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군 후쫑난,
    홍색수도 옌안 점령하다
    [국공내전 ⑱] 숑샹후이의 맹활약
        2019년 03월 21일 02: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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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공내전⑰] 라이우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인들은?

    장제스 엔안 공격을 결심하다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8개월이 지났다. 국민당군은 동북을 비롯하여 주요도시와 철로선을 장악했다. 그러나 국민정부군 점령지역이 늘어날수록 병력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드러났다. 도시와 철도, 그리고 주요 도로를 수비하는 데 많은 병력이 필요하여 기동할 수 있는 부대가 점점 줄어들었다. 해방군은 지연전과 소모전을 통해 부단히 국군의 병력감소를 꾀했다. 해방군은 전세가 불리할 경우 근거지를 버리고 미련 없이 후퇴하여 자신의 주력을 보존했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 국민정부가 기동할 수 있는 병력은 백만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일년도 지나지 않은 47년 3월에 가용병력이 60만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간의 전투와 탈주 등으로 40만명이 감소한 것이다. 병력이 줄어든 국민정부는 1947년 3월부터 공산당에 대한 전면 공격방침을 전환했다. 산둥과 섬북 해방구에 대한 중점공격으로 바꾼 것이다.

    장제스는 산둥에서 천이와 쑤위를 공격하고 섬북에서는 공산당의 홍색수도인 옌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결심했다. 장제스는 연초부터 천이와 쑤위에게 잇따라 패배하였다. 특히 자신이 직접 지휘한 산둥성 라이우 전투에서 패배하여 아픔과 분노가 더욱 컸다. 엔안을 점령한다면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고 해방군 지휘관들을 심리적 공황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장제스는 확신했다. 1934년에 장시성의 공산당 소비에트 수도 루이진에 밀고 들어갔던 것처럼 옌안 공격은 내전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원 안이 옌안. 그 아래에 시안이 보인다. 구글맵

    1947년 2월 28일, 장제스는 서북의 최고 지휘관인 후쫑난을 난징으로 불렀다. 그는 옌안 공격에 대한 구체적인 부대 배치와 점령에 대한 결심을 말했다. “비적들의 당·정·군 신경중추를 깨뜨려 군심을 동요시키고 투지를 꺾어야 한다. 공산당의 국내외 지위를 떨어뜨려야 한다.” 3월 4일, 후쫑난은 시안에 설치한 수정공서 주임에 임명되었다. 옌안 공격의 총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장제스는 비행기로 시안(西安)에 와 직접 옌안 공격에 대한 부대 배치를 지휘하였다. 그는 서북의 34개 여단 25만 병력으로 남,서,북 등 3개 집단군을 편성했다. 서북 행원(西北行辕: 행원은 임시로 설치한 군사 지휘기구)의 마홍쿠이(馬鸿逵), 마부팡(馬步芳)과 진섬수 변구(晋陕綏: 산시, 섬서, 쑤이위안성에 설치한 행정기구)의 덩바오산(鄧寶珊)군이 서쪽 전선과 북쪽 전선에서 서로 협력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1전구 사령관인 후쫑난의 주력부대가 남쪽 전선에서 진격하여 옌안을 빼앗게 하였다.

    이렇게 부대 배치를 한 것은 중공 중앙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를 서북으로 내몰고 서북 해방군을 옌안 및 그 부근에서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또 해방군이 동쪽으로 황허를 건너도록 해서 후쫑난 부대와 황허 동쪽의 국민당 군이 협격하여 섬멸하려는 것이었다.

    장제스와 후쭝난(오른쪽)

    후쫑난은 저장성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1기생이었다. 장제스와 같은 지방 출신인데다 황푸 1기생이었으므로 출세의 조건을 두루 갖춘 셈이었다. 후종난은 특히 장제스의 총애를 받았는데 “천자의 학생 중 첫 번째”라는 칭호를 얻었다. 천자는 중국의 왕을 뜻하는 것이니 곧 장제스의 학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을 그렇게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총애를 받았으니 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그는 서북에서 수십만 군대를 거느려 ‘서북왕’ 혹은 ‘서북의 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후종난은 장제스를 따라 전장을 두루 전전하였을 뿐 아니라 홍군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는 1932년 홍군 4방면군을 추격, 차단하며 공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쉬샹첸(徐向前), 쉬스요우(許世旭) 등이 부대를 지휘, 결사적으로 싸워 간신히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1936년 홍군이 장정 끝에 섬북에 도착하자 부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펑더화이의 부대와 크게 싸웠다. 그때 펑더화이의 홍군부대가 대승을 거둬 장쉐량이 ‘서안사변’을 일으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후쫑난과 펑더화이는 이때 처음 악연을 맺어 서로 숙적이 되었다. 국공합작 기간에도 후쫑난은 장제스의 지시를 받들어 700리에 이르는 토치카군을 구축하고 옌안을 봉쇄했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졸업생 중 군단장, 전구 사령관 등에 처음으로 임명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 때문에 마찬가지로 장제스의 총애를 받던 천청과 여러 차례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는 줄곧 서북쪽에서 활약했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휘하에 20만명의 대병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46년 9월 산시성의 옌시산과 함께 천겅이 지휘하는 해방군 타이웨 종대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그 전투는 마오쩌둥이 “네 배의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하라”는 지침을 만들게 한 해방군 전투의 전범이 되었다. 이제 장제스로부터 홍색수도 공격명령을 받은 그는 “공을 세워 교장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며 투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후쫑난은 휘하 부대장들에게 “먼저 옌안에 입성하는 자에게는 특별히 포상하겠다. 공산당 지도부를 잡는 사람은 3계급을 특진시키겠다. 3일 내로 옌안을 점령하라.”고 독려했다.

    펑더화이, 두려움을 모르는 불같은 용장

    후쫑난의 대군을 맞아 싸울 해방군 지휘관은 펑더화이였다. 펑더화이는 중공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총참모장이었지만 당 안에서는 모두 “펑총”으로 불렀다. 펑 총사령을 줄인 말이다.

    그는 마오쩌둥과 같이 후난성 상탄현 출신으로 우스마을이라는 궁벽한 산골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는데 아버지도 병으로 노동력이 전혀 없었다. 집안이 워낙 가난한 탓에 장남인 그는 소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나무하기, 소 먹이기, 소년광부 등 고된 노동을 하다가 15세 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주들의 창고를 털었다. 대기근이 들어 빈농들이 굶어죽게 되었던 것이다. 관헌에 쫓긴 그는 달아나 퉁팅호의 제방인부로 일하다 탄광의 소년광부로 노동했다. 그러다 잔뼈가 굵게 되자 후난 군벌 휘하에 병사로 입대하였다.

    펑더화이는 병사에서 부총사령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하여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떤 싸움이라도 회피하지 않았다. 후난성 핑장에서 기의를 일으킨 그는 당의 명령에 따라 성도인 창사를 점령한 일도 있었다. 그는 군벌 휘하 부대의 연대장으로 자신의 병력만으로 기의를 일으킨 다음 징강산으로 가서 마오쩌둥, 주더의 부대와 합류했다. 그 뒤 마오쩌둥이 곤란한 일을 겪을 때마다 앞장서서 호위장수 역할을 해냈다.

    마오쩌둥과 함께 선 펑더화이(왼쪽)

    징강산에서 국민당군의 토벌이 닥치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근거지를 지키라고 하고 자신은 주더와 함께 떠났다. 펑더화이는 산을 수비하다 스무 배도 넘는 대군의 포위를 간신히 뚫고 나와 후난성을 전전했다. 나중에 마오쩌둥은 “그때 펑에게 산을 지키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고 하면서 미안해하였다.

    장정 때 쭌이에서 펑더화이는 견결하게 마오쩌둥의 ‘북상항일’을 지지했다. 그리고 ‘사도적수’(1) 뒤에 “군대 지휘는 펑더화이에게 맡기자”는 린비아오의 제의를 뿌리쳐 마오쩌둥의 지도력을 뒷받침했다. 장궈타오와 갈등을 겪은 뒤 북상할 때는 자신의 부대로 마오쩌둥 등 지도부를 호위하였으며 섬북에 도착해서도 추격하는 국민당군을 섬멸시켜 뒤를 받쳤다. 항일전쟁 시기 그는 백단대전을 총지휘하여 공산당의 항일투쟁에 빛나는 이력을 남기게 하였다. 100개 연대를 동원한 이 작전으로 공산당은 항일의 명분과 실적을 동시에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직언을 하거나 바로잡으려 하였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가리켜 ‘대장군’이라 불렀다. 일찍이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긴 칼 비껴차고 말에 오른 이가 누구인가, 오직 나의 펑 대장군일세.“(誰敢横刀立馬,唯我彭大將軍)일세.” 하는 시를 보낸 일이 있었다. 1935년 10월 장정 끝 무렵 악착같이 추격해오는 마홍쿠이, 마부팡군을 류판산(六盤山)에서 격퇴한 펑더화이를 기린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죽음이나 고생은 물론 어떠한 강적이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25만명의 후쫑난군에게 2만 8천명의 병력으로 맞서는 데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마오쩌둥에게는 망설임 없이 옌안 방어전과 그 후의 지연전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펑더화이의 조수는 시중쉰(習㑖勳)이었다. 시중쉰은 현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의 아버지이다. 그는 류즈단과 함께 섬북의 근거지를 개척한 사람으로 마오쩌둥 등 지도부가 바오안 및 옌안에 안착할 수 있게 기반을 닦은 공신이었다.

    시중쉰 삼부자. 왼쪽 큰 이가 시진핑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옌안 부근의 해방군 부대를 총지휘하게 하였다. 시중쉰은 당시 중공 서북국 서기를 맡고 있었다. 부대가 통합 개편되면서 시중쉰은 서북 야전병단 부정치위원을 맡았다. 시중쉰이 현지 인민들과 사정과 지리에 두루 밝았기 때문에 펑더화이와 짝을 이뤘을 것이다.

    마오쩌둥 옌안 포기를 결심하다

    엔안은 공산당이 10년 동안 지켜온 홍색 수도였다. 혁명성지라 하여 수많은 청년 학생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혁명가들이 자발적으로 찾아 들었으며 외국기자, 심지어 미국 대사 및 미군 관계자들까지 드나들었다. 한 나라의 수도에 필요한 모든 기관이 그곳에 있었다. 학교, 병원, 은행, 통신사, 당 훈련기관 및 군정기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에 마오쩌둥 등 지도부는 옌안 양자링(陽家領)에 자리잡았으나 나중에 거처와 서기처를 자오위안(棗園)으로 이전했다. 본래 이곳은 섬북 군벌 가오솽청(高雙成) 소유의 장원이었으나 공산당이 온 뒤로 징발하여 썼다. 지금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펑더화이, 장원텐 등 주요 지도부들의 집과 병원, 그리고 서기처 건물이 남아 있다. 마오쩌둥의 집은 황토언덕을 파서 만든 요동이었으며 나머지 지도부들의 집도 모두 요동이었다. 이제 10년간 유지해온 옌안이 대병의 공격 아래 풍전등화의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당정의 지도부는 물론 중앙군사위원회는 옌안 방어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중공 중앙서기처는 3월초 회의를 소집하여 국민당군의 공세에 대한 대응책을 의논했다. 마오쩌둥은 옌안 바깥에 나가있는 해방군 부대와 섬북 근거지 안의 부대가 서로 협력하여 전투하는 방어계획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부득이하면 옌안을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도 옌안의 상징성과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세가 불리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쫑난 휘하에 정보선으로부터 들어온 첩보에 따르면 후쫑난 휘하 국군과 옌안을 수비할 해방군의 병력대비가 10대 1도 넘었다.

    3월 6일, 마오쩌둥은 왕쩐의 부대 2개 여단을 옌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옌안 남부를 수비하던 2개 여단도 불러들여 방어에 임하게 하였다. 3월 8일, 섬감녕 해방구 정부가 옌안의 시장에서 만인대회를 열고 사수를 결의했다. 첩보에 따르면 예정된 공격날짜는 3월 10일이었다. 준비하기에 시일이 너무 촉박했다. 마오쩌둥과 지도부는 숙의를 거듭한 끝에 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적을 깊이 유인하고, 적시에 옌안을 포기하며, 옌안 북쪽에서 전기를 만들어, 점차 국민당군 병력을 소멸한다.”고 결정하였다.

    방침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혼란이 뒤따른다. 옌안에서 근무하는 당정군 인사들만 5,000여명에 이르렀다. 거기에 가족들과 연안에 거주하는 군중들을 모두 소개시켜야 하였다. 홍색 수도인만큼 옌안에 사는 주민이라면 누구라도 국민당의 공격 앞에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은 대군이다. 요동 안에 한 톨의 곡식이라도 남겨서는 안 된다. 견벽청야를 철저히 시행해야 한다.” 마오쩌둥이 회의에서 특히 강조한 말이었다.

    3월 10일, 옌안을 방어할 부대가 집결을 완료했다. 펑더화이가 직접 전선에 가 부대 배치를 진행했다. 당시 섬감녕 야전집단군 주력은 6개 여단이었으며 병력은 3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당 중앙과 중앙군사위 기관, 그리고 군중들을 엄호, 이동시키기 위해서도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펑더화이 등 지휘부는 병력을 옌안 남쪽에 배치하고 운동방어전으로 적을 저지하게 하였다.

    옌안 방어전

    1947년 3월 11일, 미군 옌안 관찰조가 떠난 지 7시간 뒤 국민당군 비행기가 옌안을 대규모로 공습했다. 1947년 3월 13일, 국군은 남쪽 전선 집단군을 좌우 2개 병단으로 편성했다. 정편 제1군단장 동자오(董钊)와 정편 29군단장 류칸(刘戡)이 지휘하는 부대가 각각 이촨, 뤄촨 등에서 옌안을 향해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국민당군은 비행기로 옌안 및 부근 지역을 번갈아가며 폭격했다. 후쫑난은 뤄촨에 진주하여 “3일 내에 엔안을 점령하라.”고 다그쳤다.

    1947년 3월 13일부터 서북 각 야전군과 지방 부대들은 옌안 남쪽 지역에서 설치한 진지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저항했다. 중앙기관과 군중들이 이동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관계자의 가족들과 옌안 군중들은 이미 이동을 시작하였다. 마오쩌둥의 딸 리나가 덩잉차오를 따라가면서 엄마인 장칭을 돌아보며 울었다. 어지간한 마오쩌둥도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인간의 삶에는 이별의 아픔을 피할 수 없구나.”(人生自古傷别离)(2) 옌안의 시민들도 뒤돌아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1947년 3월 12일 새벽에 주더, 류샤오치, 런비스, 예젠잉이 중앙기관 일부 요원들과 함께 옌안을 떠났다. 14일, 옌안 신화사 방송국도 송출을 중단했다. 신화사는 와야오부(瓦窯堡)에 미리 준비해둔 방송국에서 계속 방송했다.

    1947년 3월 16일, 변구부대를 통일지휘하기 위해 중앙군사위는 섬감녕 변구의 모든 야전 부대를 서북 야전병단으로 재편성했다. 병단은 주력 6개 여단 2만 6천명과 산간닝 변구 경비부대 및 기병 사단 등 모두 1만 6천명의 지방부대를 관할했다. 중앙군사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 펑더화이가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중공 서북국 서기 시중쉰이 부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통일 지휘를 하게 하였다. 동시에 마오쩌둥은 중앙군사위 명의로 옌안 방어와 관련한 작전명령에 서명했다. 작전명령 중 주요한 내용은 “서북 야전병단은 방어작전 중 적을 피로하게 하고 소모시켜라. 그 뒤 5개 여단을 집중하여 운동전으로 각개 섬멸하여 적의 공격을 철저하게 분쇄하라.” 는 것이었다.

    옌안 방어전은 7일 밤낮으로 진행되었다. 해방군은 뤄원파(羅元發)가 지휘하는 5,000여명이 옌안 남부에서 결사적으로 국군의 진격을 막았다. 비행기와 대포가 동원된 강력한 공습 속에서 익숙한 지형을 이용하여 결사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해방군은 적은 병력으로도 야습을 하거나 이동방어를 하면서 국군을 교란했다.

    18일, 후쫑난 집단군은 옌안 남쪽 10킬로미터 지점인 얼스리푸(二十里铺)와 양자판(楊家畔)선에 진출했다. 마부팡, 마홍쿠이 집단군은 옌츠(鹽池), 칭양(慶陽) 등을 점령했다. 22군은 헝산(横山)을 공격했다. 그때 옌안의 각 기관, 학교 등은 이미 이동했으며 군중들도 소개를 완료했다. 그날 저녁 중공 중앙주석 겸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은 중앙기관과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등을 인솔해 옌안을 떠났다. 부주석인 저우언라이,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런비스 등도 함께 떠났다.

    3월 18일 엔안을 떠나기 직전 마오는 왕쩐과 팡더화이를 만나 당부했다. 왕쩐은 막 부대를 인솔하여 진수(산시, 쑤이위안 관할) 해방구에서 달려온 참이었다. 마오의 부탁인즉 방과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해 달라는 것이었다. 적에게 어지럽게 달아났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였다. 경호원들이 빨리 떠나라고 재촉했지만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해가 저물 무렵에야 10년 동안 지내온 옌안과 작별했다.

    마오쩌둥은 떠나며 펑더화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장졔스가 옌안을 공격한 것은 제 발등을 찍는 거요, 우리는 짧으면 1년, 길어야 2년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소.” 그로부터 일 년간 마오쩌둥은 국민당군의 추격을 피해 섬북을 전전하였다. 그들은 섬북에서 지휘 기구를 인솔하며 전국적인 내전을 지휘했다. 서북 야전군은 하루 뒤인 3월 19일 지연전 임무를 마치고 옌안에서 철수했다. 그러자 후쫑난의 부대가 곧 옌안에 입성하였다.

    후쫑난, 빈 성을 점령하다

    후쫑난이 옌안에 입성하고 보니 마오쩌둥은 그만두고 해방군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산당과 관련한 사람들은 물론 군중들도 대부분 떠나 텅빈 성이 되어 있었다. 옌안 점령은 내전이 시작된 후 국민정부가 거둔 가장 큰 승리였다. 난징의 신문들은 몇날 며칠이고 1면 머리기사로 난징 점령과 그 뒤 소식을 전하였다. 후쫑난도 점령 당일 새벽에 장제스에게 전보를 쳤다 “아군과 적 사이에 칠일 밤낮을 두고 교전하였습니다. 마침내 오늘 새벽 옌안을 점령하였습니다. 섬멸한 적과 포로가 5만명입니다.” 그것은 허위보고였다. 옌안을 방어하던 해방군 총수가 3만명도 되지 않는데 5만명이라니, 옌안 방어전에서 사상 당한 해방군 병사는 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점령지 옌안을 시찰하는 장제스

    기록에 따르면 그가 작전참모를 시켜 허위보고를 하게 했다고 한다. “정치적 효과를 크게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은 국군이 확보한 해방군 포로와 사상자를 합하여 몇십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장제스는 크게 기뻐했다. 전보를 보내 “당과 국가를 위해 공을 세운 것을 치하한다. 그동안의 노고를 크게 위로한다. 공이 있는 자는 포상하라. 전상자들을 위로하고 옌안의 질서를 바로 잡으라.”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곧 후쫑난을 일급 상장(대장에 해당한다.)으로 진급시키며 훈장을 주었다.

    늘 공무에 바쁜 장제스는 8월 7일이 되어서야 엔안으로 갔다. 자신의 국민정부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있음을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내심으로는 공산당의 소굴과 자신의 적수가 묵던 곳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다음날 그는 후쫑난과 함께 자오위안에 있는 마오쩌둥의 거처로 갔다. 요동은 소박하다 못해 누추했다. 벽은 얼룩덜룩했으며 문짝도 낡아서 아귀가 맞지 않았다. 가구라고는 칠도 하지 않은 느릅나무 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오래되어 낡은 것이었다. 중공 지도부들의 요동이 일반 백성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난징의 대통령 관저는 물론 곳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던 그가 마오쩌둥의 집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가 시안 화청지에 장제스가 묵었던 숙소–시안사변이 일어났을 때 묵던 곳이다.-를 보고난 뒤 옌안 자오위안의 마오쩌둥 집을 보았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집이 소박하다 못해 초라했던 것이다. 화청지에 있던 장제스의 임시 숙소도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소박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집과 비교하면 여인숙과 호텔의 수준이라고 할까.

    자오위안 요동 안에서 일하는 마오쩌둥

    시안 화청지 장제스 숙소

    후쫑난은 옌안에서 7일간 머물렀다. 기자들이 대거 몰려들어 취재를 하였기 때문에 그는 부득이하게 해방군 포로를 만들어 내었다. 국군 병사들 몇백명을 해방군으로 위장시킨 것이다. 물들인 옷을 입히고 공산군 포로라며 며칠 동안 훈련을 시켰다. 기자들에게 그는 “기자들이 백성을 취재할 수 있도록 미처 안배하지 못하였다. 노약자들만 남아 있는데 태도가 적대적이다. 그리고 지뢰라도 밟을까 걱정스럽다. 누군가 총을 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귀순한 공산당 간부가 있으니 그 사람을 취재하기 바란다.”하고 말했다. 그래도 후쫑난은 이런 말을 하였다. “국민혁명과 북벌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자들을 잘 응대해야 하지만 민중들과 싸워서는 안된다. 우리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1947년 3월 25일, 후쫑난은 숑샹후이 및 휘하를 이끌고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 등의 집을 찾아 보았다. 먼저 왕자핑을 보고 차례로 양자링, 자오위안 등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쉰 예술학원을 찾았다. 자오위안의 마오쩌둥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요동 안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하였다. 마오쩌둥이 남긴 시였다. “후쫑난이 옌안에 왔으니 호랑이 등에 올랐구나.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으니 어허, 이를 어쩌랴.” (胡宗南到延安,勢成骑虎。進又不能進,退又退不得。奈何。奈何.)” 후쫑난은 편지를 읽고 껄껄 웃었다. 심중이 어떻든 호탕하게 웃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옌안 공격을 준비할 때 후는 비서인 숑샹후이에게 “삼국연의와 수호전을 준비해 가라”고 지시하였다. 옌안에서 기분전환을 할 때 읽겠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삼국연의와 수호전을 즐겨 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 그만큼 후쫑난은 옌안 공격에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가 마음놓고 웃은 것은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바로 그날 후쫑난의 정예부대인 31여단이 칭화벤에서 해방군에게 전멸당하고 여단장 리지윈(李纪云)이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후쫑난과 숑샹후이(雄向揮)

    후쫑난에 대한 장제스의 신임은 절대적이었지만 공산당 쪽에서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일찍이 후쫑난을 가리켜 “품은 뜻은 크나 재주는 적다.”고 평한 적이 있었다. 저우언라이가 후를 그렇게 평가한 것은 아무래도 숑샹후이의 활약 때문일 것이다. 숑샹후이는 국민정부군 안에서 활약한 거물 특수공작원 네 명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후쫑난의 부관 겸 기밀비서로 있었다. 공산당원이 사령관의 기밀비서였으니 국민정부군의 작전계획이나 기밀이 줄줄 샐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숑샹후이를 직접 지도한 인물이 저우언라이였으니 후쫑난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았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궈루구이, 숑샹후이, 한롄청 등 첩자들을 직접 지휘했으며 장충 등 국민정부군 장군들을 귀순하게 하였으니 공산당에 세운 공이 유수한 지휘관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숑샹후이는 베이징에 있는 칭화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집안도 좋아서 그의 아버지는 국민정부에서 호남성 고등법원 원장을 지냈다. 그는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Reserve Western Reserve University)에 유학하여 정치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쳤다. 당시 중국군 내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칭화대학교 재학 중 18세가 되던 1936년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7년에는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후쫑난의 부대에 가서 기밀정보업무에 종사했다. 당시 후쫑난이 옌안의 해방구를 주로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로 보냈을 것이다. 총명한 숑샹후이는 금방 후쫑난의 눈에 들어 중용되었다.

    1943년 숑샹후이는 옌안을 공격하려는 후쫑난의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공산당에 전달하였다. 부대배치 계획 등 구체적인 계획을 입수했으므로 훙군이 그 계획을 파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쫑난의 비서가 된 뒤에 명령이나 편지등을 모두 직접 기초했다. 공산당의 신화사 통신 보도나 공산당 동향을 요약하여 보고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국민정부군의 옌안 공격이 임박한 1947년 2월, 숑샹후이는 여러 해 동안 사귀어온 연인 잔샤오화(湛筱華)와 결혼했다. 그 증인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맡았으니 장의 부자가 통탄할 일이었다.

    숑상후이와 부인 잔샤오화

    숑상후이 옌안 공격계획 문서를 입수하다

    신홍여행 중 숑샹후이는 국민정부 비밀정보기구 요원에게 포착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후쫑난에게 미국 유학을 요청하여 미국으로 피하려 하였다. 그러나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해 차일피일 늦추다 후쫑난에게 호출을 당했다. 신혼여행 중에 돌아온 숑샹후이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어제 총재께서 급전으로 나를 난징에 부르셨네. 미·영·소·프 4국이 3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중국 문제를 토론한다는 거야. 총재는 결단을 내려 나에게 공산당 소굴인 옌안을 토벌하라 하셨네. 4개국 외무장관 회의가 열리는 3월 10일 공격을 해야 하네.” 말을 마친 후쫑난은 숑샹후이에게 문서함을 주고 함 속의 문서 가운데 초안을 보게 하였다. 숑에게 방문을 잠그게 한 다음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일렀다.

    숑이 문서함을 열어보니 두 개의 기밀문서가 있었다. 장제스가 승인한 ‘옌안 공격방안’이었다. 섬북의 공산당 부대배치 상황도 들어 있었다. 숑샹후이는 가슴이 뛰었다. 그는 문건 내용을 조용히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3월 3일 오전 숑샹후이는 후쫑난과 참모장 성원(盛文)을 따라 전용비행기로 시안에 돌아왔다. 그날 저녁 숑샹후이는 시안의 ‘신타이일보(新泰日報) 편집국장 왕스젠(王石堅)(3)의 집 지하실에 있는 비밀 무선국에서 비밀정보를 엔안으로 송출했다. 후쫑난이 기밀유지를 위해 휘하 군단장과 사단장에게도 알리지 않은 내용이었다.

    3월 8일, 후쫑난은 숑샹후이 등 몇 명을 데리고 비밀리에 시안을 떠나 뤄촨(洛川)으로 갔다. 뤄촨의 소학교에 먼저 도착한 국민당 고관들과 함께 지휘소를 차렸다. 숑상후이는 후쫑난의 동태를 당 중앙에 보고할 필요를 느껴 일지에 기록했다. 일지를 사령관 관인이 찍힌 서류봉투에 넣어두고 만약을 위해 같은 봉투를 또 하나 만들어 두었다. 하나는 왕스젠에게 부치고 남은 하나는 왕스젠의 친구에게 주어 계속 당 중앙에 보냈다. 이에 따라 옌안은 후쫑난 부대의 침공에 충분히 대비할 수 있었다.

    숑스후이가 이렇게 제공한 정보로 공산당 부대와 요인들은 계속 후쫑난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숑상후이를 크게 칭찬하였다. “참으로 귀한 인재다. 몇 개 사단보다 활약이 낫구나.” 저우언라이는 “우리 당에서 국군 내부에 잠입한 정보요원들의 활약이 정말 탁월하다. 리커농(李克農), 첸좡페이(錢壮飛)와 후디(胡底)를 전 삼걸이라 한다면 숑샹후이, 천충징(陳忠經), 신젠(申鍵)을 후 삼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공적은 적의 천군만마에 해당된다.”

    숑샹후이는 1947년 5월 20일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그는 웨스턴 리저브 대학에서 정치경제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1949년 11월 6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 신중국의 당정기구가 있던 지역이다.) 근정전에 국민당 원로 장즈중(张治中), 샤오리즈(邵力子), 류페이등이 초청을 받아 왔다. 이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숑샹후이를 소개하자 모두 깜짝 놀랐다. “숑 형제 아닌가? 자네도 기의했는가?” 누군가 묻자 저우언라이는 “기의한 게 아닙니다. 귀대한 거죠.”하고 대답했다. 장즈중은 “장제스는 원래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공산당의 적수가 못되었군요.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정보공작에서도 공산당에 한참 못 미치는군요.” 하고 감탄했다.

    본래는 숑샹후이가 미국 유학을 간 뒤 국민정부 정보분야에서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숑샹후이의 유학비용 지급을 중단했을 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훗날 학자들이 분석하기로는 후쫑난이 고의로 보고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제스가 그 사실을 알면 책임을 추궁당할까봐 묻었다는 것이다. 결국 숑샹후이는 두 번에 걸친 옌안 공격정보를 미리 알린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는 신중국 건립 뒤 별다른 풍파 없이 천수를 누렸다.

    <각주>

    1. 사도적수(四渡赤水)란 구이저우성 쭌이 부근에 있는 츠수이(赤水)를 네 번 건넌 사건이다. 마오쩌둥이 쭌이 회의 뒤 군권을 잡은 뒤 국민당군의 추격과 차단을 뿌리치기 위해 지시하였다. 린비아오 등 현장 지휘관들의 불만을 샀다.

    2. 인생자고상별리(人生自古傷别离)는 중국 송나라 때 시인 류용(柳永)의 사(詞: 한시의 종류) 우림령(雨霖铃)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래 문장은 다정자고상이별(多情自古傷离别: 정이 많으면 이별할 때 아픔이 크다)로 되어 있다.

    3. 중공 비밀당원으로 시안에서 무선연락을 담당했다.

    필자소개
    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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