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로 꽃피운 교회
    [그림 한국교회] 홍천군 한서교회
        2019년 03월 25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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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에서 꽃 한송이에 걸음이 멈추면 / 나는 그 꽃입니다.
    밤하늘 바라보다 별 하나 눈 마주치면 / 나는 그 별입니다.” (하략)

    – 박두규 시, ‘그렇게 그대가 오면’에서

    여울교회(이은주 목사)에서 설교하던 3월 10일, 주보의 이 시가 바짝 다가왔습니다.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궁화가 되어 전국 보급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셨나! 강원도 홍천군 모곡리에 낙향하여 고통 받는 이들과 눈 맞추고 하나 되어 희망을 노래하신 것인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받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찬송가 580장 1절)

    이탈리아 작곡가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치아 디 람메르모어’에 나오는 합창곡에 한서 남궁억 선생이 가사를 붙인 찬송가입니다. 독립의 그날까지 소망을 잃지 말고 힘차게 일하자고 노래한 한서의 치열한 삶의 흔적은 그의 호칭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계몽운동가, 구한말 관료, 애국지사,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저술가, 기독신앙인”

    1863년 서울 정동에서 출생한 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어학교(동문학)를 수석으로 졸업하고(1884년), 고종황제의 어전통역관을 시작으로 여러 관직(내부토목국장, 칠곡부사 등)을 맡았을 때 잘못된 관습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을 들어주어 칭송을 받았으나 한계를 절감하고 독립운동가로 삶을 전환하였습니다. 내부 토목국장 시절, 다른 관료들의 반대를 뚫고 탑골공원을 완공하였는데 후일에 3.1혁명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역사적 장소가 됩니다.

    한서는 독립협회 총무를 시작으로 근대 시민운동을 주도하고. 언론의 힘을 직시하여 1898년에는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초대사장이 된 후 러일협정의 문제를 제기하여 4개월간 구금을 당하는 등 네 번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 황성신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시,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여 조선인들의 공분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관동학회 회장으로 헌신하고, 전국에 70여개의 지부를 둔 대한협회회장으로 사립학교(상록수)운동을 주도한 결과 학생들이 3.1혁명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한서의 신념은 대한협회 협회보 창간사에서 밝힌 “사상이라는 자는 사실의 어미다. 그러나 능력이 없는 사상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사상에 능력을 더하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15년 남감리회 본처전도사가 된 한서는 서울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가로서 살아갈 수가 없게 되자 1918년 선친의 고향인 모곡리(보리울)로 낙향하였다. 1919년 사재를 털어 열 칸의 기와집 모곡예배당을 세우고 매주 토요일이면 마을을 돌며 “내일은 주일이니 교회로 나오시게” 하면서 전도하자 곧 예배당이 비좁아 바깥마당에 멍석을 펴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민족교육의 실천으로 4년제 ‘모곡 여학당’을 시작으로 하여 6년제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12회 졸업생까지 배출합니다. 음악에 재능이 많은 한서가 직접 작사, 작곡한 구국의 심정을 담은 사상가들은 전국 각지로 퍼져서 애창가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부르는 찬송 “일하러 가세”도 있습니다.

    한서는 노동의 정신을 강조하여 실습시간에는 무궁화와 뽕나무 묘포 작업, 도로 수선,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등으로 생활농촌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독서회, 토론회, 웅변대회, 학예회를 열었으며, 생활신앙에 철저하여 인간차별의 악습을 없애려고 누구에게나 깍듯이 경어를 썼다고 합니다. 그가 쓴 역사책 <동사략>, <조선이야기사>는 제자들이 이를 먹지로 복사하고, 원근 각처의 사립학교에서 구입하여 다시 복사하여 일경의 눈을 피하여 이를 가르쳤습니다.

    선생은 일제가 만든 기차나 버스를 타지 않았기에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에 축사(告辭)를 부탁받았을 때, 2월 초순이었지만 무명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고 도보로 눈 덮힌 고개를 넘고 넘어 와서 이렇게 연설하였습니다.

    “(전략) 우리는 강자를 도와서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주고 같이 강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졸업생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것은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눈을 뚫고 원래의 길을 찾아서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를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저 피폐한 농촌에 내려가서 일하기를 바랍니다.”

    한서는 나라꽃 무궁화에서 우리 민족의 끈기와 지조, 번영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일찍이 무궁화 나라꽃운동을 펼쳤습니다. 모곡으로 내려 온 뒤로는 무궁화묘목을 가꾸어 전국각지의 교회와 사립학교로 보내는 운동을 전개하여 구속되기까지 10년 동안 무려 30만 그루를 전국 각지로 보급하며 민족혼 고취에 힘을 쏟았습니다.

    눈엣가시로 여기던 홍천경찰서의 일경들은 1933년 11월 모곡학교로 들이닥쳐 선생을 연행하는 동시에 마을청년들의 집을 수색하여 기독교대한 감리회 춘천선교부를 중심으로 일어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으로 결성된 <십자가당> 기록을 입수하고 마을청년들까지 연행하였습니다. 일제는 이 조직과 한서가 주도한 애국독립운동과 엮기 위해 극심하게 고문을 자행하였지만, 한서는 평소 공산주의의 한계와 문제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반대였기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석방됩니다.

    그러나 한서는 평소에 펼쳤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이 빌미가 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후 1935년 가을, 병보석으로 나오기까지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연로한 한서는 후유증이 심해서 고생하다가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한서의 무궁화운동은 세계독립운동사에서 그 어떤 활동보다 극적이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 운동일 것입니다.

    남궁억 선생이 남긴 주옥같은 말들이 한서교회 교우들과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일나무 밑에다 묻어서 거름이나 되게 하라. 나는 죽어서도 민족의 거름이 되겠다.” “나는 독립을 위하여 일했지만 독립을 보지 못하나 너희는 독립 후의 일을 준비하라” 이렇게 한서는 실천적인 독립운동가요, 성서를 정독하고 이해하고 가르치며 <신앙구국과 교육입국>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그림=이근복

    3.1운동 100주년에 기억할 만한 교회를 찾다가 3월 2일, 한서교회를 방문하였는데 5,000평의 무궁화꽃을 볼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자명, 환희, 동철, 영백, 파랑새, 삼천리….. 여러 품종이 적힌 작은 표지판만 봤습니다. 앞에 동상이 서 있는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전통 한옥으로 복원한(2004년) 모곡교회당에는 낡은 풍금이 긴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한서가 갖은 고문과 협박,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지조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심성과 불굴의 정신이요, 그가 위로받고 새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철저한 십자가 신앙이었습니다.

    옛 모곡교회 오른쪽에는 1998년, 감리교 동부연회가 힘을 모아 봉헌한 한서기념예배당이 있습니다. 100년 전 한서가 세운 모곡예배당의 정신을 이어가는 교회인데 한서교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60년대 중반입니다. 1995년 부임한 현재호 목사님과 교우들의 각별한 수고로 한서교회의 과거 역사를 기리고 새 날을 열어가는 모습이 특별해 보입니다.

    십자가 종탑과 제단 위 십자가 조형이 주는 울림이 크고 친교실에는 교우들의 신앙 시와 그림, 조각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서기념관과 무궁화동산, 100주년 기념동산에는 자연이 주는 생명의 힘이 충만하고 그늘막, 의자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어서 누구든지 지나가다 들어와서 쉬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쉼터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현재호 목사님은 자신의 목회철학과 교회운동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독립 후의 일을 준비하라”는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어느 순간, 그대가 오면 / 나는 그대일 뿐입니다.”

    박두규 시인의 “그렇게 그대가 오면”의 마지막 연입니다. 이제 남궁억 선생이 우리에게 다가왔으니, 우리도 남궁억이 되면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무궁화가 될 것입니다.

    필자소개
    성균관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전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새민족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교육훈련원장 역임. 전 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한국기독교목회지원네트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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