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와 조선어학회,
영화 ‘말모이’ 의미와 교훈
    2019년 03월 08일 03: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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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유나 감독이 직접 각본을 쓴 『말모이』가 개봉 53일을 지나면서 286만 명이 넘는 관객이 보았다. 1월 9일 개봉 초기엔 은근히 기대가 컸다. 750만 명의 관객이 본 『밀정』이나, 1200만 명이 넘게 본 『암살』처럼 1000만 고지를 넘어서길 고대했다. 영화 『말모이』가 주는 충격과 교훈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말모이'는 사전의 순우리말이다. 영화 『말모이』는 두 가지 충격과 하나의 교훈을 안겨다주었다. 먼저 영화 『말모이』를 통해 '이극로'라는 이름 석 자가 처음 회자되었다. 영화 속에서 '이극로'라는 이름자가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이 '이극로'로 등장할 뿐이다.

영화 장면 가운데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이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바로 이극로 선생이 강조했던 표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연구의 권위자인 박용규 박사(고려대 연구교수)는 류정환(윤계상 분)이 '이극로'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의 아버지가 친일인물로 등장하는 것에 분개했다. '이극로'의 아버지는 경남 의령군 빈농 출신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선 경성 제일중학교 이사장이자 부유한 친일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엄유나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때 조선어학회 연구의 권위자인 박용규 박사를 직접 만났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영화는 당대의 사건과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을 서사적으로 형상화시킨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고증에 치밀함을 더했으면 대중들의 역사의식을 더 의미 있게 높였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껏 한국근현대사 진실이 대중화되는 계기는 작가나 영화 예술인들을 통해서 전해져 왔다. 실제로 역사교과서나 그것을 쓴 역사학자를 통해서 대중화된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4・3 사건을 다룬 현기영 선생의 『순이삼촌』이나 해방공간의 진실을 다룬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그러하다.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을 다룬 황석영의 『손님』이나 정신대 문제를 최초로 대중화시킨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또한 그렇다.

이승만 정권에서 저질러진 거창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김원일의 『겨울골짜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2003년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개봉돼 1000만 관객이 넘게 본 영화 『실미도』 역시 영상매체로서 영화의 위력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금기시됐던 북파공작원의 실체에 대해 균열을 낸 역작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상식은 간첩이 북쪽에서 남쪽으로만 넘어온 거였다. 그러나 영화 『실미도』는 그 상식을 깨뜨려버렸다. 남쪽에서도 북쪽으로 간첩을 보냈다는 사실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켜 준 작품이었다.

영화 말모이(박스 안은 조선어학회 회원들 모습)

이극로를 망각에서 꺼내다

사실 '이극로'는 대한민국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알려지기는커녕 철저히 망각의 인물이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국어교사들조차 생소한 인물이다. 마치 교사들에게 조선의 페스탈로치 '이만규'가 낯선 인물이듯이 '이극로' 역시 망각의 인물이다. 두 분 모두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 3인에 꼽히는 인물들이다. 해방 공간 조선 최고의 교육자이자 한글운동가였지만 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 진보적 민족주의자로서 항일독립지사이지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은 그간의 연구결과로 이미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이극로 평전인 박용규 박사의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2005)엔 이극로 선생이 조선어학회의 실질적인 목대잡이(지도자)였음을 여실히 밝히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70주년 기념 해인 2012년 한글날에 박용규 박사는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를 출간했다. 그 책에서도 이극로 선생이 우리나라 한글운동의 제1인자였음을 또다시 밝히고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사자이자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원이었던 정태진의 평가가 이를 뒷받침한다.

이극로 박사는 독일 유학 시절에도 우리말 강좌를 여는 등 우리말 사랑이 남달랐다. 이극로 박사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미국을 경유해서 귀국했다. 귀국 도중 1928년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 행한 강연에선 '우리말이 민족의 생명이기에 언어독립투쟁이 시급하다'며 열변을 토했다. 실제로 이극로 박사는 김윤경, 이만규, 최현배, 이윤재, 이희승 등 다른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달리 일부러 무직인 상태를 고집하며 한글운동을 시작했다.

우리말글이 살아 있으면 언젠가 우리 민족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주변에 힘주어 강조했다. 경제학 박사이지만 평생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에 혼신을 다한 이유이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장(오늘날 이사장)과 조선어학회 살림살이를 책임졌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조선어학회 사무실 운영과 재정을 오롯이 떠맡았다. 오로지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에 매진하기 위해서였다. 한글연구보다 한글운동가로서 열정과 면모가 훨씬 더 강했다. 영화 『말모이』는 그런 이극로의 열정적인 헌신과 우리말 사전 편찬에 분투하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

1930년대 한글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 그리고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은 그런 희생과 수고의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이극로 선생은 잔혹한 고문으로 3일 동안 7번이나 혼절했다. 그리고 12번이나 천장 들보에 매달린 상태에서 무수히 난타를 당했다. 9차례에 걸친 재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6년이라는 가장 센 징역형을 받았다.

그리고 해방 이틀 뒤 함흥형무소에서 들것에 실려 나왔다.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과 함께 나왔는데 이극로 선생님만 들것에 실려 나왔고 다른 이들은 주위의 부축을 받으며 출옥했다. 거의 산송장과 마찬가지로 몰골이 처참하여 말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17일 당일 조선어학회 회원 모기윤 선생을 따라간 이근엽(연세대 명예 교수)이 목격한 풍경이었다. 그럼에도 상한 몸을 추스르기보다 바로 조선어학회 13대 간사장을 역임하며 한글운동에 매진했다.

박용규 박사의 『조선어학회 항일투쟁사』 198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신의 안일과 집안의 이익에 급급한 현대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움을 극복해 내었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극로 선생의 지나온 삶을 평가한 외솔 최현배 선생의 회고이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서 평생 한글만 쓰기를 피를 토하듯 강변했던 꼿꼿한 선비이다. 일찍이 일제강점기 시절 국어학사에 빛나는 역저 『우리말본』을 지음으로써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결정적으로 토대를 닦은 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징역 4년이라는 두 번째로 센 징역형을 언도받고 해방 뒤 이극로 선생과 함께 함흥형무소에서 출감했다. 그리고 옥살이로 상한 몸을 돌보거나 연희전문학교로 돌아가기보다 이극로 선생과 함께했다. 해방 직후 이극로 박사가 조선어학회 13대 간사장을 맡았을 때 최현배 선생은 간사를 맡아 한글교과서 발간과 한글운동에 힘을 쏟았다. 해방 후 초등학교 우리말 교과서로 처음 발간된 것이 『한글 첫걸음』과 『국어독본』이었다. 모두 조선어학회에서 만든 것이다. 나아가 이극로와 최현배의 조선어학회는 한글전용과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하였다.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주시경 선생의 언어민족주의 정신을 이어갔다.

특히 외솔 선생은 미군정 학무국과 자문기구인 조선교육심의회에 적극 참여해 해방 후 초기 국어정책의 기틀을 다졌다. 이극로 박사 역시 조선교육심의회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조선교육심의회는 공식적으로 미군정 자문기구였지만 실질적으로 '준 정부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왜냐하면 조선교육심의회의 결정사항은 그대로 한국교육의 기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몽양 여운형 선생 피살 직후 해방 공간은 살벌했다. 친일 반민족세력이 고개를 쳐들고 극우반공파시즘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분들까지 빨갱이로 몰아가던 시절이 지속되었다. 이만규 선생이든 이극로 선생이든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북을 선택하거나 잔류했을 뿐이다.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의열단 단장 김원봉조차 오죽했으면 북을 선택했을까! 북을 선택했거나 잔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업적을 파묻어버리거나 금기시하는 것은 결코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거 비이성적인 광기의 시대를 살다간 역사 인물에 대해 아직도 비이성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민족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정당하지 않다. 분단과 이념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좀 더 역사를 냉정하고도 객관적으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하루빨리 김원봉을 비롯하여 이만규, 이극로 선생에게도 서훈을 추서해 독립유공자의 반열에 올리는 게 마땅하다. 남북미 정상들이 서로 만나 한반도 평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오늘날 좁쌀만큼이나 옹졸한 처사가 보훈의 지침이 되는 게 바람직하지도 시대정신에도 들어맞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말모이』는 분단시대의 마지막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는 빼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극로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드러내며 이극로 선생을 역사적으로 복권시킨 영화이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조명

두 번째 영화 『말모이』가 주었던 충격은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다. 비록 영화 속에서는 제한된 시간 때문에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을 소상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학자들과 이름 없는 대중들의 수고와 희생을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시켰다. 조선어학회를 탄압하는 장면에서 일제의 간교한 술책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나온다.

바로 조선어학회 막내 민우철(민진웅 분)이 변심하는 장면이 그렇다. 민우철의 변심은 매우 인간적으로 묘사돼 나온다. 그러나 민우철이 일제 경찰에 흘린 정보는 조선어학회가 오랜 시간 쌓아올린 사전편찬 활동을 파괴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일제가 민우철을 만난 이후 경찰들이 느닷없이 '문당 책방'을 압수 수색한다. 그리고 조선어 낱말카드 수천수만 장이 쌓여 있는 지하실까지 탈탈 털어간다. 10년이 넘게 걸린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이 심대한 타격을 받았던 장면이다. 텅 빈 지하창고를 둘러보던 장면에서 얼마나 허망한 심정이었을지 절절함이 묻어날 정도였으니까!

일제의 간교한 술책은 야심한 밤에 민우철에게 일부러 접근하여 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아내의 건강 상태를 흘린다. 그러면서 조선어학회 내부 비밀을 캐낸다. 민우철은 항일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는 아내가 아프다는 소식에 마음이 흔들린다. 이미 형무소 내에서 극심한 고문으로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일제는 경찰서나 형무소 취조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다가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으면 병보석이나 형 집행정지로 풀어주었다. 대부분 풀려난 항일지사들은 석방된 지 시름시름 앓다가 1-2년 내 아니면 길어야 병석에 누워 지내다가 대부분 단명했다.

삼천리 강산에 무궁화를 퍼뜨린 남궁억 선생이 그러했고 독립운동의 인격자 안창호 선생도 그랬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큰아들 김환기 역시 젊은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단명했다. 조선의용군 항일여전사 박차정의 둘째 오빠이자 의열단원이었던 박문호 역시 27살 젊은 나이에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갔다.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당한 유진흥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름시름 잃다가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죽어갔다. 님웨일즈의 『아리랑』에 20대 김산(본명 장지락)이 고문을 당한 후 출옥했을 때 늙은이가 돼버린 충격적인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그만큼 일제의 고문은 잔인했고 악랄했다. 그래서 그런지 항일지사들 가운데 감옥 한 번 갔다 온 뒤에 독립운동 선상에서 멀어지거나 변절한 인물들이 많았다.

민우철은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말려들어 조선어학회 내부사정과 활동 정보를 건네준다. 형무소에 수감된 병든 아내를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로 아내를 면회 갔던 민우철은 아내가 진즉 사망했다는 일인 교도관의 퉁명스런 답변에 어찌할 줄을 모른다.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이용당했음을 알고 분노하지만 개처럼 얻어맞고 끌려 나온다. 당시 서대문경찰서나 서대문형무소는 종로경찰서만큼이나 고문의 양상이 잔혹했다. 일제강점기 경찰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원성이 자자해 의열단이 파괴할 대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의열단 박재혁, 최수봉,김상옥이 목숨을 담보한 채 부산경찰서,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을까!

『말모이』 영화와 달리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은 함흥 영생여고보 학생 사건이 발단이 됐다. 학설이 학자마다 조금 엇갈리지만 함흥 학생 사건에서 비롯된 것은 확실하다. 기차 안에서 조선말을 사용한 것을 조선인 형사 안정묵(창씨 명 야스다)에게 들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국어시간에 조선어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교사에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일기장에 기록된 것에서 사건의 발단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거꾸로 국어시간에 일본어로 대화하다가 조선어 교사에게 야단을 맞았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아무튼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고 조선어학회 어른 조갑윤(김홍파 분)이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다. 풀려난 후 병상에서 임종을 지켜보던 민우철은 회한과 자책의 눈물을 흘리고 조갑윤은 숨을 거둔다. 늙은 아내는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남편을 쳐다보며 위로하는 장면은 처연하기 그지없다. 카메라 조명이 조갑윤의 양 손을 비추었을 때 손톱이 다 빠져 있었다. 조갑윤이 받은 고문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일제는 잔혹하게 고문했다. 한글학자 한징, 이윤재 두 분이 예심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감옥에서 돌아가셨으니 고문의 양상이 얼마나 극악하고 참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화롯불에 달궈진 장작으로 벗은 몸을 지지거나 고춧가루 탄 물을 계속 퍼부었다. 각목으로 정강이를 산적 이기듯 난도질하거나 두 손을 뒤로 결박한 채 쇠꼬챙이를 끼워 통닭처럼 비녀 꽂기 고문을 저질렀다. 추운 겨울날 벌거벗긴 채 찬물을 끼얹기도 하고 기절할 때까지 무수히 난타하기도 했다. 고문은 혼절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이윤재 선생이 당한 고문의 경우는 더욱 모멸스러웠다. 고문했던 자가 바로 배재학교 재직 시절 제자 김석묵(창씨 명 시바타)이었다. 일제의 개가 된 김석묵은 이윤재 선생을 향해 '이 선생님! 이놈의 자식아!'라며 몽둥이로 내리치며 모욕과 희롱 섞인 욕설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결국 이윤재 선생은 물고문과 무수한 매질, 굶주림과 추위 속에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나라 사학계 일부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제가 고문 조작하여 민족운동, 독립운동으로 크게 뻥튀기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한 때 지배적이었다. 독립운동사에서 그리 큰 위상을 차지하는 사건이 아니라는 견해이다. 즉 일제가 함흥 영생여고보 사건을 계기로 조선어사전 편찬원인 정태진을 고문하여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 단체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김석묵, 안정묵 등 조선인 형사들을 앞세워 극악한 고문을 통해 항일민족운동으로 억지 조작한 사건이라는 관점이었다.

그러나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전개과정, 그리고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그러한 생각이 잘못됐음을 이해하게 된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한글학자들의 단순한 활동을 고문 날조를 통해 민족운동으로 과대 포장한 사건이 아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활동을 이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규정하고 수사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을 전후한 시대상황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 죽음을 무릅쓴 우리말 사전 편찬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일제는 학교교육에서 조선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고 급기야 조선어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리고 국어(일본어) 상용운동을 펼치며 일상생활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1940년대 일본어가 국어가 되고 일본사가 국사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조선 학생들끼리 조선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일본인 교사에게 들켜 뺨을 맞는 것은 흔히 목격되던 학교 풍경이었다. 심지어 일제는 이름조차도 창씨개명을 강요할 정도로 민족을 말살시키기 위한 정책에 혈안에 되어 있었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창씨 개명한 이름을 부르며 어색해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창씨개명은 당시 우리 민족에겐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의 뿌리이자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당대 선열들은 치욕과 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순결한 민족시인 윤동주조차 일본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도항증 발급 당시 창씨개명을 했다. 그리고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에 개명한 창씨계를 제출하면서 치욕을 느꼈다.

창씨계를 제출하고 5일째 되는 날 너무나 부끄러워서 “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고 살아왔던가”라고 탄식하면서 「참회록」을 썼다. 그리고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며 참회했다. 최명희의 『혼불』에도 창씨개명에 치욕을 느낀 선열들이 통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야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40년대는 그런 암울한 시대분위기에 휩싸인 암흑의 시대였다. 한 때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인물들조차 일제가 그렇게 빨리 망할 줄 몰랐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만큼 암흑기로 치달을수록 일제의 탄압은 잔혹했고 악랄했다.

그런 시기에 우리말을 연구하고 우리말을 모아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강퍅한 시대분위기 속에서 우리말을 모으고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이 한글학자들의 단순한 일상 활동이거나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자 의식적인 거부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우리말 연구와 보급을 항일독립운동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행위 자체가 스스로 불령선인임을 선포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바로 '조선어학회 사건'이 항일독립운동인 명백한 이유이자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가 남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결코 허위자백과 고문 날조로 일제가 과대 포장한 민족운동이 아니다. 당대 암흑기로 치닫던 시대상황을 분석해 볼 때 명명백백히 숭고한 항일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말모이』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해 일경의 감시를 피해 노력하는 모습이 나온다.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모아 우리말 어휘 선정을 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게다가 일제의 번뜩이는 감시를 피해 전국에서 수집된 토박이 우리말을 수집하는 장면들은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된다. 실로 매우 감동적이고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일경에 발각된 이후 당대 선각자들의 분투와 희생 그리고 조선인이라는 의식과 우리말을 사랑하는 민중들의 삶의 자세 또한 그러하다.

그런 점에서 영화 『말모이』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이 극한으로 치닫던 40년대에 우리말을 통해 우리의 민족정신을 견결히 지켜나가기 위한 언어독립투쟁, 바로 위대한 항일독립운동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참신할 정도로 획기적인 작품이었고 적잖이 충격적인 영화였다.

이름 없는 민중들의 의미를 되살리다

다음으로 『말모이』 영화가 던지는 교훈은 역사 속에서 민중의 힘이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숱한 서민들의 삶이 당대 역사적 사건의 와중에 옹골찬 모습으로 살아 있음을 거듭 확인했기 때문이다. 까막눈 김판수(유해진 분)는 식민지 시절 당대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1940년대 조선인들 가운데 80%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이었으니까.

그러나 김판수는 여러 가지 계기를 통해 조선어사전 편찬에 참여한다. 전국 8도 사투리와 토박이말을 모으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그리고 말모이! 바로 한글운동에 목숨을 건다. 물론 그 와중에 김판수는 아들의 눈물어린 호소에 가장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조선어학회를 일시 떠난다. 떠날 당시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집요한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김판수는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에게 머뭇거리며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미안합니다. 어려운 때 작은 힘이라도 되어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먹인다. 그러나 판수는 다시 조선어학회를 찾아가고 말모이 편찬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또 희생된다.

이 장면은 마치 『택시운전사』에서 김만섭(송강호 분)이 택시비를 억지로 쌀쌀맞게 돌려받은 뒤 위험한 광주에서 빠져나오는 장면과 겹쳐진다. 그리고 광주를 빠져 나온 직후 서울로 향하기보다 다시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되돌아간다. 광주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 차를 돌리기 전 어린 딸에게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라고 전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김판수든 김만섭이든 가족만을 생각하는 소시민적 가장의 모습을 넘어서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성장한다. 이름 없는 민중들이 역사적 인물로 승화되는 가슴 뭉클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판수가 던지는 명대사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가는 것보다 열 사람이 한 걸음을 함께 가는 것이 역사의 발전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당대 선각자와 역사적 사건에 책임을 느끼며 이름도 없이 스러져간 숱한 민중들의 서사인 것이다. 한반도가 평화의 시대로 성큼 발을 내디딘 오늘날, 영화 『말모이』는 이극로라는 망각의 인물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말모이』는 분단시대 종막을 알리며 통일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는 훌륭한 대중서사임에 틀림없다.

필자소개
상암고 교사, '우리역사에서 사라진 근현대 인물 한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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