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의 주인은 누구?
    쇠붙이로 만든 회색지대
    [소설로 읽는 한국사회]『철의 시대』
        2019년 03월 12일 10: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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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고 각계 분석들이 쏟아졌다.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바로 우리”라던 문 대통령의 말은 사실보다 희망에 가까워 보였다. 트럼프는 결코 한반도의 운명을 주인에게 맡기지 않았고 스스로 주인임을 자처했다. 잦은 일이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후안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승인했다. 2월 25일 한국 외교부도 덩달아 후안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혹은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실상 ‘저들’이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의 운명도 ‘저들’에게 있다.

    저들의 날인용지에 피값이 기입되면 무덤 위에 벙커가 뚫리고 초소가 지어지며 미사일이 날아든다. 유목민들은 그토록 뿌리내리고 싶은 땅에 묻힌다. 그들을 흙으로 덮고 덮어도 결코 흙이 되지 않는다. 수백 년 역사 속에 증오와 분노로 얼어붙은 피는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성의 물질로 땅에 부박했다. 어떤 생명도 피워 올리지 못하도록 흙덩이가 아닌 쇠붙이가 되어, 촛불 대신 쇠창을, 용서 대신 총탄이 될 것을 산 자들에게 명한다. “철의 시대”는 계속 될 것이다.

    J.M, 쿳시 『철의 시대』는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쳐 온 백인 엘리자베스 커런이 퇴직 후 죽음을 앞두고 딸에게 보내는 서간체 소설이다. 1986년 남아프리카 백인 정부가 남아프리카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주인공 커런은 부랑자를 돕거나 흑인 가정부의 아이들을 연민하며 휴머니스트로 산다. 인종분쟁에 아이들을 희생양으로 만든 남아공 흑인운동을 비판하지만 죽음 앞에서 자신이야말로 증오와 피로 물든 “철의 시대”에 공모자였음을 깨닫는 소설이다.

    “이제 그 아이는 묻혔고, 우리는 그 애를 밟고 지나가요. 나는 이 땅 위를 걸을 때, 남아프리카의 땅 위를 걸을 때, 흑인들의 얼굴을 밟고 지나간다는 느낌을 점점 더 강하게 받아요. 그들은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영혼은 그들의 몸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땅속에 무겁고 완강하게 누워서 내 발이 통과하기를 기다리고,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다시 들어 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선철로 된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표 아래에서 떠다니는 거죠. 철의 시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거죠.” (p. 165)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후에도 계속된 흑인 배제와 차별 적대와 혐오의 피로 얼룩진다. 커런은 “삭여지지 않는 없는 분노”를 표출한 흑인 아이를 훈계하고 그의 어머니를 만류하지만, 그들에게 커런은 통행증 없이 어디든 갈 수 있고 총격과 방화 무차별적 폭력과 무관한 “동화 속 늙은 여자”일 뿐이다.

    커런은 연민을 느끼지만 실상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저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되뇌며 구걸, 도둑질, 나태함, 만취 상태, 넝마 속 수치를 모르는 저들의 몸을 증오한다. 위험한 폭력이 늘상 도사리는 구굴레투 지역에 그저 “나의 딸이 살고 있지 않음”에 안도한다. 흑인 아이의 폭력을 두둔한 어머니 플로렌스(흑인 가정부)에게 윤리를 운운하고 선의를 베풀지만 자신의 거주지를 도피처로 쓴 흑인 아이들을 내쫓고 싶다.

    비록 자신은 곧 죽을 처지지만 “내 차, 내 집, 내 것, 나는 아직 떠난 게” 아니라며 소유에 집착한다. 경찰이 흑인 아이들을 좇는 데에 합리적 이유가 있을 거라 단정 짓는다. 주차장에 노숙하는 부랑자도, 소란을 일삼는 흑인 가족들에게 염증을 느끼며 시시각각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오로지 제 육체의 고통만이 선연한 절망으로 다가올 뿐이다.

    커런은 이 소설 전체의 유일한 화자다. 커런이 암에 잠식당해 죽는 순간 죄의식을 느끼는 뻔한 결말을 예상했지만 J.M. 쿳시는 커런보다 쉽게 죽음에 당도하는 흑인 아이들과 흑인 가정부 플로렌스의 죽음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러온다. 커런이 느끼는 고통을 따라가며 쓸쓸하게 죽어가는 그녀를 연민할 즈음 어느새 독자도 불에 타 죽은 흑인 아이의 주검과 마주한다. 위악과 증오의 가면을 벗고 “죽을 때, 다시 어린애가 돼 버린” 무구한 아이의 얼굴. 이제 열 살밖에 안 된 베키.

    1985년 남아공 정부는 백인 공권력을 동원해 흑인 데모대를 철저하게 탄압했고 돌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남아공의 18세 미만의 학생 천여 명을 살상한다. 구굴레트 현장은 보복과 재보복의 피로 물든다. 커런은 흑인 구역으로 가 불타 죽는 아이들을 본다. “분노와 폭력이 난무하는 이 세계” 한 가운데 서 커런은 길을 잃는다.

    나는 그 애 베키의 뜬 눈을 생각했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목격했던 것 중 최악의 것이다. 나는 이제 눈을 떴다. 다시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pp. 102~103)

    철의 시대였다. 차갑게 얼어붙어 쇠붙이가 된 아이들. 아이들의 주검 위로 탱크를 보내 더 많은 아이를 무덤처럼 쌓아 올린 시대. 한때 커런은 시민적 성숙함을 주장하며 당장 해결될 기미가 없는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피 흘리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 휴머니즘과 이상을 교육받길 권한다. “교육은 특권”이고 “부모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절약하고 저축” 해야 한다 다그친다.

    “그들을 잔인하게 만든 게 누구죠?” 라는 커런의 질문에 “그건 바로 백인”이라 답하던 그들. 죽어가는 순간에도 “엠블런스나 의사나 경찰이나 모두 똑같아” 응급실로 갈 수 없다는 그들. 자비 없는 세상에 던져진 철의 아이들의 삶이다. 커런이 제 육체의 고통에 신음하듯 그들 또한 그녀처럼 아직 살아 숨 쉬고 똑같이 수치와 치욕, 생중사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다. 태어난 죄로 자연사 할 권리마저 박탈당하고 재단된 삶. 아이들이 목격한 현실은 무엇인가.

    J.M. 쿳시 소설 주인공들은 대부분 ‘검둥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유색인종은 받지 않는다’ 경고문을 보며 몇 세대 전에 결정된 차별에 부딪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고뇌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6세기 이후 지금까지 스페인, 영국, 미국에 이르는 근대/식민지 체제 내에서 ‘생각함으로 존재하는’ 코기토(Cogito)적 인물들은 아파르트헤이트를 탈출하기 위해 영어권으로 탈주해 더 큰 차원의 근대성 기획에 포섭된다. 야만과 문명, 문자와 비문자,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분화되는 몸과 정신의 이분법은 서구 근대성의 근간이다. 서구에 깊숙이 착종된 인종주의와 계몽주의는 한국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냉전체제는 오랫동안 살던 땅에서 열외된 민족에게 주체의 몸과 역사적 자아라는 정신을 분리 지배한다.

    커런 몸과 정신은 암에 좀먹으며 고통을 매개로 일원화된다. 특권을 누렸던 일상,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걷고 안락한 잠과 당연한 듯 찾아오는 아침이 불현듯 사라지면서 몸은 정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배회하다 넝마 속에 배변을 본다. 길에 굴러다니는 술로 목을 축이고 금니를 빼앗기기 위해 버려진 동물처럼 끌려 다닌다. 육체로 인해 무너진 삶은 비로소 비특권화 된 삶, 벌거벗은 자(1)의 상태로 건너간다. 그제야 평소 혐오했던 부랑자를 대면하며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 참을 수 없었던 타자를 환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멀리 있는 딸이 아니라 “그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내 옆에, 현재”에 닿은 실체다. 수치심을 방어막 삼아 명예를 지키며 살아온 커런은 자신의 예정된 죽음보다 시시때때로 당도하는 철의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역사의 무의미를 깨닫는다. 백인 영웅주의가 커런에게 할당한 수치심은 결국 흑인 영웅주의에 분노의 죄과를 남긴다. 그 어떤 문명도 타인의 죽음 앞에선 역사일 수도 영웅일 수도 없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모든 인간은 뒤틀린 저항으로 실존적 곤경과 싸워왔다. 오만한 소피스트들은 타자의 피와 성별을 사후적으로 구성한 뒤 능숙한 경멸을 다음 세대에 세습했다. 돌처럼 변해가는 심장을 가진 아이들, 살인과 폭력으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돌을 쥐는 이른바 화강암의 시대(Age of Granite). 그 기원은 도대체 언제인가.

    “범죄는 오래전에 저질러졌어요. 얼마나 오래전이었을까요? 그건 몰라요. 그러나 1916년보다 훨씬 이전이라는 건 분명히 오래 전이어서, 나는 그 속에서 태어났던 거죠. 그건 내가 물려받은 유산의 일부예요. 그건 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의 일부예요.” (p. 164)

    『철의 시대』에서 아파르트헤이트로 전경화 된 “철의 아이들”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그리고 한반도에 당면한 현실에 어떤 주체로 현현하는가. 근대 이후 제국은 생명 권력을 쥐고 적대와 혐오를 양산했다. 냉전체제의 제3국면을 넘어 초기업적 자본으로 재편된 근대성의 기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과거의 가시화된 벽이 허물어진 자리에 생존이라는 거대한 자본 주권의 비물질적 벽이 들어선다. 일상 깊숙이 침투한 자본제국은 국가라는 껍데기 아래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족이란 이름의 계급적 차별을 보전 유지하는 비가시적 회색지대를 만든다. 이미 초국적 기업자본은 국가의 통제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냉전의 트라우마를 끝낼 본래적 주체에게 허락된 자유란 자본제국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회색지대를 전유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그 나라를 매우 잘 알고 있다. 구석구석 모두 다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얻어내야만 하는 것을 얻어내야 한다.”고 북조선을 향해 트럼프는 말했다. 어쩌면 최첨단 정찰기를 동원하고도 그가 진정 알지 못한 것은 그가 딛고 선 땅 밑이다. 수십 년간 제국의 발 아래 끝도 없이 파묻힌 쇠붙이 같은 아이들. 철의 아이들이 흘린 피는 세상을 향한 비수가 되어 세계의 가장 안쪽을 겨눈다.(끝)

    1. 조르주 아감벤이 창안한 개념으로 추방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존재, 즉 벌거벗은 생명을 호모 사케르라 부른다.

    필자소개
    추계예술대학교에서 소설 창작기법을 연구했으며 성균관대 박사과정에서 현대 문학평론을 공부하고 있다. 독서코칭 리더로 청소년들과 붉은 고전읽기를 15년간 진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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