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주 된 마음으로 선거 임해
    "여영국이 노회찬 빈자리 채워야지"
    [당당히 앞으로 ⑥-2] 여영국 창원성산 보궐선거 후보
        2019년 03월 21일 10: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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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당히 앞으로 ⑥-1] “권영길·노회찬, 내가 이어가겠다”

    공단에 노동자 건강센터 의무화법 만들고 싶다

    이광호 : 도의원 시절 국회의원이 되면 이런 건 꼭 해야겠다,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있나?

    여영국 : 일정 규모 이상의 아파트를 지으면 도서관 건립이 의무화돼 있다. 나는 공단이 조성되면 그 안에 노동자 건강을 관리하는 노동자 건강지원센터를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고 싶다. 공단에는 중소 규모 사업장이 많아서 이런 건강지원센터가 꼭 필요하다. 도의원하면서 피부로 느낀 바가 있다.

    또 노동운동 출신이라서 그렇긴 하겠지만 우리 지역이 복수노조 폐해와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 곳이 몇 개 있다. 자본 쪽에서 제2, 제3노조 만들어서 민주노조를 무력화시키고, 교섭창구 단일화를 통해 소수노조를 배제하고 있다. 노조 조직력의 비율만큼 교섭 테이블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원해서 법제화된 게 복수노조이지만 폐해를 최소화하고, 악용하는 고리를 차단하는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됐다.

    인터뷰 모습(사진=김태현)

    이광호 : 노회찬 의원을 성산으로 불러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여영국 : <상남동 사람> 책을 쓴 이후 연구를 집약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창원미래연구소를 열었다. 2015년 10월 28일이다. 그때 창립 기념 강연 초청 강사가 노 의원님이었다. 그걸 두고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영국이 국회의원 나가려고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이야기도 있었고, 노 의원님을 초청한 걸 두고도 여러 얘기가 나왔다. 2016년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그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노 의원님, 내려오시죠”

    초청 강연하러 내려온 날 저녁에 술 한 잔 하면서 내가 첫 말을 뗐다. “의원님 창원 내려오시죠.” 11월경이었다. 여론조사를 돌려봤는데 결과도 괜찮게 나왔다. 그 데이터 들고 본격적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노 의원은 고민하다가 노원병 출마 쪽으로 방향을 잡은 상태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늦게 노 의원께서 전화를 걸었다. “준비 잘 돼?”라고 물었고 나는 “내일 새벽 첫 차 타고 올라갈 테니 서울역에서 보자.”고 했다. 2017년 1월 29일이었다. 다음날인 30일 총선 주요 전략을 정하는 정의당 전국위원회가 예정돼 있었다. 거기서 같이 1박을 보내고 수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결국 창원으로 내려오기로 최종 결심을 하셨다. 그때 내가 안 올라갔으면 안 내려왔을 수도 있다.

    이광호 : 정의당으로서는 이번 창원 선거가 각별한 것 같다. 못 다 채운 노회찬 의원의 임기를 이어가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정의당을 통해 그의 꿈을 실현하는 의정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여영국 후보의 의무가 됐다. 지역 주민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표시해 주고 있나?

    2018년 6월 지방선거 때의 여영국 도의원 후보와 고 노회찬 의원

    선대위 발족식 때의 여영국, 김지선(고 노회찬 의원의 부인), 이정미 대표

    급작스런 상황 전개, 마음 준비는 하고 있었다

    여영국 : 가장 밑바닥에는 노 의원이 그렇게 가신 것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도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같이 있다. 무상급식 운동하면서 내 지역구 넘어서 많은 학부모와 교류할 수 있었다. 그런 분들은 내가 정의당 경남도당 위원장하면서 노 의원 모시고 함께 일한다는 걸 안다. 의원님이 돌아가신 후 내가 그 빈자리를 이어가는 건 너무 당연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노 의원 장례 하루 전날 추모 행사 직전에 영정 들고 반송동에 가서 노제를 지냈다. 반송동은 성산구이지만 나의 지역구는 아니다. 내가 잘 아는 지역은 아니다. 그런데 노제 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200~300 주민이 참석했다. 반송시장 상인회 쪽에서 노제 물품을 준비해줬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노 의원을 이어 내가 출마하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번 선거는 우리에게 큰 부담이다. 선거는 후보 중심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후보를 빨리 정해야 했고, 이를 중앙당에 요청했다. 노 의원 같은 분을 모실 수는 없다 해도, 이 상황을 돌파할 큰 사람이 있으면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이에 대해 내부에서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여영국은 약하지 않느냐,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없지 않았다.

    노 의원께서 후보로 창원 성산에 내려왔을 때 정의당 빼고 모든 정당에서 ‘타지 사람’이라며 일제히 공격하고 나섰다. 노회찬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 후보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들으면서 다른 대안이 없으면 내가 출마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난해 10월 서울에 가서 이정미 대표와 사무총장, 심상정 의원을 만나서 상의했다. 그때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으로 정리가 됐다.

    이정미 대표, 창원 상주하며 서울로 출퇴근

    이광호 : 며칠 전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 이정미 대표는 ‘창원에 있으면서 서울로 출퇴근 한다’고 말했고, 심상정 의원은 ‘서울에 있으면서 창원으로 출퇴근 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다른 지역 평당원도 자발적으로 이번 선거를 돕기 위해 창원을 방문 계획을 세우는 등 다양한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중앙당 차원에서도 거의 ‘올인’하고 있다. 힘도 되고 부담도 될 것 같은데.

    여영국 : 당원을 물론 노회찬 의원을 그렇게 보내면서 당원은 물론 많은 국민들께서 마음 아파했다. 성산에서 여영국을 통해 노회찬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벅차다. 이번 선거를 통해 노회찬을 부활시키는 데 당원은 물론이고 정의당을 지지하는 분들, 노 의원 가신 것을 아파하는 많은 국민들이 주역이 돼 주시길 바란다.

    창원 성산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이번 선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힘을 보태주기를 바란다. 정의당 당선자가 한 명 늘어나면 2020년 총선에서 독자적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정의당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해서 국회 안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상상 이상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의 씨앗을 이번에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돈 안 드는 국립 공고 들어가

    이광호 : 어렸을 때 집안 형편은 어땠나?

    여영국 : 중학교까지는 의무교육이었으니 나의 선택 여지는 없었다. 고교 진학은 스스로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취업 나가고 공장에 들어가고 노동운동 하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족들과 상의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럴 정도로 집안 사정이 힘들었다. 내 위의 형만 고졸이고 나머지는 다 중학교 졸업했다. 난 막내였는데 ‘멘토’ 역할을 해줄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내 버릇 중 하나가 혼자 고민하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건데, 이런 환경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좋은 점도 있지만 조직운동에서는 안 좋은 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선택했던 유일한 기준은 돈이 안 드는 학교였다. 박정희가 세운 국립 고등학교를 선택한 이유다. 농사를 짓던 집에서는 한 달에 5만 원 하는 기숙사비도 내기 어려웠다. 큰 형님이 기숙사 비용을 대 줬다.

    이광호 : 자녀들이 아빠가 정치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나?

    여영국 : 큰 아이가 딸인데 26세이고, 둘째는 21세로 아들이다. 정치하는 아빠를 그렇게 지지하는 편은 아닌 것 같다. 힘든 것 같다. 내가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 하지만 선거 때가 되면 내가 당선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보여주긴 한다.(웃음)

    이광호 : 통일중공업에 들어온 후 노동조합 운동을 하게 된 계기와 86년 해고된 사유를 얘기해 달라.

    여영국 : 80년에 부산기계공고 입학했다. 한 달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입학하자마자 학교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응이 안 됐다. 빨리 자격증 따고 공장 갈 생각만 했다. 1학년부터 공부는 접고 살았다. 3학년 올라가자마자 계속 선생님을 졸라서 15개 반 졸업 예정자 중에 내가 가장 먼저 실습을 나가게 됐다. 82년에 사상공단으로 실습을 나갔고 83년 2월 졸업했다.

    병역특례 적용되는 직장에 가기 위해 취업 알선을 하는 학교 부서를 찾아갔다. 선생님이 삼성, 현대, 대우 세 곳 중 가고 싶은 곳을 찍으라고 했다. 하지만 나와 친한 친구와 같이 있고 싶어서 통일중공업을 선택했다.

    문성현을 만나다

    통일중공업에는 이미 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조합원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직장생활은 그리 모범적이지 않았다. 그때 프로야구가 붐이었다. 주야간 근무에 잔업 등으로 야구를 볼 수가 없었다. 이러저러한 거짓말도 많이 했다. 반장한테 많이 찍혔다. 83년 6월 25일, 날짜도 기억하는데, 그날이 토요일 야근이었다. 마침 동료 중 한 명의 생일 파티에 가서 술을 좀 마셨다. 공장에 들어가서 기계 앞에 섰는데 약간 오락가락 했다. 조퇴를 요구했는데 들어주지 않았다. 가겠다, 안 된다, 옥신각신하다가 철조망 담치기를 하다 옷이 걸려 찢어지고 넘어지고 다치고 했다. 결국 공장 밖에 나와서 집으로 갔다.

    당시로 보면 해고 감이었다. 월요일 출근했더니 부장이 전체 인원 모아놓고 일장 설교를 했다. 다행히 주변에서 좀 도와줘서 쫓겨나는 건 모면했다. 기존에 있던 부서에서 쫓겨났다. 쫓겨서 간 곳에 문성현(현 경노사위 위원장) 선배가 있었다. 거기서 둘이 친해지다 보니 노조 사무실도 가 보고 하면서 노동운동을 하게 됐다.

    85년도에 부평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 동맹파업이 있었다. 우리도 임금인상, 단체협약 체결 중에 잔업 거부 투쟁을 했다. 이 과정에서 문성현이 위장취업자인 것이 발각되고 신분이 들통 났다.

    그런데 당시 위원장이 임금 협상을 직권조인으로 처리했다.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문성현을 중심으로 모인 민주파가 주동해서 파업에 돌입했다. 그해 4월 25일 파업에 돌입했고 그날 밤 식당에서 철야 농성을 했다. 회사 쪽에서 바로 타결했다. 문성현이 노조 위원장이 됐다. 노동조합의 봄날은 잠깐이었다. 문 위원장은 그해 6월 20일경 새벽 연행, 구속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는 과정에 나는 대의원에 출마했고, 당시 반장과 붙어서 더블 스코어 차이로 그를 눌렀다. 22세 때였다.

    노무현 변호사 집에서 엠티도

    그는 86년 허재욱, 박성철과 함께 해고됐다. 전태일 문학상을 받은 김하경 소설 <그해 여름>은 이들 세 명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다. 해고 무효 소송을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를 선임해 해고 무효 소송을 했으나 해고자들이나 변호사 쪽이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부당 해고는 맞지만 여영국은 복직 의사가 별로 없었다.

    86년 겨울에 영화 <변호인>에서 나오는 노무현 변호사의 남촌동 아파트에서 한진중공업 김진숙 등과 함께 엠티를 하기도 했다. 여영국은 문성현과 생활을 거의 같이 했다. 한때는 여기서 역할은 끝내고 다시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가자는 생각도 했지만, 당시 시국 상황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이 투쟁의 주역들인 이종엽, 이흥석, 진영규 등을 만났다.

    87년 투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 여영국은 한때 ‘이제 할 일은 끝났으니,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내 87년 투쟁 지도부들이 구속되는 바람에 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동운동 판에 남아서 본격적인 운동을 하게 됐다.

    이광호 : 구글 검색을 해 보면 여영국의 연관 검색어 가운데 ‘쓰레기’가 있다. 홍준표 씨가 여영국 후보한테 내뱉은 말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말과 함께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덕분에 여영국 당시 경남도의원도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됐다. 홍준표 씨가 한 일 가운데 그나마 좋은 일인 것 같다.

    여영국 : 그렇지 않아도 텔레비전 토론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내 대답은 이랬다. “무슨 소리냐, 나 덕분에 오히려 홍준표 씨가 떴다.” (웃음)

    홍준표 지사와 공방을 벌이는 여영국 도의원 모습

    이광호 : 반려견 ‘누리’와 같이 걷는 걸 큰 낙으로 삼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밤에도 개와 함께 걷는다고 했는데.

    여영국 : 재선에 성공한 2014년에 이름 정도 알고 지내는 사람 집에서 키우는 진돗개 어미가 새끼를 낳고 죽었다. 한 마리 키울 생각 없냐고 해서 가족 동의도 못 구하고 가져왔다. 당시 처도 장사를 하고 나도 밖으로 돌아다니던 판이라 개가 있으면 심심치 않겠다고 생각했다.

    새끼들 중 가장 개구장이인 녀석을 데려왔다. 키우다 보니 정이 들었다. 홍준표 지사 때 스트레스 많이 받았다. 초대인 9대 때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의원도 좀 있어서 함께 술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10대 때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아는 사람들과 만나서 의회 얘기해 봐야 잘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스트레스는 더 받고 술도 더 마시고 하다가,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야간에 개와 같이 산에 가기 시작했다. 야간 산행 하면서 몇 놈을 죽였다 살렸다 했고, 소설도 몇 권 썼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뭔가 속에서 걸려 있던 것이 확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또 밤에 산에 혼자가면 좀 무서운데 개와 같이 가면 괜찮다.

    ‘당당히 앞으로’ 인터뷰 시리즈는 보통 2시간 이상 진행됐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는 여영국 후보가 바빠서 1시간 남짓 하고 끝났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저녁 퇴근 인사를 하러 나가야 되는 여영국 후보를 5시가 조금 지나서 놔줄 수밖에 없었다.

    준비해 간 질문 중 재미있는 것들이 후반에 많이 있었는데 이번 원고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아쉬움은 당선 후 인터뷰 하면서 풀기로 하고, 인터뷰 시리즈 마지막 공통 질문을 했다. 보기보다 눈물이 많은 그는 마지막 질문에 대답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이광호 : 노회찬 의원에게 다짐의 한 말씀 부탁드린다.

    여영국 : 우리 당원들이나 창원 시민들은 아직 의원님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다. 상주의 마음으로 이번 선거에 임하고 있다. 내가 당선이 되는 그날, 끝까지 완전히 보내드릴 수는 없지만, 그때가 탈상하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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