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를 수 있는 것도 권력
    [밥하는 노동의 기록] "그만 물어"
        2019년 03월 12일 11: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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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행을 떠나며 어머니께 물었다. 내가 잘 살 수 있을까요. 어머니는 답했다. 남자 철들자 노망난댄다. 기다리며 지치지 마라. 나는 이것이 그저 위로 삼아 하신 우스개인 줄 알아서 그 후 몇 번이나 이 말을 써먹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청소를 곧잘 하며, 빨랫줄에 넌 옷을 각 잡아 개키는 남편은 언뜻 보면 살림을 꽤 잘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어 살림의 대부분을 내 손으로 하면서부터 나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되었다. 그는 설거지는 잘 하지만 식기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했다. 각 잡아 갠 빨래를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 몰랐다. 청소는 하지만 쓰고 난 걸레는 빨지 않았다. 당신이 설거지를 하고 나면 뭐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데 한참이 걸린다고 하자 남편은 “이건 어디에 두는 거지?”라고 물었다. 냄비, 국자, 뒤집개, 냄비받침, 찻숟가락 모두 십 오년 동안 이 집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들인데 그는 꾸준히, 성실하게 물었다. 십 년쯤 참다 제발 좀 그만 물어보라고 하자 그는 침울하게 말했다. 언젠 또 제 자리에 두라며.

    동네 언니들에게 이런 얘기를 풀어놓자 언니들은 설거지까지 했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냈냐며 나를 책망했다. 아유, 그래도 그 집 아저씨는 하려고 하네. 우리 집 남자는 아무것도 몰라. 원래 남자들은 그런 거 몰라.

    겪은 바와 들은 바를 헤아려볼 때 남자들이 모르는 그런 것은 비단 냄비의 위치뿐이 아니다. 그들은 칫솔의 교체시기를 모른다. 설거지는 개수대의 물기를 닦고 수세미와 행주를 삶아 널어야 끝난다는 것을 모른다. 기름기 있는 그릇을 물에 담가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일주일에 한 번은 청소기나 세탁기의 먼지통을 비워야 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 먼지통을 어떻게 여는지 모른다. 세제를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탄 냄비를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 모른다. 자신의 부모 생일을 모른다. 변기를 닦는 수세미와 타일 바닥을 닦는 수세미가 따로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아이가 언제 자야 하는지 모른다. 날씨에 따라 아이의 옷을 어떻게 입혀야 하는지 모른다. 자기 조상의 제삿날을 모른다. 자기 부모님의 생신날을 모른다. 명절 준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배우자가 명절을 어떻게 보내는지 모른다.

    그들은 아예 묻지 않거나 매번 묻는다. 말하지 그랬어. 대답해주면 되잖아. 나한테 시키지 왜 혼자 해.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것도 다 일이다. 그것도 아주 품이 많이 드는 일이다. 그게 쉬운 일이면 관리자의 임금이 실무자의 임금보다 낮아야 한다. 혼인생활 내내 신입사원처럼 살면서도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걸 모르도록 내버려 둔 나도 문제였다는 것을 안다.

    많은 아내들이 남편을 돌보고 키우며 산다. “남자들은 원래 그런 거 몰라.”, “남자는 철들면 바로 노망이야.”라는 말은 이 사회의 통념이자 진리이니 자라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며 내버려 둔다. 남편을 육아에 동참시키려면 아이가 기분이 좋을 때 맡기라든가 설거지 한 그릇에 고춧가루가 붙어있어도 잘한다고 칭찬하라든가 하는 말들이 죽지도 않고 팁으로 몇 십 년을 돌아다닌다.

    청문회 자리에 나온 사람이 자주 “저는 모릅니다.”하던데, 그가 모를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집안이라고 집밖과 다르지 않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불편이 없는 것, 그것이 권력이다.

    나물을 넣은 밥은 하기 쉬워. 이것까지 모르지는 마. 두릅밥과 달래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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