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군, 산둥에서 반격의 서막을 열다
[국공내전⑰] 라이우 전투의 승패를 가른 요인들은?
    2019년 03월 14일 02: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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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국공내전⑯ 만주에서 일진일퇴”

천이, 장제스가 인정한 인물

국공내전 초기 해방군 작전지역은 크게 나누어 다섯 군데였다. 린비아오가 지휘하던 동북지역, 내룽전과 허룽이 지휘하던 화북지역, 천이와 쑤위가 함께 지휘하던 화동지역, 그리고 류보청이 지휘하던 중원지역, 마지막으로 공산당 근거지를 지키던 펑더화이의 섬북지역이었다.

섬북은 워낙 궁벽진 곳에 있어 아직 내전의 불길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정부 시안 수정공서 주임인 후쫑난이 전투준비를 마치고 호시탐탐 옌안을 노리고 있었다. 후쫑난은 내전이 시작된 직후 1946년 7월, 산시성의 옌시산과 함께 산시성 남부 해방구로 진격했다. 20만 대병을 동원하여 천겅이 지휘하던 타이웨(太岳) 종대를 해치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을 집중하여 각개 섬멸하는 천겅의 작전에 말려들어 2개 여단을 잃고 두 명의 여단장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다.

천겅의 지휘방침은 마오쩌둥에게 전해져 “네 배나 다섯 배의 병력으로 적을 각개 섬멸하라.”는 지침이 되어 전군으로 확산되었다. 천겅은 종대 사령원이었지만 용맹하고 민첩한 지휘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해방군 지휘관 가운데 장제스가 인정한 인물은 천이였다. 지략이라면 류보청, 지와 용을 겸비했다고 하는 쑤위, 주력 중의 주력을 지휘하던 린비아오를 두고 왜 천이를 가장 대적하기 어려운 장수로 꼽았을까?

장제스의 우환거리

신사군 시절부터 장제스는 천이를 두통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환남사변 때 신사군을 공격하여 섬멸적인 타격을 주었는데 끝내 재건해내었기 때문일까, 그는 줄곧 천이의 부대를 중요한 공격 목표로 삼고 있었다. 장제스의 예측은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내전이 폭발한 지 1년 뒤 국민정부군은 71만명을 상실했다. 그중 산둥에서의 손실 규모가 가장 컸다. 장제스는 차츰 전면공격에서 중점공격으로 선회하였다. 병력 소모가 너무 커서 동원할 수 있는 부대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점령한 도시를 모두 수비해야 하는 국민정부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거기에 비해 해방군은 신축성 있게 움직였다. 전황이 불리해지면 해방구의 중심도시일지라도 미련 없이 후퇴하였다.

1947년에 이르러 장제스의 중점 공격목표는 천이와 쑤위가 수비하는 화동지역과 옌안이 있는 섬북지역이었다. 옌안은 공산당의 정치중심이어서 상징성이 컸다. 그곳을 점령하면 공산당은 위신에 커다란 타격을 입을 것이며 심리적으로 와해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천이와 쑤위가 지휘하던 화동지역을 쓸어버리면 공산당으로서는 주력 중의 주력을 잃는 셈이었다. 본래 쑤위는 장쑤성에서, 천이는 산둥성에서 각각 활약하였지만 47년 1월 중순 화동 야전군으로 개편하며 하나의 부대가 되었다. 천이가 사령원, 쑤위가 부사령원을 맡았다. 지난번 산둥 남부전투에서 두 부대의 합동작전이 큰 효과를 발휘하자 아예 한 부대로 통합한 것이다.

장제스는 천이와 쑤위의 부대를 공격하는 데 20만명의 대병을 동원했다. 그중 11사단과 74사단, 그리고 제 5군은 장제스 부대 중 5대 주력이라 일컫는 정예 중의 정예였다. 5대 주력 중 세 개의 부대를 산둥 공격에 동원한 것이다. 공격부대 20만명에 현지 주둔부대를 합하면 모두 45만명이 작전에 참여하는 셈이었다. 장제스는 총지휘를 육군 참모총장인 천청에게 맡겼다. 장제스는 자신이 쉬저우 지휘부에 와서 병력 배치를 하는 등 승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직접적인 작전지휘는 천청에게 맡겼는데 천청은 쉬저우 사령부에서 부대를 통일지휘하기로 하였다. 국군은 19군 군단장 어우쩐(歐震)이 8개 사단 20개 여단 병력으로 남쪽 돌격 집단군을 지휘하였다. 북쪽 전선에서 밀고 내려올 쉬저우의 제 2수정구 병력과 함께 해방군을 남북 협격하여 섬멸할 계획이었다. 장제스는 분할하여 각개 섬멸하는 해방군의 전술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부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차근차근 전진하라.‘는 방침을 하달했다. 한걸음씩 밀고 들어가 병력과 장비의 우세로 결전을 하려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1947년 2월 19일 난징의 장교 훈련연대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현재 관내 공산군은 대략 5개 단위로 나눌 수 있다. 그 부대 중 천이의 부대가 가장 강력하다. 훈련도 가장 잘되어 있으며 흉계도 가장 잘 꾸민다. 이것들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한다.” 장제스는 이번에 이 두통거리를 깨끗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다. 국민정부군은 전투를 시작한 뒤 공세를 통해 이미 장쑤 남부를 탈환했으며 산둥 해방구 중심도시인 린이를 점령하였다. 장제스는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이렇게 말하였다. “천이는 이미 소굴을 잃었다. 섬멸할 날이 멀지 않았다.”

옌안의 대응은 유인과 지연전이었다. 중앙군사위원회는 1월 31일 “적을 깊이 유인하라. 적을 늦게 공격할수록 좋다. 필요하면 린이도 과감하게 포기하라. 그러면 승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천이와 쑤위는 산둥 해방구 수도인 린이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태산 부근의 라이우(萊蕪)에서 국민정부군 보조 돌격집단군 리셴저우 부대를 포위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해방군 화동군구 병력은 총 30만명이다. 장쑤 북부 수비를 위해 남겨둔 2개 종대를 제외하면 작전에 쓸 수 있는 병력은 27만명이었다.

빨간 표시 부분이 라이우. 바로 밑에 린이가 보인다. (구글맵)

천이와 쑤위는 장제스의 기대를 철저하게 깨뜨렸다. 2월 23일 정오, 해방군은 산둥성 라이우(萊蕪)에서 국민정부군을 갑자기 기습했다. 천이와 쑤위의 화동야전군 부대는 삽시간에 국민정부군을 대파하고 내전 이래 가장 큰 승리를 얻었다. 이 전투에서 국민정부군 17개 보병연대, 총 5만 6천명이 섬멸되었다. 해방군 사상자는 8,800여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국민정부군 제2수정구 부총사령인 리셴저우(李仙洲)와 73군 군단장인 한준(韓浚)이 포로로 잡혔다. 겨우 다섯 시간이 걸린 전격적인 섬멸전이었다.

국민정부군이 이렇게 단시간에 대패한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천청계와 허잉친계 사이에 파벌 다툼이 드러났다. 본래 산둥성에서 국민정부군을 총지휘했던 인물은 산둥성 성도인 지난에 자리잡고 있는 왕야오우(王耀武)였다. 그는 산둥성 타이안(泰安) 출신의 항일 명장이었다. 왕야오우는 과거 홍군과의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차례 승리한 일이 있었다. 일본군과의 수많은 전투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를 거둔 공적이 있었다. 그는 해방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드문 인재이며 총명한 인물”로 꼽히고 있었다. 하지만 허잉친계로 분류되는 바람에 천청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리센저우가 휘하부대를 이끌고 라이우로 돌격할 때 왕야오우는 복병을 우려했다. 해방군이 라이우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파악한 그는 리센저우에게 돌격을 멈추고 전선을 수축시키라고 명령했으나 천청은 계속 돌격할 것을 지시했다.

장제스 쑹메이링과 함께 한 천청. 오른쪽 두번째

왕야오우

해방군이 린이를 포기하자 천청이 보기좋게 걸려들었다. 린이를 점령한 국민정부군 부대장들은 장제스,천청에게 “린이를 수비하던 공산군 16개 여단을 섬멸했다.”고 거짓보고를 했다. 또 공군 정찰기가 인민해방군이 운하 위에 있는 것을 보고하였다. 그에 따라 장제스와 천청은 화둥 야전군이 린이를 포기한 것은 “사상자가 많아 다시 싸우기 힘들어서”라고 판단했다. 장제스와 천청은 리셴저우 집단군에게 속도를 내어 남진하라고 명령했다. 가능한 빨리 남북으로 협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역사령관인 왕야오우의 명령이 통할 리가 없었다. 리센저우도 첩보를 믿고 무모하게 돌격하다가 자루 모양으로 포위망을 형성한 해방군의 매복에 걸려 들었다. 이미 준비를 마친 대병력으로 갑자기 공격하니 국민정부군은 순식간에 대열이 흐트러지고 지휘체계가 마비되었던 것이다.

공산당 비밀당원, 46군단장 한롄청(韓練成)

리센저우 집단군이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순식간에 궤멸당하고 두 명의 군단장이 포로로 잡힌 데에는 다른 원인도 있었다. 리센저우 집단군에서 군단장을 맡고 있던 한렌청이 전장을 이탈하며 지휘를 포기했던 것이다. 한롄청은 부대의 철수를 최대한 늦추다가 경호부대와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집단군 세 개 주력 가운데 한 개 부대가 무력화되고 우왕좌왕하니 혼란이 전체 부대에 파급되었던 것이다. 한롄청은 공산당이 적지에 심어둔 4대 장군의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즉 숑샹후이(熊向晖) 궈루구이(郭汝瑰), 첸좡페이(钱壮飞)가 그들인데 모두 국민정부 핵심부에서 활약하며 공산당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중 한롄청은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로부터 “부친 신변에 가장 오래 숨어있던 간첩”이라는 평을 들었다.

한롄청. 국군 내부에서 해방군과 내통하였다.

한렌청은 과거 장제스의 목숨을 구해준 일이 있었다. 1930년 펑쉬샹과 옌시산이 연합하여 장제스에게 대항한 중원대전 때 한롄청은 장제스 휘하의 연대장이었다. 그때 장제스는 국민정부군 총사령관으로 허난성 상추(商丘)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펑위샹의 기병부대가 상추역 열차에 설치한 장제스의 행영(이동 지휘소)을 기습하여 철통같이 포위했다. 그때 무전을 들은 한롄청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달려와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었다.

장제스는 감동하여 한롄청에게 물었다. “위급한 것을 보니 목숨을 아끼지 않는구나. 충성과 용기가 본받을 만 하다. 자네는 황푸 몇기인가?” “….” 한롄청은 황푸 출신이 아니었다. 그러자 장제스는 “자네를 황푸 3기를 졸업한 것으로 하고 학적에 넣어 두도록 하겠다.” 이야기했다. 국민정부에서 황푸 출신이라면 성골로 치며 출세가 보장된다. 장제스가 직접 학적에 넣어 주었으니 황푸 출신 장교들도 부러워하며 그를 동창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 후로도 장제스는 한롄청을 보기만 하면 즐거워하여 승진을 시키는가 하면 장려금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롄청은 장제스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 1933년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성에서 한롄청이 장제스에게 일본군과 싸우기를 극력 간청하자 “자네는 정치를 모른다.”는 차가운 대답을 들었다. 충칭과 구이린에서 한렌청은 국민당의 파벌 다툼을 보며 혁명이 이미 식었다고 생각했다. 한렌청이 보기에 중국 공산당만이 혁명정신에 투철할 뿐 아니라 항일을 견지하고 있었다.

1943년 6월 한롄청은 무당파 인사의 소개를 거쳐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경력과 정치관, 혁명관을 피력하고 공산당에 입당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저우언라이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국공합작 기간이다. 공산당원으로 국민당 내부에 있을 수는 없다. 공산당의 동지가 되어 국민당 안에서 활동하라.” 그 뒤로 한롄청은 저우언라이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활동하게 되었다. 한롄청은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절대적으로 따랐을 뿐 아니라 저우가 지목한 왕루어페이(王若飛), 둥비우(董必武), 리커농(李克農), 판한녠(潘漢年)과도 접촉했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인사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비밀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1947년 라이우 전투때 비로소 국민정부군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활약을 하게 되었다. 옌안의 저우언라이가 안배하여 천이와 한롄청을 연결하였다. 천이는 즉시 공작원을 한렌청에게 파견하여 긴밀하게 협의하여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전장을 이탈하게 했던 것이다.

국군 사령원 리센저우는 철수를 결정해야 하는 긴밀한 시기에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나타나지 않는 한롄청을 기다리다 철수시기를 놓치고 우왕좌왕하다 자신도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리센저우는 황푸 1기생이며 항일 명장이었다. 그는 거용관 전투를 비롯하여 쉬저우 전투, 우한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과 용맹하게 싸웠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항일전 영화 ‘남정북전’에도 등장한다. 막다른 골목에 빠져 권총을 빼어들고 “형제들이여, 당과 나라를 위해 하나가 되자.”고 외치는 이가 바로 리센저우이다.

라이우 전투에서 그는 성을 고수하려고 하였다. 성벽이 높고 튼튼하여 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만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야오우는 철수하라고 명령하여 그는 고심을 거듭했다. 공산당의 지침을 받은 한롄청도 극력 철수를 주장하였다. 그래야 이동 중에 포위망으로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내키지 않는 철수를 하다가 해방군의 포위망에 걸려들었다. 리센저우는 다리에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천청의 무모한 돌격명령과 왕야오우의 철수명령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패망한 것이다.

포로가 된 리센저우는 1973년 특별사면 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때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을 질문했다. “아군 6만 대군이 아무리 하여도 출로를 찾지 못했는데 한롄청 군단장은 어떻게 겹겹의 포위망을 뚫었습니까?” 그때 저우언라이는 웃으며 대답하였다. “한롄청 동지가 지금 베이징에 있소. 당신이 만날 수 있어요.”

리센저우

전투가 끝난 뒤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고위 지휘관 회의는 침울했다. 장제스는 “대병이 옆에 있는데 서로 구원하지 않는다. 투지와 용기가 없으면 병력이 아무리 많아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면서 질타했다. 천청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한롄청에게 화살을 돌렸다. “군단장 두 명이 포로로 잡히고 휘하 지휘관들도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한렌청만 단신으로 탈출했습니다. 엄중히 조사하여 처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롄청은 처벌받지 않았다. 장제스는 한롄청의 직을 거두고 종군하게 하였다. “장수에게 승패는 병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하며 두둔하였다. 여전히 한렌청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한롄청은 1948년 국공간의 다툼이 거의 판가름났을 때 기의했다. 장제스로서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다.

라이우 전투는 국지전이었지만 국민당이 받은 피해가 실로 컸다. 국민정부군은 56,000여명을 잃었으며 산둥에서 주도권을 잃었다. 국민당 안에서 장췬(張群), 장즈중(張治中) 등 고위 인사들이 영향을 받아 국공 간 회담 재개를 주장했다. 미국대사 존 스튜어트((John Leighton Stuart, 1876-1962)도 국공 간에 회담 분위기를 내비쳤다. 하지만 장제스가 그런 주장에 귀를 기울일 리 없었다. 그는 쉬저우 수정 공서 주임인 쉐웨 대신 육군 총사령관 구쭈통을 보냈다. 구쭈통이 쉬저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쉬저우와 정저우 공서를 통일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공산당이 꺼리는 쉐웨 대신 구쭈통이 온 것은 해방군으로서는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공산당은 모처럼의 대첩에 크게 기뻐했다. 옌안 및 동북, 진찰기(산시 차하얼, 허베이) , 진수(산시, 쑤이위안), 진기로예(산시, 허베이, 산둥, 허난) 등 각 해방구에서 경축행사가 열렸다. 밀리던 장쑤 중부의 해방구도 안정을 되찾았다.

산둥성 라이우 전투에서 공산당이 승리한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조직력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공산당은 천이와 쑤위의 두 해방구 부대를 하나로 통일하여 효과적으로 작전할 수 있게 하였다. 천이는 전체 국면을 관장하고 쑤위는 전투지휘를 맡게 한 것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키워온 동조자를 결정적인 시기에 움직여 상대방을 혼란하게 하였다. 한롄청이 결정적인 시기에 역할을 하고도 다시 국민정부로 돌아간 것을 장제스가 알았다면 그 기분이 어땠을까? 한롄청의 내응은 이념과 신념으로 뭉친 집단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라이우 전투가 벌어질 때 류보청과 덩샤오핑의 진기로예 야전군은 안후이성 북부지역과 산둥 서남부로 출동하여 정면의 국민정부군을 견제했다. 라이우 전투를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라이우 전투를 지원하는 공산당 민병들

공산당이 해방구의 인민들을 동원하여 전선 지원에 나서게 한 것도 승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부녀자들은 음식을 해 날랐으며 해방군에 필요한 신발을 지었다. 내전을 다룬 중국 드라마에는 수많은 농촌 여성들이 전병을 부치며 먹을 것을 준비하고 반찬으로 대파를 다듬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천으로 신발을 만들어 해방군에게 제공하는 모습이 나온다. 무기, 식량, 부상병 수송 등 전선지원에 50만명의 인민들이 동원되었다. 민병들은 포로를 감시하고 이동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포로가 너무 많아 심지어 여성 민병들이 총을 들고 감시하기도 하였다.

해방군은 라이우 전투에서 승리하여 오백리에 이르는 자오지 철로를 확보했다. 보하이만 지역도 공산당의 손에 들어와 자오지(칭다오, 웨이하이, 옌타이등 지역)와 함께 해방구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 외에 기록하기 힘든 수많은 무기와 물자를 손에 넣었다. 저우춘(周村) 한 곳에서만 창고 세 개의 군용물자와 100만근의 식량을 얻었다고 한다. 그 외에 해방군은 차량등 장비, 대포, 기관총, 소총, 탄약, 포탄등 엄청난 량의 군용물자를 노획하였다.

국민정부군 지휘부의 판단과 지휘는 졸렬하기 그지없었다. 장제스와 천청 등 수뇌부는 해방군의 린이 포기에 감쪽같이 속았다. 장제스는 장쑤 중부전투부터 줄곧 해방군이 병력을 잃어 다음 작전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오판을 하고 있었다. 국군 지휘관들이 전과를 과장하여 보고하거나 거짓으로 보고하였기 때문이었다. 라이우 전투에서도 “수비군을 모두 섬멸했다.”는 휘하 부대장들의 거짓보고를 믿고 급히 추격하게 나선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국민정부는 공산당이 보유하지 않은 정찰기와 무선전화 등 현대식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정보전에서 한참 밀렸다. 국민정부 곳곳에 숨어있는 공산당 비밀당원들의 활약으로 작전계획이 누설되기 일쑤였다. 공산당 해방구 안에서 작전할 경우 비밀 당조직과 인민들이 국군의 부대배치나 이동상황을 해방군에게 급보하였다.

파벌 다툼으로 인한 지휘체계의 혼란도 패배를 부채질했다. 군대가 파벌 다툼을 하면 지휘관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선다. 우군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할과 각개섬멸을 두려워하여 부대를 밀집시켜 전진한 것도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수만명이 좁은 지역에 몰리니 부대를 전개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유사시 후퇴를 불가능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집중사격과 포격에 무의미한 희생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로써 해방군은 반격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었다. 만주에서는 동북 민주연군이 쑹화장 너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산둥과 장쑤, 그리고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지키는 중원지역은 국공 쌍방이 교착상태로 대치하였다. 라이우 전투는 장제스와 휘하 장군들에게는 일말의 불안감을, 마오쩌둥과 공산당에게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천이와 해방군 지휘관들의 활달하고 낙천적인 풍모는 전투가 끝난 날의 행동에서 잘 드러난다.

그날 천이의 부하 한 사람이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저녁을 먹고 사령원 부부(천이와 장쳰)는 광장에서 노획한 자동차를 몰았다. 쑤위 사령원은 가족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축포를 쏘았다. 탄전린은 적 군단장의 자동차를 탔다. 우리들은 모두 대승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 후에도 장제스는 멍량구 전투, 화이하이 전투에서 천쑤 대군에게 잇따라 패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천이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천이가 상하이 시장에 있을 때 잇따라 자객을 파견했다. 그러나 모두 천이의 수하에게 잡혀 무위로 돌아갔다. 그 후 1955년 장제스는 중국이 10대 원수를 지명하자 그중 천이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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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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