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미 좌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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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6월 19일 11:3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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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 마지막 날, 오전에 열린 마지막 포럼에서 참석자들의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연설자는 바로 브라질 대통령의 외교 보좌관인 마르꼬 아우렐리오 가르씨아였다.

    지난 5월1일 공표된 볼리비아의 자원 국유화 방침이 쎌소 아모힘 브라질 외무장관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이것이 한동안 양국 사이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룰라는 국유화 발표 며칠 후에 모랄레스와 만나 볼리비아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발언해 일단 갈등은 봉합한 듯이 보였지만, 룰라 정부는 자국 이익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며 국내 언론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남미의 좌파들 중 일부는 룰라 정부가 이전 정부와 차별성이 없다는 근거로 볼리비아의 국유화 조치에 대한 반응을 들었고, 다른 이들은 아모힘 외무장관이 행정부와 충분한 공감대 없이 격한 발언을 쏟아낸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실제로 일부 브라질 언론들이 볼리비아의 국유화 방침 직후, 대응을 둘러싸고 룰라 행정부 내에서 이견과 혼선이 있었다는 보도를 내보내 혼란을 가중시켰었다. 많은 해외 언론에서 볼리비아와 브라질 사이의 갈등이 볼리비아 정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룰라 사이의 관계 악화와 갈등의 시작으로 분석했다.

    브라질 좌파 정치인이 바라본 남미의 미래

    이처럼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 브라질 사이의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된 시기에 가르씨아 보좌관이 발표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작년 룰라 대통령의 한국 방문 당시 볼리비아에서 긴급한 일정이 생겨 민주노동당 당사 방문 약속을 못 지켰던, 그래서 당과 다소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 체 게바라, 아옌데 등 남미 혁명가들의 얼굴이 새겨진 회의 홍보용 걸개그림.
     

    아모힘 외무장관와 브라질 외교의 정책 기조를 둘러싸고 경쟁 관계에 있는 그는, 오랫동안 브라질 집권 노동자당의 국제비서를 지냈고, 남미 좌파들의 연대를 도모하기 위한 장인 상파울루 포럼의 핵심 조직가 출신이다. 미국의 우익들이 룰라 정부가 공산정권이라고 흑색 선전을 할 때 자주 언급했던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회의장 단상에 오른 그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홉스봄을 인용하며 우리가 “흥미로운 시기”에 살고 있다는 말로 운을 뗀 뒤, 룰라 정부의 정책 기조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경제적 영역에서는 현재 브라질이 “대외적 취약성의 극복을 통해 경제에 대한 결정권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이라며 여기에는 새로운 경제 틀의 형성 속에서 성장과 함께 국가 자원의 분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치 영역에서는 전대륙적으로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시기에 사회운동의 참여를 통한 민주적 공간의 확장과 함께 제도적 민주주의 정착의 중요함을 피력했다. 민중 주권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 주권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남미의 통합과 관련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세계화 시대에 남미의 존재감과 역량을 증대시키려면 사회·경제·문화적 측면 모두에서 통합뿐만이 아니라, 대륙 차원의 인프라와 함께 에너지 기반 역시도 마련해야 한다며 남미 통합이 브라질 정부의 전략적 과제임을 확인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단결 필요”

    이어 현재가 좌파에게 “우호적 환경이며, 남미의 좌파에게 지금처럼 좋았던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라며 현정세의 긍정적 측면들을 확대 심화시킬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차별적 역사적 경험”에 “다른 전략들이 생겨날 것이고, 차이가 발생할 때에 이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해 사실상 남미의 좌파 정부들 사이의 “전략적” 과제와 관련한 차이들을 인정했다.

       
     
    ▲ 베네수엘라 정부가 시행하는 각종 사회프로그램 홍보부스.
     

    그러나 그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단결”의 필요성 또한 연설 동안 수차례 강조했다. 전략적으로는 원칙적 입장을 지니되 동시에 “전술적 유연성”의 “강한 역사적 요구”에 모두가 직면하고 있다고 강하게 역설했다. “역사적으로 단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는 다시 역사가 출신답게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며, 다시 한번 미래의 지평선 너머를 볼 것을 촉구했다. “우리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할 수 있지만 무엇이 사회주의가 아닌 줄은 안다”며 “사회주의의 지평선”을 위해서 다시 한번 “민주적 세력의 강력한 단결”을 촉구하며 연설을 맺었다.

    대륙 차원에서 수십년간 진보운동의 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치인의 연설은 그렇게 끝났다.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의 좌파들이 그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던져준 과제들과 함께 회의 또한 폐막했다.

    예상보다 체계적인 베네수엘라의 사민주의 정책들

    처음으로 시간이 생겨 호텔 주변의 시내로 나갈 수 있었다. 베네수엘라는 여전히 빈곤의 늪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어 보였다. 도심 곳곳의 혁명 벽화 앞에는 여전히 젊은 실업자들이 거리에서 돈을 구걸하고 있었고, 도심 주변의 빈민촌 또한 그 규모가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하지만 무료 진찰 서비스를 제공하는 작은 버스들이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빈곤층들이 정부의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자신들을 조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차베스 정부는 지원 프로그램의 상당 부분을 시민들의 자기 조직화와 연동시키고 있다).

    회의 내내 여러 정부부처 관계자들의 발표를 종합해보면 차베스 정부는 급식, 교육, 대중교통, 의료, 주택 등 전 사회, 복지 분야에서 전통적인 사민주의 정책을 예상보다 상당히 체계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베네수엘라 사회가 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심도 깊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정부의 가장 큰 힘은 물론 바로 이 빈곤층으로부터의 절대적 지지이다. 귀국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에 빈민층 거주 지역의 벽 곳곳에 적혀 있는 “여기는 차베스 지지자들의 지역”이라는 낙서가 바로 그것의 징표였다.

    이는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베네수엘라에서의 이러한 변화 과정이 지속될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남미의 좌파 강세 또한 지속된다면, 지역 차원에서의 새로운 실험들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러 국가간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사회주의의 지평”을 열어가는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남미 좌파들이 수십년 동안 축적해온 경험과 역량을 시험할 이 과제는, 우리에게도 분명 함의들을 지닐 것이다.

    그런데, 이 원고를 넘기는 오늘까지도 베네수엘라의 정부는 약속했던 항공료를 환불해 주지 않고 있다. 하긴, 언제 변혁이 체계적으로 진행된 적이 있던가.(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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