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섬북을 전전하다
[국공내전⑲] 1년 동안 20개 현, 37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휘하다
    2019년 03월 28일 0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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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회의 글 [국공내전⑱] 국민군 후쫑난, 홍색수도 옌안 점령하다

1947년 3월 18일 저녁, 국민당군이 옌안을 공격하는 포성과 총성이 똑똑히 들려왔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는 10년 동안 살던 옌안을 한참 동안 돌아보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떠나기 전에 마오쩌둥은 배웅 나온 서북 야전병단 지휘관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싸움은 성이나 도시 한 곳에서 득실을 따지는 게 아니다. 적의 병력을 소멸시키느냐에 달린 것이다. 사람이 있으면 땅은 찾을 수 있다. 사람이 없으면 모두 잃는 것이다.” “우리는 옌안과 전 중국을 바꿀 것이다.” 다음날 옌안의 당정군 인사들이 철수한 것을 확인한 뒤 서북 야전병단은 옌안에서 철수하였다. 서북 야전군은 옌안 북쪽에서 후쫑난 부대를 유인하며 지연전을 펼칠 예정이었다.

중공 중앙은 지도부를 나누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섬북에 남아 전국을 지도하고 국민당군 주위를 선회하기로 결정했다. 마오쩌둥이 섬북을 선회하기로 한 것은 그의 강한 의지 때문이었다. 자신과 중앙은 절대로 멀리 달아나지 않겠다는 것, 섬북에 남아 계속 전쟁을 지도하며 후쫑난 부대를 잡아두고, 유인하여 승기를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황이 바뀌기 전에는 절대로 황허를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섬북으로 가는 마오쩌둥

섬북을 전전하는 것은 국민당의 시야에서 활동하는 것이라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마오쩌둥과 국군 간 거리가 가까울 때는 수백 미터에 접근한 일도 있었다. 옌안 부근 섬북의 지형은 다른 곳과 완전히 다르다. 황토고원지대인데다 골짜기가 한없이 깊은데다 좁았다. 구릉 위나 골짜기에 난 좁은 길을 걸을 때마다 황토 먼지가 풀풀 날렸다. 마오쩌둥은 처음에 지프를 타고 이동했지만 얼마 못가 고장이 났다. “장정 때는 2만5천리를 걸었다. 모두 걸어가자.” 마오가 태연히 내려서 길을 걷자 런비스, 루딩이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길을 걸었다.

3월 25일, 헤어졌던 지도부가 다시 만났다. 마오쩌둥과 주더,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 등은 쯔창(子長)현 왕자핑(王家坪)에서 합류했다. 그날 마오쩌둥은 런비스가 있는 곳에서 산시 성 원수이(文水)현의 15세 소녀 공산당원 류후란(劉胡蘭)이 죽은 이야기를 들었다. 마오쩌둥은 붓을 들어 “살아서는 위대했으며 죽어서는 영광( 生的偉大,死的光榮)”이라고 써서 어린 혁명가를 추모했다. 류후란은 1946년 해방군이 옌시산군과 싸울 때 옷을 만들고 식량을 나르는 등 전선 지원을 하다 국민당군에 잡혀 죽었다.

3월 29일, 중공 중앙은 섬북 칭젠(清涧)현 자오린거우(棗林沟)에서 회의를 열어 중앙기관의 행동문제를 토론했다. 회의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섬북에 남아 중공 중앙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임무를 맡는다. 류샤오치, 주더, 둥비우(董必武)는 중앙 공작위원회를 결성하여 허베이(河北) 핑산(平山)현으로 가 중앙이 부여한 공작을 담당한다.”고 결정했다. 그 뒤 4월 11일, 다시 “예젠잉(葉劍英), 양상쿤(陽尚昆)이 중공 기관의 대부분 공작인원을 인솔하여 산시(山西) 린현(臨縣)으로 간다. 그곳에서 중앙 후방공작위원회를 결성하여 후방공작을 총괄한다.”하고 결정했다.

지도부를 나눈 것은 한꺼번에 잡혀 지도력 공백상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석과 부주석인 마오쩌둥, 저우언라이가 적진 바로 앞에 남고 나머지 지도부를 오히려 대부대가 있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보낸 것이다. 마오는 자신 등 중앙이 섬북에서 일이 생기게 되면 류샤오치가 즉시 전당의 공작을 맡게 하였으며 주더가 전군의 지휘를 책임지게 하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류샤오치는 화북에 가서 토지개혁을 주재하게 하였다. 토지개혁은 본래 류샤오치가 관장하던 업무였다. 농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전쟁기간이라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주더는 화북 해방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화북에 전략적 지휘를 할 수 있는 지휘관이 없다는 명분이었지만 푸쭤이에게 계속 패배한 화북의 지휘관들을 믿지 못하는 원인도 있었다.

자오린거우 회의 뒤 섬북에 남아있던 중앙기관, 해방군 총사령부 공작인원 및 경호부대 800명으로 4개 대대를 편성했다. 이를 ‘직속사령부’(별칭 9지대) 통할하여 지휘하고 런비스가 사령을 맡았다. 800명이면 몇 개 중대 병력밖에 되지 않는다. 경호를 하는 외에 실제로 작전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국군 1개 연대만 만나도 모두 포로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계속 따라붙는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쳐야 하므로 지도부 모두 가명을 쓰기로 하였다. 런비스는 스린(史林)이라는 가명을 썼다. 사령원을 중국 발음으로 하면 ‘스링’이 된다. 신화사 통신 책임자인 루딩이(陆定一)가 정치위원을 맡았으며 가명으로 정웨이(鄭位)라고 하였다. 역시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골라 썼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도 각각 리더셩(李德胜), 후비청(胡必成)이라는 가명을 썼다. 마오쩌둥은 “옌안을 떠나 승리를 얻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합하면 “해방전쟁에서 필승하며 중국 혁명을 반드시 이룬다.”는 뜻이 된다. 과연 평생을 함께 한 동지답게 가명도 짝을 지어 쓴 것이다.

안싸이현 왕쟈완

4월 12일에서 6월 8일까지 당 중앙은 섬북 안싸이(安塞)현 왕자완(王家湾)에서 56일을 머물렀다. 새로운 전황에 대한 전략과 부대 배치가 이곳에서 무르익었다. 이 기간에 마오쩌둥은 전보로 각 전장의 고급 지휘관들에게 부대배치와 작전행동을 지시했다. 각 해방구가 근거지 안에서 적병을 대량으로 섬멸하라고 요구하고 국민당군의 섬북과 산둥의 중점 공격을 분쇄하여 전략적 공격으로 돌아설 준비를 하라고 요구했다. 전장을 국민당 통치구역으로 이동시켜 근본적으로 국민당 장제스의 반동통치를 흔들라고 요구했다.

장제스는 후쫑난을 난징으로 불러 섬북의 전황과 마오쩌둥이 아직 섬북에 있는지 물었다, 후쫑난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산 채로 사로잡던가 동쪽 황허 너머로 쫓아내라.”고 지시했다. 옌안을 점령했는데도 섬북에 있는 마오가 걸렸던 것이다. 시안으로 돌아온 후쫑난은 즉시 휘하 29군 군단장 류칸을 불러 마오쩌둥이 있는 곳으로 판단되는 왕자완을 공격하게 하였다. 류칸은 휘하 4개 여단 4만명을 이끌고 왕자완으로 진격했다. 이 소식은 숑샹후이를 거쳐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전달되었다.

국군의 왕자완 공격을 두고 지도부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중앙지대 사령원인 런비스와 저우언라이는 동쪽으로 황허를 건너 피하자고 제의했지만 마오쩌둥이 완강하게 거절했다. “황허를 절대 건너지 않는다. 섬북에 남아 전쟁을 지도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런비스가 양보했다. 계속 섬북을 전전하며 국군의 추격을 피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오쩌둥, 섬북에서 20개 현 37개 마을을 전전하다

대략 일년 동안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는 중앙 요원들을 이끌고 섬북 각지를 전전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를 계속 이동하며 주둔지를 옮겨 다녔다. 그들의 거주지는 모두 황토 토굴인 요동이었다. 그것도 지도부나 요동에서 머물지 병사들은 대부분 노숙해야 하였다. 각지를 옮겨 다니며 전국의 전장상황과 토지개혁 운동을 지도했으며 국민당 통치지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개입했다. 섬북의 전황을 파악하고 서북 야전군의 전투를 지도하였다.

마오쩌둥은 섬북을 전전하는 동안 2,200리(중국의 1리는 500미터)를 걸었다. 옌안, 류린(榆林) 두 지역의 옌촨(延川), 칭젠(清澗), 쑤이더(綏德), 즈저우(子洲), 정볜(靖邊), 안사이(安塞), 헝산(横山), 미즈(米脂), 자현(佳縣), 우바오(吳堡) 등 20개 현과 37개 마을, 42채의 집에 묵었다. 그들은 도중에 수백개 마을을 지나쳤다. 마오쩌둥은 섬북을 전전하는 일 년간 수많은 이론 작업을 했으며 여러 중요한 저작물을 썼다. 수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당,정,군을 부단히 지도했다. 대부분 호롱불이나 촛불 아래 쓴 것들이었다. 마오쩌둥 선집에 실린 17편의 논문을 이 1년 동안에 썼다. 마오쩌둥은 섬북을 전전하는 기간 동안 섬북 인민과 공산당이 이심전심으로 통하였다고 술회했다. 마오쩌둥은 섬북 인민들에 대하여 “인심이 매우 좋은 곳”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표현이 달랐다. “섬북의 백성들은 완전히 적화되어 있다. 겉만 빨간 게 아니라 속까지 새빨갛다.” 주석이 일년간 일반 백성들 사는 곳을 돌아다녔으니 이야기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둥의 섬북 전전기간 여러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생겨났지만 그중에서도 평범한 일화들을 소개한다.

마오쩌둥이 ‘망아지’를 살린 이야기

1947년 봄, 마오쩌둥이 안사이현 왕자완에서 묵을 때였다. 하루는 마오쩌둥이 짬을 내어 뒷짐을 지고 시냇가를 산보하고 있었다. 경호대 권총중대 주둔지를 지나는데 요동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오쩌둥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누가 아픈가?” “망아지입니다.” 망아지는 권총중대 연락병으로 올해 겨우 17세였다. 기록할 때에 이름은 잊어먹고 별명만 남았을 것이다. 마오가 두세 걸음 걸어 요동 안으로 돌아가 보니 혼수상태였다. “의사가 와서 봤는가?” 마오가 물으니 “여러 차례 와서 진찰했습니다. 하지만 점점 심해집니다. 의사도 방법이 없다고….”

마오쩌둥은 의사를 불러 오게 하였다. “무슨 병인가?” “재귀열입니다.” “치료할 방법이 없는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썼는데 특효약이 없습니다.” 의사는 치료 경과를 간략하게 보고하였다. 마오가 물었다. “특효약이 없어? 페니실린으로 듣지 않던가?” “그것은….” 의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마오쩌둥이 다그치자 “지휘관 명령과 부대 계획에 어긋납니다.”하고 실토했다. 마오쩌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무슨 명령, 무슨 계획인가? 그런 약품은 전장에서 전사들이 목숨을 바쳐 얻은 것이다. 그들이 피를 흘려 노획한 것을 그들에게 쓰지 않고 누구에게 쓰려고 하나? 분명히 말하는데 내 걱정 말고 전사들을 생각하게. 나는 이렇게 건강하지 않은가? 전사와 인민이 우리 승리의 근본이다. 당장 급한 환자부터 돌봐야지. 당장 치료하게.” 마오쩌둥이 망아지의 곁에 지키고 서 있자 의사는 급히 페니실린을 꺼내어 주사했다. 다행히 망아지의 병은 곧 나았다.

빈대에 물린 장칭

중앙기관이 섬북의 정볜현에 있을 때였다. 이 작은 산촌 마을은 겨우 십 몇 호가 사는 작은 동네였다. 빈농인 노인이 두칸 반의 요동을 내주었다. 그중 한 칸에 마오쩌둥과 장칭이 묵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런비스, 루딩이(陸定一)는 군사회의를 해야 했다. 장칭은 군사회의에 참석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 다른 곳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녀는 빈대에 물려 온 몸이 붉은 반점과 부스럼 투성이였다. 장칭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아야 했다. 이런 일에 대하여 장칭은 매우 민감했다. 한 번은 마오쩌둥이 전문을 기초하고 있는데 장칭이 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즉시 거둬가서 그녀는 매우 난감해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칭은 남편이 하는 일에 결코 개입할 수 없었다.

도하

1948년 3월, 서북 야전군은 이미 외선작전으로 전환하였다. 외선작전이란 근거지 밖으로 원정나가 싸우는 것을 뜻한다. 마침내 중공 중앙은 섬북에서 임무를 완성한 것이다. 각지 전장의 상황을 직접 파악하고 장래의 전략적 결전을 지휘하기 위해 주더, 류샤오치의 중앙공작위원회와 합류해야 했다. 중공 중앙은 화북의 시바이포(西柏坡)로 가기로 결정했다. 3월 23일 오전, 마오쩌둥은 중앙종대를 이끌고 우바오현(吳堡縣) 나루터에서 배에 올랐다. 동안으로 향하는 배위에서 그는 도도히 흐르는 황허를 건넜다. 마오쩌둥은 감개어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황허는 참으로 천험이구나…. 과거에 황허는 이용하기에 참 힘이 들었지. 이제는 황허의 관개를 잘 이용해서 발전도 하고 항운도 하고, 황허가 인민들에게 복이 되게 해야지.” 이때쯤 마오쩌둥은 승리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져 있었던 것이다.

불발탄이 목숨을 살리다

1948년 4월 10일, 마오쩌둥은 중앙기관을 이끌고 산시성에서 허베이성 서부의 푸핑(阜平)현 청난좡(城南庄)으로 갔다. 어느 날 밤새워 일한 마오쩌둥은 새벽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방공 경보음이 막 울렸다. 경호원들이 마오쩌둥의 처소로 뛰어들었을 때 세발의 폭탄이 마오쩌둥이 묵는 집 앞에 떨어졌다. 다행히 폭탄이 폭발하지 않아서 조사해보니 모두 불발탄이었다. 국민당 병공창의 노동자가 불만을 품고 폭탄 안에 모래를 넣은 것이었다. 잠시 후 또 폭탄이 떨어져 정원에서 폭발했다.

나중에 조사하니 마오쩌둥이 거처하는 곳에 국민당 특무가 잠입했는데 이름이 멍셴더(孟憲德)라 하였다. 그는 군구 보급부 소속의 담배공장 부책임자였다. 마오쩌둥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에 왔다. 그는 처음에 네룽전을 해치려고 독약을 군구 취사반의 사무장 류총원(劉從文)에게 주었다. 그러나 기회를 잡지 못하다 마오쩌둥이 그곳에 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오쩌둥이 묵는 집의 위치를 바오딩(保定)의 국민당 특무기관에 알려 폭격기가 그 곳을 폭격했던 것이다.

펑더화이와 시중쉰, 섬북에서 세 번 연승하다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옌안 방위전에서 처음 짝을 이뤘다. 저우언라이가 “옌안에는 병력이 너무 적다. 방위전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하고 묻자 마오쩌둥은 “펑총이 곧 이리로 올 것이오.”하고 대답했다. 펑더화이가 들어오자 마오쩌둥이 제의했다. “지금 옌안에 중앙군사위 성원이 세 명뿐이다. 나하고 저우언라이, 그리고 펑총 당신이다. 옌안 방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당신 의견을 말해 보라.” 펑더화이는 “허룽 동지가 아직 진수(산시, 쑤위위안) 해방구에 있습니다. 그가 올 때까지 내가 지휘하는 게 어떨까요?” 하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이 바라마지 않던 말이었다. “좋소. 시중쉰이 이곳 사람들하고 지리에 훤하니 그를 붙여 주겠소.” 펑더화이는 그 뒤로 계속 서북야전군 총지휘를 맡았다. 펑더화이가 급하고 대쪽같은 성격이라면 시중쉰은 성격이 원만하고 사람들하고 두루 친했다. 친화력이 탁월한데다 배려심이 많고 사심 없이 맑았다. 거기에 섬북의 사정을 손바닥처럼 훤히 꿰고 있으니 펑더화이로서는 더 바랄 게 없는 짝이었다. 그때 시중쉰의 나이는 34세로 49세의 펑더화이보다 한참 젊었다. 장남인 시진핑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칭화벤 전장을 시찰하는 펑더화이(좌2)와 시중쉰(좌3)

시중쉰과 두아들, 왼쪽이 시중쉰, 오른쪽이 동생 위안핑 이다.

후쫑난이 옌안을 점령했으나 빈 성을 차지한 것이었다. 후쫑난은 하루빨리 해방군 주력을 포착하여 결전을 하고 싶어 하였다. 장제스에게 섬멸한 해방군 숫자를 과장 보고하여 실제로 전과를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부대와 섬북 해방군 부대의 전력 차이가 십대일은 되었으므로 싸우기만 하면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마오쩌둥과 펑더화이 등 지휘부는 이미 지연전과 소모전 방침을 세워두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것을 “모구전술”이라고 불렀는데 모구는 귀찮게 달라붙거나 치근거리는 것을 뜻한다. 서북 야전군은 섬북의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여 이동, 매복, 기습 등으로 이길 수 있는 전투만 하기로 하였다. 마오쩌둥은 옌안을 떠나기 전 날 저녁 펑더화이와 첫 번째 전투를 의논하였다. 국군을 칭화볜 지역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도록 한 것이다.

서북 야전군은 소부대 병력으로 후쫑난 주력 5개 여단을 옌안 서북쪽 안싸이(安塞)로 유인했다. 주력은 옌안 동북쪽 칭화볜 지역에 집결시켜 적을 매복 공격하기로 했다. 섬북은 지형이 험준한데다 도로가 비좁다. 평지는 거의 없고 황토 구릉지대에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에 도로가 나 있었다. 구릉들 사이 곳곳에 작은 분지들이 있어 지형이 마치 자루나 소시지를 연상하게 하였다. 매복하여 공격하기에는 천혜의 조건이었다. 주력을 유인한 해방군은 주력의 측면을 엄호하기 위해 따라가는 1개 여단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골짜기 양쪽 벼랑에 매복한 해방군은 1947년 3월 25일, 국군이 자루 안으로 모두 들어오자 여섯 배의 병력으로 맹렬한 공격을 펼쳤다. 전투라고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살육전이었다. 불과 한 시간 만에 포위한 국군 3,000명을 섬멸하고 여단장을 포로로 잡았다. 후쫑난이 옌안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때 제대로 한방 먹인 셈이었다. 후쫑난은 이 패배를 기자들에게 감췄다. 옌안 점령 소식이 모든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빨간 표시가 있는 곳이 산시성 쯔창현 양마허 인근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4월 14일, 서북 야전군은 양마허(羊馬河村: 산시성 쯔창(子長)현에 속한 마을)에서 국민당군 4,700여명을 섬멸하고 여단장 마이종위(麥宗禹)를 포로로 잡았다. 해방군 사상자가 429명이었으니 일방적인 승리였다. 이번에도 후쫑난은 해방군과 결전을 하려고 11개 여단을 동원하여 뒤를 쫓았으나 해방군은 피하며 휴식을 취하였다. 일부 부대가 국군 주위에서 선회할 뿐 결전을 회피하였다. 4월 3일, 국군은 방향을 바꾸며 해방군의 흔적을 찾았으나 계속 허탕만 쳤다. 국군은 섬북의 고원을 헤매느라 피로가 쌓인 데다 식량까지 떨어져갔다. 하는 수 없이 국군은 주력을 판룽과 칭화벤에서 보급을 받고 휴식을 하게 하였다.

4월 6일, 국군 29군이 이동하다가 서북 야전군의 기습을 받았다. 600여명을 사살하고 후퇴하자 국군은 계속 뒤를 쫓았다. 국군은 해방군 주력을 판룽지역에서 포위 공격하려고 기동하였다. 그중 혼자 남하하던 135여단이 14일 새벽, 양마허에서 서북야전군 2종대 사령원인 왕쩐이 지휘하는 해방군의 매복에 걸렸다. 오후 4시까지 전투에서 국군은 모두 섬멸되고 여단장인 마이종위(麦宗禹)까지 포로로 붙잡혔다. 왕쩐은 내전 시작 뒤 중원해방구에서 1만 병력을 이끌고 섬북으로 탈출하여 이름을 알린 맹장이었다. 그는 수염을 길게 길러 사람들이 모두 ‘왕후즈’라고 불렀다. 중국어로 ‘후즈’는 수염이다. 옌안이 공격 당하기전에 진수(섬북, 쑤이위안) 해방구를 방어하다 마오쩌둥의 부름을 받고 섬북으로 달려왔다.

왕쩐은 포로로 잡힌 마이종위를 불렀다. 마이종위는 “이거 참 악연이오. 왕사령이 중원에서 탈출할 때 내가 추격과 차단 임무를 맡았던 사람이오. 이제 내가 포로가 되었으니 왕사령에게 졌소.” 하고 말했다. 왕쩐이 “천리를 와서 다시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오.” 하자 마이종위는 “왕장군, 나를 살릴 수는 없소? 나는 이제 당신 손에 달렸소.”하고 청하였다. 마이종위는 왕쩐의 주선으로 서북야전병단 포로교육 담당을 맡았다. 포로를 교육시켜 해방군으로 편입시키는 공산당의 정책과 마이종위 등의 영향으로 포로 가운데 대부분이 해방군으로 편입되었다. 무기와 병사를 모두 적으로부터 취하는 정책으로 2만여명에 불과했던 서북 야전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대병력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왕쩐은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고 위기에 처한 마이종위를 끝까지 보호했다. 귀순한 적장인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보호한 것을 보면 왕쩐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다.

전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두 번 잇따라 승리하자 공산당은 크게 고무되었다. 1947년 4월 18일, 신화사는 ‘전황의 전환점’이라는 사설을 발표하고 칭화볜과 양마허 전투를 크게 선전했다. “모범적인 전투이다. 135여단이 섬멸당한 것은 후쫑난이 이제부터 내리막길을 갈 것이라는 표지이다. 서북 전황의 전환점이며 전국 전황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월부터 2,3개월내 장제스 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바뀔 것이며, 인민해방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펑더화이, 보급기지 판룽(蟠龍)을 공격하다

회피하고, 유인하고, 갑자기 기습한 다음 다시 이동하는 해방군의 전술에 국군 공격부대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양마허 전투를 끝낸 뒤 서북 야전군은 와야바오(瓦窯堡) 지역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다. 장제스와 후쫑난은 중공 기관 및 서북 야전군 주력이 쑤이더(綏德)에 있으며 곧 동쪽으로 황허를 건널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서 9개 여단병력을 출동시켜 서북 야전군과 결전을 하려 하였다. 부대를 남북 두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려고 한 것이다.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국군 부대에게 쑤이더를 내주는 대신 총끝을 판룽으로 돌렸다. 판룽은 즈창현에 있는 국군 보급기지가 있는 곳이었다. 서북 야전군은 일부 병력을 주력으로 위장하여 후쫑난 집단군 주력을 계속 북쪽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4개 여단 병력을 출격시켜 판룽을 기습했다.

판룽전역에서 성벽을 오르고 있는 해방군 병사들

후쫑난은 판룽에 국군 167사단과 보안부대등 1개 사단병력을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5월 2일, 국군 주력부대가 쑤이더를 점령했을 때 해방군은 판룽 공격을 시작했다. 그날 해질 무렵 공격을 시작한 서북 야전군 부대는 외곽의 진지부터 공격했다. 4일 16시, 서북 야전군 부대는 판룽 동쪽 수비군 진지를 빼앗고 해질 무렵에는 외곽진지를 모두 점령했다. 이어 판룽성에 총공격을 가해 24시간 격전 끝에 판룽진을 점령하고 수비군 6,700여명을 모두 섬멸했다. 해방군은 밀가루 1만 2천 푸대를 노획했으며 4만벌의 군복과 대량의 무기, 탄약을 노획했다.

판룽 전투는 직전의 칭화볜, 양마허 전투와 함께 서북 야전군 3전 3첩의 싸움이 되었다. 서북 야전군은 이 세 번의 전투에서 국민당군 1만 4천명을 섬멸했다. 판룽 전투는 국군의 허를 찌른 기습이었지만 상당한 위험부담이 뒤따르는 작전이었다. 견고한 진지를 공격할 때 우세한 국군 주력이 되돌아와 지원하면 반포위 당할 위험이 컸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판룽을 쳐서 군수품을 꼭 손에 넣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서북 야전군은 식량은 물론 마실 물도 부족했다. 군복은 모두 해져서 너덜너덜해졌으며 병사들은 메마른 섬북 고원을 헤매느라 피로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펑더화이는 섬북의 지형이 대병단이 이동하기에 불리하며 매복을 하기 쉽고, 판룽 같은 요지에 겨우 여단의 절반 병력이 수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서북 야전군 간쑤로 출격하여 양마와 싸우다

국민당군은 서북 야전군과 세 번 싸워 완전히 섬멸 당했다. 비록 여단 규모의 병력이지만 전멸당하면 지휘관이든 병사든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늘 “열 손가락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 한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 낫다.”고 강조하였다.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섬북에서 병력이 10대1로 열세인데도 깨끗한 승리를 만들어 내었다. 서북 야전군이 옌안 북쪽에서 한창 싸우고 있을 무렵 국군 마홍쿠이, 마부팡의 서북 행원 부대가 섬감녕 해방구를 공격해 들어왔다. 마홍쿠이와 마부팡은 회족(신장 위구르 자치주에 주로 생활하는 회교도들이다.) 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양마(兩馬)로 불리며 국군에서 회족을 대표하는 지휘관들이었다. 기병을 주력으로 하는 국군에서도 손꼽히는 강맹한 정예부대였다. 양마는 후쫑난의 지휘를 받고 있었는데 후쫑난 집단군의 출격에 호응하기 위해 서쪽을 침범해온 것이었다. 양마의 부대는 칭양(慶陽), 허수이(合水) 옌츠(鹽池), 딩볜(定邊)을 점령하였다. 승세를 탄 서북 야전군은 간쑤성 룽둥(龍東 )으로 출격하여 국민당군 4,700여명을 섬멸하고 빼앗긴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이로써 마오쩌둥과 중앙지도부는 엔안 점령의 커다란 위기를 넘긴 셈이었다. 펑더화이는 후쫑난의 대병에 맞서 섬북에서 전장의 주도권을 확립했다. 싸우고 싶은 장소에서, 짜우고 싶을 때 싸우는 방식으로 지도부를 보위하고 국군 병력을 소모시키고자 하는 마오쩌둥과 중앙의 희망을 실현했던 것이다.

오이를 먹고 자아비판한 펑더화이

펑더화이의 불같은 성격은 누구도 비교할 사람이 없었다. 말하는 게 곧 욕이었다. “모가지가 달아난다.”는 식의 이야기를 주변의 누구라도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욕하는 사람은 모두 직속 부하들이었으며 병사들에게는 욕을 한 일이 없었다.

홍군 시절, 화를 잘 내는 병사가 있었다. 그는 펑더화이를 몇 번 욕했는데 결국 오랏줄에 묶여 펑더화이 면전에 끌려왔다. 펑더화이는 당장 풀어주라고 명령했다. “욕한다고 잡아오느냐? 그럼 나는 맨날 잡혀가야 한다.” 펑더화이는 연대장 이상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성질이 안 좋다는 것을 잘 안다. 늘 사람을 욕한다. 하지만 내가 욕하지 않았으면 많은 동지들이 지금 여기 없을 것이다.” 즉 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는 뜻이다. 이상한 일은 펑더화이가 그렇게 욕을 하는데도 많은 이들이 그의 수하에 있기를 원하였다. 그의 부대는 손꼽히는 정병이었으며 간부들도 정예였다.

펑더화이와 시중쉰 사이에는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1947년 펑더화이, 시중쉰이 지휘하는 2만여명의 서북 야전군은 후쫑난이 지휘하는 미제 무기로 무장한 후쫑난의 25만 대군과 세 번 싸웠다. 칭화벤, 양마허, 판룽에서 세 번 이겨, 후쫑난이 부대를 거둬들이게 하였다.

새로운 전기를 찾기 위해 펑더화이와 시중쉰은 상의 뒤 싼벤(三邊)으로 북상키로 했다. 때는 6월이어서 날씨가 매우 더웠다. 부대가 물도 없는 사막을 행군하여 모두 기갈이 들렸다. 많은 병사들이 갈증과 어지러움으로 쓰러졌다. 오십에 가까운 펑더화이도 매일 전사들과 함께 도보로 행군했다. 그는 늘 가지고 있는 물통의 물을 쓰러진 병사에게 먹였다. 경호원들은 펑더화이의 입술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였다. 그럴 때면 펑더화이는 경호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방울의 물이 생명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살리지 말란 말이냐?”

어느 날, 부대는 마침내 사막을 벗어났다. 저녁을 먹을 때 펑더화이는 뜻밖에 상 위에 싱싱한 오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오이를 집어 입에 물었다. 하지만 한 입 먹다 말고 곧 멈추었다. 펑더화이는 관리원을 불러 불었다. “이 오이가 어디서 난 것인가?” 관리원은 “시장에서 샀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전사들도 모두 주었나?” 관리원은 망설이며 말을 하지 못했다. 펑더화이의 얼굴이 심각해지더니 반토막 남은 오이를 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관리원은 큰일 났다고 생각하여 급히 부정치위원인 시중쉰을 찾았다. “펑총이 너무 고생이 많아서 영양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오이를 몇 개 사서 드렸는데 펑총이 먹지도 않고 화를 내십니다.”하고 실토했다. 그리고 시중쉰에게 중간에서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했다. 시중쉰은 펑더화이를 찾았다.

펑더화이는 시중쉰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자아비판을 하였다. “내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기율을 위반하였다. 남은 오이는 경호원을 시켜 부상병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시중쉰에게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청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 진지하게 토론하겠다는 것이었다. 곧 연대장 이상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펑더화이는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부대원들이 사막에서 죽을 고생을 했다. 피로, 열은 말할 것도 없고 물도 없었다. 이런 시기에 나 펑더화이는 오이를 먹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심각하게 자기비판을 한다. 나는 심각한 관료주의의 잘못을 저질렀다.” 펑더화이는 군모를 벗고 모두에게 깊이 절을 했다.

시중쉰이 그것을 보고 끼어들었다. “펑총은 오이를 먹지 않고 모두 부상병들에게 보냈습니다.” 펑더화이는 손을 가로 젓더니 “여러분도 느껴야 한다. 오이 한 개의 일이 아니다. 나 펑더화이는 병단 사령원이다. 먹으면 먹는 것이지 그게 뭐 큰일이냐?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 작은 일을 크게 만들었다. 어째서인가? 우리 군대와 국민당 군대의 가장 큰 차이는 관병평등이다. 오늘 병단 사령원이 오이 한 개를 먹으면 내일 당신들 종대 사령원들이 나를 보고 배우게 될 것이다. 한 마리 닭도 예사로 먹게 될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도 모두 위를 보고 배울 것이다. 장교와 병사 사이 거리는 이렇게 하여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펑더화이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펑더화이는 시중쉰을 보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시 정치위원, 나 스스로의 비판은 오늘 저녁 당지부에 보고해 주시오. 다른 관련자들에 대한 처분은 지부 서기가 결정하게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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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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