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의 자세 갖춰야 할 쪽은 누구?
    '정부 압박으로 논의 시작, 불평등 협약'
    경사노위 문성현 "일부 불참에 성과물 의결 못해"
        2019년 03월 07일 05: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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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7일 2차 본위원회를 열고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합의안을 의결할 예정이었으나 무산됐다. 본위원회 노동자위원인 계층별 대표 3인(청년·여성·비정규)이 탄력근로제 확대 합의안의 절차적, 내용적 문제를 제기하며 불참을 선언해서다.(관련 기사)

    계층별 대표 3인이 의결을 거부한 이 합의안은 경사노위 산하 노동시간제도개선위원회(노개위)에서 한국노총(노동), 경총·대한상공회의소(사용자), 고용노동부가 마련했다.

    문성현 경사노위 위원장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사단체의 결단을 발판 삼아 큰 타협을 이뤘음에도, 일부에 의해 전체가 훼손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매우 안타깝다”고 밝혔다.

    문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를 바탕으로 한 경제·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참여주체들의 성숙한 대화 자세가 전제돼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일부의 불참으로 인해 어렵게 마련된 소중한 결과물이 최종 의결되지 못하는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구체적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고도 했다.

    문 위원장의 기자회견은 계층별 대표 3인이 사회적 합의를 파기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문성현 위원장 기자회견 모습(방송화면)

    성숙한 대화의 자세를 갖춰야 할 쪽은 누구인가

    이들의 본위원회 불참 결정은 무를 수 없는 소중한 결과를 파기한, 성숙하지 못한 태도였을까.

    일각에선 경사노위에 불참하는 민주노총 등이 계층별 대표 3인의 본위원회 불참을 “겁박”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펴지만, 사실 이들은 민주노총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민주노총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인 비정규직 공동행동은 지난해 11월 28일 성명을 내고 “비정규직을 대표한다는 분을 우리는 비정규직 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고 촉구한 바도 있다.

    계층별 대표 3인이 탄력근로제 확대 자체에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 대표인 이남신 한국비정규센터 소장은 지난달 28일 <레디앙>과 통화에서 “탄력근로제 확대는 필요한 업종에 한해, 현장에 잘 안착될 수 있도록 제도 설계를 잘 한다면 가능하다”며 “다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분별하게 적용한다면) 확대에 따른 부작용이 크기 때문에 실태조사와 같은 과정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경사노위는 그런 것들도 하지 않은 채 조급하게 합의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탄력근로제 확대가 청년 노동에 어떠한 긍·부정적 영향을 주는 지에 대한 연구도 없다. 김병철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경사노위에서 청년을 대변하지만 탄력근로제 확대와 청년 노동에 관한 정확한 진단도 내리지 못한 채 표결에 참여해야 했다.

    같은 날 <레디앙>과의 통화에서 김병철 위원장은 “탄력근로제 확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가 풍부하게 돼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데 그렇지 못해 청년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며 “그럼에도 한국의 노동시간이 굉장히 긴 조건에서 탄력근로제 확대부터 추진되는 것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 또한 “탄력근로제 확대의 우려 지점이 합리성은 있지만 업·직종에 (그런 우려가)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라며, 탄력근로제 확대 자체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밝혔다.

    불참 결정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도 아니다. 경사노위 측에 절차적, 내용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조율할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 전부터 비정규직 이해를 반영하기 위한 계층별 대표 1인을 논의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탄력근로제 확대 시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이 가장 타격이 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참 선언 일주일 전엔 노개위의 합의안이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의 건강권, 안전, 임금보존 문제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며 경사노위에 항의했다. 경사노위는 이미 끝낸 합의를 되돌릴 수 없다며 또 묵살했다.

    “정부여당이 압박으로 시작된 논의가…불평등 협약으로”

    제도 개편 이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충분한 실태조사, 사회적 대화기구로서의 핵심인 민주적 논의과정이 모두 실종된 것이 소위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경사노위의 모습이다.

    노개위 공익위원인 김성희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탄력제 6개월 연장과 임금보전, 건강권 확보의 맞교환이라는 부등가 교환을 정부여당이 압박하면서 시작된 논의”라며 “(논의 과정에서) 도입요건 완화라는 독소조항 삽입으로 인해 불평등 협약으로 변질되어 합의 종용이 이어져 왔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국회에서 열린 ‘유연근로시간제 실태와 탄력근로 기간확대의 사회경제적 영향 분석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노개위에서 탄력근로제 합의가 나오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이렇게 정리했다.

    특히 김 교수는 “노동 권리의 사각지대인 대표권 없는 노동에 대해 실질적인 고려가 전무하다”고 지적했다. 탄력근로제 확대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미조직 비정규 노동자에 대한 이해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계층별 대표 3인이 논의 전후로 계속해서 제기했던 문제다.

    또한 “노동시간제도 논의의 핵심 사항 중 하나인 고용문제에 대한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긍정적 고용창출 효과 극대화 방안은 고사하고, 탄력제가 갖는 부정적 고용축소 효과에 대한 고려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제도 변경 전 충분한 사전 조사나 연구 없이 이뤄진 졸속 합의라는 비판이다.

    탄력근로제 확대와 노동법 개악 반대 노동법률가들 기자회견 모습

    “경사노위는 출범 정신과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되짚어야”

    노개위 합의의 내용을 뜯어봐도 정부 정책 관철을 위해 경사노위가 무리한 합의를 종용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노동시간을 기존 일 단위에서 주 단위로 변경하는 점은 이번 합의 이후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노동시간을 주 단위로 변경하면 1주 내에서 사용자가 일별 노동시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노동자는 일주일 내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해야 한다는 얘기다.

    더욱이 주 단위 변경은 탄력근로제 확대를 다루는 경사노위의 의제도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주 단위 변경이 합의문에 담긴 이 결과는 경사노위가 얼마나 사용자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인지를 보여준다.

    김성희 교수는 “사용자는 기간확대 이상으로 도입요건 완화를 원했다”며 “논의 과정의 흐름에서 돌출적 의제인 주 단위 도입요건 완화가 포함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측 가능한 규칙적 변경이라는 탄력제의 기본원리로 보건대, 위임된 논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항”이라고 짚었다. 이어 “주 단위로 노동시간을 정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에 대한 검토와 공감대 형성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탄력근로제 확대와 주 단위 변경이라는 도입요건 완화를 사용자 쪽에 내어주고 노동계가 받은 것은 터무니없다. 노개위 합의를 이룬 구성원들은 건강권과 임금보전 방안을 얻어냈다고 자평하지만 강제성은 결여돼있다.

    김 교수는 “임금보전 방안에서 신고의무와 신고의무 위반에 대한 과태료 처분이 도입되었지만, 구체적인 임금보전 촉진방안은 없어 선언적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일 11시간 휴게시간 도입’으로 확보됐다는 건강권에 대해서도 “극한적 활용을 제어하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라며 “과로 기준인 12주 연속 60시간 이상 근무 제한보다 집중노동에 대한 제한은 더 강해야만 건강권은 지켜질 수 있다. 결국 건강권의 측면도 선언적 문구가 주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경사노위가 ‘성숙한 대화의 자세’를 상실한 채 정부의 정책 관철기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은 불가피해 보인다.

    정호진 정의당 대변인은 이날 국회 브리핑에서 “충분한 논의와 대화 없이,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가이드라인과 이를 추인하는 논의구조는 경사노위를 들러리 내지는 요식행위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경사노위는 출범 정신과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되짚어야 한다. 이를 방기하고 합의를 빙자한 정부·여당의 정책 추인기구로 전락한다면 실패한 사회적 기구의 목록에 경사노위를 추가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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