] 남한의 이승만과 북한의 김일성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개인 우상화로 치달았다. 거대한 동상 제작은 그 결정판이었다. 왼쪽은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맞아 제작하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56년 8월 완성된 이승만 동상으로 서울 남산에 세워졌다. 본체만 7미터이고, 기단까지 합치면 25미터였다. 4.19혁명 직후 이 동상은 철거되었다. 오른쪽은 북한의 평양 만수대 김일성 동상으로 김일성이 태어난 지 60주년을 맞이하여 1972년 건립된 것이다. 본체만 23미터이고 표면에 금을 입혔다. 현재 남한은 ‘동상의 시대’를 극복한 지 오래이지만, 북한은 아직도 그러한 시대를 살고 있다. (두 사진 모두 인터넷 사진)

    경기중학교 김장환의 일기

    이제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보자. 4년 전 경매를 통해 일기장 한 권을 수집하였다. 이 일기를 기록한 인물은 김장환으로 당시 경기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학생이다. 김장환의 나이는 고작 10대 중반이지만 세상일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소소한 일상 말고도 정치, 사회적 사건들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관찰하고 소감을 일기에 적었다. 당시 중학생은 요즘 중학생과는 뭔가 달랐던 것 같다. 이 일기장의 몇 페이지만 봐도 금방 느낄 수 있는데, 같은 나이인데도 시대에 따라 생각 수준이 다른 것은 왜일까?

    시대적 상황이 사람들을 조숙하게 하는 것일까? 결혼 시기가 사람의 성숙도를 결정짓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 유관순의 친구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남동순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는 유관순과 여섯 살부터 알고 지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여섯 살은 그때 우리 나이 여섯 살과 비교하면 완전히 어린애 같아요. 옛날에는 일찌감치 남자는 열다섯 살이면 장가를 갔고, 여자도 열네 살이면 시집을 갔어요. 17∼20세면 벌써 노총각 노쳐녀였죠. – 남동순 증언,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사진] 경기 중학교 3학년 김장환의 일기장으로 표지 가운데 경기중학의 마크와 ‘경기중학’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1956년 초부터 1957년 4월까지 기록되어 있다. (박건호 소장)

    이 조숙한 경기중학생 장환의 가족 구성은 부모 외에 위로 형 하나, 아래로 동생 하나였다. 장환을 포함하여 모두 다섯인 셈이다. 그의 일기는 1956년에서 초부터 시작되어 57년 4월로 끝나고 있는데, 지금부터 이 일기장을 통해 1950년대 중후반의 사회상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1956년 3월로 돌아간다. 마침 그 해는 대선이 있던 해였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3선 출마의 길을 연 자유당은 1956년 3월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 자유당 전당 대회에서 이승만을 다시 대통령 후보로 뽑았다. 그런데 며칠 후 이승만은 뜬금없이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국민들은 대체로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성명이 발표되자마자 그가 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서야 된다는 관제 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자유당과 경찰은 물론,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데모를 벌이며 그의 대통령 출마를 주장했다. 심지어 우마차 조합원들은 우마차를 끌고 나와 이승만의 3선 출마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여 ‘우의마의(牛意馬意)’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국민 여론에 못이기는 척하며 “민의에 따르겠다”고 말하고 다시 대통령 후보에 나설 것을 수락하였다. 그는 이기붕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하였다.

    대통령 선거를 일 년 앞둔 작년 1955년 9월 17일 드디어 야당은 ‘민주당’으로 통합하고 새로이 출발하였다. 민주당은 당수인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한편 혁신계는 대통령 후보 조봉암, 부통령 후보 박기출로 진용을 갖추었다. 1956년 5월 15일 실시될 제 3대 대통령 선거(제 4대 부통령 선거)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56년 3월 15일 일기에서 장환은 중학생임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재출마를 요구하는 여러 단체들의 데모를 마땅치 않게 언급하고 있다.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그는 현상만을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보고 있었다. 그날의 일기를 보자.

    3월 15일 목요일

    …….현재 정치상으로 보면 이대통령이 무슨 이유인지 3선 출마를 안 한다고 자유당 회의에서 발표했다. 그러자 공무원 요원들은 국민을 시켜 이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나라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국민을 억지로 시켜 대통령 재출마를 요청하고 있으니 이것은 민주국가에 위반된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어느 동회에서는 강제로 대통령 재출마의 도장을 찍으라고 하는 둥, 안하면 재미적다는 등과 같은 일이 발생하여 말이 많다. 그리고 매일 경무대에 대통령 재출마 요청인들이 무려 4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들이 정직히 원하는 바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무원의 조정으로 끌려온 사람인가? 그리고 또 이상한 것은 대통령께서 가끔 우리나라 경제 상태를 아시려고 동화 백화점에 오셔서 물건을 사신다. 그런데 그 비서들이 그 전날 상점에 가서 이대통령에겐 싸게 팔기를 정해 놓는다. 그들은 참된 대통령을 참되게 모시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대통령에 장점만 뵈려는 원숭이의 극이니만치 이것이 쭉 계속된다면 후일의 우리 세계는 어떻게 될는지 의문이다.

    장환의 일기에는 3월 24일부터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행사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학교별로 행사를 하도록 교육청에서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3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행사는 선거 운동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승만에 대한 우상화는 이렇게도 집요한 것이었다. 작년의 80회 생일 축하 행사야 80회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올해는 81회니 특별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더욱 가관인 것은 생일날인 3월 26일에 눈비가 온 후 운동장이 질어서 개최할 수 없게 되자 생일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3일 뒤로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장환의 일기 3월 29일자에는 친구들이 “생일도 연기할 수 있나”라고 말들을 했다고 하니 중학생들이 봐도 이상한 생일 축하식이었다.

    3월 24일 토요일 비

    학교에선 26일 대통령 생신날. 태극기를 갖고 학교에 등교하란 요지와 요사이 낙제생이 많을 것이라는 우리 선생님의 수심 가득 찬 어조의 요지가 있었을 뿐이다.

    3월 25일 일요일 비, 눈

    …….저녁부터 젖은 강산을 내려 퍼붓는 눈은 아직 늦겨울을 다시 상징하는 듯 지천 없이 떨어지는 양은 내일의 대통령의 생신을 축하함인지 그렇지 않으면 나를 지루하게 만듦인지…….

    3월 26일 월요일 개임, 흐림

    오늘은 대통령 생신이었건만 날이 질고해서 우리들은 행사가 없었으나 육해공군의 사관생들의 사열 등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수업은커녕 학교에서 바로 집에 돌아오다…

    3월 29일 목요일 개임

    오늘은 연기한 대통령 생일 축하식이다. 동무들은 생일도 연기할 수 있나하고 말하였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연세가 세계적으로 많으신 대통령의 축하만은 일기관계로 연기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다.

    [사진] 1956년 3월 29일자 일기 부분

    장환의 일기는 중학생의 일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3대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이왕 일기를 보기 시작했으니 생일 기념행사를 지나서 선거 직전의 상황까지 정주행해보자. 역시 가장 큰 사건은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의 급서(急逝)였다. 4월말부터 5월 15일까지 일기의 주요 부분이다.

    4월 28일 토요일 개임

    …….요즘은 전기도 24시간 준다. 그리고 판자 집 철거 문제를 취소했다. 그것뿐이랴. 세금도 잘 안 받는다. 그것은 자유당의 선거운동에 매우 큰 계획인 것 같다. 이러고 보니 대통령선거가 한 달에 한 번씩 있었으면 그 얼마나 좋은 그리고 살기 편리한 나라와 도시가 될까…….그리고 갑자기 문교부 장관(이성근)이 지방 순찰을 하는 도중 은근히 선거 운동을 한다는 기사가 신문에 씌어 있었다.

    5월 5일 토요일 비

    오늘은 어린이날이요 또한 신익희씨가 돌아가신 날이요 또한 우리학교 연구수업이 있던 날이다…….이번 입후보자 중 이승만 대통령에 제일 강적으로 대항하던 신익희씨가 이리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는 좀 그를 투표해줄 가망이 있었고, 더욱이 이번엔 어떻게 된 셈인지 민심이 그리로 많이 쏠렸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전주로 정견 발표 차 떠났는데 기차 안에서 발병되어 이리에 도착하여 호남병원에 입원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15분후인 5시 45분(오전)에 임종하셨다는 것이다. 갑자기 아침부터 쏟아지는 비는 그를 슬퍼함인지……. 애닲아하는 시민과 함께 더욱 우울케 한다…

    5월 6일 일요일 개임

    어제 비극의 한 토막이다.

    민족을 울려놓고 돌아가신 고 신익희씨의 시체를 담은 엠부란스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군중의 아우성 소리 그중에는 대학생을 비롯한 고등학생이 많았다. 그 행렬이 서울역을 지나 중앙청에 이르자 국민의 흥분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학생에게 선거운동을 못하게 한 이성근 문교부 장관을 쫓아내자고 중앙청으로 달려드는 무리,……일행은 다시 신익희집인 효자동으로 어떤 무리는 엠부란스를 몰고 경무대로 들어가자는 이도 있고……. 신익희씨의 시체가 다 안치되자 그 무리들은 경무대로 데모, 경찰을 막 두드리면서 팔매질로 말미암아 경찰과 헌병에서 뿜는 총에 겨우 진압. 한 사람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총에 쓰러진 자는 수십 명에 되는 듯하나 다 끌고 가서 잘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어제 납치된 이들이 무려 700여명이 되고, 직접 구속된 이가 400여명이 된다고 한다. 경찰도 수십 명이 다쳤다고 하나 확실한 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학생 중 납치된 가운데 우리학교 고등도 있다는 말이 있고 대학생 중에는 고대 학생이 제일 많다는 것.

    5월 15일 화요일 개임

    오늘은 장차 우리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대통령 그리고 부통령 선거일이다. 수많은 선전의 결과가 오늘에 나타날 것이다. 대통령엔 해공 신익희 선생의 빈 자리를 둔 채, 이승만 박사와 조봉암씨의 결전이고, 부통령후보에선 8인 중 박기출씨와 이종태씨가 탈퇴했다. 이종태씨는 수송국민학교에서 정견 발표 때 겨우 200명의 청중이 모인 까닭이요, 박기출씨는 진보당의 재정이 곤란해 그런 까닭인 모양이다. 우리 집에선 아버지 주장에 대통령엔 조봉암, 부통령엔 장면씨로 투표했다. 여지껏 선전 방해라든가 폭력을 사용한 것은 자유당의 짓이 매우 많았다 한다. 그리고 지금 계산으로는 대통령에는 틀림없이 이승만씨일테고, 부통령엔 장면씨일 것이라고 추측되나 뒤에 자유 분위기를 폭발하거나 또는 무데기 투표(투표통수를 몰래 바꿈)를 쓰면 부통령엔 변동이 있으리라 추측된다.

    [사진] 장환의 일기 중 1956년 5월 6일 부분

    이 날 선거 결과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이 선출되었다. 장환은 선거권이 없었을 것이고, 그의 아버지는 대통령에 조봉암, 부통령에 장면을 찍은 것으로 보아 다소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인물로 보인다.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장환 가족이 실망하는 모습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렇게 선거는 끝나고 시간은 흘러 해가 바뀐다. 1956년 병신년이 가고 1957년 정유년이 되었다. 이제 장환은 고등학생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문영극장에 가서 150환을 주고 [선장 호레이쇼]를 본 게 새로운 경험이라면 경험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걱정인 것은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매우 위독한 상황이라는 점!

    충무로에서 양복점을 하는 아버지의 벌이도 빠듯하다. 10만환이 조금 안 되는 월수입에 병원비니 학비니 지출이 많아 얼마 전부터는 쌀도 외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956년 시작된 장환의 일기는 1957년 4월 5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장환 집안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유당 정권하에서 세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루하루의 삶이 고달프기만 한데, 일기장이 끝나기 며칠 전 그 귀하신 분의 생일이야기가 또 나온다. 생일이 뭐가 그리 중한지…….

    이날 81회 생일날에는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들이는 ‘부자식(父子式)’이라는 것도 같이 거행됐다. 저 윗분들의 생일 파티는 장환 가족의 생활고와 아무 관계없다는 듯이 3월 26일이면 어김없이 거행되었다. 1957년 3월 장환의 일기이다. 임종을 눈앞에 둔 어머니의 건강에 늘 마음 졸였을 장환 형제에게 노대통령(老大統領) 생일 축하 행사는 공허한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1957년 3월 24일 일요일 흐림

    오늘은 의사가 더 한번 왕진을 왔었는데
    온 이유는 어머니가 매우 약하시므로 링그루 주사를 놓을 목적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핏줄이 어찌나 가는지 그만 못 놓고 다른 주사만 놓고 갔다.
    어머니는 병 시초보다도 더 매우 야위셨다.
    요새는 밥도 제대로 못 드시는 형편이다.

    1957년 3월 26일 화요일

    오늘은 대통령 82세 생일날이다.

    요즘같이 경제가 핍박하고 절양궁민이 많은 이때 그렇게 화려하게 연다하니 좀 엉터리 같은 00병(??)이 들기 쉬웠다. 우리 형도 어제까지 마스게임 연습했었으나 연기했음으로 실제로 활동은 어렵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대통령이 양자로 이기붕의 맏아들을 정해서 새 부자식(父子式)도 오늘 거행했다.

    1957년 3월 28일 목요일 눈. 흐림

    어머니의 병환은 자꾸 더해 가시는 것만 같다. 요새는 진지 잡수시는 족족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다시 죽을 끓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양꿀을 사와서 어머니에게 드렸다. 꿀물이라도 끓여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 달걀 잡수셨으나 여위실대로 여위시었다. 그래서 우리 집은 웃음도 즐거움도 없이 그저 슬픔에 잠겨있는 듯하다.

    일기 그 후의 이야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이런 ‘우상 정치’의 끝은 무엇이었던가?

    ‘최고 존엄’ 이승만은 영원한 대통령이어야 하고, 자유당 정권 역시 영원한 것이어야 했다. 4대 대통령 선거(5대 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던 1960년이었다. 장환의 일기로부터는 대략 3∼4년이 지난 후였다. 선거는 원래 1960년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집권 자유당은 야당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병옥은 “이것은 페어 플레이 정신을 망각하고 등 뒤에서 총을 쏘는 격”이라고 비난 성명을 발표했지만 선거일이 조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선거 날짜를 일방적으로 2달 앞당긴 이유가 가관이다. ‘최고 존엄’의 생일 때문이었다. 자유당 강경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탄신일 이전에 당선시켜 드린 다음 탄신일을 거족적인 축일(祝日)로 하자”고 조기 선거를 밀어 붙인 것이다. ‘대통령 당선’을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축하 선물로 드리자는 논리였다. 이미 국가는 공공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희한한 이유로 1960년 3월 15일로 조정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이 맞붙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신병 치료 중이던 조병옥이 병원에서 급서하게 되면서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된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버렸고, 당시 사람들의 주 관심은 누가 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대통령 자리로 만족했으면 그 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3월 15일 엄청난 부정선거가 자행된 것은 부통령까지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하는 과욕에서 빚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지난 1956년 선거처럼 부통령에 장면이 당선될 경우를 상상해보자.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5세! 당시 한국인의 일반적 수명으로 고려할 때 언제 ‘밤새 안녕’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럴 경우 권력 승계 1순위는 민주당 출신의 부통령 장면이 될 것이므로, 한 번에 권력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절대 권력에 도취한 자들은 이런 끔찍한 악몽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욕망이 결국 부정선거를 낳았고, 부정선거는 혁명을 낳았고, 혁명은 결국 그들이 12년간 쌓아놓았던 우상 정치, 최고 존엄, 동상(銅像) 그 모두를 파괴하고 말았다.

    공자(孔子)가 제자인 자공에게 말했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

    역시 그 말이 진리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사진]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면서, 이승만 동상도 국민들의 손에 끌어내려졌다. 왼쪽은 서울 남산, 오른쪽은 탑골 공원에 세워져 있던 동상으로 우상 정치의 허망함을 증언해 주는 장면이다. 당시 85세의 노(老) 대통령은 매년 그의 생일을 찬양해마지않던 그의 신민들이 왜 이렇게 거친 분노를 드러내는지 의아해했을 것이다. 50년대 그의 신민(臣民)들은 혁명을 통해 시민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터넷 사진)

    [참고자료]

    이승만박사투쟁사간행회, [민족의거성], 1958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2권∼3권, 인물과 사상사, 2004

    [8.15의 기억], 한길사, 2005

    필자소개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국사학과와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를 졸업하고 명덕외고 교사로 있다가 현재는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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