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지한 반박없이 중상 비방만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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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01월 28일 09: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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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영 동지(이하 존칭 생략)의 “‘다함께’가 신당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들”(<레디앙>, 1월 25일)이라는 글의 내용은 제목과 완전 딴판이다. 다함께가 신당파에 가한 비판에 대한 진지한 반박은 찾아볼 수 없고 다함께에 대한 중상과 비방이 대부분이다.

    아무리 학술토론회 약정토론문을 정리했다지만 한심한 정치적 수준을 스스로 드러내는 듯한 이 글에서 이재영은 정치적 비판을 감정적 매도로 대체하고 있다.

    신문을 통한 혁명

    이재영은 다함께를 “신문 파는 학생들”이라고 곡해, 폄훼하며 “트로츠키주의라는 것이 우면산 정기 받아 태어나는 것도 아닐진대, ‘다함께’가 유독 강남, 서초에만 버글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비아냥거린다.

    이재영이 맑스의 <신라인신문>, 레닌의 <이스크라>, 로자 룩셈부르크의 <적기>, 안토니오 그람시의 <신질서> 등으로 대표되는 혁명적 신문을 통한 혁명적 조직과 운동 건설이라는 전통을 이해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함께의 활동에 대한 기초적 정보조차 모르는 것도 놀랍지 않다.

    놀라운 것은 제대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운동과 조직에 대해 너저분한 비방을 늘어놓는 그의 용기다. 언제부터인가 이런 식의 냉소적인, 내용 없는 말장난이 이재영의 특기가 된 듯하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재기 있다고 착각하는 듯해 안쓰럽기도 하다.

    물론 그의 글에 정치적 주장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레닌주의 정당과 민주집중제 원리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는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상투적 오해와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 “캘리니코스의 당론은 다분히 도식화된 전위-대중관에 가깝”고, 이런 “레닌적 전위정당론”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의 짜르 체제에 대응키 위한 특수한 변형”이라는 것이다.

    이재영은 정성진 교수에 대한 약정토론을 시작하면서 자신은 정 교수가 언급한 “국내에 번역된 13권의 캘리니코스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고 강조해, 그 토론회에 참석한 다함께 회원을 놀라게 했는데, 그러면서 어떻게 캘리니코스의 당론을 평가할 수 있는지 다시금 놀랍다.

    당에 대한 레닌의 논술에 제정 러시아에서의 정치적 자유 부재를 배경으로 한 비밀스런 조직 기술에 대한 논의가 포함돼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당 이론 자체는 훨씬 더 넓은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

    레닌의 당 이론은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뿐 아니라 오늘날 세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인 노동계급 의식의 불균등성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노동계급이 모두 똑같이 혁명적이라면 혁명적 정당은 불필요할 것이고, 그 동안 혁명은 훨씬 더 자주 일어나 벌써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계급 의식은 불균등하다. 우파적인 노동자도 있고, 중도진보적인 노동자도 있고, 급진좌파적이거나 심지어 혁명적인 노동자도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급진좌파적, 혁명적인 일부가 독자적으로 조직돼 투쟁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스탈린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달리 레닌의 당 이론은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고 보지 않는다. 당은 계급의 ‘일부’일 뿐이다.

    당과 계급

    레닌의 당 이론은 계급의 선진 부분과 후진 부분이 고정적이라고 보지 않고 그들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에 주목한다. 예컨대 1917년 2월 혁명에 앞장선 것은 전통적 선진 부분인 대기업 숙련 금속노동자들이 아니라 방직공업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때 레닌은 “계급이 당보다 왼쪽에 있다”며 노동자들의 혁명 열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선임 볼셰비키’를 비판했다. 혁명적 조직은 이런 상호작용 속에서 얼마나 잘 배워 올바른 투쟁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느냐에 따라 계급의 지지를 받으며 혁명적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다.

    따라서 다함께가 “노동계급의 선진적 혁명적 중핵”이라고 “주관적으로 자임”하고 있다는 이재영의 비판은 다함께의 주장은 물론 레닌의 당 이론에 대해서도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오히려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야말로 대중의 자주적 운동 대신 사회민주주의 국회의원이 대중에게 개혁을 선사할 수 있다고 엘리트적으로 자임한다.

    이재영이 공감하는 신당파가 결속을 염원하는 보통의 민주노동당원들과 그들의 결정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서도 독선적인 엘리트주의가 드러난다. 이재영의 무지는 민주집중제 비판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민주집중제와 공동전선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마구 섞어서 뒤죽박죽으로 비판하고 있다.

    먼저, 민주집중제는 이재영의 천박한 비난처럼 “통일 행동을 강제하기 위한 제재나 징벌”, “비밀음모가 조직들(이나) … 동서양 전근대 공동체 문화의 잔재”가 아니다. 그는 “소련과 중국과 북한 등의 참상”이 민주집중제 때문이라고 할 뿐 아니라, 심지어 “알카에다나 적군파 같은 테러리즘 정당”과 민주집중제를 연결시킨다. 맙소사!

    민주집중제는 결정에 도달할 때까지 자유롭게 토론과 논쟁한다는 뜻에서 민주적이고, 일단 결정에 도달해 그 결정을 실행할 때는 행동을 통일한다는 뜻에서 집중적이다. 이는 노동조합을 비롯한 모든 노동계급 단체와 운동에 마땅히 적용돼야 하는 조직 원리이다. 예컨대 노동조합에서 민주적 토론과 찬반 투표를 통해 결정한 파업에 조합원들이 각자 알아서 참가하거나 불참한다면 그 노동조합과 투쟁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지난해 여름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은 민주적인 분회 토론을 통해 결정한 상암점 점거파업의 무기한 연장 결정을 영웅적인 용기와 규율로 사수했다. 이것은 노동운동에서 민주적 토론과 규율 있는 행동 통일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반면, 테러 조직에게는 민주적 토론과 집단적 대중 행동 모두가 필요하지 않다. 옛 소련, 중국, 북한의 참상은 민주집중제 때문이 아니라 관료 지배계급의 노동자 착취와 억압, 비민주적 독재 때문이다. 그런 곳의 ‘공산’당은 민주적 집중이 아니라 관료적 집중이 조직 원리이다.

    그리고 민주집중제를 “국가 맹아인 정당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이재영은 맑스주의 국가론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진정한 맑스주의 전통에서 당은 국가의 맹아가 아니다. 노동자 국가의 맹아는 당이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나 꼬뮌이다.

    이재영의 “행동 (통일)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자는 주장은 노동운동의 집단적 규율을 거부하는 개인주의적 태도를 반영한다. 이재영이 공감하는 신당파가 민주노동당이 더는 진보정당도 아니어서 심지어 와해돼야 마땅한 조직이라고 공표하고서도 일부가 민주노동당에 남아 분당을 선동하는 등 제멋대로 하기가 설명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선거와 국회의원 의정활동 보조가 활동의 기조인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행동가적 전투 정당에는 규율이 요구된다.

    한편, 상이한 정파들이 함께하는 공동전선에서는 민주집중제를 엄격히 적용하기 힘들다. 여기서는 정파 간의 타협과 배려가 필요하다. 따라서 느슨한 다정파 연합체여야 할 민주노동당에서 다른 정파를 ‘청산’하라는 이재영과 신당파의 태도도 패권주의적이며 그들에게 ‘다원주의’는 말뿐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이재영은 다함께가 신당에 반대하는 이유는 “개입하거나 침투할 곳이 두세 개로 갈려 있으면 귀찮다는 말”이라고 했다. 자주파 동지들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비난도 덧붙였다. “민주노동당 밖의 …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숭상”하며, “민주노동당을 자신들의 숙주”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질환”이며 “퇴치해야 하는 공공 범죄”라고도 했다.

    이재영 등 PD 경향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다함께의 관계를 비웃을 때 우리는 그들도 NL과 꼭 마찬가지로 국수주의적 가정을 갖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2000년에 사망한 팔레스타인 맑스주의자 이가엘 글룩스타인(토니 클리프)이 창립하고 65살의 크리스 하먼 등이 이끄는 60년 된 맑스주의 조직 사회주의노동자당뿐 아니라 트로츠키, 레닌, 그람시, 룩셈부르크, 맑스와 엥겔스를 모두 ‘숭상’한다. 그락쿠스 바뵈프와 토마스 뮌처, 스파르타쿠스도 숭상한다.

    특히, 우리가 1989/91년 옛 동구권 몰락에 이재영처럼 절망하지 않아도 되게끔 1947년에 국가자본주의론을 정초한 고(故) 클리프를 숭상한다. 하지만 ‘숭상’이 종교적 숭배는 아니다. 우리는 맑스가 정당 문제에서 숙명론적 가정을 하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또, 레닌은 ‘노동귀족’이나 ‘금융자본’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 클리프의 초기 국가자본주의론은 옛 소련에서의 임금노동의 존재를 과소평가했다. 더 많은 사례는 지면 제약상 생략한다.

    이재영의 주장과 달리, 반자본주의자와 제대로 된 좌파는 오히려 민주노동당을 ‘숙주’로 삼아 ‘기생’해야만 한다. 민주노동당은 남한 노동계급이 지난한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쌓은 특정 형태의 의식이 반영된 노동계급 선진 부분의 정치적 기관이다.

    이런 때 반자본주의자와 좌파가 ‘기생’이 아닌 ‘독자성’을 고집하면 종파주의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다. 문제는 민주노동당을 쇠약하게 만드는 기생충식 기생이냐, 아니면 민주노동당도 건강하게 만들고 자신도 건강해지는 종류의 기생, 즉 상생이냐이다.

    이재영과 신당파의 당 비전은 영국 노동당, 독일 사민당, 프랑스 사회당 등이 일찍이 수십년 전부터 보여 준 모습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동계급에 대해 이질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출세주의자들이 이익을 얻고 보통의 당원들과 노동계급은 마침내 배신당해 손해를 보는 진정한 기생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정한 좌파는 노동계급 운동과 노동계급 정당을 전진시킴으로써 자신도 살고 당도 살린다.

    이재영과 신당파가 느끼는 박탈감의 본질은 이것이다. ‘원래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향하며 만든 당에 왜 좌파 민족주의자나 혁명가들이 들어와서 목소리를 내냐. 더구나 자주파가 다수가 되면서 우리가 당권과 국회의원 자리를 얻기도 힘들어졌다. 더구나 다함께는 사회연대전략 등 당의 중도화를 위한 정책도 가로막았다. 따라서 이들의 핵심을 쫓아내고 나머지를 통제해서 우리가 당권을 잡고 당의 사회민주주의적 성격도 분명히 하자.’

    그래서, 불만족스런 대선 결과가 나오자 곧바로 ‘종북주의 청산’ 등을 내걸고 당을 흔들었고 분당 협박으로 당권을 일시 되찾았지만, 이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나갈 수도 있게끔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물론 자주파인 기존 다수파 당 지도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패권주의로 파트너를 소원케 해 당의 분란을 자초했고, 마찬가지로 개량주의적이었다. 북한에 대한 잘못된 태도도 문제다.

    그러나 이재영과 신당파는 이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들은 미국 제국주의나 남한 국가보다 북한 국가가 주적이라는 태도로 우파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독일 혁명가 칼 립크네히트가 말했듯이 “주적은 국내에 있”는데 말이다. 신당파는 심지어 선거 때 표가 깎일까봐 국가보안법에 굴복하고 동지를 쫓아내자고 한다.

    ‘민주노총당이 문제’라며 당에 대한 조직 노동계급의 입김을 약화시키려 하며, 정규직-비정규직의 단결 투쟁이 아니라 정규직 양보와 투쟁 자제를 수반하는 사회연대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운동권 정당이 문제’라며 아래로부터의 행동과 투쟁, 좌파적 가치들과도 거리를 두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느슨한 다정파 연합체로서 존속이 가능한 민주노동당을 또 다른 패권주의로써 파괴하고 경직되게 만들려 한다는 점과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라는 더 우경적인 개량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현재적, 잠재적 분당파들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이재영은 책(정성진 교수가 지은) 서평을 맡아놓고 책도 읽지 않았는지 책의 본 논지와 관계 없는 시비거리나 만들었던 지난번 <프레시안> 지상논쟁에서도 그랬듯이, 감정적 비방이나 비아냥거림, 그리고 관련성 없는 딴소리나 지엽말단으로 곁가지치기 등의 상투적인 방법으로 도망가지 말고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진지한 반박과 답변을 내놓는 게 책임 있는 태도일 것이다. 얄팍한 연막에 가려 개량주의적 본질을 보지 못할 만큼 활동가들이 멍청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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