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혁명의 역사-1
    문명의 발생-기계혁명-전기혁명
    [4차 산업혁명과 노동해방③] 노동과정 분석의 잣대
        2019년 03월 22일 08: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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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의 글 “산업혁명의 실체 여부, 나의 나침반은 ‘노동해방’”

    2. 산업혁명의 역사

    2-1. 농업혁명 : 문명의 발생
    2-2. 1차 산업혁명 : 기계 혁명
    2-3. 2차 산업혁명 : 전기 혁명
    2-4. 3차 산업혁명 : 디지털 혁명
    2-5. 4차 산업혁명 : 인공지능 혁명

    [필자 주] <붉은 오늘>은 붉은 어제를 되새김질 하고 있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그렇다면 내일은? 붉은 내일이 없는 붉은 오늘이 있을 수 있을까? <4차 산업혁명과 노동해방>은 붉은 내일에 대한 토론을 제안한다. 토론을 알차게 준비하기 위하여 독자들의 동참을 부탁드린다. 댓글과 반박, 비판과 비난, 그리고 부지런한 퍼나르기는 토론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첫 번째 오프라인 토론은 금년 5~6월에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심화학습 과정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1. 산업혁명의 역사

    노동과정의 분석은 인간의 생산기술 발전단계를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구분할 수 있는 이론적 잣대를 제공해준다. 이 잣대로 되짚어볼 때, 우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적어도 서너 차례의 혁명적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 또 한 번의 혁명적 변화가 시작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2-1. 농업 혁명 : 문명의 탄생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따르자면, 인류가 원숭이 나라의 경계를 넘어서서 인간의 나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은 대략 5백만 년 전이라고 한다. 그리고 문명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대략 1만 년 전이라고 한다. 원시 시대를 통틀어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기반기술은 수렵기술과 채집기술이었다.

    수백만 년 동안 원시인류는 노동시간의 대부분을 노동대상(=야생 짐승과 야생 식물)을 찾아다니는 데 사용하였다. 원시시대의 노동대상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행운(=우연)에 달려 있었다.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굶주려야 했다. 수렵하고 채집해야 할 대상을 쫓아서 원시인류는 끊임없이 유랑하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생산기술은 조금씩 발전하였고, 원시 인간들은 돌도끼, 활, 불, 질그릇 등의 노동수단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기반기술을 뒤집어엎을 만한 새로운 기술은 등장하지 않았다. 수렵기술과 채집기술은 수백만 년 동안 기반기술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수렵노동과 채집노동에서 두뇌노동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작았고, 육체노동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쇼베 동굴 벽화, 3만2천년 전

    인류의 노동방식과 생활방식에 최초의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사건은 사육기술 및 재배기술의 개발이었다. 약 1만 년 전에 일어난 이 변화를 두고 역사학자들은 흔히 ‘농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은 수렵기술 및 채집기술과 비교하여 질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생산기술이었다. 사육과 재배는 노동대상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킬 수 있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원시인류는 자연 속에서 즉시 식용 가능한 완제품을 찾아서 떠돌아다녔다. 짐승을 사냥해도 즉시 먹어치웠고, 과일과 채소를 발견해도 즉시 먹어치웠다. 그에 따라 수렵기술과 채집기술은 저장기술로 이어질 수 없었다. 수백만 년 동안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생활이 이어졌을 뿐이다. 수렵노동과 채집노동은 매우 고생스러웠지만, 수확물은 매우 적었고,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특히 수확이 매우 불안정했기 때문에 원시인류는 종종 멸종의 위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이 기반기술로 상용화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한결 수월해졌고, 생활은 한결 풍요로워졌다. 사육기술은 소를 기르는 데도 적용되었고, 양을 기르는 데도 적용되었다. 들짐승을 기르는 데도 응용되었고, 날짐승을 기르는 데도 응용되었다. 재배기술도 마찬가지였다. 보리를 기르는 데도 적용되었고, 벼를 기르는 데도 적용되었다. 채소를 기르는 데도 응용되었고, 과일을 기르는 데도 응용되었다. 짐승을 울타리 안에 가두어 길러내게 되면서부터 인류는 야생 짐승을 쫓아다니는 고생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곡식, 과일, 야채를 밭에서 길러내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야생 식물을 찾아다니는 고생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원시시대의 노동과정과 달리 농경시대의 노동과정에는 자연력을 활용하는 단계가 포함되어 있다.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은 이미 그 자체로 자연력을 활용하는 기술이었다. 동물과 식물의 성장능력을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인간은 쟁기와 수레를 발명함으로써 논밭을 갈고 물건을 옮기는 데 가축의 힘을 활용할 수 있었다.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활용하는 기술이었고, 돛은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기술이었다.

    자연력을 활용하는 노동과정 알고리즘은 노동의 고생을 한결 덜어주었다. 수렵채집 노동에 비교한다면 사육재배 노동은 한결 수월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력을 활용하는 기술 덕분에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한결 풍요롭게 확보할 수 있었다.

    노동과정 흐름도 ① (인간+자연력)

    사육과 재배는 두 가지 의미에서 훌륭한 저장수단을 제공해주었다. 울타리 안의 가축들은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항상 저장되어 있는 고기’와 다름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축은 울타리 안에서 정기적으로 새끼를 낳았고, 새끼는 정기적으로 어미아비로 자라나서 다시 새끼를 낳았다. 식용식물도 마찬가지였다. 밭에 뿌려둔 씨앗은 계절에 맞추어 푸성귀와 곡식을 제공해주었고, 다음 해를 위한 씨앗을 맺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저장되어 있는 양식’과 같았다.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의 상용화와 더불어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지속해오던 유랑생활을 마감하고 처음으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노동방식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가 생활방식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의 생산력은 수렵기술과 채집기술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았다. 그 덕분에 인간은 굶주림을 채우고도 남는 식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인구가 늘어나고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잉여식량은 공동체 구성원 중 일부가 식량생산 노동에서 벗어나서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게 된다.

    농업문명의 형성은 정착생활, 공동체 규모의 팽창, 사회적 분업의 심화와 더불어 진행되었고,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새로운 사회문제들도 생겨났다. 그것은 원시인류가 수백만 년 동안 유지해오던 유랑사회의 규범과 제도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는데, 그런 문제들을 감당하기 위하여 가족, 사유재산, 국가라는 새로운 규범과 제도가 출현하게 된다. 노예제도와 세습신분제는 노동력을 농토에 붙들어두기 위하여 고안된 제도였고, 농업문명이 지속된 1만 년 내내 함께 지속된다.

    농부와 관료, 이집트 멘나 무덤 벽화, 기원전 15세기

    농업문명이 지속되던 1만 년 내내 인간의 노동과정에는 이렇다 할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사육기술과 재배기술은 기반기술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인간의 노동과정에서 두뇌노동이 차지하는 몫은 여전히 매우 작았고, 육체노동이 차지하는 몫이 매우 컸다.

    인간은 가축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육체의 고생을 덜 수 있었지만, 가축을 부리는 과정도 만만찮은 육체적 고생을 요구하였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가축이 움직이도록 하자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력과 풍력을 이용하는 기술도 마찬가지였다. 수력과 풍력은 지리적 조건과 기후적 조건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의 의지대로 이용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축, 물, 바람이 발휘하는 힘은 뒤에 기계가 발휘하게 될 힘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새 발의 피’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인간, 동물, 또는 기계가 발휘하는 힘을 계산하기 위하여 우리는 흔히 ‘마력(馬力)’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제임스 와트가 자신이 발명한 증기엔진의 힘을 측정하기 위하여 말의 힘과 비교한 데서 비롯되었다. 지속적 노동력으로 환산할 경우 말은 0.68~0.8마력을, 인간은 0.08마력을 발휘한다. 말 한 마리가 노동에서 발휘하는 물리력이 인간 10명의 물리력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중형 승용차 한 대가 발휘하는 힘은 말 200~300마리, 또는 인간 3천~4천 명이 발휘하는 물리력과 대등할 정도이다. KTX 기관차의 힘은 약 1만8천 마력이다. 참고로, 1969년 아폴로 11호를 쏘아올린 1단 로켓 새턴5는 1억8천만 마력의 출력을 냈다고 한다.

    2-1. 제1차 산업혁명 : 기계 혁명

    약 1만 년 동안 이렇다 할 변화가 없이 지속되어오던 인간의 노동방식과 생활방식에 다시 한 번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기계의 발명이었다. 제1차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기반기술은 기계기술이었다.

    증기엔진 기술은 기존의 모든 생산기술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생산기술이었다. 농경시대에 축력, 수력, 풍력을 이용하던 기술은 자연에 존재하고 있는 운동에너지를 에너지 형태의 전환 없이 다시 운동에너지로 이용하는 기술이었다. 그에 반하여 증기엔진 기술은 에너지 형태를 전환시키는 기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석탄이 지니고 있는 화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전환시킨 다음, 그것을 다시 운동에너지로 전환시키는 기술이었다.

    뉴커먼 증기엔진

    증기엔진의 발명은 다양한 기계의 발명을 촉발시켰다. 물레에 증기엔진을 보태니 방적기계가 되었고, 베틀에 증기엔진을 보태니 방직기계가 되었다. 마차에 증기엔진을 얹으니 기차가 되었고, 돛배에 증기엔진을 얹으니 기선이 되었다.

    기계의 사용은 인간의 노동과정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농경시대 1만년 동안 인간의 노동과정 알고리즘에는 ‘자연력 활용’ 단계가 포함되어 있었다.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간은 이 단계를 ‘기계 활용’으로 대체하게 된다. (노동과정 흐름도 ② 참조)

    노동과정 흐름도 ② (인간+기계)

    인간은 노동과정 중에서 육체의 힘이 필요한 모든 곳에 기계를 투입하기 시작했고, 기계는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힘을 발휘해주었다. 이제 인간은 육체노동의 고생으로부터 점차 해방되기 시작한다.

    증기엔진의 성능은 빠르게 발전하였고, 이내 축력, 수력, 풍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발휘하게 된다. 예컨대, 1712년 뉴커먼이 광산의 배수펌프에 사용한 최초의 증기엔진은 5.5마력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꼭 200년 뒤, 1912년에 건조된 여객선 타이타닉 호는 5만 마력 엔진 3개를 장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계는, 소나 말과 달리, 매우 고분고분하였다. 가끔 고장이 나기는 했지만, 소나 말의 변덕스러움에 비교하자면, 기계는 거의 완벽하게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소나 말과 달리 기계는 쉬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인간은 기계가 작동하는 동안 거의 완전하게 자신의 팔다리를 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증기엔진의 발명은 수많은 공장의 건설을 촉발하였다. 인간은 증기엔진을 이용함으로써 지리적 조건과 기후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제 냇물과 강물이 없는 곳에서도 기계물레와 기계베틀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그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장소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세워졌다. 거기로 농부들이 몰려들어서 공장노동자로 되었고, 거기에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다.

    인류 최초의 공장, 크롬포드 방적공장 1771~1791년, 처음엔 수력을 이용하였지만 뒤에 증기엔진으로 가동되었다.

    기계와 공장은 노동방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수천 년 동안 농촌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는 도시에서 살게 되었고, 도시는 점점 더 생활의 중심지로 번창해나갔다.

    이처럼 증기엔진 기술은 농업문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계의 발명과 더불어 인간의 생산력은 획기적으로 높아졌고, 생활방식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런 변화를 가리키기 위하여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프랑스 외교관 루이-기욤 오토가 1799년에 보낸 편지이다.

    새로운 생산기술의 확산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요구하였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생산의 중심지는 농토에서 공장으로 이동해갔다. 그렇지만 신흥상공인들은 공장을 돌리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노동력은 여전히 지주귀족들의 농토에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의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력 발전에 질곡으로 작용하면 할수록 대폭발은 피할 수 없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 1789년

    18~19세기 시민혁명은 농토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지주귀족들과 공장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신흥상공인들 사이에 벌어진 거대한 노동력 쟁탈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신흥상공인들은 ‘신체의 자유’와 ‘영업의 자유’를 내세워 농민 집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승리와 더불어 자유주의 인권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새로운 사회경제질서로 자리 잡게 된다.

    농민들은 신흥상공인들과 손잡고 지주귀족들에게 맞섰으며, 마침내 세습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자유시민으로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흥상공인들이 준비해놓은 열악한 공장노동과 도시의 빈민굴이었다. 노동자들에게 자유주의 시장경제는 해방의 땅이 아니라 새로운 고통과 질곡의 땅이었다. 이렇게 해서 기계혁명은 노동운동을 낳게 된다.

    노동운동이 표출된 최초의 모습은 기계파괴운동이었다. 운동의 추동자들은 수공업 기술자들이었다. “기계가 우리의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이것이 기계를 파괴하도록 만든 동기였다.

    그러나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으로는 세상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노동자들은 조직화 운동으로 방향을 바꾼다.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을 건설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치세력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대규모로 터져나온 차티스트 운동(=보통선거권 운동)은 이미 노동자민중과 지배세력 사이의 사회적 갈등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규범과 제도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예고하였다. 19세기 내내 노동운동은 수많은 투쟁과 패배를 쌓으면서 성장해나갔다.

    차티스트 운동, 1848년 런던 케닝턴 커먼 집회

    기계혁명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낳고 기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 사회적 갈등은 뒤에 두 가지 방향으로 수습된다. 러시아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 사회제도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사회제도를 창출함으로써 한동안 사회적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하여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한편으로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위기를 외부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주의 혼합경제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수습해나간다.

    2-2. 제2차 산업혁명 : 전기 혁명

    ‘기계혁명’의 내용을 상세하게 살펴보기 위하여 그것을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으로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는 사람들은 흔히 증기엔진의 발명을 1차 산업혁명의 출발점으로, 발전기와 전기엔진의 발명을 2차 산업혁명의 출발점으로 꼽고 있다. 서술의 편의상 나도 이 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2차 산업혁명을 추동한 핵심기술은 전기 기술이었다. 증기엔진 기술과 비교해볼 때 전기 기술이 가진 가장 큰 장점으로는 우선 에너지 형태 전환의 자유를 꼽을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생산기술은 에너지전환 기술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다. 기계혁명을 불러일으킨 증기엔진도 실은 에너지전환 장치였다. 증기엔진은 석탄을 연소시켜서 화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전환시킨 다음 그것을 다시 피스톤 원리를 이용하여 운동에너지로 전환시켜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증기엔진 기술은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있었을 뿐, 더 이상의 에너지전환은 불가능했다.

    그에 반하여 전기 기술은 에너지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발전기를 발명하여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꿀 수도 있었고, 모터를 발명하여 다시 전기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도 있었다. 발열기는 전기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꾸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기에너지는 전자에너지, 화학에너지, 빛에너지, 소리에너지 등등 거의 모든 에너지 형태로 전환될 수 있었다.

    전기 기술은 증기엔진 기술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증기엔진 기술이 해낼 수 없는 수많은 일도 해낼 수 있었다. 에너지 형태 전환의 자유 덕분이었다. 전기 기술은 전기분해 기술을 낳았고, 때마침 발견된 석유를 이용하여 거대한 화학 산업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전기 기술은 전자 기술로 이어졌고, 거대한 통신 산업을 촉발하였다.

    뒷날 컴퓨터의 발명으로 제3차 산업혁명이 시작될 수 있게 된 것도 실은 전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기 에너지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는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정보화 혁명의 씨앗이 숨어 있었다.

    에디슨 발전소, 1895년 뉴욕

    증기엔진 기술과 비교해볼 때 전기 기술이 가진 또 하나의 큰 장점으로는 에너지 전송의 자유를 꼽아야 할 것이다. 교류전기의 발명과 더불어 전기에너지는 매우 먼 거리까지 전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동해안 원자력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가 서울로든 부산으로든 마음대로 전송될 수 있는 것이다. 에디슨과 테슬라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전류 전쟁’에서 테슬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다름 아닌 에너지 전송의 자유에 있었다.

    1879년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그것을 대중적 상품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도시 중심에 발전소를 건설하였다. 에디슨은 직류 전기를 고집했는데, 직류 전기는 고작 1km밖에 전송될 수 없었다. 1882년 가동을 시작한 에디슨의 ‘펄스트릿 발전소’는 인류 최초의 상업발전소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곧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에디슨에 맞서서 테슬라는 교류 전기를 내세웠다. 1895년 나이아가라 폭포에 건설된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수력발전소는 전류 전쟁에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에는 테슬라가 설계한 5천 마력(=3.7MW) 교류발전기 10대가 설치되었다. 1896년 발전소 가동과 더불어 전기는 34km 떨어진 뉴욕까지 전송되었고, 이어서 전송거리는 644km까지 확장되었다.

    증기엔진의 발명과 발전기의 발명이 생산기술의 발전에 끼친 영향을 되돌아보면,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찾아낼 수 있고 차이점도 찾아낼 수 있다. 연속성을 확인할 수도 있고 불연속성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인간의 노동과정을 두고 보자면, 전기 기술도 증기엔진 기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능력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런 점을 강조한다면, 발전기의 발명은 증기엔진 발명의 연장선상에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토플러는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을 한 덩어리로 합쳐서 ‘제2의 물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브린욜프슨과 맥아피는 ‘제1의 기계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반하여 리프킨과 슈밥은 증기엔진 기술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전기 기술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1차 산업혁명과 2차 산업혁명을 구분하고 있다.

    2차 산업혁명 시대에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킨 중요한 기술로는 기계 기술뿐만 아니라 분업화 기술도 꼽아야 할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제대로 간파했듯이, 이어서 맑스가 적절하게 강조했듯이, 생산력의 크기는 분업과 협업의 규모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분업과 협업을 조직하고 제어하는 기술은 생산력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된다.

    중세시대 마차 공방

    1~2차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인간의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농경시대에 마차를 만들던 생산력과 산업시대에 자동차를 만드는 생산력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었다. 마차는 불과 너덧 명의 분업과 협업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자동차는 수천, 수만 명의 분업과 협업을 요구했다.

    마차는 불과 수백 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오늘날의 자동차는 수만 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농경시대의 마차 기술자는 혼자 힘으로 마차를 만들 수 있었다. 혼자 머리로 마차를 설계할 수 있었으며, 혼자 수십 종류의 다양한 연장들을 모두 다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자동차 기술자가 혼자 자동차를 만들 수 있을까? 혼자 머리로 수만 개의 자동차 부속품을 설계할 수 있을까? 수만 개의 부속품을 만들고 조립하는데 필요한 모든 연장들을 혼자 다룰 수 있을까?

    생산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생산과정이 복잡해질수록, 달리 표현한다면, 생산물이 복잡해지고 정교해질수록, 두뇌노동의 역할도 커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부속품들을 조립하여 하나의 생산물을 만들자면 복잡한 계획과 계산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분업과 협업을 조직하는 일도 복잡한 계획과 계산을 동반하게 된다. 그런 만큼 마차를 만드는 데 요구되는 두뇌노동에 비교한다면 자동차를 만드는데 요구되는 두뇌노동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노동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포드 공장의 흐름작업, 1920년대

    기계의 발명과 공장의 발전은 생산조직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도록 만들었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의 분업과 협업을 조직하는 일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가 등장할 수 있는 여건이 점점 더 무르익은 것이다. 테일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맑스 이래로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밀려나 있던 문제에 다시 한 번 주목하였다. 인간의 노동과정 중 두뇌노동이 차지하는 역할 문제가 그것이다. 테일러는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공식을 정립함으로써 20세기 생산방식의 틀을 잡는다.

    2차 산업혁명은 인간의 노동방식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생활방식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들 중 하나로는 아마 ‘생활의 기계화’를 꼽아야 할 것이다. 1차 산업혁명이 공장에 기계를 들여놓았다면, 2차 산업혁명은 가정에 기계를 들여놓았다.

    증기엔진을 동력원으로 삼고 있던 1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계들은 모두 큰 공간을 요구하였고, 오로지 생산도구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 방직기계도 그랬고, 기차도 그랬다. 집안에 증기엔진을 설치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 반하여 전기 혁명은 다양한 기계들을 집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전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기계는 생산의 영역에서 생활의 영역으로 넘쳐 들어갔다.

    최초의 대량생산 가정용 전기세탁기와 광고, 1908년. 장하준은 “인터넷의 발명보다 전기세탁기의 발명이 세상을 더 많이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생활기계의 발명은 전기에너지가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로 쉽게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집안으로 들어온 기계로는 빛을 내는 기계, 즉 전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세탁기계, 주방기계, 청소기계 등등이 집안을 채워나갔다. 달리 말해서, 이제 기계가 인간을 가사노동의 육체적 고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생활기계의 상용화는 이른바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를 열었다. 수많은 생활도구들이 기계화되었고, 사람들은 앞 다투어 생활기계를 구입하였다. 그럴수록 가전기계 공장은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가전기계의 가격은 더 싸졌고, 그럴수록 가전기계에 대한 소비도 늘어났다. 자동차의 상용화도 마찬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때마침 발견된 석유는 내연기관의 발명을 촉진하였고, 자동차의 상용화에 가속도를 붙여주었다.

    이 시기 자본주의 기업들의 생산력은 국내시장으로는 만족할 수 없을 만큼 팽창하였다. 제국주의 시장쟁탈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일차적으로 시장을 확장하려는 전쟁이었다. 식민지는 원료를 싼값에 공급해주고 완성품을 비싼 값에 소비해주는 넓은 시장이었다.

    한편, 제국주의 전쟁은 국내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고 있는 노동자 집단의 저항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역사에서 늘 되풀이 되고 있듯이, 이번에도 혁명을 모면할 수 있는 최고의 탈출구는 전쟁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폭발 직전에 있는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를 국경선 바깥으로 배설시켰다. 1~2차 세계대전은 기계혁명과 전기혁명이 낳고 기른 사회적 갈등을 배설하는 거대한 하수도와 같았다.

    양차대전이 끝난 뒤 세계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냉전체제로 재정립된다. 양차대전 기간 동안 자본주의 지배세력은 자유주의 사회경제 질서로는 더 이상 노동자들의 저항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민주의 질서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부는 경제에 깊숙하게 개입하여 고용창출 정책과 사회보장 정책을 두 축으로 삼아 총수요 정책을 펼쳐나갔다. 산별노조는 합법적 지위를 획득하였고, 노동자집단을 대표하여 자본가들과 단체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노-자 사이의 정치투쟁은 나라마다 서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그 결과 사회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나라마다 서로 달라진다.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산별노조와 진보정당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사민주의 질서를 넓고 깊게 정착시킬 수 있었다. 그에 반하여 미국에서는 산별노조가 허약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정당이 제대로 성장한 적이 없었다. 그에 따라 사민주의 질서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곧 신자유주의 세력의 반격을 받고 허물어지게 된다.

    사민주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는 전제조건은 정치가 경제를 제어할 수 있어야 했다. 1944년 수립된 ‘브레튼우즈 체제’는 각국 정부가 고정환율제를 이용하여 독점자본의 이동에 어느 정도 재갈을 물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 선진국들에서 20~30년 동안 이른바 ‘사민주의 황금시대’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수립되는 ‘킹스턴 체제’는 신자유주의 세력에게 반격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계속>

    필자소개
    평등사회노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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