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ㆍ경제적 평등사회 지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2006년 06월 26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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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일어나 ‘우리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음을 확신한다’는 믿음의 참된 뜻대로 살아가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노예의 아들들과 주인의 아들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앉아있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부정과 억압의 열기에 허덕이는 황폐한 땅인 미시시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화되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깔이 아니라 그들의 개성으로 평가받는 나라에 살 것이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계곡에 기쁨이 넘쳐나고, 모든 언덕과 산이 낮아지고, 황무지가 옥토가 되고, 굽은 길이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것을 목도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흑인해방을 바라는 수십만 군중 앞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목사가 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제목의 유명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1968년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는 시점에 로레인 모텔에서 암살당한 킹 목사는 우리에게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흑인 민권운동가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믿기지 않지만 “보다 개선된 부의 분배가 필요하고 미국은 민주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펜실베니아대 종교학 교수인 마이클 에릭 디슨이 쓴 <여러분과 함께 그 땅을 밟지 못할지도 모릅니다-마틴 루터 킹의 진실>에는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했던 것으로만 알려진 그의 이미지와는 달리 적극적인 차별해소(affirmative action), 할당제를 주장하고, 사회주의에 동감을 표시한 것을 비롯해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들이 실려있다.

    킹 목사는 공산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지만 이는 백인 자유주의적 진영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고, 그의 주변 인물들이 공산주의자였으며 그가 관계를 맺은 전미법률가조합(NLG)이나 ‘민주행동을 위한 변호사회’(LDA) 등은 좌파조직이었다.

    인종차별ㆍ불평등에 눈떠

    킹은 1929년 1월 15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에서 에버니저 침례교회 소속의 목사 마틴 루터 킹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교회에서 자라났으며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증조할아버지도, 형도, 작은아버지도 목사였다.

    킹이 태어난 1920년대말은 대공황이 시작될 무렵. 어린 시절 빵을 구하기 위해 줄지어선 사람들을 자주 보아온 그는 나중에 “내가 성년이 돼서 자본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킹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유색인종을 위한 전국협회(NAACP) 애틀랜타 지부장으로 활동하며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해온 목사였다. 킹이 어린 시절 애틀랜타에서는 흑백분리 제도가 엄격히 유지되고 있었다. 흑인들은 수영장을 이용할 수도 없었고 공원에서 놀 수도 없었고 백인학생들과 다른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도심 번화가의 상점에서 흑인들은 커피 한 잔도 사먹지 못했다. 흑인들은 흑인전용극장에서 철지난 영화나 겨우 볼 수 있었다. 킹은 열네살 때 ‘흑인과 헌법’이라는 주제로 웅변대회에 참가해 입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운전사의 욕설을 들었다. 이날의 모욕은 킹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었다.

    그는 흑백분리제도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억압적이고 야만적인 법령들을 혐오하면서 자랐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Ku Klux Klan)단의 폭력을 직접 목격하며 자라난 그는 이런 경험들이 자신의 자아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1944년 모어하우스 대학에 입학한 이후 킹은 인종차별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불복종>을 읽으며 비폭력 저항주의를 처음으로 접한 킹은 4학년때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있는 에버니저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회학 학사 학위를 받은 후 신학공부를 위해 펜실베니아주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 신학교에 입학했다.

    영혼을 억압하는 사회조건 외면하고 영적구원만 관심 가지는 종교는 사멸

    그는 신학교에서 사회철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빈민가와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경제적인 조건, 인간의 영혼을 짓누르는 사회적인 조건에는 무관심한 채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종교는 사멸하게 된다”는 확신을 얻게 됐다.

    1949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은 킹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인 해석방법을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전형적인 약점들을 지적하고 대중의 자의식 성장에 기여했으며, 기독교 조직의 도의심에 자극을 주었다는 점”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는 마르크스 저작을 통해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다”고 인정하고 “현대 미국 자본주의는 사회개혁을 통해서 빈부격차를 상당히 감소시켰지만 부를 보다 효율적으로 분배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았다”고 주장했다.

    1951년 보스턴 대학 신학과에 입학한 킹은 성악가 코레타 스콧을 만나 1953년 결혼하게 된다. 킹은 1954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덱스터 애버뉴 침례교회에서 처음으로 목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목회활동에만 머무르지 않고 교회신도 전원에게 선거권 등록과 NAACP 회원가입을 권유하는 한편 교회 내에 ‘정치사회활동위원회’를 조직했다.

    후버 FBI 국장 "킹은 미국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

    1955년 12월1일 로사 파크스 부인은 버스에서 백인전용 좌석 바로 뒷좌석에 앉아 있다가 흑백분리법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킹 목사는 몽고메리 진보연합을 조직하고 미국 인권운동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은 버스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다. 흑백분리에 항의하는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카풀을 운영하면서 버스타기를 거부했고 백인들조차도 점차 이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주도한 킹 목사는 스물일곱 살이던 이듬해 보이콧 금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지만 그해 11월 연방대법원은 버스 내 흑백분리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투쟁을 승리로 이끈 킹 목사는 이후 전국적인 흑인민권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1957년에는 시사주간지 <타임>이 몽고메리 보이콧 운동을 커버스토리로 다루기도 했다.

    이때부터 연방수사국(FBI)은 킹 목사를 감시하기 시작한다.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킹 목사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요시찰 대상에 올렸다. 나중에 공개된 연방수사국 기록에 의하면 킹 목사는 1950년대 미국공산당의 연수 프로그램에 참석했으며 한 세미나에서 폐회연설을 맡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의 흑인운동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킹 목사도 체포와 구금을 거듭했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1963년 미국은 노예해방 1백주년을 맞이했지만 흑백분리의 유산은 병원, 공원, 학교, 상점, 교회, 극장 등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정부-마피아 음모 희생자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킹 목사는 앨라배마주 셀머시에서 투표권 쟁취를 위한 행진시위 직후 2백명의 시위자들과 함께 투옥됐다. 이후 그는 월남전에 대해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며 반전운동에도 앞장섰다.

    “지금 미국 청년들이 아시아의 정글에서 전투를 하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너무나 막연하기 때문에 전국의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들의 희생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이공 정권과 그의 동맹세력도 명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며, 미국 흑인병사들은 민주주의를 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킹 목사 암살 혐의로 99년형을 받은 제임스 얼 레이는 이후 무죄를 주장하다 1998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1999년 셀비 카운티 순회법정은 킹 목사가 정부 내 비밀조직과 마피아 등 범죄조직이 연루된 거대한 음모의 희생자라는 평결을 내렸다.

    암살직전까지 흑인민권운동뿐 아니라 노동운동과 반전운동에도 힘을 기울이던 킹 목사는 흑인들의 경제적 참상을 고발하고 정치적 권력과 경제력을 근본적으로 재분배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파업중인 멤피스시 청소원들에게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다면, 적절한 임금을 받고 싶다면 투쟁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자신이 지닌 엄청난 자원을 빈곤을 종식시키고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기본적인 생활상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역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킹 목사는 자신이 지향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자유시장의 원칙에 근거해서 상품이 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며 인종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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