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때의 인민재판 그리고 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 송종섭 석방 청하는 진정서 한 통
        2019년 03월 19일 10: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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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고교 시절 한 고약한 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따금 수업시간에 눈 밖에 난 학생을 복수로 불러낸 다음 서로 뺨을 때리게 하는 악랄한 벌을 줬습니다. 처음 두 학생은 교사의 지시에 거부하며 상대 친구의 뺨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교사는 한 학생 뺨을 세게 때린 다음, 상대 학생에게 그렇게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에 마지못해 한 친구가 슬쩍 상대의 뺨을 슬쩍 치니까 그 교사는 “너희들 장난하니!”라고 고함치며 더 세게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두 친구의 상대 뺨 때리기는 서로가 기진맥진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두 친구가 코피가 터지고 지쳐 쓰러지자 그제야 벌이 끝났습니다.”

    -오마이뉴스, 2017.11.3. 박도 기자 글에서

    가혹한 동족상잔의 역사였다. 미소(美蘇)의 대리전쟁이었던 6.25 전쟁 중 한국인들은 서로 다른 이념으로 무장한 채 상대방을 증오하고 죽였다. 자신의 이념을 절대선이라 내세우며, 북한군 세상이 되면 인민재판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반동분자’로 몰려 죽어갔으며, 세상이 바뀌어 국군이 들어오면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공산 부역자’,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그것을 지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은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증오가 증오를 낳았고, 원수가 원수를 낳았다. 서로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점령지역이 급격히 전환되는 전쟁 양상의 변화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살아남기 위해 마지못해 선택했던 순응조차도 적(敵) 체제를 돕고 협력한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전쟁 중이라 ‘반동분자’나 ‘빨갱이’로 지목되는 것도 엄정한 절차에 따랐다기보다는 그저 그런 소문이나 심증으로, 혹은 원한에 의한 고발로 인한 경우도 많았다. 누구 말처럼 당시는 “찍해도 죽고, 짹해도 죽고, 찍짹해도 죽고, 아무 소리 안하면 안한다고 죽이는 세상”이었다.

    [사진] 많은 사람들이 전쟁 중 죽어갔다. 그 중에는 왜 죽는지 이유도 모른 채 죽은 자들도 많았다. 피난 중 죽은 한 여인과 엄마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이다. 전쟁은 이렇게도 잔인하고 비극적이었다.

    행동 하나 하나가 자신을 찌르는 비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과거도 돌아봐야 했고, 주변과 원한 진 일이 없는지도 살펴야 했고, 자기의 재산이 남들보다 많아 질시의 대상이 아닌지도 다 살펴야 했다. 꼬투리가 잡히면 언제든지 목숨이 날아가는 그런 시절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희생되는 거라면 본인도 수긍을 했겠지만,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야말로 광기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이성적 판단과 차분함은 어울리지도 않았고, 발붙일 수도 없었다. 그래서 민초(民草)들은 선악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바람에 풀이 그러하듯, 시류를 따라 이리 저리 흔들렸다. 그런 시대에 확고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민중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이기는 쪽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들은 때로 침묵했으며, 때로는 비겁했으며,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민중의 기회주의’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일까?

    아! 인민 재판…..

    2017년 7월 특이한 진정서(陳情書) 한 통을 수집하였다. 6.25 전쟁 중 인민군 점령지에서 마을 주민 4명이 좌익들에게 잡혀간 송종섭의 석방을 위해서 쓴 진정서였다. 송종섭이 바로 석방되지 않으면 곧 열리게 될 인민재판에서 죽게 될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한 목소리로 석방을 청원하였다. 이 진정서를 보기 전에 전쟁 중 열린 인민재판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당시의 인민재판 상황을 알면 송종섭의 진정서가 왜 작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민재판은 공개된 장소에서 범죄자에게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재판 형태이다. 즉심 재판으로 변론 없이 이루어지는데, 주로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시행되었다. 북한에서는 1946년 12월 1일부터 시작된 이 인민재판은 6.25 전쟁 발발 후 인민군이 장악한 남한 지역에서도 열려 악질 지주나 자본가, 반공주의자, 우익 경찰이나 군인들이 ‘반동분자’나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흔히 이런 재판이 열릴 때는 누군가가 주동자로 대중을 흥분시키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면 대중들은 한 명 두 명 여기에 찬동하여 ‘죄인’들에 대한 처벌에 동참하게 된다. 만약 적극적으로 ‘죄인’을 변호하면 그 역시 반동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대놓고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러다보니 죽을죄를 지은 자들이 죽는다면 그렇다 치더라도 억울하게 이런 저런 이유로 대중의 손에 죽은 자도 부지기수였다.

    인민군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의 인민재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 꽤 남아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쟁 중 인민재판의 실상을 보다 생생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6.25 전쟁 당시에 쓰인 박찬웅의 일기를 살펴보자. 여기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 하나가 인민재판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이 학생이 재판을 받게 된 이유는 전쟁 전에 좌익 학생을 폭행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 학생은 처형당했다. 그는 ‘인민의 적’으로 죽을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실제로는 폭행 당한 학생의 앙심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인민군 병사가 오히려 ‘다시 한 번 생각해 달라’고 할 정도로 대중은 침착함을 잃고 있었다.

    “찬경이가 그 근로대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졌던 얘기를 한다. 근로대에 나온 서울대 문리대 학생 한 명이 인민재판을 받은 것이다. 전에 좌익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는 그의 친구가 그를 고발한 것이다. 그 친구가 그 학생의 죄상을 말하고 모든 근로대원에게 처치 여하를 물으니 모두 “죽여라, 죽여라!”하고 소리쳤다 한다. 그래서 인민군 병사에게 통고를 하니 인민군 병사가 나와서 “다시 한 번 잘 생각해서 결정해 달라”고 모든 학생에게 말했다는 것. 그러자 학생들이 또 “죽여라, 죽여라!”하고 소리치므로 그 학생에게 유언을 말하라고 했다 한다. 그러니까 그 학생이 “나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 죗값을 치르기 위해 지금 의용군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건투와 하루 빨리 전 조선의 해방을 빌 뿐입니다. 조선인민공화국 만세!”라고 말하고 바로 처형됐다는 것이었다….그가 전에 좌익 학생을 팼다니, 이 처형된 학생은 국가 권력을 등에 업고 주먹을 휘두른 우익 깡패 학생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에 놓고 한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진심일지도 모르고 살기 위해서 한 동정 작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학생들은 그 말을 받아들여 그를 살렸어야 했다. 아니, 학생들에게 이런 재판을 할 권리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이 귀중한 것을 이 민족은 언제나 돼야 깨닫게 될 것인가!”

    – 박찬웅, [6.25일지] 중, 지식산업사

    작가 김팔봉과 그의 딸의 수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오효진의 다음 글도 인민공화국 치하 서울에서 열린 인민재판의 폭력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몇 사람만 나서서 그를 반동분자로 주장하면 ‘죄인’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사진] 6.25 전쟁 중 서울에서 열린 인민재판 장면이다. 재판 받는 이들 중 왼쪽이 문학가인 김팔봉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재판에서 총살형 대신 타살형을 선고받고 몰매를 맞은 김팔봉은 이후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된다.

    “여러분, 어떠시오? 검사의 논고와 판사의 (사형) 판결에 대해서 의견이 있거든 말들 해 보시오!”

    군중은 괴괴했다. 사회자가 다시 다그쳤다.

    “여러분, 어떠시오?”

    이 대목에서 ‘옳소’와 함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와야 될 듯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30초는 지났을 듯 같았다. 그래도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까 사회자가 다시 재촉했다.

    “여러분 어떠시오!”

    사회자의 재촉을 받고 맨 앞줄에 서 있던 깡마른 청년이 조그맣게 소리쳤다.

    “좋소!”

    그러면서 그는 손바닥을 두들겼다. 팔봉이 얼른 그를 봤다. 그는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있었고, 와이셔츠 없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팔봉은 누가 좋다고 사형에 찬성하는가를 남의 일처럼 지켜보며 숫자를 헤아려 봤다.

    그가 “좋소”하고 말문을 터 줘서 그런지 주위에 있던 40∼50명이 박수를 쳤다. 박수소리에 묻혀 “옳소!”하는 소리도 들렸다.

    팔봉은 침착하게 또 생각했다.

    ‘500명 중에 50명이면 십분의 일이 찬성했는데도 나는 인민의 이름으로 죽는구나.’

    팔봉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역시 파랬다. 아름다웠다. 그는 기도했다. 깨끗하게 죽자고.

    “미워하지 말자. 원망하지 말자. 탓하지 말자….깨끗하게 죽자”

    어디선가 이런 소리가 들렸다.

    “총탄도 아깝다. 때려 죽여라!”

    이 소리가 들려온 건 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오효진, ‘실화소설’ 김팔봉과 인민재판, [월간조선] 2010년 6월호

    “송종섭은 인민을 착취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앞에서 언급한 송종섭 석방 진정서를 살펴보자.

    이 진정서는 1950년 9월에 작성된 것이다. 한 장의 종이에 송종섭의 석방을 청원하며 마을 주민 4명이 쓴 것으로, 4명의 진정인 이름은 순서대로 이희섭 이영국, 은성섭, 리종녹이다. 이 진정서가 들어있던 편지 봉투도 같이 수집되었는데, 그 봉투에 적혀 있는 수신자는 ‘이요섭’으로 되어있다.

    이 진정서의 배경이 되는 지역 정보는 진정서나 봉투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당연히 1950년 9월 기준으로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38도선 이남으로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낙동강 전선 위쪽으로 범위를 크게 잡을 수 있으나 정확한 지역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자료를 필자가 수집할 때 판매자의 주소가 전라북도 순창군이었으므로, 그 지역에서 처음 수집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판매자에게 이 진정서의 출처 정보를 더 자세히 확인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자료는 전라북도 순창군 일대에서 벌어진 일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최소한 전라도 지역이라고 하면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 잠정적으로 이 자료에 관한 다음의 설명은 순창 지역이라고 가정하고 쓴 것임을 밝혀 둔다.

    이 진정서가 작성된 시점은 언제쯤이었을까?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대략 석 달이 지난 9월 15일이면 인천 상륙작전이 전개되고 9월 28일에 수도 서울이 수복되므로, 이 진정서가 작성된 시점은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기준으로 그 이전이 될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반전되고 인민군은 곧 철수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정세가 급박했던 9월 하순보다는 9월 상순을 진정서의 작성 시점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제 진정서의 내용이다. 순한글체로 세로쓰기한 이 진정서는 옛글들이 그렇듯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사진] 1950년 9월 이희섭 등 4명의 이름으로 작성된 진정서이다. 이 진정서에서 그들은 촉진대 부대장이었던 송종섭의 석방을 청원하고 있다. (박건호 소장)

    “진정서

    우(右) 진정하고자 하는 일은 본 부락 송종섭(宋宗燮)은 천성이 인후하여 추호도 인민을 착취하거나 악질적 행동을 한 일이 없는 양심적 인물인바 주위 환경의 부득이한 일로 촉진대 부대장에 투명은 하였으나 우리 인민 동무를 성의껏 구호하는 동시에 절대로 인민의 원한을 사거나 악덕행위는 없었습니다. 금차(今次) 해방이 되어 삼천리 강산에 광명한 빛이 비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이 광명 명백한 때에 위와 같은 선한 양민을 하루라도 속히 석방하여 주심을 삼가 바라나이다.

    1950년 9월 일

    진정인 이희섭 이영국 은성섭 리종녹”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 뒤인 1950년 9월이었다. 위 진정서에 따르면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반동분자로 지목된 송종섭이 좌익들에 의해 끌려갔다. 인민군이 직접 끌고 갔다기보다는, 대한민국 정부 시기 지하에서 활동하던 그 지역의 좌익 활동가들이 그들의 표현대로 이 지역이 ‘해방’되자, 남로당 순창지부와 순창군 인민위원회를 복구한 후 ‘악질반동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송종섭을 찾아왔을 것이다.

    당시 ‘반동분자’를 색출하여 잡아들이는 일은 담당한 것은 각 지방 인민위원회 산하의 경찰기구인 내무서(內務署)라는 조직이 담당하였는데, 순창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자주 그려졌듯이 군복 비슷한 제복에 푸른 완장과 푸른 띠를 두르고 둥근 모자를 쓴 내무서원은 권총을 들었을 것이고, 같이 온 죽창이나 몽둥이로 무장한 여러 명의 인민위원회 소속의 젊은이들이 송종섭을 협박하다시피해서 끌고 갔을 것이다. 송종섭이 끌려간 것은 진정서에 나오는 ‘촉진대 부대장’이라는 직책을 통해 보건대, 전쟁 이전에 했던 우익 청년단체 활동 때문으로 보인다.

    송종섭은 우익 청년단체인 촉진대의 순창 지부의 부대장으로 활동했던 경력 때문에 ‘반동분자’로 몰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이 촉진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지, 아니면 진정서의 내용대로 ‘투명(投名)’ 즉 그저 이름만 올리고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자료들을 찾아보면 이 촉진대라는 단체는 당시 대중들에게 큰 민폐를 끼쳤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촉진대는 서북청년단, 광복청년회(광청), 정의단과 함께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대표적인 우익 청년단체로 좌익이나 일반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 활동을 자주 벌여 문제가 되던 단체이다. 그 정도가 꽤 심했던지 전쟁 전인 1947년 경무부장 조병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테러) 사건을 주모주동하야 사회 안녕 질서를 교란하는 청년단체는 단호한 해산 명령을 발포할 방침이다. 무질서한 혼란기를 기회로 하야 촉진대와 같은 청년단체가 협박 공갈하야 금품강요를 하는 행동을 하야 민간에 폐해를 끼친 예가 수 건(件)이 있는데, 이의 불법 행동을 수사 중이며 적발 되는대로 곧 엄중 처단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6월 6일 기사, ‘남조선 ‘테로’ 진상’ 중

    [사진] 촉진대 등 우익 청년단체들의 문제점을 보도한 동아일보 1947년 6월 9일자 신문. ‘남조선 테로 진상’는 제목 아래 ‘주모 단체는 해산을 명령… 협박·공갈·금품강요는 엄벌’이라는 부제도 보인다.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자료)

    ‘창씨개명’되는 용어들

    이 진정서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 진정서를 쓴 인물들이 쓴 용어들 중에는 남한 사람들이 잘 쓰지 않던 용어들이 있다는 점이다. ‘인민’이라는 말을 3번, 동무라는 말을 1번 쓰고 있다. 북한에 의해 남한이 점령된 상황을 표현한 것도 ‘침략’이라는 우리식 표현이 아니라 ‘해방’이라는 북한식 표현을 쓰고 있다. 또 진정서의 마지막에 쓴 진정인 4명의 이름 중에 이씨가 3명인데, 2명은 ‘이’라고 썼는데, 한 명은 특이하게 ‘리종록’이라고 하여 성을 ‘리’로 표기하고 있다. 세 명이 다 같이 ‘리’로 행동 통일을 하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전시의 혼란상은 그들의 용어 사용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용어 하나 때문에도 죽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 6.25전쟁 기간에는 쓰는 용어 하나에도 사람들의 생명이 오갔다. 어떤 말을 쓰는 가에 따라 ‘빨갱이’가 되기도 ‘반동분자’가 되기도 하였다.말이 곧 생명이었다. 누가 이 땅을 점령하는가에 따라 용어들도 그에 따라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당시 이와 관련된 상황을 그 시대를 기록한 일기나 소설 속에서 살펴보자. 직접 관찰한 자들의 목소리가 더 생생하지 않겠는가?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서울에서 90일간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살았던 역사학자 김성칠의 일기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김성칠은 전쟁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이런 일기를 남기고 있다.

    “집에 오니 아내가 몹시 억울해하는 표정으로 “세상에 이럴 법이 다 있소”하고 한탄한다. 왜 그런가고 까닭을 물으니, 오늘 낮에 정숙이가 반장 집 가게에 가서 다마네기를 달랬더니 “다마네기가 다 무어냐. 그런 말 쓰려거든 일본으로 가거라. 반동분자네 집 아이가 다르다”하여 이것이 또 듣고만 있지를 못하고 “반동분자가 뭐 택혼가. 우리 집이 왜 반동분자여”하고 말대꾸를 하여 한동안 부산했다는 것이다.”

    – [역사앞에서], 1950년 7월 25일자 일기 중

    ‘다마네기’ 하나가 사람 잡을 뻔 했다. 모두 예민해져 있었고,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시대였다. 따뜻한 마음과 관용은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개인적 원한이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거칠게 표출되었다. 며칠 뒤인 8월 1일자 일기에서는 자신의 동료 유열이 ‘류렬’로 이름이 창씨개명하게 되었다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랄 알타이 어계족에 있어선 첫 음절에 있어서의 ‘ㄹ’ 발음이 나지 않는 것인데, 이북에선 로동자, 리승만이라 쓰고 있다. 문법책에는, 쓰기는 그렇게 쓰더라도 읽기는 노동자, 이승만으로 읽으라 하였으나 평안도 사투리는 곧잘 로동자, 리승만으로 발음하고, 또 심지어 우리가 노동자, 이승만이라 하면 반동이라고 욕한다. 언제까지나 괴뢰의 구습을 버리지 못한다고.

    ‘반동’이란 레테르 하나 때문에 적어도 남의 앞에선 ‘리승만’이라 하여야겠고 그게 싫으면 어두(語頭)에 ‘ㄹ’음이 붙은 말은 안 쓰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 [역사앞에서] 1950년 8월 1일자 일기 중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식 표현은 점차 대중들의 용어로 자리 잡아 갔다. 대표적인 표현이 ‘인민’과 ‘동무’라는 표현이다. 김원일 소설 [불의 제전]의 한 대목이다. 여기에서는 ‘동무’와 ‘인민’이 어떻게 6.25 전쟁기 남한 사회에 쓰이게 되는 지를 잘 보여준다.

    “바깥세상에서는 ‘동무’란 새로운 말이 거침없이 나돌았다. 해방 직후까지도 널리 쓰던 말이었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동무란 말을 쓰면 빨갱이로 몰려 치도곤을 당했는데, 이제 그 말이 응달에서 양달로 나와 그 동안의 한풀이라도 하듯 말끝마다 입에 올려졌다. 어린이 동무, 청년 동무, 노인 동무, 김동무, 리동무, 이렇게 사람을 부를 때마다 무조건 동무란 말을 붙였다. “계급 없는 사회의 한 형제자매이므로 우리는 모두 동무 사이요.” 이런 정의가 내려지고부터 시민들도 남 듣는 자리에서는 어눌하게나마 그 말을 따라 썼다. ‘인민’이란 말도 그랬다. 호칭으로는 동무란 말을 썼으나 삼인칭으로 쓸 때는 시민·사람·인간·군중·대중이란 말 대신 두루뭉술 인민으로 불렀다.”

    -김원일, [불의 제전] 중, 문학과 지성사

    위의 송종섭 진정서에 나왔던 ‘동무’와 ‘인민’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이런 표현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그런데 4명의 진정인들은 이런 북한식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던지 넷째 줄에 “인민 동무”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도 쓰고 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세상이 바뀌면 또 말의 운명도 바뀌는 법. 대중들은 또 새로운 용어에 적응해야 했다. 국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다시 옛 땅을 수복하면, 대중들은 적의 용어들을 버리고, 기존의 용어들을 다시 사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사상을 의심받게 된다. 김성칠의 일기 1950년 10월 17일자 일기는 서울 수복 후의 이런 상황을 담고 있다.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으면 생존이 위협받던 시대였던 것이다.

    다시 송종섭 진정서 이야기.

    송종섭이 잡혀가자 그의 아내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을 것이다. 그대로 있다가 인민재판에 넘겨지는 날이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일단 순창군 인민위원회의 간부인 이요섭에게 석방을 호소할 작정이었다. 이를 위해 이요섭과 친척 관계에 있는 이희섭과 그 외 마을 어른 몇몇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하소연하였다. 이 진정서가 담긴 편지 봉투에 쓰인 ‘이요섭’이라는 인물은 송종섭의 석방 여부를 결정할 수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아마 순창군 인민위원회의 간부쯤이었을 것이다. 내무서 간부였을 수도 있겠다.

    ‘요섭’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Joseph)’을 본 따 지은 것으로, 흔히 기독교 집안에서 많이 쓰는 이름이다. 이요섭은 분명 기독교 집안 출신의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원래 북한 지역 출신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원래 이 순창지역 출신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진정인 네 명 중 제일 앞머리에 쓰인 ‘이희섭’과 성과 돌림자가 같은 것을 통해 친척관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요섭은 이 순창 출신으로 전쟁 전 월북했다가 전쟁 발발 후 고향 순창에 ‘금의환향’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쟁 전 좌익 활동을 하다가 탄압을 피해 지리산 등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중 인민군이 이 지역에 들어오자 지하에서 나와 이 지방 인민위원회의 간부로 활동하게 되었을 것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사진] 송종섭을 석방해 달라는 진정서가 들어있던 봉투이다. 봉투 위에 ‘이요섭(李垚燮)’의 이름이 보인다. 이 이요섭은 진정인의 첫 번째 인물인 ‘이희섭’과 성과 항렬이 같은 것으로 보아 친척 관계로 보인다. 이렇게 친인척이나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는 ‘줄’은 송종섭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박건호 소장)

    송종섭의 아내는 이요섭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이희섭과 그 외 마을 어른 몇몇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송종섭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런 특별한 ‘줄’뿐이었다. 당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절이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만인이 만인을 불신하는 시대. 그것이 전쟁이었다. 대중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그때그때의 정세 변화에 따라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었다. ‘운’과 ‘줄’에 의해 사람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우리 사회의 기회주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김성칠의 1950년 8월 16일자 일기에는 당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운에 달린 것임을, 또 당시 생존을 위해서 ‘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송종섭의 부인이 왜 ‘이요섭’의 친척으로 보이는 ‘이희섭’을 찾았는지, 그리고 진정인 4명 중 왜 이희섭을 제일 앞에 내세웠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세상이란 참 우스운 것이다. 나는 별반 죄지은 기억이 없고, 또 아무도 나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이 없건만, 나는 공연히 겁을 내어서 세상을 비슬비슬 피해 다니는 못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떠한 한계의 사람이 반동으로 몰리는 것인지, 또 몰리면 어떠한 경로를 밟아서 어떠한 처단을 받는 것인지? 이런 것이 모두 분명치 아니하고 정치의 필요에 따라, 또 더러는 그 많은 끄나풀들의 감정 여하에 따라 아무라도 언제든지 반동으로 몰릴 수 있는 것이며, 또 한 번 몰리고 보면 그때그때의 객관적 정세의 변동 여하에 따라, 또 더욱 불안스런 것은 국(局)에 당(當)한 사람의 판단이랄까, 좀 더 나쁘게 말하면 기분 여하에 따라 어떻게라도 처단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불안을 자아내는 별별 소문이 돌고 있다. 더러는 대한민국 시절에 상당히 날치던 사람들도 아직은 아무런 일 없이 지나고 있는데, 그러가 하면 참으로 애매하다 싶은 사람들이 많이 경을 치고 허망하게 총살을 당하고 한다. 그러니 특별한 줄이라도 닿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공포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역사앞에서], 1950년 8월 16일자 일기 중

    송종섭의 아내는 남편이 특별히 주변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괴롭힌 사실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진정서를 써 줄 것을 빌었을 것이다. 우리는 송종섭이 촉진대 부대장으로 실제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 네 명이 연서로 진정서를 써 준 것으로 보아 특별히 나쁜 일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런 진정서를 써 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이다. 당시는 전시였으므로 진정한 일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그들의 목숨 역시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송종섭의 아내가 부탁한대로 진정서를 작성했다. 인민군이 순창지역을 ‘해방’시켜 광명이 비쳤다는 식의 듣기 좋은 표현도 적절히 섞었다. 전쟁이 일어난 지 석 달을 넘기고 있었다. 낙동강 밑으로 밀려난 국군과 유엔군이 언제 반격을 해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지 미래는 너무도 불투명하였다.

    송종섭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진정서의 뜻이 받아들여져 그는 석방되었을까?

    아니면 인민재판을 통해 ‘인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어갔을까?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서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송종섭의 운명도 궁금하지만, 이 진정서 자체가 던져주는 궁금점도 크긴 마찬가지이다. 이런 특이한 전시(戰時) 자료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흘러흘러 전해졌을까?

    이 진정서는 이요섭에게 제출되었다가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버려진 것일까? 아니면 인천상륙작전 직후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자료를 소각할 때 다행히 살아남은 것일까? 아니면 이요섭이라는 인물에게 제출이 되기는 했던 것일까? 제출하려고 만들긴 했는데 괜히 송종섭을 변호했다가 같이 인민의 적으로 몰릴까봐 결국 제출하지 못한 채 누군가의 책상 속에서 수십 년간의 잠을 자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네 명의 진정인 중 세 명의 이름 밑에는 도장이 찍혀 있는데, 세 번째 인물 은성섭의 이름 밑에는 왜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일까? 세 명이 도장을 찍고 미처 도장을 준비하지 못한 은성섭에게 마지막으로 날인하여 내무서의 이요섭에게 제출하라고 했는데, 은성섭이 차마 이것을 제출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다시 ‘인민재판’을 운운하는 자들 누구인가?

    전쟁이 끝나고 60년도 훨씬 지났다. 6.25전쟁은 한반도의 모든 한국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제는 그 전쟁을 끝내려는 ‘훈풍’이 불고 있다. 비록 중간중간에 시련들이 있겠지만 이런 시대적 대세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기억의 심연에 잠들어있던 ‘인민재판’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불러 일으켜 세우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유한국당과 소위 ‘태극기부대’로 불리는 극우 세력들과 일부 보수 언론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인민재판’의 사례들을 살펴보자.

    사례1. 2019년 1월 24일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조갑제닷컴에 쓴 글

    “대법원의 법적 판단은 개념 법학적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합목적성, 사회정책성, 국가 목적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내리는 판결입니다. 대법원의 정책, 판결을 두고도 사법 적폐라고 몰아붙여 전직 대법원장을 구속하는 촛불 혁명정권이 되었습니다. 보수우파 출신 전직 두 대통령을 인민재판식으로 몰아붙여 구속, 영어(囹圄)의 몸이 되게 한 정권이 아직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전직 사법부의 수장(首長)도 적폐로 몰아 인민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홍준표, 2019.1.24, 조갑제닷컴

    사례2. 2019년 3월 11일 전두환 씨의 연희동 집 앞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지법 재판에 출석하는 날, 연희동 자택 앞에 모인 전씨 지지자들은 광주 재판은 인민재판이라고 주장하며 전두환씨의 광주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그들은 ‘5.18은 폭동·내란’ 등 문가가 적힌 피켓을 들고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 조서를 공개하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사진] 2019년 3월 11일 광주지법에서 열리는 재판 출석을 위해 전두환 씨가 광주로 떠나는 날, 보수단체 회원들이 전두환 씨 집 앞에서 전두환 씨의 재판 출석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속 차량 위 남성이 들고 있는 종이에는 “문재인 정권 인민재판 규탄한다”는 구호가 적혀있다. (오마이뉴스 2019.3.11, 정대희 사진)

    이들은 이런 식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재판들에 대해 ‘인민재판’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지금의 재판은 인민재판과 달리 한 번에 끝나지도 않고, 변론의 기회도 있다. 게다가 대중 공개 재판도 아니다. 지금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고 있는 재판은 대한민국 헌법적 질서에 근거하여 지극히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절차에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보수우파들이 대한민국 헌법적 질서에 기반한 이런 정상적인 재판을 경우에 맞지 않게 ‘인민재판’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구시대의 ‘색깔론’으로 상대편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것이다.

    그들이 전직 대통령들이나 전직 대법원장의 재판에 대해 ‘인민재판’이라고 규정해버리는 대전제는 대한민국이 소위 ‘종북 좌빨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한국은 ‘좌파 빨갱이’들이 지배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전직 대통령과 전직 대법원장에 대한 재판도 인민재판이라는 논리이다. 이들의 시각은 매우 편협하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있다. 극우의 시각으로 보면 자신의 왼쪽에 있는 자들은 다 빨갱이고, 다 적인 것이다. 아무리 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이미 대법원에서의 판결이 난 사안이라도 그들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빨갱이들인 것이다. 참으로 손쉬운 논리다.

    자기들만이 절대선이며, 여기에 반하는 생각과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논리. 그런 식의 색깔론으로 대한민국 현실을 보고자하는 것이 소위 ‘태극기부대’이고, 한국의 제1야당이라는 자유한국당도 최근 노골적으로 여기에 편승하고 있다. ‘태극기부대’의 주장은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소위 대한민국의 수권정당을 자임하는 제1야당이 이런 외눈박이 인식을 가지고 집권을 꿈꾼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집권하면 다수의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겁박하고 탄압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보수우파세력들의 최근 막말 퍼레이드를 보자. 이들의 주장은 1회성의 우발적 발언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발언과 주장을 듣다보면 이것이 2019년 대한민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짐승만도 못한 저 종북 주사파 정권을 처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괴 문재인 역시 민족 반역자로 처단해야 합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청년 최고위원 후보 김준교 발언)

    “우리 자유한국당이 싸워 이기는 정당이 되게 하기 위해서 첫 번째 과제는 좌파 독재 저지 투쟁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9년 3월 4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최고위원회의 발언)

    “반민특위는 이승만이 해체한 것이 아니라, 불법적 공권력을 행사하고 남로당 지령을 받은 반민특위 국회 프락치들이 국가안보를 위협했다가 국회에서 해체됐다.”

    (2019년 3월 16일 한정석 [미래한국] 논설위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

    “70년 위대한 역사가 좌파정권 3년 만에 무너지고 있다….한미동맹은 붕괴되고 자유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문재인 정권의 경제정책은 위헌….강성노조 등의 촛불청구서에 휘둘리는 심부름 센터…국민 머릿속까지 통제하는 문브라더….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선거제를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것은 사상 초유의 입법 쿠데타이면서 헌정 파괴이다…해방 후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다….”

    (자유한국당 원내 대표 나경원 의원의 최근 발언들)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이 뭘 어떻게 했는지 알 리가 없다…광주 교육도 질서 속에 유지돼야 한다. 아이들은 그 어떤 집단의 전위 세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장, 교감, 담임이 사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교육공무원법, 초중등교육법 등이 정한 위반 사항에 따라 고발하겠다. ”

    (전두환 씨의 광주지법 출석 시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친 초등학교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연 극우단체의 주장)

    지금 이들은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다 헌정 파괴이고, 좌파이고 빨갱이고, 인민재판으로 규정하고 있다.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정치 행위와 재판에 대해 빨갱이, 좌파독재, 인민재판이라는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 질서를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국민과 대한민국을 모독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국민을 심각하게 분열시키는 행위이다. 태극기부대와 심각하게 극우화되고 있는 자유한국당에게 지금 진정 헌정 질서를 부정하고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묻고 싶을 따름이다.

    전두환식으로 말하면,

    “이거 왜 이래!”

    <사족>

    이들의 상식과 동떨어진 주장을 듣다보면, 너무나 황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들이 자기의 이념과 신념에 충실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 인식에 심각한 장애가 있거나 난독증 환자가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자하는 확증 편향 말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가 쓸모없다는 것이다. 하도 말이 안 되는 지라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번역기가 필요할 듯하다. 왜 저들이 저런 주장을 하는 것인가하는 논리의 회로도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몇 가지 사례를 가지고 번역기를 돌려보자.

    [팩트1]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편의대’라는 비밀특수부대를 운용하여 시민과 시위대를 이간질하고 각종 증거를 수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편의대’란 군인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위장하여 주민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첩보, 정보수집과 선무 선동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임시특별부대를 말한다. – [광주in]기사 2019년 3월 14일 기사 중

    → [그들의 인식] “광주”, “특수부대”?

    5.18은 광주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해 일으킨 폭동이었다.

    [팩트2]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에서 시위대가 인민재판을 시행하고, 무장투쟁 장기화를 위해 폭도 2천여명이 산악지대로 도주했다는 거짓 정보를 미국에 흘렸다. 또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독침사건 등 공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등 북한의 남침 징후가 있다고 퍼뜨렸다. 미국 정부 문서를 번역해 이러한 내용을 확인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연구진은 전두환 신군부가 위기 상황을 부각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는 발판으로 이용하려 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2018.8.20. 기사 중

    → [그들의 인식] “전두환”, “광주”, “인민재판”, ‘폭도’ ?

    전두환 전 대통령을 광주의 재판정에 세우는 것은 인민재판이다. 광주는 폭도들이 일으킨 내란이자 폭동이다.

    [팩트3]

    영국 BBC 로라 비커 기자는 2018년 3월 9일자 기사에서 “누구와 이야기 하느냐에 따라 남한의 지도자 문재인은 외교적 천재이거나 자신의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이고,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벼랑 끝 작전의 달인이거나 훨씬 기만적인 게임의 졸이다”라고 썼다.(South Korean leader Moon Jae-in is either a diplomatic genius or a communist set on destroying his country and US President Donald Trump is either a master of brinkmanship or a pawn in a more devious game – depending on who you speak to)”

    → [그들의 인식] “문재인”, “공산주의자”?

    조선일보는 2018년 3월 12일자 기사에서 “BBC는 문 대통령에 대해 “‘외교의 천재’ 또는 ‘나라를 파괴하는 공산주의자’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도 “‘벼랑 끝 작전의 달인’ 또는 ‘카드게임의 졸(卒)’ 중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고 보도하였다.

    [사진] 로라 비커 BBC 한국 특파원은 2018년 3월18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조선일보의 오역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친애하는 한국 언론이여, 제발 제 기사를 공정하게 번역해달라”며 그녀는 “북한과의 대화라는 정치적 도박에 관한 나의 글에서, 일부 보도에서처럼, 나는 문 대통령이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국 보수 언론들의 외신 번역 기사들은 사실을 전달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희망과 의도를 표현하는 것인지 구별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소개
    역사자료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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